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1화 (251/427)

망설임 없이 술술 이야기하는 걸 보니, 사전에 라나에게서 허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라나가 먼저 공중파 예능에 나가는 후배를 위해 들려줬거나.

“현재 같은 팀 멤버인 은영 언니, 어스래빗에 있는 유호 선배님, 지금은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가신 분. 이렇게 딱 네 명.”

개그맨이 장작을 끌어안은 채 부르르 떨었다.

“워, 벌써 무서워.”

“우리 회사가 연습실이 많아요. 지하에도 안무 연습실이 세 개 있고, 2층에도.”

박세은이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한율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2층에도 안무 연습실이 둘, 보컬 연습실이 다섯.”

“밤에는 진짜 무섭겠다. 사람은 없는데 빈 곳만 많은 거잖아.”

“하루는, 비가 정말 많이 내리던 날이었는데 라나 언니가 은영 언니랑 둘이서만 안무 연습을 하고 있었대요. 그런데 우리 회사에는 연습생들이 지켜야 할 규칙 하나가 있었는데, 미성년자는 되도록.”

“새벽 2시를 넘겨서까지 연습하지 말 것.”

“응. 그래서 1시 40분에 연습을 중단하고, 두 분이 씻으러 가려고 복도로 나왔어요. 그때.”

출연자들의 눈과 귀가 모두 박세은에게 집중되었다.

그 순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깜짝.

보이그룹 스타믹스의 리더이자 배우 지헌, 그리고 히아신스의 호수가 밝게 인사하며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집밥 먹으러 왔어요!”

진송아가 장난스럽게 외쳤다.

“너희들 5분만 더 늦게 와!”

“…네?!”

오늘 <서울집밥> 손님은 한율을 포함해 세 명이었다.

“한율이 너도 손님으로 와놓고선 왜 앞치마하고 있었던 거야?”

“저한테만 도착해야 할 시간을 더 이르게 말한 거더라고요.”

<시골집밥> 촬영을 마친 뒤, 한율은 지헌과 오래간만에 만난 기념으로 바다가 보이는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 작품은 언제 들어갈 거야? …라고 묻고 싶은데, 지금 어스래빗 신나게 노 저을 때라서 조심스러워진다. 보니까 미국에서 반응 좋던데, 미국에서 앨범 내자는 소리는 안 나와?”

콜록. 가까운 테이블에서 지헌의 매니저와 어색하게 커피를 마시던 조유찬이 돌연 기침했다.

한율은 슬쩍 웃었다.

“다 꿰고 계시네요.”

“오. 역시.”

본래 어스래빗은 내년 여름 발매를 목표로 새 앨범 계획을 잡은 상태였다. 그런데 월드투어 막바지에 미국 토크쇼에서 섭외가 들어와 출연하고, 현지 반응도 나름 괜찮아 보이자 회사에선 미국에서 앨범을 내자는 말이 강하게 나왔다.

현재는 타이틀곡을 신중히 추리는 중.

지헌이 입가에 검지를 세웠다.

“모른 척할게.”

“감사합니다. 스타믹스는 언제 컴백해요?”

“나도 그렇고 다른 애들 개인 활동도 있어서, 아마 유닛이 먼저 컴백하게 될 거야.”

“JE 선배님도 참여해요?”

“아니.”

지헌이 작게 한숨 쉬었다.

“그 녀석, 요즘 뭐에 그리 정신이 팔렸는지 정해진 연습 시간 외엔 얼굴 보기가 힘들어. 그런데 날이 갈수록 혈색이나 피부가 굉장히 좋아져서.”

휙휙. 지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내 직감인데, 아무래도 여자친구가 생긴 것 같아.”

진실을 아는 한율은 그저 웃었다.

“그럴까요?”

“연애하면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도 고와지는 법이잖아.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상대방에게 더 잘 보이려 노력도 하고. 그리고 무엇을 해도 즐겁고 행복하니까 저절로 사람이 반짝반짝. 그러니까 틀림없어.”

