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여름에 게이트가 열리는 걸 아는 한율로선 조금 안쓰러웠다. 그렇게 아등바등 고생해봤자, 결국엔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게 될 텐데.
“긍정적으로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연극에 관한 식견이 좁은 제가 어떻게 감히 평가하고, 투자하느니 마느니 하겠어요.”
완곡한 거절 의사. 그러나 홍 대표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가는 늘 어렵죠. 저 역시 가끔 심사를 볼 때마다 그러는걸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약소하지만, 따로 응원 선물을 준비했어요.”
“선물이요?”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혹시 차 가져오셨어요?”
그날 밤, 보리극단 홍 대표의 개인 SNS엔 사진 세 장이 올라왔다. 잔뜩 쌓인 화장품과 간식, 홍삼엑기스 상자를 보고 놀라는 배우들의 사진, 배우들이 어스래빗과 서한율의 슬로건을 들고 활짝 웃는 사진, 마지막은 대표와 서한율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서 배우님의 든든한 응원 선물! 감사합니다!^^♡♡♡]
-율토끼 팔로잉 타고 놀러 왔습니다! :D
-다음 타깃이 된 분인가?
-이 와중에 서한율 죄다 본인이 광고하는 제품으로 선물했어
ㄴㅋㅋㅋㅋㅋ의리 최고!
ㄴ광고주가 뿌듯해합니다.
-홍삼 저게 다 얼마짜리냐ㄷㄷㄷ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작년 이맘때 보리극단 연극을 함께 관람했던 남친과 결혼했습니다. 좋아하는 아이돌 관련해서 뜨길래 괜히 반가워서 적어보네요ㅎㅎ
-응원합니다! :D
-대표님 어디서 뵌 분인가 했는데 3년 전 주말극에 팔불출 트럭 아저씨로 나왔던 그분이시네요ㅎㅎ 감초 연기 참 잘하신다 생각했는데 극단 대표셨구나. 응원합니다!
홍보 비슷한 효과가 나타나는지, 홍 대표의 팔로워는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한율은 댓글을 슥슥 훑다가, 실내 세트장에 크게 울리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현재 M/V 촬영 중인 ‘하양 토끼 까망 토끼’ 네 번째 디지털 싱글 <바다와 산타토끼>였다.
“들어가긴 무서워, 선물은 물수제비뜨기 슛슛.”
…가사가 대체 왜 이래. 무의식적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던 한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윽. 한율 위로 그림자가 조용히 드리워졌다.
“……?”
고개를 들어보니 크리스탈 래빗의 채아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노래 부르는 거 찍었지롱.”
“네.”
“반응이 건조하구먼? 하긴, 이런 게 서 후배님의 매력이지. 혼자 뭐 하고 계셨습니까?”
“핸드폰이요.”
채아가 카메라를 가까이에 들이대며 물었다. 곁에선 진짜 카메라 주인인 VJ가 불안한 얼굴로 카메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즐겨 하는 핸드폰 게임이 있으신가요?”
“자주 하지는 않는데, 가끔 달리는 게임을 합니다.”
“그렇군요. 금메달 따기를 응원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인터뷰 대상자를 찾아서!”
채아가 차남석에게로 향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차남석은 채아가 카메라를 든 채 다가가자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삼계탕을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죠, 차남석 씨? …네? 삼계탕이요?
“어제.”
크래의 라나가 옆에 앉으며 조용히 물었다.
“세은이 프로그램에 손님으로 갔었다며?”
“네.”
“어땠어? 한율이 네가 보기엔 세은이, 잘하는 것 같았어?”
“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랑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았어요.”
라나가 안심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다행이다.”
“선배님이 연습생 때 겪은 미스터리한 일에 대해서도 들었어요.”
“크으. 얼마나 잘 살려서 이야기했는지, 방송을 확인해야겠네? 설마 편집되진 않았겠지?”
“무서운 얘기는 보통 편집 안 하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 세은이, 방송에 조금 더 나오게.”
“무서운 얘기?”
막 촬영 준비를 마치고 나오던 강보배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무슨 무서운 얘기?”
“가람이 형이, 형한테서 빌린 이어폰 한 짝이 안 보인대요.”
“……!”
물 빠지기 전에 노 저어야지
경기도 양평의 한 단독주택.
이해원은 이른 아침부터 정원에 떨어진 낙엽을 쓸고 있었다. 까악. 나무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까마귀 한 마리가 돌연 크게 울며 언덕길로 향했다.
“……?”
