한율은 계속 말해보라는 듯 대답 없이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락뮤닷> 생방송에서 우리가 백스테이지로 들어간 후에, 빅타임의 성건이 언이한테 비꽜대. 잘나가는 대세랑 친해서 좋겠네? 이런 식으로.”
“성건? 드림래빗 애들한테 수작질하고 시비 건다는 녀석?”
“어. 그리고 그때 보람이가… ‘부러우면 부러운 거지, 왜 말투나 억양이 그 모양이지?’ 이렇게 성건한테 무안을 줬고. 그래서 둘 사이가 더 나빠졌다고 그러더라.”
“넌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
“혜란이한테. 어젯밤에 보배 형이랑 보컬 연습실 갔다가 만났는데, 애가 그동안 쌓인 게 아주 많았는지 우리 붙잡고 하소연하더라. 성건 뒤통수 한 대 시원하게 때리고 싶다고. 그래서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낸 약점을 알려주었지.”
“…진짜로 인터넷에 약점이 나왔다고?”
길우성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 자식, 옆구리가 약하대.”
“…….”
“언제 한번 마주치기만 해봐. 실수인 척, 옆구리를 쥐도 새도 모르게 푹!”
길우성의 손끝이 허공을 찔렀다가 빠졌다.
“손끝으로 찔러버릴 테다.”
“…그래. 들키지만 마라.”
* * *
[16일 어스래빗 차남석 <너의 집> 세 번째 출연! 이쯤 되면 반고정]
[어스래빗, 일본 유명 음료 CF 촬영 마치고 오늘 17일 귀국]
[19일 뮤닷 <뮤직카페> 어스래빗 유호·길우성 대활약!]
[어스래빗, SBC <달리는 예능> 완전체 출격!]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이 오늘 22일 SBC <달리는 예능>에 완전체로 출연했다.
가을 운동회 콘셉트로 진행된 오늘 방송에서 어스래빗은 게스트로 나온 차남석과 강보배를 응원하기 위해…(중략).]
-얼굴만 봐도 재밌었다.
-외모랑 달리 하는 짓들은 어리바리한 순둥 토끼들ㅋㅋㅋ
-잠깐이지만 완전체로 달예 나오는 것도 보구ㅠㅠ 우리 애들 진짜 많이 노력하고 고생했다ㅠㅠ
-강보배랑 차남석 물 폭탄 뒤집어써도 잘생긴 거 실화냐고 누구는 폭포에서 돌아온 몽구스가 되는데
ㄴ몽ㅋㅋㅋ궄ㅋㅋ슼ㅋㅋㅋ
-애들 줄다리기할 때 팔 근육
ㄴ♡
ㄴ더는 애들이 아닌 걸로
-어스래빗 더 흥하자♡♡♡♡♡
-남돌은 군대나 가라.
-본인이 삭제한 댓글입니다.
ㄴ그거 악의적인 헛소문으로 밝혀진 지 오래입니다.
ㄴ피해자가 고2 겨울 방학 때 속초 PC방에서 ㄱㅂㅂ한테 돈 뺏겼다고 주장함. 그런데 그때 ㄱㅂㅂ는 데뷔가 코앞이라 서울에서 그다음 해 가을까지 속초엔 발도 디딘 적이 없음. 오히려 ㄱㅂㅂ는 일진들한테 돈 뺏겼던 애임...
ㄴ님들 원댓글 원카운트 팬임. 댓글 모음 보세요
ㄴ삭튀했네요.
-아이돌 게스트 재미없어요.
-남석아, 아버지 빚 다 갚았니?
ㄴ네.
-얘네가 달예에 나올 정도로 뜨진 않았는데 떴다고 언플하고 내보내네ㅋㅋ 누구 작품이냐?
ㄴ월드투어도 죄다 코딱지만 한 공연장 채워놓고선 성공했다고 자화자찬하는 거 보고 내가 대신 수치감 느껴버림ㅜㅜ
ㄴ와 그렇구나 만 명, 만 오천 명 들어간 공연장이 코딱지만 한 거였구나 그랬구나ㅋㅋㅋㅋ
-댓글에 억까하고 헛소문 끄집어내는 악플러들이 많아진 거 보니까 어스래빗이 뜨긴 떴네ㅎㅎ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연습실에서 <달리는 예능> 본방 사수를 한 어스래빗 멤버들은 구내식당으로 와서 저녁을 먹었다.
길우성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악플러들이 많아졌네. 슬프당.”
“전혀 슬픈 표정이 아닌데?”
