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6화 (256/427)

“…….”

“…….”

연습생 시절부터 늘 어른스럽고 도도하게 굴었던 루아였기에, 거실에 선 이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루아에게 화가 잔뜩 났던 호수도.

하아. 매니저가 한숨을 내쉬곤 루아를 부축했다.

“일단 일어나. 헤어져서 속상한 건 알겠는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건 그때였다.

타악!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루아가 돌연 진은수를 도끼눈으로 째려보더니,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다가갔다. 그러곤,

짜악! 진은수의 뺨을 때렸다.

“……?!”

“……!”

잔뜩 쉰 목소리가 앙칼지게 울렸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바로 앞에서 동생이 맞는 걸 본 호수는 그대로 눈이 뒤집혔다.

“이 미친년이! 야!”

호수가 루아의 머리채를 거칠게 낚아챘다.

“네가 뭔데 내 동생 건드려! 네가 뭔데 애를 때려!”

“꺄악!”

“왜들 이래! 그만해! …안 떼어내고 뭐 해!”

“호수야, 그만! 그만해!”

“루아 언니 미쳤어?!”

거실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

내가 왜 맞은 거지?

난데없이 뺨을 맞은 진은수는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다, 발치에 떨어진 핸드폰을 집었다. 맞은 곳이 너무나 아파, 순식간에 고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대체 왜?’

이유를 헤아려보려 했다. 그러나 지금껏 루아에게 당했던 이런저런 일들만 떠올라, 이성보다 서러운 감정이 가슴에 요동쳤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흐윽.”

진은수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았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말, 나쁜 말을 잔뜩 뱉어버릴 것 같아,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아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은수야!”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걸 들었지만, 진은수는 계단 난간을 잡은 채 내려가다가 마침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흐윽, 흑….”

그 뒤론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없이 아파트 후문을 통해 빠져나와, 자신을 쫓아오는 기자 혹은 너튜버 같은 사람들을 따돌리기 위해 무작정 모르는 길, 복잡한 길을 골라 걷다가 뛰다가, 숨는 걸 반복했던 것 외엔.

정신을 차렸을 땐,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에 혼자 쭈그린 채 앉아있었다.

…훌쩍. 한참 동안 소리를 죽여 울던 진은수는 겨우 울음을 그치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온몸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아무리 대낮이라 해도 한겨울에 후드티셔츠에 트레이닝복 바지, 그리고 운동화만 신고 나왔으니 당연했다.

슥슥. 소매로 얼굴에 번진 눈물을 대충 닦고선 내내 쥐고 있던 핸드폰을 살폈다. 평소 전원을 꺼놓았던 본인 명의 핸드폰이었다.

우웅.

[우리 언니]

“…….”

진은수는 망설이다가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호수의 목소리를 들으면 또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지금 감정에 휩쓸려, 괜한 말까지 다 쏟아내 버릴 것 같아서.

“……하.”

뒤늦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나 대체 뭐 하는 걸까. 이런 걸 바라고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던 게 아닌데. 언니가 걱정할 텐데. 회사 사람들도 걱정할 텐데.

그런데도 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조용한 곳에 혼자 틀어박히고 싶었다.

‘이럴 때 기댈 만한… 친구도 없고….’

어릴 적부터 연습생 생활, 그리고 따로 레슨을 받으러 다니느라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었다. 기껏 친해졌다고 생각한 아이들도 ‘친구 사이에 이런 것도 못 해줘?’ 이런 말을 하며 이것저것 요구하는 일이 잦아져, 스스로 거리를 두었다.

함께 연습생 생활을 하며 친해진 이들은 데뷔 이후 연락이 뜸해졌다. 저마다 힘들거나 바쁜 까닭이었다.

‘난 정말 우리 가족 아니면 혼자구나….’

우웅. 이번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

가만히 보고만 있자 이내 끊어졌다.

우웅. 그리고 연달아 들어와 화면에 뜨는 메시지. 보낸 번호는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있었다.

-[진은수 너 우리 오빠한테 집적거리면 죽여버린다.]

-[좋게 말로 할 때 전화 받아라.]

-[진은수 핸드폰 맞아요?]