이해원은 빗자루를 한쪽에 세워두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CCTV 모니터를 살펴보니,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언덕길을 오르던 도중 멈춰 있었다. 까마귀 세 마리가 차량에 내려앉거나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어 당황한 듯 보였다.
‘저 차는….’
계나리가 보내줬던 자료를 살폈다. 이우그룹 회장의 손자이자, 부회장의 둘째 아들 이채욱이 주로 사용하는 차량 번호와 일치했다.
서한율이 했던 말.
『형이 제가 소유한 집에서 지내는 게 밝혀져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친한 사이에 지낼 곳을 빌려준 게 뭐가 어때서요.』
‘언젠가 올 거라곤 생각했지만.’
변호사를 만나고 경찰서와 견인 업체, 카센터를 다니는 동안 뒤를 밟으리란 예상도 충분히 했다. 오히려 늦게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
모니터 속 차량이 슬슬 물러나더니 길가 옆에 바르게 주차되었다. 차에서 내린 건 이채욱 단 한 명. 그의 시선이 이해원이 살피는 CCTV를 힐끗했다.
이해원은 계나리에게 톡을 보내곤 심호흡했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이우그룹 전략기획실 소속, 이채욱이라고 합니다.”
“들어오세요.”
이해원은 담담하게 그를 맞이했다. 이채욱은 안으로 들어와 준비된 거실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쿵, 삐릭. 닫힌 현관문이 저절로 잠겼다.
“어….”
거실 내부를 눈으로 살피며 들어오던 이채욱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반쯤 열린 테라스 문턱에 앉은 까마귀도 이채욱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까마귀, 해원 씨가 키우는 겁니까?”
“아니요. 커피 드시겠어요?”
“네. 아무거나 주십시오.”
이해원은 커피 원두와 추출 방법, 시럽 비율, 온도, 컵까지 까다롭게 따지던 재벌가 자제들과 셀럽들을 떠올렸다. 정말 아무거나 줘도 잘 마실지.
“앉아 계세요.”
이해원은 소파를 가리키곤 커피 그라인더 앞으로 향했다. 이채욱은 까마귀가 언제 자신에게 날아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테라스 창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까마귀를 경계했다.
“먼저 말씀드리는데, 전 이우그룹을 협박한 해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요.”
달칵. 이해원은 티 테이블에 커피 두 잔을 내려놓곤 이채욱의 맞은편에 앉았다. 푸드덕. 문턱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밖으로 날아갔다.
“왜 날 도와주고 지켜보는 건지도.”
“잘 마시겠습니다. …지켜본다는 건, 현재진행형이란 말씀이군요.”
“네. 지난번 사건 후, 이우그룹에 단단히 경고했으니 다신 그런 불쾌한 짓을 하지 않을 거란 메시지도 보내더라고요.”
“연락이 가능한 겁니까?”
이해원은 커피를 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중이에요. 정체는 모르지만, 제가 힘들 때 도와준 사람이라 일부러 캐고 싶지도 않고요.”
“채현이가 해원 씨에게 저지른 짓들, 가족으로서….”
“아니요. 사장님과는 저 역시 동의한 부도덕한 관계였으니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촌 동생에게 스폰을 받았던 상대라 불쾌할 법도 한데, 이채욱은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커피를 마셨다.
“……?”
고개를 갸웃하곤 또 한 모금.
“커피 맛이 괜찮네요. 어떤 원두를 사용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중에 가실 때 알려드릴게요. 저도 집주인에게 선물 받은 거라 잘 모르겠네요.”
“네.”
잠시 이야기가 샛길로 샜으나, 이채욱은 담백한 태도로 지난번 심부름센터를 통해 납치하려 했던 일에 대해 사과했다. 그리고 가지고 온 명품 서류 가방을 내밀었다.
“이건 납치를 지시했던 사람이 해원 씨에게 따로 보내는 피해보상금입니다. 가방도 포함해서요. 마음에 안 들면 팔아치워도 됩니다.”
“네.”
“염치없지만 부탁 한 가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해원은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커피가 정말 입맛에 잘 맞는지, 이채욱은 커피가 식는 게 아깝다는 듯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만약 그 해커와 연락이 닿는다면 이렇게 물어봐 주십시오. 사람이 얼마나 죽냐고.”
살며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이채욱은 남은 커피를 입 안에 털어놓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어디 원두를 썼는지 알려주십시오.”
“…네.”
이해원이 주방에서 원두 봉지를 가져와 보여주자, 이채욱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상품 사진을 찍었다. 찰칵.
“맛있는 커피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이채욱이 떠난 뒤, 이해원은 그가 놓고 간 가방을 전파탐지기로 살피고 조심스레 열었다. 안은 5만 원권 지폐 다발로 채워져 있었다. 가방 정품 보증서, 이채욱의 개인 명함도 함께.