“내가 웬만하면 기사 댓글 보지 말라 그랬지?”
길우성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 인생에 저언혀 도움 하나 안 되는 악플러들의 말 따윈, 강해진 나의 멘탈이 방어한다. 악플이나 달면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바보들을 불쌍히 여기는 시간조차 아까워.”
“뭔 소리야.”
우웅. 한율은 다른 멤버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톡을 확인했다.
-[내일 촬영장소 전남 영광. 오전 5시 샵으로 출발.]
점심 한 끼 얻어먹으러 새벽 5시 전에 일어나야 한다니.
“뭔데 슬쩍 보고 감춰?”
“광고 촬영 시간이 앞당겨져서, 새벽 5시까지 준비하래.”
“히익.”
“네가 고생이 많다, 한율아.”
“이번엔 무슨 광고 찍어?”
“피자 광고요.”
멤버들의 눈빛이 안쓰럽게 변했다.
“일본에서 음료 광고 촬영할 때도 힘들었는데 피자라니.”
2년 전부터 팀버거 전속 모델로 활동 중인 차남석은 한율의 팔을 따뜻하게 두드렸다.
“고생해라. 소화제 꼭 챙기고.”
“네.”
다음 날 새벽 4시. 한율은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끄고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선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온 후엔 달냥의 사료와 물을 체크, 나갈 준비를 마쳤다.
조유찬의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엔 달냥을 쓰다듬으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여기 말고도, 나중에 게이트가 열리는 돔구장 위에도 미스터리 홀을 하나 띄우는 게 좋겠어. 누구도 오갈 수 없다 하더라도 게이트는 게이트니까.’
핸드폰에는 그동안 눈여겨본 서울 폐건물이 떠 있었다.
우웅.
“네, 형.”
-[준비 다 했어?]
“네. 금방 나갈게요.”
그로부터 6시간 후.
한율은 비닐하우스에서 묵묵히 오이를 따고 있었다. 흔히 ‘몸뻬’라 불리는 알록달록한 작업복 바지를 입고.
“…….”
청담동 샵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온 단정한 얼굴에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최대한 늦게 가
몇 시간 전. 샵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다시 오른 차에는, 조금 전엔 없었던 MBS <시골집밥>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율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곤, 어스래빗 손구호도 했다.
“어스, 래빗. 맛있는 시골 집밥을 먹기 위해, 새벽부터 예쁘게 단장하고 나온 서한율입니다.”
어스래빗 데뷔 이전에 <보컬리스트 시즌3>로 활동한 것까지 치면 방송 5년 차. 누가 시키지도 않았으나, 한율은 알아서 방송에 쓰일 법한 멘트를 했다.
“<시골집밥> 출연자 중 드림래빗의 박세은. 그 친구랑 제가 같은 회사에 동갑이에요. 입사 시기도 비슷하고, 초반에 연기랑 일본어 레슨도 같이 받았었어요. 음…. 솔직히 그렇게 막 친하지는 않은데 진송아 선생님도 계신다고 해서, 두 사람의 손님으로 <시골집밥>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도 하며 혼자서도 잘.
“장소는 전남 영광. 반찬으로 영광 굴비는 무조건 나올 것 같은데…. 굴비 요리가 어렵나? 출연자분들을 보니까….”
한율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가 활짝 웃었다.
“걱정되진 않습니다. 송아 선생님도 계시고, 여차하면 저도 도우면 되니까요.”
가볍게 말했던 돕겠다는 말은 현실이 되었다.
선물로 산 과일을 들고 메인 촬영장소인 집에 도착하자, 출연자들이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시간 없어요, 빨리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요.”
“네?”
그리고 현재. 한율은 알록달록한 작업복을 입고 비닐하우스에서 묵묵히 오이를 따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거지? 분명히 와서 밥만 먹으면 된다고 했는데. 이런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론 방송 재미를 위한 연출이란 걸 깨닫곤 일부러 짓는 표정이었다.
“선생님, 이 정도면 될까요?”
소쿠리 하나를 가득 채운 한율은 출연자 중 한 명에게 물었다. 그녀는 <객귀, 해>에서 이윤영의 모친 역을 맡았던 배우 ‘진송아’였다. 드라마 촬영 당시, 이윤영과 셋이서 사이좋게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기도 했었다.
“응, 넉넉할 것 같다. 예쁘게 잘 땄네?”
“감사합니다.”
비닐하우스를 나와 돌아오는 길에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앞에는 카메라 감독이 뒷걸음질 치며 두 사람을 찍었다.
