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정말 보고 싶은 공포 영화가 개봉했는데.”
“3초 만에 형의 사랑을 시험하는구나, 보배야. 서한율아, 너도 보배 사랑하지? 같이….”
“안 하는데요.”
“…가자꾸나.”
잡담은 자연스럽게 공포 영화를 보러 가자는 이야기로 흘러갔다. 연습 시간을 빼면서까지 놀 순 없는 터라, 그나마 쉬는 날인 일요일 오전에 보러 가기로 했다. 유호와 라이언, 차남석을 제외한 다섯 명만.
“예매 완료. 이제 갑자기 약속 취소하는 사람은 벌금이야.”
한편, 이제설 주연의 스릴러 영화 촬영장.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세요.”
“조심히 들어가요, 윤영 씨. 오늘 고생 많았어요.”
“네, 감사합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연이라 촬영 씬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윤영은 감사한 마음을 담아 배우들,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꾸벅꾸벅 인사했다.
철컥. 매니저가 기다리던 차에 올라 안전띠를 매자, 그가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로?”
“서울에 있는 집이요.”
“네.”
2년 전 서한율 주연 영화 <고양이 난로>에 조연으로 나간 뒤, 이윤영은 곧바로 월화드라마 조연으로 캐스팅되었다. 그리고 라디오나 잡지 인터뷰, 광고 촬영도 하며 슬슬 인지도를 쌓았다. 지금은 대한민국 정상급 배우 중 한 명인 이제설 영화에 참여 중.
그러나 소속사인 별이날다 엔터는 그런 이윤영을 제대로 밀어주기는커녕, 무뚝뚝하거나 초보 매니저를 곁에 붙였다.
이윤영은 이게 대표의 소소하고 유치한 복수란 걸 알았지만, 딱히 항의하진 않았다. 참 얄밉게도 선은 넘지 않는 까닭이었다.
‘계약 기간도 얼마 안 남았고.’
이윤영은 커피차에서 가져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이희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이희우, 그리고 이희우를 통해서 친해진 배우 장미연과 셋이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선배님, 저 지금 촬영장에서 출발했어요. 집에 가면 7시 정도 될 것 같아요.”
-[그럼 7시에 집 앞으로 갈게. 혹시 오늘 미연 언니랑 통화한 적 있어?]
“아니요? 왜요?”
-[이 언니가 전화를 안 받는다? 분명히 오늘 3시에 한국 들어온다고 했는데. 뭐, 때 되면 알아서 연락 오겠지. 그럼 나중에 봐.]
“네.”
잠시 후 저녁 7시. 외출 채비를 마친 이윤영은 이희우의 전화를 받고선 집을 나왔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대기 중이던 그녀의 차에 올랐다. 차 스피커에선 어스래빗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연 선배님이랑은 통화됐어요?”
“어. 3, 40분 늦을 것 같다고, 우리 먼저 먹고 있으래.”
이윤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미연 선배님 집에서 먹기로 했는데요?”
“비번 알려주더라.”
장미연의 집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촬영 중이거나 준비 중인 작품 이야기, 어스래빗과 서한율에 관한 이야기.
“얼마 전에 진송아 선생님이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고요. ‘너 한율이랑 따로 연락하면 큰일 난다면서?’”
“큰일이 나기는 하지. 예전에 나랑 한율이가 사귄다느니 어쩐다느니 이런 헛소리가 나왔던 걸 떠올려보면. 그때 얼마나 황당했는데. 내가 나보다 열 살 어린 미성년자랑? 아니, 왜 멀쩡한 사람을 변태로 만드냐고. 생각하는 수준들하고는.”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이희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나도 예전엔 ‘본인들만 당당하면 됐지, 왜 남들 눈치를 봐야 해?’ 이렇게 생각했지만….”
하아. 이희우가 내뱉는 한숨엔, 아이돌인 민준과 사귀면서 그의 팬에게 당한 일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윤영이 넌 한율이랑 두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 데다가 접점도 많잖아. 팬들이 오해할 만한 빌미를 주지 않는 게 최고지.”
이윤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돌 한창 좋아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팬들 심정도 이해가 가요.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특정 여자 사람이랑 친한 걸 보고선, 쟤가 우리 오빠 유혹하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을 했었거든요. 한편으론 샘도 나고.”
“그래? 아이돌 누구 좋아했는데?”
“비밀이에요.”
“민준인 아니지?”
“아니에요.”
“네가 학생 때 활동한 아이돌이면 민준이가 자알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여차하면 민준을 통해 소개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 이윤영은 재차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탈덕했으니, 이 이야긴 여기에서 그만이요.”
이희우가 이윤영을 힐끗하곤 귀엽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래.”
