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7화 (257/427)

하. 찬형은 나기혁을 향해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형 처신이나 똑바로 해요.”

* * *

“그렇게 된 거래.”

3일 자정으로 넘어가는 늦은 시간.

라방으로 진행한 박가람의 생일파티를 끝낸 뒤, 한율은 유호와 와인을 마시며 RMMA MC 대본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 옆에 라이언이 포도 주스를 들고 와서 앉더니, 두 사람이 연습에서 잡담으로 넘어가자 퍼플아워에게 생긴 일을 떠들었다.

“그럼 루아가 은수를 때린 정확한 이유는.”

“루아가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아무도 모른대. 은수도 숙소가 아니라 오빠 집에 있고.”

유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에 은수한테서 연락 왔을 때 전화해 볼 걸 그랬다.”

“그런데 지금 이 얘기, 아림에서 퍼플아워 불화설로 번질까 봐 쉬쉬하고 있을 것 같은데. 해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 찬형이 리더한테는 말해도 된다 그랬거든. 은수 편이잖아.”

“저는요?”

“하뉼은 하뉼이니까 괜찮아.”

“라이언이 한율이 너 정말 신뢰하나 보다.”

“그런데 이 와인, 가람이 받은 선물 아니야?”

“아까 한 모금 마시고는, 본인 입맛에 너무 시다고 우리한테 넘기고 갔어요. 형도 마셔볼래요?”

“아니.”

라이언은 안주로 둔 큐브 치즈 하나를 입에 쏙 넣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자러 갈게.”

“그래, 잘 자.”

“잘 자요, 형.”

라이언이 2층으로 올라가고, 거실엔 한율과 유호, 달냥만 남았다. 달냥은 라이언이 앉았던 의자로 올라와, 큐브 치즈를 향해 앞발을 슥 뻗었다. 후려치기 좋은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 눈이 반짝거린다.

한율은 달냥의 앞발을 가볍게 툭 저지했다.

“안 돼.”

므앙.

유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아이돌그룹이 비즈니스로 뭉친 팀이라 해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그러는 편이 대본 없어도, 굳이 짜인 대로 연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친한 케미가 흘러나와서 더 좋은데 말이지.”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미성숙한 어린애들이 모여 서로 경쟁하고 가면 쓰는 법부터 배웠으니까요. 사회성이 다 좋을 순 없겠죠.”

“…….”

“왜 그렇게 보세요?”

“한율이 너 솔직히 말해.”

유호가 장난스레 물었다.

“인생 몇 회차야?”

한율은 농담처럼 대답했다.

“3회차요.”

다음 날 아침. 누군가 켜놓은 거실 TV에서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부가 지난 11월 30일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 천둥소리 환청과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을 겪은 인원을 파악하기로 했습니다. 정부는 오는 7일….]

잠옷 바람으로 우두커니 서서 TV를 보던 길우성이 중얼거렸다.

“필요에 따라 병원에서 검사받게 한다니… 왠지 무섭다….”

한율은 지나가는 어조로 말했다.

“그럼 일단 등록 보류해. 그날 이후 별다른 증상도 없잖아. 섣불리 등록했다가, 해외 출입국 금지라도 당하면 어떡할래.”

길우성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출입국 금지된대?!”

“아니, 만약에 말이야. 미국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서.”

“안 되는데. 당장 다음 주에 일본에서 열리는 RMMA 가야 하는데…. 미국에서도 앨범 내야 하는데….”

힐끗. 한율은 거실에 다른 멤버가 없는 걸 확인하곤 어깨를 으쓱였다.

“뭐, 신고 제도라도 생기면 자진 등록 보류도 소용없겠지만.”

“……!”

“뭘 그렇게 놀란 눈으로 봐.”

휙. 길우성이 닫혀있는 다른 멤버의 방문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비장한 얼굴로 하는 말.