“지난번 추석 선물 정말 잘 받았어. 항상 바쁠 텐데, 잊지 않고 챙겨줘서 고마워. 윤영이랑은 연락하니?”
“가끔 SNS로 ‘좋아요’ 누르면서 소통해요.”
“응? 너희들 서로 번호 몰라?”
“네. 데뷔 초에는 서로 조심해야 한다고, 번호 교환도 하면 안 된다고 그래서요.”
“영화에선 사이좋은 남매로 나왔는데. 하긴, 요즘은 서로 번호 모르는 형제자매도 있다더라. 우리 집 애들도 그렇고.”
“그래요?”
“응. 그런데 같이 있으면 사이가 좋다?”
“제가 외동이라 그런가, 그런 거 보면 조금 신기해요.”
메인 촬영장소인 집에 도착해선, 제각기 다른 곳에서 재료를 공수해 온 출연자들과 점심을 준비했다. 한율은 이번엔 작업복 대신 앞치마를 둘렀다.
“칼질은 저한테 맡겨주세요.”
박세은이 깨끗하게 씻은 각종 채소를 가져오며 조마조마한 얼굴로 말했다.
“손 다치지 않게 조심해.”
“걱정하지 마. 너도 껍질 조심히 벗겨.”
“응.”
출연자 중 한 명인 40대 개그맨은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한율 씨의 칼질을 실제로 보게 되네요. 예전에 원백두 선생님이 나왔던 예능에 같이 나오는 거 봤는데, 칼질을 아주 기가 막히게 잘하더라고.”
“누구한테 설명하세요?”
“스태프분들이랑 시청자분들?”
탁탁탁탁. 한율이 빠르고 깔끔하게 칼질하는 동안, 박세은은 옆에서 오이 껍질을 벗겼다.
굴비구이와 조림을 준비하던 30대 배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둘이 친해요?”
두 사람은 고개를 흔들었다.
“새로 바뀐 번호도 몰라요.”
“그래도 성별 다른 친구 중엔 그나마 가까운 사이? 평소엔 연락을 안 하지만, 1위 할 때나 컴백 할 땐 서로 축하한다고 톡을 보내거든요.”
“그럼 둘이 다툰 적도 없겠네요?”
“네.”
“그런데 얘 때문에 심장 떨어질 뻔한 적은 있어요.”
“응? 언제?”
가마솥에다 밥을 안친 진송아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물었다. 한율은 칼질 속도를 늦추곤 이야기를 풀었다.
“우리 회사 2층에 조용히 공부하기 좋은 작은 회의실이 있거든요. 어느 날은 거기에서 혼자 공부하고 있었는데, 문득 시계를 보니까 자정인 거예요.”
개그맨도 장작을 품에 안은 채 다가왔다.
“자정이면 조용했겠네?”
“네. 그리고 회의실 불을 끄고 나오니까 복도 비상등만 켜져서 어두컴컴하더라고요. ‘회사에 남은 멤버가 있으면 같이 퇴근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핸드폰을 꺼냈는데.”
한율은 아예 칼을 내려놓곤, 차근차근히 상황을 설명했다.
“시야 저편에 얼핏, 사람의 형상을 본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천천히 이렇게 고개를 돌렸더니.”
“설마.”
“비상등만 켜진 반대쪽 복도에,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을 이렇게 풀어 헤친 여자애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서 있더라고요.”
“…….”
박세은이 말없이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귀신인 줄 알고 정말 놀랐는데, 자세히 보니까 얘였어요.”
“자정에 비상등만 켜진 복도에서 그러고 있는 사람을 보면 놀랄 만도 하지.”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거기에 책장이 하나 있어요. 회사 사람 누구든 읽을 수 있게끔 대표님이 베스트셀러나 좋은 글이 있는 책을 꽂아두시는데.”
“아아, 책 고르려고 이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거구나? 한율이는 그 모습 보고 귀신인 줄 놀랐던 거고?”
“네.”
“그럼, 회사 괴담이나 실제로 겪었던 이상한 일은 없어? 아이돌 기획사엔 그런 얘기가 꼭 한두 개는 있다던데.”
“나 이런 얘기 너무 좋아.”
박세은이 살짝 손을 들었다.
“크리스탈 래빗의 라나 언니에게서 들은 얘기가 하나… 있어요.”
“뭔데, 뭔데?”
“라나 언니가 우리 회사에 갓 들어왔을 때 겪은 일인데, 그땐 회사도 세워진 지 얼마 안 됐을 때라서 연습생이 언니를 포함해 네 명밖에 없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