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쉰 김경원은, 멘토와 만나기로 한 공원 벤치에 앉아 너덜너덜한 연기 관련 서적과 노트를 만지작거렸다.
그런 아이를 향해 다가가는 흐릿한 실루엣.
[안녕, 경원아.]
김경원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눈물을 글썽거리며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어…. 어…?]
한참 동안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자신의 멘토를 바라보다, 울먹거리며 간신히 묻는다.
[진짜예요…? 진짜… 형이 오늘 제 멘토예요…?]
김경원의 앞에 선 멘토의 실루엣이 또렷해졌다.
방송 속, 한율이 김경원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응. 만나서 반가워. 올해 데뷔 4년 차 아이돌이자 배우인 서한율이라고 해.]
[대박….]
방송이 끝난 뒤 <일일 멘토> 시청자 게시판과 SNS, 해당 방송 너튜브 채널에선 난리가 났다.
서한율이 심상치 않은 기세로 글로벌 팬덤을 키워나가는 인기 아이돌이면서, 한편으론 아이돌을 모르는 대중에게도 실력파로 인정받은 배우인 까닭이었다.
그리고,
-처음엔 ‘이미지 관리하러 나왔나? 아, 비싸고 좋은 학원 끊어주겠네 개꿀ㅋㅋㅋ’ 생각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잘못된 버릇 고쳐주고 조언해주는 거 보고 솔직히 감동했음
-그렇지. 대본 분석이나 연기 같은 건 발성, 발음, 호흡 등 기초부터 확실히 잡은 뒤의 문제지ㅇㅇ
-무작정 ‘네가 계속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야’가 아니라, 정말 현실적인 조언을 많이 해줘서 놀랐어요. 사기꾼 같은 업체에 걸려서 시간 낭비, 멘탈 낭비하지 않는 팁은 엄지척
-새삼 서한율 기초 진짜 튼튼하다고 느낌. 20대 배우 중 자막 없어도 되는 몇 안 되는 배우 중 하나.
ㄴ아나운서였고, 아나운서 시험 준비했던 부모님들이 한글 뗐을 때부터 발음부터 확실히 가르치셨다니 말 다했죠ㅋㅋ
ㄴ조기교육의 중요성
방송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을 정도로, 김경원을 알차게 가르쳐주고 간 까닭이었다.
-멘토가 아니라 과외 쌤인 줄ㅎㅎ
어스래빗 연습실.
길우성이 TV를 끄더니 연습 촬영용 카메라를 들고 왔다. 그러곤 덥석, 한율의 어깨를 잡으며 진지하게 하는 말.
“연기 연습용으로 이 카메라를 빌려줄게. 만약 나중에 경원이 네가 배우의 꿈을 접게 된다면… 그때 돌려줘.”
<일일 멘토>에서 한율이 김경원에게 카메라를 건네며 했던 말이었다.
“크으! 감동!”
“…….”
“자, 다 봤으니 연습하자.”
“한율아, 저 애랑은 그 뒤로 연락… 해?”
강보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SNS 팔로우는 했어요. 궁금한 게 있으면 DM으로 물어보라고.”
“그런데 괜찮을까 모르겠다. 갑자기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면 오히려 안 좋은 데에 물드는 애들이 있잖아. 그 애 이용해서 서한율 너한테 접근해보려고 하는 것들도 있을 텐데.”
“프로그램에 함께했던 아동 심리 상담가가 잘 봐줄 거예요. 방송엔 안 나와도, 후일담을 위해서인지 잘 챙겨주는 것 같더라고요.”
방송 반응을 살피느라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박가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아림 난리 나겠다.”
“무슨 난리?”
박가람이 핸드폰을 멤버들에게 보여주었다.
“원카운트 나기혁하고 퍼플아워 루아하고, 밤중에 따로 만나서 크게 다투는 게 카메라에 찍혔대.”
[[단독]나기혁·루아, 정말로 사귀었었나? 한밤중 다툼 포착!]
못 들었어?
[인기 보이그룹 원카운트의 나기혁과 걸그룹 퍼플아워의 루아가 한밤중에 만나 다투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심각한 분위기의 두 사람)
(가려는 나기혁의 손을 붙잡는 루아)
(말다툼하는 두 사람)
두 사람은 작년 2019년 1월 첫 열애설이 나왔을 당시 친한 선후배 사이라며 열애 의혹을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사진=익명의 제보>]
-나기혁 마음 떠나서 헤어지는 듯?
-따라다니던 사생이 몰래 찍다가 빡치거나 현타 맞아서 제보한 것 같다
ㄴ킹리적 갓심
-둘 다 절대 안 사귄다고 칼같이 부인해놓고ㅋㅋ 2년 가까이 사귄 거네?