곧 두 사람은 장미연의 아파트에 도착, 오면서 장을 본 물건을 식탁에다 늘어놓고 저녁을 준비했다.
집주인인 장미연이 온 건 그로부터 40분 뒤였다. 두 사람이 기다리다 지쳐 고기를 불판에 올렸을 때.
“희우 안녕, 윤영 안녕.”
“이 언니는 본인이 같이 저녁 먹자고 해놓고 왜 제일 늦게 와? 안색은 또 왜 그래?”
“말도 마.”
풀썩. 장미연은 캐리어와 가방을 현관에 대충 내버려 둔 채,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러곤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부르르 진저리를 치다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잠깐 납치당했다가 왔어.”
“뭐?”
“네? 납… 치요?”
“나 물 좀 줘.”
…후. 이희우가 가져다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장미연은 그제야 살겠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고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공항에서 택시 타려고 승차장으로 가는데, 차 한 대가 내 옆에 서는 거야. 보니까 이우그룹 이채환이더라?”
“이채환? 이우그룹 회장 손자? 언니가 예전에 말했던 그 또라이?”
“어, 그 또라이. 그래서 못 본 척 지나가려고 했거든. 그런데 집요하게 내 옆에 따라붙으면서 말을 거는 거야.”
“뭐라고?”
“11월 30일에 천둥소리 환청 들은 거에 관해 묻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왔다고. 그리고 웬 덩치들이 나타나선 날 강제로 이채환 차에 태웠고… 그 또라이랑 몇 시간 내내 드라이브했어.”
달그락. 장미연이 티 테이블에 빈 컵을 내려놓았다.
“미스터리 홀 속 거대 몬스터가 어쩌고, 초능력자가 어쩌고, 판타지 영화가 어쩌고저쩌고 계속 떠드는데, 아주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말해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
“왜 공통점이 없지? 왜 없을까?”
널찍한 룸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이채환은, 부하직원이 가져온 서류를 훑으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11월 30일 천둥소리 환청과 호흡 곤란 증상을 겪었다는 사람 열 명을 파악해 조사했는데, 성별이나 출생지, 건강 기록이나 직업 등이 전부 제각각이었다. 간혹 겹치는 것도 있었지만, 무의미한 수준으로 소소했다.
“인간이 아직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건가? 음, 그럴 만해. 그래도 조사는 멈추지 마. 워낙 사소해서 놓친 뭔가가 있을지도 몰라. 이해원은?”
“여전합니다. 가끔 새벽에 산책하거나 정원을 관리할 때, 식료품을 사러 갈 때 외엔 집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습니다. 만나거나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요.”
“으음….”
초능력자일지도 모른다며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시시한 보고 결과에 실망하는 표정. 부하직원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망상에서 좀 벗어나자, 인간아. 술이랑 약 좀 그만 처먹고.
“채욱인 뭐 해? 아버지가 해커 찾으라고 한 지가 언젠데, 걘 왜 아직도 함흥차사야?”
한편, 이채욱은 부하직원과 함께 한 건물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왜 이곳을 간과했을까.’
이해원과 해커와의 접점을 찾기 위해, 이해원의 과거를 다시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다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빈 곳을 발견했다.
올해 3월, 이해원이 MOHE 숙소를 나와 잠적했을 때 지냈던 곳. 이우그룹과 VEL 엔터의 뒷배인 조폭들이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 없었던 은신처.
‘분명히 여기야. 내 촉이 그래.’
VEL 엔터의 실상을 폭로하고 몇 달.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이해원은 집에서 어머니를 간호하며 지냈다. 그러면서 종종 다닌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이 건물 3층에 있는 명상센터였다.
부하직원의 조사에 따르면 소수 회원제로 운영되던 작은 명상센터라고 한다. 그리고 현재 센터장은 작년부터 인도에서 요가 수업을 비롯해 그곳 문화를 공부하는 중.
『마음 편히 쉴 곳이자 개인 작업실로 빌려줄 수 있겠냐는 지인의 부탁으로 그곳을 내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인도에서 유유자적하는 거고. 물론, 건물주에겐 비밀로 하고요.』
그 지인은 현재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 어쨌든 명상센터는 보일러와 화장실, 샤워 시설까지 갖춰졌다고 했다.
이채욱은 이해원이 이곳에서 지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다라, 직접 살펴보기로 했다.
“같은 3층에 있는 IT 회사와 미용실은 간판만 달려있을 뿐 공실입니다. 맞은편에 있는 디자인 공방은, 사장이 거의 창고 용도로 사용하는 곳이라 평소에 잘 드나들지 않는다더군요.”