-[(사진)]

-[귀여운 척하지 마 XXㄴ아]

-[사랑해 은수야♡]

-[(사진)]

-[안녕하세요. 진은수 씨 핸드폰 맞나요?]

-[전화 받아^^]

메시지 중엔 역겹고 혐오스러운 사진도 섞여 있었다. 번호를 아무리 바꿔도 귀신같이 알아내서 연락해대는 안티와 사생들.

우웅. 다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이건 지금 진은수의 상황을 알고 한꺼번에 보내는 연락이 아니었다. 감정에 휩쓸려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뿐, 루아가 멋대로 전원을 켠 뒤부터 들어온 부재중 전화가 수십 건, 읽지 않은 메시지가 수백 건이었다.

전화와 메시지 수신을 모두 차단하자, 그제야 핸드폰이 잠잠해졌다.

진은수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고개를 묻었다.

…훌쩍.

입막음시켜야겠어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어스래빗 연습실.

멤버들이 안무 연습에 들어가기 전,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가까이에 있던 박가람이 다가갔다.

“누구세용?”

삐릭, 철컥.

“잉? 네가 웬일이냐?”

“유호 오빠 있어?”

“어. 잠깐만.”

박가람이 유호를 돌아보았다.

“리더, 미랑 선배님 면회.”

“……?”

복도에서 미랑과 짧게 대화를 나눈 유호는, 다시 연습실로 들어와 자신의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복도로 나가 말했다.

“안 받는데. 나중에 또 전화해보고, 받으면 말해줄게.”

“네.”

철컥, 삐릭.

유호가 문을 닫으며 들어왔다. 다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한숨을 푹 내쉬는 그의 표정이 심각하다.

차남석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형?”

유호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연습 시작하자.”

유호는 연습 도중 잠깐 쉴 때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거나 메시지를 보냈다. 그쯤 되자 한율도 궁금해져,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아는 사람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유호가 멤버들을 돌아보더니, 한율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은수가 핸드폰 하나만 들고 나가선 연락이 안 된대. 숙소에서 멤버들끼리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은수가 대책 없이 숙소에서 뛰쳐나가거나 연락을 받지 않을 애가 아니잖아. 그래서 더 걱정이다. 이 추운 날에 외투도 안 입고 나갔다던데.”

아주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나.

한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주변 사람을 오래 걱정시키는 성격이 아니잖아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마음 추스르는 대로 들어가지 않을까요? 핸드폰도 갖고 있고, 별일 없을 거예요.”

유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길 바라야지.”

그 시각. 아림 엔터테인먼트는 난리가 났다. 나기혁과 루아의 스캔들 파장이 채 가라앉기도 전, 이번엔 진은수가 사라졌기 때문.

“지금 손 남는 사람들, 전부 나가서 은수 찾읍시다. 이 일이 외부로 알려져서 퍼플아워 불화설이라도 돌 경우, 지난번 스캔들보다 더 큰 폭풍이 회사 덮칩니다. 이거 아주 큰일….”

우웅.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실장은 핸드폰을 들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쉿. 직원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곤, 최대한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은수야. 너 지금 어디니?”

진은수는 현재 퍼플아워에서 가장 인기 많고 인지도 높은 멤버이자 중요한 메인 보컬이었다. 언니인 호수 역시 아림 엔터 대표 걸그룹 히아신스 멤버에다, 곧 드라마 주연을 맡을 예정. 당장 화가 난다고 윽박지르면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컸다.

워낙 착하고 순한 아이라 그러고 싶지도 않고.

“연락이 안 돼서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데. 몸은 괜찮아? …그래, 그랬구나. …음, 오빠랑 있어서 다행이다. …아냐. 당분간 아무 생각하지 말고, 오빠 집에서 푹 쉬어. …죄송하긴. 네가 무사했으면 됐지. …그래, 밥 잘 챙겨 먹고.”

실장은 진은수와 통화를 끊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직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오빠 집에 있대요?”

“네. 그리고 핸드폰은 자꾸 사생이랑 안티가 계속 연락해서 잠깐 수신 차단했던 거랍니다.”

“금방 연락이 와서 다행이네요. 다친 곳은요? 만약 얼굴에 흉이라도 졌으면….”

“쉿.”