ㄴ2년 전엔 정말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한쪽 마음이 떠나면 그냥 놓아주는 게 본인을 위해서도 좋다. 구질구질하게 매달려서 억지로 계속 사귀어 봤자, 좋은 추억 쌓았던 과거로는 절대 못 돌아간다.
-지금 원카 팬들 루아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녔던 거로 몰아가면서 나기혁 쉴드 치느라 바쁘더라. 퍼플 팬들은 나기혁 죽여버리겠다고 날뛰고 있고
ㄴ아림 내부 분열ㅋ
ㄴ원카 팬이 훨씬 많고 독해서 퍼플 쪽이 발리는 중임
ㄴ퍼플 팬들도 마냥 루아 편드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2년 전부터 사귄 게 사실이면 팬들한테 거짓말했다는 거니까
-신고로 비공개된 댓글입니다.
-찐팬이랑 홈마, 사생들은 이미 둘이 사귀는 거 알고 있었음. 그냥 쉬쉬해줬을 뿐이지
-작성자가 삭제한 댓글입니다.
ㄴ정신 차려. 네가 이런다고 걔가 널 좋아해 주진 않아
ㄴ부모님한테나 그렇게 신경 써드려라
-이것도 친한 사이에서 그냥 다툰 거라고 해봐라, 아림아ㅋㅋ 어떤 친한 사이가 새벽 2시에 일부러 만나서 다투냐? 그것도 이성이랑
-원카운트 컴백 미뤄지면 가만 안 둔다, 진짜.
쯧쯧. 이건우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동안 시끄럽겠다.”
다음 날 아침.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엔 <일일 멘토>에서 활약한 한율의 기사가 떴다. 댓글란은 훈훈하고 좋았단 반응이 대다수였다.
-마음도 따뜻한 서한율♡♡♡
-간만에 힐링했당
-연기자 꿈꾸는 우리 아들도 노트에다가 서한율 님이 말해주는 팁 부지런히 따라 적더니, VOD로 다운 받으면 안 되냐고 하더라고요ㅎㅎ 알찬 정보 감사합니다!
-일일 멘토는 무편집 풀영상을 내놓아라
-카메라 빌려줄 땐 내가 괜히 흐뭇
반면, 나기혁과 루아 기사 댓글란은 여전히 분위기가 험악했다.
“원카운트 컴백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팬들이 더 날이 선 것 같아. 처음부터 거짓말이나 하지 말지, 아예 들키지나 말지, 다른 멤버들은 무슨 잘못이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많고.”
한율이 운전하는 차 안. 길우성이 강보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여러분. 남들 눈에 띄면 큰 파장이 일어날 걸 알면서도, 따라붙은 사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밖에서 다툴 정도로… 감정 통제가 안 된다는 거잖아.”
“찬형인 괜찮대?”
라이언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현재 네 사람은 박가람의 생일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가는 중이었다.
“응. 스케줄 있는 멤버 몇 명 빼곤 전부 외출 금지당해서, 지금 숙소에 있대.”
“저런. 컴백이 얼마 남지 않아서 할 일이 많을 텐데.”
“멤버들 간의 분위기는?”
“루아랑 사귀는 건 다 알고 있어서, 왜 경솔하게 밖에서 그랬냐 정도인 것 같아. 들키지만 않았을 뿐, 연애 중인 멤버들이 더 있기도 하고.”
“진짜? 와…. 전혀 몰랐는데.”
“다들 안 그런 척해도 썸 타고 사귀나 보다. 우리 팀에도 그런 사람 있을까?”
서로 얽혔던 세 사람의 시선이 묵묵히 운전 중인 한율을 향했다가 이내 흩어졌다.
“써한은 아닐 것 같다.”
“응.”
“어쨌든, 누구든 썸을 타게 되거나 여자친구가 생기면 숨기지 말고 솔직히 말합시당. 모르고 있다가 기사로 알게 되면 섭섭한 마음이 클 것 같아.”
“응.”
강보배와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우성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한율은 전방을 주시한 채 대답했다.
“어.”
“그런데 우리 팀에 연애 금지 기간이나 해금 조건이 정해져 있었나?”
“아니? 못 들은 듯?”
* * *
퍼플아워 두 번째 숙소.
매니저 장미소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래서 벌써 집 나누고 각방을 쓰게 해선 안 됐는데. 너희들, 핸드폰 다 가져와. 와이파이도 끊을 거야. 허튼 생각들 하지 말고 책을 읽든지 음악을 듣든지 해. 진은수.”