“어째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 큰 것 같은데요?”

데뷔 6년 차라도 아직 연애는 시기상조일 텐데, 지헌은 멤버의 연애를 추측하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한율이 네 눈엔 JE가 선배고 다섯 살 많은 형이겠지만, 나한텐 어릴 적부터 본 우리 팀 막내거든. 그래서 그런가 봐. 이젠 저 녀석이 다 컸구나~ 이런 느낌?”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문득 떠오른 조언을 말했다.

“선배님.”

“응?”

“군대는 최대한 늦게 가세요.”

한편 그 시각, 히아신스 호수를 태운 차량. 호수는 같은 소속사 후배 그룹, 퍼플아워의 루아와 통화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언니가 말려주세요. 은수 쟤, 지금 검사하면 게임 중독 나올 것 같아 무서울 지경이에요.]

“응, 그럴게. 아, 나 전화 온다.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네, 언니.]

호수는 걸려오지도 않은 전화를 핑계로 통화를 끝냈다.

같이 사는 멤버가 게임 중독이 걱정된다며 전화할 정도면 얼마나 심각한 걸까. …예전이었다면 이렇게 생각하고, 은수를 챙겨주는 루아가 고마웠을 것이다.

바로 어제, 오빠에게 그 얘길 듣기 전까진.

『예전에… 언제였더라. 은수가 나 사는 집 비번 바꿨다고, 호수 네가 왜 비번 바꿨냐 물어보면 오히려 그걸 왜 물어보는지 이유를 들어보라고 하더라. 호수 너랑 친한 후배가, 남친과 만날 장소로 그 집을 빌려달라고 할 수 있다고. 대체 뭐냐? 아무리 네가 마련해준 집이라지만, 생판 모르는 커플이 내 집에 들락거리는 거 기분 나쁘거든?』

‘나랑 친한 후배. 그리고 은수에게 오빠 집을 빌려달란 부탁을 했을 만한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루아나 송의연밖에 없었다.

호수는 진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핸드폰을 무음이나 진동으로 두었는지 받지 않았다. 그래서 원카운트 찬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누나. 무슨 일이에요?]

“지금 숙소야?”

-[네.]

“혹시 우리 은수, 게임에 접속했어?”

-[잠깐만요. …네, 접속했어요.]

“나한테 전화 좀 해달라고 전해줄래?”

-[네.]

“고마워.”

우웅. 찬형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진은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호수는 목을 가다듬고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수야, 이따 저녁에 언니랑 같이 밥 먹자.”

전부 말해

호수가 진은수와 저녁을 먹기로 한 장소는 오빠가 혼자 사는 집.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편히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오빠는 손에 용돈을 두둑하게 쥐여주고 내보냈다.

치이익. 진은수가 전기 그릴에서 맛있게 익어가는 고기를 보며 말했다.

“오빠도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언니랑 둘만 먹는 거 어색해?”

“그런 뜻은 아닌데.”

고개를 흔들며 웃는 진은수. 호수도 장난이라는 듯 입가를 올리곤 고기를 잘랐다.

“나도 은수 네가 하는 게임 배울까 봐. 요즘 연습이랑 레슨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할 게 없어. 미랑이도 그 게임 재밌다고 하고.”

“언니 드라마 준비 중이잖아. 그래도 괜찮아?”

“어떻게 사람이 일만 하니. 이거 먹고, 오빠 컴으로 해보자.”

“오빠 컴에 비번 걸려 있던데.”

“혼자 살면서 비번은 왜 걸어놨대?”

“우리가 드나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 오빠 프라이버시도 있잖아.”

“하긴, 가족끼리도 프라이버시는 지켜줘야 하니까. …그래서.”

호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루아가 이 집 빌려달라고 했을 때 좀 당황스러웠지?”

“어?”