저벅저벅. 이채욱은 부하직원과 계단을 오르며 물었다.
“언제부터 비어있었죠? 입지가 괜찮아서 금방 나갈 것 같은데.”
“3년 전, 미용실 간판이 붙은 곳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었다고 합니다. 맞은편 IT 회사 직원들이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그 현장을 목격했고, 그 뒤로 귀신이 나타난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돌면서… 먼저 IT 회사가 나갔습니다. 그 후 다른 임차인들이 들어왔지만, 몇 달 못 버티고 도망치듯 나갔답니다.”
“…….”
슥슥. 이채욱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팔을 문질렀다.
3층은 그나마 인기척이 느껴졌던 2층과 달리 캄캄하고 고요했다. 꺼진 복도 조명을 켰지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명상센터는 계단 바로 옆이었다. 문에는 ‘푸른 명상센터’라는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똑똑. 부하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달칵, 달칵. 노크하고 초인종을 눌러도 별 반응이 없다.
“자물쇠가 보안업체와 연결되어 있어, 강제로 열었다간 동네방네 소란이 일 것 같습니다.”
이채욱의 시선이 바로 위 천장에 설치된 CCTV를 훑었다.
“그럼 빈 사무실을 열어보죠. 혹시 압니까. 해커가 그곳에다 온갖 장비를 가져다 놨을지.”
“네. 도구를 가져오겠습니다.”
“네.”
이채욱은 복도 끝에 있는 미용실 간판을 보곤 덧붙였다.
“…빨리 오세요.”
“네.”
부하직원이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우웅. 그때 이채욱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사촌 동생인 이채현.
“웬일이야, 네가 전화를 다 하고?”
-[오빠, 이해원 만났다며?]
이해원 때문에 그룹 이미지에 막대한 손해를 끼쳐 놓고선, 또.
하아. 이채욱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그러다 바로 옆 창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이것 때문에 공기가 더 싸늘했구나.
이채욱은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누구한테 들었어? 그것보다 너, 우리 아버지가 더는 이해원한테….”
그 순간이었다.
깜빡.
“……?”
깜빡깜빡. 창에 비친 미용실 앞 복도 조명이 별안간 깜빡거리더니, 툭 꺼졌다.
“……?!”
조금 더 어둑해진 복도. 이채욱은 손잡이에 손을 뻗은 채 굳어 버리고 말았다.
순간 창에 비쳤던 무언가를 보고.
“…….”
귓가에 이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한 용건 때문인지, 조금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웠던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나도 알아. 그냥, 잘 지내는 것 같냐고… 묻고 싶어서 전화했어. 그 정돈 말해줄 수 있잖아. …듣고 있어?]
멍하니 있던 이채욱은 겨우 입을 뗐다.
“채현아.”
-[어.]
“나 방금… 귀신 본 것 같아….”
이채현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말해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 실망이다, 이채욱.]
* * *
-[환영 마법이 제대로 발동한 것 같아요. 다른 두 사무실이 빈 것만 확인하곤 도망치듯 나가더라고요.]
계나리와 통화 중. 한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그 특이한 경험 때문에 의심하게 되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그래도 센터나 주변 CCTV 모두 깨끗하게 정리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우리가 빌리기 한참 전부터 원래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도 있었고.]
지난번 이채욱이 이해원을 찾아간 날. 한율은 센터를 정리하고 마법 학교를 옮기기로 했다. 이젠 각자 알아서 마나 유동을 잘하는 데다, 사생들 때문에 그곳을 자주 찾기가 힘들어진 까닭이었다. 도보로 3분밖에 안 걸리는 짧은 거리가 오히려 단점이 되었다.
“하긴. 훈련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쨌든 센터 복도에 설치한 아이템은 내가 회수할 테니, 넌 걱정하지 말고 가족 여행 잘 다녀와.”
-[넵!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너도 잘 자.”
일요일 아침, 서울의 한 극장.
어스래빗 멤버 다섯 명이 상영관 앞 의자에 모여 앉았다.
“극장에 온 기념으로 사진이나 찍을까?”
“치즈.”
찰칵.
실내에서도 목도리와 마스크, 모자 등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옷을 입은 모양새가 누가 봐도 연예인이었기 때문. 그것도 한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이나 모여 있어, 더 눈에 띄었다.
“그런데 우리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솔직히.”
길우성이 한율을 가리켰다.
“얘 말곤 딱히 알아볼 것 같지 않은데.”
“뒤쪽에 중학생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이 모여 있단다, 막내야. 충분히 알아볼 것 같지 않니?”
“알아봐도 꼭 팬이란 보장은.”
“우리 때문에 소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조심해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되잖아.”
“음, 듣고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