“네.”
“네 방 컴퓨터, 와이파이가 아니라 인터넷 선 직접 연결해서 사용 중이지?”
진은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 게임 출석 아이템 아직 못 받았는데.
“네….”
매니저는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진은수를 바라보다가 가위를 꺼냈다. 송의연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선을 아예 잘라버리려고요? 인터넷 연결만 끊는 스위치 없어요?”
“이참에 은수 게임도 좀 끊자고.”
“아니….”
잘릴 위기에 처한 건 진은수 방의 인터넷 선인데, 송의연이 억울한 얼굴로 따졌다. 문을 닫고 방안에 틀어박힌 루아에게 들릴 만큼 큰소리로.
“사고 친 건 루아 언닌데 왜 우리까지 세상이랑 단절돼야 하는 건데요? 뭐 때문에?”
“너희 멘탈 위해서. 됐니?”
“악플만 안 보면 되잖아요! 우리도 데뷔한 지 벌써 2년이나 됐는데,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매니저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싫으면 나가.”
“…네?”
“회사는 너희를 보호할 의무가 있고, 너희도 거기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의무가 있어. 내가 괜히 너희 괴롭히려고 이러는 것 같아? 인터넷 며칠 못 한다고 사람 안 죽어.”
“…….”
매니저는 말문이 막혀 멍해진 송의연 앞을 지나, 진은수의 방으로 들어갔다. 진은수도 그 뒤를 조심스레 따랐다.
하아. 진은수의 방을 크게 둘러본 매니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PC 본체와 연결된 랜선을 뽑았다.
“나중에 랜 커넥터만 갈아 끼우거나 랜선을 아예 새 걸로 교체하면 되니까, 그렇게 큰일이라는 것처럼 쳐다보지 마. …잘 안 잘리네.”
질겅질겅… 툭. 무참하게 잘린 랜선이 힘없이 떨어졌다.
“……!”
진은수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매니저가 잘라낸 커넥터 부분을 손에 쥔 채 거실로 나갔다.
“이제 핸드폰들 가져와. 사과패드랑 노트북도.”
매니저는 멤버들의 핸드폰과 사과패드, 노트북을 상자에 담아 소파 옆에 두었다. 그러곤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핸드폰 쓸 일 있으면 내가 보는 앞에서 써.”
이렇게 기기를 다 압수할 거면 와이파이나 랜선까지 자를 필욘 없지 않았을까. 진은수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강하게 경고하고자 이러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너희도 루아처럼 문제 일으키면, 이런 식으로 다른 멤버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그러니 처신 똑바로 해.
“네….”
“짜증 나, 진짜!”
송의연이 빽 소리를 지르더니 쿵쿵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쾅!
“아랫집에서 항의받고 싶어?! 조용히 걸어!”
다른 멤버도 크게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진은수도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끝이 처참하게 잘린 랜선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무선 랜카드도 사놨어야 했는데. 이제 뭐 하지….’
참 이상했다. 숙소에 갇힌 것도 모자라 게임도 못 하게 된 건 아쉽지만,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진 않았다.
자신이 서한율에게 호감을 비쳤을 때 크게 불호령하고 경계했던 것과 달리, 루아의 연애는 못 본 척 눈감아주던 매니저의 태도에도 이젠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매니저는 정 연애가 하고 싶으면 차라리 같은 회사 사람을 만나라고 했었다. 이는 연애를 장려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이성에게 끌리는 한창 나이대의 아이들을 완전히 막는 건 불가능하니, 그나마 회사가 커버쳐줄 수 있도록 안에서 만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현재, 루아와 나기혁이 회사가 커버치기 힘든 사진에 찍혀 난리가 났지만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어쩌다 밖에서 그렇게 다투게 된 건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알아서 하겠지.’
그보다 팬들이 더 걱정이었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거짓말한 데에 실망한 것도 모자라, 원카운트 팬들이 던지는 비난이나 팬덤 내부 갈등으로 상처받고 있을 텐데.
진은수는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팬에게 선물 받은 다양한 책 중 하나를 골라, 침대에 편히 앉아서 펼쳤다.
팬이 적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은수 네가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랄게.]
진은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행복이란 뭘까. 내 노래와 무대를 좋아해 주는 팬들 앞에 서면 즐겁기도 하고 가슴이 벅차기는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드드득! …그긍!
“……?!”
하늘에서 내려오는 엄청난 굉음. 진은수는 깜짝 놀라 두 귀를 틀어막았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허억.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어지며 눈앞이 핑 돌았다.
눈을 질끈 감은 진은수는 상체를 수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