진은수는 그러잖아도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깜빡거렸다. 그러다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는 듯.

“응, 조금.”

호수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은수는 오빠한테 루아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나한테 어떻게 알았냐 묻지 않는 건… 루아가 나한테도 부탁했었다 아는 거겠지.’

왜 처음 그 부탁을 들었을 때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을까. 언니도 루아 언니한테 그런 부탁 들었어? 이 한마디만 해도 됐을 텐데. 내가 그렇게 안 미더웠던 걸까.

‘아니, 그 전에… 나와 거리를 느껴서 말하지 않은 걸지도.’

호수는 어릴 적 미국에 있는 친척 집에 살면서 유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린 아림 엔터 오디션에 합격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연습생 생활을 하고 데뷔했다. 그런 까닭에 진은수와는 함께 보낸 시간이 무척 적었다.

진은수가 아림 엔터로 들어온 뒤에도 바빠서 챙겨주지 못했다. 조용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얼굴도 예쁘고 노래도 굉장히 잘하는 데다 성실해, 알아서 잘한다고 생각하며 두었다. 트레이너들도 회사 직원들도, 호수만 보면 동생이 정말 잘한다며 칭찬을 늘어놓았고.

루아도 그랬다.

『은수, 내가 잘 챙겨줄게요. 나만 믿어요, 언니!』

‘내가 바쁘다고, 루아한테 맡기고 방치한 거나 다름없어.’

돌이켜 생각해보니, 지금껏 퍼플아워 멤버들과 그 흔한 쇼핑이나 영화 관람을 함께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진은수가 루아 이야기를 먼저 꺼낸 적도 없었다. 멤버들이랑 잘 지내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뿐.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걸지도 몰라. 아이돌그룹이라고 해도 비즈니스 관계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남자친구를 만나려고 다른 사람 가족의 집을 빌려달라는 건 선 넘는 부탁이잖아. 그래서 나한텐 부탁하지 않은 거야. 왜? 들어주지 않을 게 뻔하니까.’

만약 루아와 진은수 사이가 아주 친해서 그런 부탁을 했던 거라면, 진은수가 비번까지 바꾸고 오빠에게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

한 마디로, 루아가 진은수를 만만하게 보고 그런 선 넘는 부탁을 했단 이야기. 그리고 선 넘는 부탁을 했던 사람이, 거절당했다고 순순히 물러났을까?

“언니?”

호수가 말없이 고기만 자르자, 진은수가 고개를 기울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많이 피곤한가 보다. 집게랑 가위 줘, 내가 할게.”

“미안해, 은수야.”

“응?”

지금까지 진은수를 둘러싼 안 좋은 의혹 모두 악의적인 루머로 치부했다. 아이돌을 두고 있지도 않은 일을 소설처럼 꾸며서 부풀리는 일이 워낙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아가 그런 선 넘는 부탁을 한 게, 그게 처음이 아니라면? 퍼플아워 불화설이나 따돌림 의혹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면?

[진은수 왕따임? 아스대에서 ㅅㅎㅇ이랑 일부러 둘만 있게 하고 가는 거 은근 멕이는 것 같던데]

[은수는 라방 왜 단체 아니면 혼자만 함?]

[은수 멤버들이랑 놀러 다니는 거 본 사람?]

[송의연이 은수보다 한 살 어리지 않나? 그런데 친구처럼 너무 막 대하는 것 같던데. 언니가 아니라 진은수 이름 석 자로 부를 때도 있고ㅋ]

호수는 천천히 가위와 집게를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속도 마냥 화려하고 즐거운 직업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데 누구보다 많이 의지해야 할 멤버들 사이에서 고립됐다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호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언니 노릇 제대로 못 해줘서 미안해.”

진은수는 당황해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언니. 언니가 뭘 못 해줬다고 그래. 내가 언니한테 얼마나 많이 의지하는데.”