“멤버들을 입막음시켜야겠어. 출입금 금지라니, 난 몹쓸 바이러스 보균자가 아니라고! 우선 같은 방을 쓰는 큰형의 입부터 막아야겠다.”

길우성이 2층 계단을 올랐다. 한율은 그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단순한 녀석.

정부가 이상 증상을 겪은 사람들을 조사하겠다고 공식 발표하자, 포털사이트 실검엔 또다시 [천둥소리 호흡곤란], [미스터리홀 천둥소리] 등이 올라왔다. 잠잠해지려던 온갖 음모론도 활개 쳤다.

-예전에 미국이 인간한테 칩 심어서 관리하겠다고 했잖아. 훨씬 그 이전에 이식받은 사람들이 동시에 신호 받고 증상 일으킨 거 아님?

-지구가 내뿜는 독성 물질에 반응한 사람들이라던데?

-자신들이 외계인이란 사실을 잊은 외계인들임. 전부 한곳에 모아두려는 거임

-그날 커뮤나 SNS, 톡에다 천둥 환청 들었다고 한 애들 전부 신원 확인 들어갔다더라

ㄴ개 무섭다

-배우 장미연도 천둥소리 환청이랑 호흡 곤란 증상 겪었다고 SNS에 적지 않았나? ㅋㅋㅋㅋ 실험체 1호로 끌려가시겠네ㅜㅜ

ㄴ아이고 누님ㅠㅠ

ㄴ이래서 SNS는

“…….”

오빠 집에서 하룻밤 묵은 진은수는, 멍한 얼굴로 모니터를 보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딸칵, 딸칵.

어제 오빠, 그리고 호수와 이야기를 나누며 또 울고, 밤에는 계속 뒤척거리다 겨우 잠들었던 터라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그래도 눈에 강제로 힘을 주곤, 화제가 된 커뮤 게시글을 살폈다.

‘그날 그 시간에… 나랑 똑같은 증상을 겪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아주 돌아버리는 줄

그동안 핸드폰도 압수당하고 인터넷에도 접속 못 했던 터라 전혀 몰랐다. 어제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쳐 인터넷을 살필 여력도 없었고.

‘어떡하지? 회사에 말해야 하나? 이미 언니랑 매니저 언니가 알고 있으니까….’

우웅.

깜짝. 진은수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호수가 퍼플아워 숙소에서 가져온 다른 핸드폰이었다. 아직 외부로 번호가 유출되지 않은 핸드폰.

“응, 의연아.”

-[언니, 대박 사건!]

전화를 건 송의연은 인사를 건너뛰고 곧바로 용건을 전했다.

-[매니저 언니 잘렸어!]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장 대리, 다른 부서로 갔다고!]

생각지도 못한 소식. 송의연의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툭하면 오버해서 우리 괴롭히고 참견하고, 지가 대표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압적으로 굴더니 아주 꼴좋다! 속이 다 시원하네!]

바뀐 건 매니저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숙소를 쓰는 멤버들도 바뀌었다.

-[어제 짐 옮기느라 혼났다, 아주. 장 대리가 잘랐던 랜선도 실장님이 새 걸로 교체했으니까, 다시 마음껏 게임 해도 돼. 그리고 전에 내가 언니한테 빌렸던 치마랑 원피스 있지? 깨끗하게 드라이클리닝 해서 언니 방에다 뒀어.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어.”

-[그럼 끊는다!]

통화가 끝났다. 진은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솔직히 미울 때도 많았지만, 퍼플아워로 데뷔하기 전부터 개인 스케줄을 봐주었던 사람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직접 듣고 싶었다.

통화 연결음으로 설정된 퍼플아워 노래가 흘러나오다 끊겼다.

-[은수야, 나 지금 바쁘다. 나중에 내가 전화할게.]

뚝.

“…….”

입도 못 떼보고 끊긴 통화. 진은수는 핸드폰을 멍하니 내려보다가 작게 한숨 쉬었다.

우웅. 이번엔 호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응, 언니.”