실장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살살 문지르다가 퍼플아워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장 대리님, 은수랑 연락됐습니다. 저 지금 숙소로 갈 테니까, 애들이랑 거기에 가만히 계세요.”

원카운트 연습실. 히아신스 호수와 짧은 통화를 마친 찬형은 나기혁을 돌아보았다. 그는 조금 전 찍은 안무 연습 영상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본인 안무는 흠 하나 없도록 저렇게 신경 쓰면서, 여자관계는 대체 왜 그 모양인지.

“형. 나가서 얘기 좀 해요.”

나기혁이 영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뭔데. 여기서 해.”

“후회할 텐데.”

“…하. 꼭 지금 해야 하냐?”

찬형은 나기혁 옆에 쭈그리고 앉아 속닥거렸다.

“루아가 은수 때렸대요. 그것도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아주 세게.”

“……!”

놀라는 나기혁. 그의 얼굴에 진저리난다는 감정이 빠르게 스쳤다. 대상은 아마도 루아.

찬형이 일어나자 나기혁도 함께 일어났다. 영상이 재생되는 사과패드를 내버려 두고.

“조용한 곳에서 얘기해.”

찬형은 나기혁과 보컬 연습실로 들어가 호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진은수의 핸드폰을 빼앗아 방에 틀어박혔던 루아가, 펑펑 울면서 나오더니 ‘이게 다 너 때문이야’라고 말하며 진은수의 뺨을 세게 때렸다고.

“오늘 루아랑 통화했죠? 대체 루아한테 뭐라고 했길래 걔가 은수를 때려요. 형 설마 은수한테도….”

나기혁이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내가 미쳤냐, 호수 동생을 건들게? 그것도 루아랑 같은 팀 애를?”

“그럼 뭔데요, 대체.”

하. 나기혁은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쉰 후에야 대답했다.

“아침에 은수 번호로 전화가 걸려와서 받았어. 나한테 전화할 일이 없는 애가 전화하니까, 혹시 루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하고. 그런데 루아더라? 거기에 조금 질려서 이젠 다른 사람 폰으로 연락하냐 물었더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은수 핸드폰으로 연락해서 짜증 내는 거 아니냐고 이상한 식으로 몰아가는 거야.”

“그래서요?”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야. 우리 이미 헤어진 사이다, 구차하게 이러지 말자, 주변 사람들한테도 이런 식으로 피해 주지 말자. 이렇게 말하고 끊었어. 그게 다야.”

정말일까. 찬형은 안 미더운 눈으로 나기혁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루아가 은수랑 형 사이를 의심하게 만든 적 없어요? 정말?”

“없어. 나랑 은수, 게임 친추도 안 한 거 너도 알잖아. 은수 번호도 다른 애가 알려줘서 저장한 거고. 그리고 솔직히.”

나기혁이 눈썹을 긁적거리더니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헤어진 마당에 의심 운운하는 것도 우습지 않냐? 다 끝난 사이에 상대방이 누구랑 연락하든 무슨 상관이야. 그렇다고 내가 은수랑 따로 연락한 건 아니다? 이건 확실히 말해둔다.”

“형이랑 루아, 서로 합의하고 헤어진 게 맞기는 해요? 형이 일방적으로 끝낸 건 아니고?”

“원래 남녀 사이는 한쪽이라도 마음이 떠나면 끝이야. 다른 한쪽이 붙잡는다고 강제로 관계를 이어나갈 의무도 없다고.”

“…….”

“야, 내가 왜 루아랑 헤어진 건지 아냐? 걔, 날이 갈수록 사람을….”

“됐고요.”

찬형은 나기혁의 말을 막았다.

“형이 루아한테 확실히 말해요. 두 사람 일이랑 아무 상관도, 아무 잘못도 없는 은수 괴롭히지 말라고. 그리고 똑바로 사과하라고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걔가 순순히 그러겠다고 하겠냐? 더 은수한테 난리 치지?”

나기혁을 바라보는 찬형의 눈이 더 한심하게 변했다. 나기혁도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문득 찬형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네가 이렇게 열을 내냐? 혹시 너, 은수한테 마음 있냐?”

“내가 형인 줄 알아요? 여자라고 다 흑심 품고 신경 쓰게?”

“그럼 왜 이러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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