호수가 눈물을 뚝뚝 흘리자, 진은수는 티슈를 가져오기 위해 일어났다. 호수가 진은수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럼 말해.”

훌쩍. 눈물을 삼키곤, 눈을 강하게 뜨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혼자 속으로 참았던 속상했던 일, 나한테 섭섭했던 일 전부.”

* * *

24일 아침. 손님이 없는 한산한 카페.

보리극단 대표이자 배우 홍영철은 면목 없는 얼굴로 USB를 만지작거렸다.

“정말 미안해요, 한율 씨. 단원들을 대신해서 내가 사과할게요.”

우승찬이 JE에게 USB를 건넨 지 열흘. 한율은 고재영을 통해 보리극단 홍 대표의 연락처를 알아내 그에게 연락했다.

『USB에 담긴 연극 영상 잘 봤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이걸 저한테 보내신 건지 궁금해서요.』

『네? 영상이요? 그게 왜 한율 씨한테…. 헉.』

그리고 극단 단원들이 공연 투자자를 찾는 데 도움을 보태고 싶다면서 찍은 영상이란 사실을 들었다. 홍 대표는 단원들이 생각한 투자자가 서한율일 거라곤 꿈에도 몰랐고.

“나이랑 의욕만 앞섰지, 아직 단원들이 철이 없어요. 기껏해야 공연업계 쪽 사람이나 단체를 찾아갈 거로 생각했는데… 기사만 보고선 이런 무례를 범할 줄은.”

“아니에요. 의욕이 넘친다는 건 그만큼 연극 무대를 사랑한다는 증거잖아요.”

그렇다고 방식과 방향성이 옳은 건 아니지만.

한율은 뒤따라온 생각을 삼켰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면, 제가 연극에 대해 잘 몰라요. 지금까지 본 연극이라곤 강덕심 선생님이 출연한 연극 하나뿐이거든요. 예전에 촬영했던 드라마에서 다른 주연배우가 연극배우란 설정이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드라마 속 이야기이고.”

홍 대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한율은 말을 이었다.

“큰 공연기획 업체의 프로젝트 작품, 그리고 유명 배우가 소속된 극단에 가려진 다수의 연극배우가 금전적 어려움을 겪고 있단 사실만 아는 정도에요.”

“네….”

“그리고 제가 이번에 친구가 소속된 연극 동아리를 도운 게 어떤 분들에겐 불편함을, 어떤 분들에겐 상대적 박탈감을 줬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홍 대표가 손사래를 쳤다.

“불편하다뇨, 전혀요. 저를 포함해 배우 대다수는 솔직히 부럽기도 하지만, 고마운 마음이 더 컸을 겁니다. 한율 씨의 홍보로 한 사람이라도 더 연극에 관심을 두게 되고, 그렇게 대학로에 새로운 관객이 유입되는 거니까요. 해당 공연에 오르는 배우 중, 실력이 좋은 친구에겐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고요.”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해 번지르르 내뱉는 말 같지는 않다.

한율은 고재영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단원 하나가 공연장의 비싼 장비를 망가뜨리고 튀었대. 그런데 그거 제대로 안 물어주면 다음부터 그 공연장은 물론이고, 다른 곳에도 소문이 퍼져서 공연장 구하기가 힘들어지잖아. 그래서 대표님이 일단 대출받아서 망가뜨린 장비를 보상했지만, 그 뒤 몇 회차 공연이 취소되면서 가뜩이나 안 좋았던 재정 상태가 더 악화한 거지.』

그 후 홍 대표는 대출금과 공연장 대관료, 임금, 기타 지출 비용을 벌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며 고생 중이라고.

『사람들이 장비 망가뜨리고 튄 놈 고소해서 돈 받으라고 했는데도, 무명 배우 지갑 사정 어려운 거 뻔히 아는데 그럴 수 없다고 하셨다더라. 극단을 접는 것도, 소속 배우들 갈 곳 없어진다고 안 된다고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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