-[은수야, 너 혹시 뉴스 봤어? 정부에서….]

“응, 봤어. …회사에 말해야겠지?”

-[아니. 내 생각엔 일단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날이 나기혁이랑 루아 스캔들 터진 바로 다음 날이었잖아. 찬형이가 그러는데, 그날 얌전히 방에 있던 나기혁이 갑자기 나와선, 천둥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는데 못 들었냐고 묻더래. 리더한테는 갑자기 숨도 못 쉴 뻔했다고 그러고.]

“정말?”

-[응. 그리고 대표님이, 정부가 이상 증상을 겪은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하려는지 알아보겠다고 하셨대. 그때까진 조용히 있으라고. 원카운트 컴백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우리도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그런데 언니.”

-[응?]

진은수는 문득 떠오른 순수한 의문을 입에 담았다.

“찬형 선배님이랑 자주 연락해?”

-[…….]

“지난번에도 찬형 선배님 통해서 게임 귓속말로….”

-[은수야.]

“응?”

호수가 잠시 머뭇거리다, 쑥스러운 기색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진은수는 눈치챘다.

언니랑 찬형 선배님, 썸 타는 단계구나.

약간 안심되었다. 찬형이라면 믿을 만했다. 호수보다 한 살 어리긴 하지만, 성격이 차분하고 언행 또한 가볍지 않아서.

음악방송 MC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온갖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찬형에 대해선 안 좋은 이야기, 이성 관련 이야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응. 비밀로 할게.”

* * *

12월 4일 금요일 오후. WB래빗 엔터테인먼트 구내식당.

유호는 테이블에 식판을 내려놓자마자 핸드폰으로 실시간 TV 앱을 실행, 생방송 중인 MBS <뮤직센터>를 재생했다. 막 첫 무대가 끝나고 MC들이 인사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뮤직센터> MC 은수입니다!]

여느 때처럼 반짝반짝 환하게 웃는 퍼플아워의 진은수. 유호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이건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다시 MC 하고 싶어?”

“그건 아니고, 요즘 음방을 제때 챙겨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잠깐만 눈을 떼도 새로 컴백하거나 데뷔하는 팀들이 나오잖아. 살펴야지.”

“그러고 보니 원제로 친구들도 슬슬 재데뷔 시동 걸고 있더라. 민솔이도 티저 떴던데?”

“빠르네.”

“악플 달아야지.”

“…이언아.”

“민준 선배님도 곧 솔로로 컴백하지 않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 화요일에 앨범 나오고, 무대는 RMMA에서 처음 공개하기로 했어요.”

“무대 라인업 보고 설마 했는데. 크으, 역시 스케일이 달라.”

“블블이 아직도 일본에서 진짜 인기 많잖아. 코어 팬도 많고.”

“우리도 열심히 하자. 인기는 유지하는 것도 힘든 거 알지?”

“그럼, 그럼.”

우웅.

한율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배우 이제설의 톡.

-[(사진)]

-[고마워^^]

-[(이모티콘)]

한율이 이제설의 영화 촬영장으로 보낸 커피차 인증샷. 이제설 옆엔 배우 이윤영도 어색하게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길우성이 멋대로 한율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제설 선배님한테 커피차 보냈어? 어? 윤영 선배님이다.”

“두 분이 같은 영화를 촬영하고 있더라고.”

“장르가 뭔데?”

한율은 이제설에게 답장하면서 대답했다.

“범죄 스릴러.”

“오우.”

“영화 이야기 나오니까 극장에 영화 보러 가고 싶다. 안 간 지 정말 오래됐는데.”

그렇게 말하는 강보배의 시선이 박가람을 향했다. 박가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번에 안 갔어?”

“그때 형 대신해서 남석이랑 건우 형한테 물어봤는데, 싫다고 그래서 나도 안 갔어. 나 혼자 가면 헤매잖아.”

“미안하다. 형이 사랑하는 거 알지?”

강보배가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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