이해원은 한숨을 내쉰 뒤 가방을 도로 닫았다.
‘그런데 저 사람, 내가 납치당한 그 상황에서 어떻게 유유히 빠져나왔는지 전혀 묻질 않네.’
한편, 대문을 나선 이채욱은 집을 돌아보았다. 그림처럼 예쁘게 지어진 집과 나름대로 관리에 신경을 쓴 듯한 정원. 정원 한쪽엔 쓸다 만 낙엽이 쌓여 있었다.
까악. 담 위에 앉은 까마귀가 뭘 보냐는 듯 울었다.
‘우리한테 거처를 들킬 걸 충분히 예상했다 쳐도, 상당히 차분했어.’
이해원과 직접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의 태도에선 적대감이나 불편해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러 매체에 기록된 모습, 그리고 스폰을 받았단 점에서 느껴진 이미지와도 괴리감이 상당했다.
‘우리보다 VEL 엔터 쪽 인간들을 경계해서 그런 건가. 하긴, 딱히 범죄를 저지르고 숨은 것도 아니니.’
차에서 대기하던 기사가 내려 뒷문을 열었다. 이채욱은 뒷좌석에 탄 뒤, 핸드폰으로 조금 전 찍은 원두 사진을 검색했다. 한국에선 해외직구를 통해서만 살 수 있는 상품이었다.
집주인이 인기 아이돌이라더니, 그가 해외 스케줄을 갔을 때 사 온 모양.
타악. 기사가 운전석에 타며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회사로요. 오전 반차만 내고 왔거든요. 가서 일해야죠.”
“괜찮겠습니까? 부회장님께서 주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룸미러에 비치는 기사의 눈에선 ‘당장 이해원을 잡아서 고문하란 명령을 내려도 다 따르겠다’란 살벌한 의지가 엿보였다.
철컥. 이채욱은 안전띠를 맸다.
“갑시다.”
“…네, 출발하겠습니다.”
* * *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녹음실.
A&R팀의 진장현 팀장이 어스래빗 멤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미국에서 낼 디지털 싱글 수록곡이 정해졌습니다.”
“빠르다.”
“원래 다음 앨범에 실을 노래를 영어 버전으로 바꾸고 조금 손봤으니까요.”
“전에 회의할 때 들었던 노래 맞죠?”
“네. 그리고 녹음은 다음 주입니다.”
“빠르다!”
“물 빠지기 전에 빨리 노 저으러 가야죠.”
진 팀장이 들려준 곡은 두 개. 어스래빗은 디지털 싱글 발매 직후, 미주 4, 5개 도시에서 쇼케이스를 진행하기로 했다.
앨범 수록곡을 비롯해 대략적인 계획이 잡혔으니, 멤버들은 RMMA 무대 준비와 함께 새 앨범에 실릴 노래를 연습했다. 회사가 가이드 버전으로 미리 안무 디렉터에게 의뢰한 안무도.
회사에서 온종일 연습하다 녹초가 되어 숙소로 돌아오는 나날. 그래도 한율은 종종 박가람과 유호의 마나 유동을 봐주었다. 유호가 길우성과 같은 방을 사용하는 터라 주로 박가람의 방에서.
어쩔 땐 옥상에서 하기도 했다.
“밤바람이 상쾌해서 좋네요.”
“얼어 죽겠다!”
“안무 연습으로 혹사당한 관절이 시려, 한율아….”
“히터 켜드릴게요.”
시간은 빠르게 흘러 29일 일요일. 교육방송 채널에서 <일일 멘토>가 방송되었다.
<일일 멘토>는 멘티로 신청한 초등학생의 상황에 맞춰 적절한 멘토를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으로, 한 회당 두 명의 멘티가 나왔다. 방송은 각 멘티의 상황을 번갈아 보여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배우가 되고 싶은 초등학교 5학년, ‘김경원’입니다.]
오늘 출연하는 멘티들의 소개와 고민 영상.
김경원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연기 학원 대신 너튜브를 보며 독학하는 초등학생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를 직접 만날 수 없다 보니 ‘내가 정말 제대로 하는 게 맞나?’ 스스로 의심하게 되며 점점 자신감이 떨어지는 게 고민이라고.
[그리고 인터넷에 정보와 광고가 너무 많고 막 뒤섞여 있어서, 오히려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어요. 좋은 오디션 정보를 알고, 또 캐스팅되기 위해선 한 달에 백만 원 넘게 내야 하는 곳에 등록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