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비가 정말 많이 내리던 날이었는데….]
박세은이 크리스탈 래빗 라나에게서 들은 오싹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강보배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리모컨을 집었다.
“볼륨 좀 올려도 돼? 나 이 얘기 처음 들어.”
[1시 40분에 연습을 중단하고, 두 분이 씻으러 가려고 복도로 나왔어요. 그때.]
한율은 강보배를 말렸다.
“안 올리는 게 좋을 거예요.”
“아. 호 형.”
유호가 귀를 틀어막은 채 강보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볼륨을 올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부릅뜬 눈으로.
[안녕하십니까!]
깜짝. 별안간 TV에서 크게 나오는 밝고 환한 목소리. 유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또 다른 손님인 스타믹스의 지헌, 히아신스의 호수가 등장하면서, 무서운 이야기도 도중에 끊겼다.
-아 진짴ㅋㅋㅋ 5분만 더 늦게 오지ㅠㅠ
…후우. 유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귀를 막았던 손을 내렸다. 이건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방금 그 이야기, 연습생이 라나 선배님, 은영 선배님, 그리고 형이랑 다른 한 사람. 이렇게 딱 네 명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이라 그랬잖아. 그럼 형도 이미 아는 이야기 아냐? 그때 못 들었어?”
“기억에서 삭제한 지 오래야. 떠올리게 하지 마.”
“큰형이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제법 오싹한 썰이란 건데. 나중에 미랑이 누나한테 물어봐야겠다.”
방송에선 음식이 다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라, 지헌과 호수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도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출연자 중 개그맨과 배우의 손님이었다.
[한율 씨랑 호수 씨는 이렇게 따로 만난 적 있어요? 음방 말고.]
[아뇨, 처음이에요.]
[한율 씨 말고도 지헌 선배님, 그리고 세은 씨하고 이렇게 만나는 것도 처음이에요.]
[<시골집밥>이 만남의 장이네.]
손님 세 명 모두 아이돌이었지만, 한율과 지헌은 드라마와 영화까지 찍은 배우이기도 했다. 호수도 곧 주연으로 배우 데뷔를 앞둔 상황. 대화는 주로 아이돌 활동과 연기 활동 중 겪은 소소한 일화로 흘러갔다. 아이돌일 때와 배우일 때 바꿔 끼우는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저는 연기할 땐 일단 이것저것 내려놔요. 아이돌로서 촬영할 땐 제일 중요한 게 비주얼이잖아요. 그래서 조금 더 턱선이나 눈매가 예쁘거나 멋있게 잘 나오도록 각도나 표정을 취하지만, 배우는 그러면 안 되니까.]
[맞아. 그리고 시선으로 카메라 쫓는 습관.]
지헌의 말에 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그 습관도 고치기 조금 힘들었어요.]
[한율이 너 하나도 안 힘들어 보였는데?]
[네. 솔직히 금방 적응하기는 했어요.]
-서한율 송아 쌤 말에 바로 이실직고ㅋㅋㅋㅋㅋ
-서한율도 은근 뻔뻔함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구먼.”
“다 맛있어 보인다.”
TV에서 내내 시선을 떼지 않던 라이언이 물었다.
“진짜 맛있었어?”
“네. 다들 요리를 잘하시더라고요. 재료가 다 싱싱하기도 했고.”
“나도 저런 방송 나가보고 싶다….”
“웬일로 라욘 형이 방송 욕심을.”
<시골집밥> 방송이 끝난 뒤, 포털사이트 실검에는 한율과 지헌, 호수가 올라왔다. [서한율 박세은]도 끝에 살짝. 방송 중 밥을 다 먹고 나서 뒷정리를 도울 때, 한율과 박세은이 조용히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한 방송 리뷰 기사.
[<시골집밥> 서한율, 박세은에 “나 때문에 미안”]
-내가 봤을 때 서한율이랑 박세은 둘이 썸 비슷한 걸 탄 기류는 안 느껴졌음ㅇㅇ 모쏠의 감은 누구보다 정확함
ㄴ본인 연애에만 세워지지 않는다는 모쏠의 감ㅜㅜ
-실제로 둘이 이성적인 사이였으면 회사에서 같은 방송에 내보낼 리가 없겠지. 서한율 정도면 출연 거부할 수 있고
-호수랑 서한율도 그리 불편한 기색 없던 걸로 봐선 오다리는 확실히 루머 같음
ㄴ호수랑도 뭐 있었음?
ㄴ동생인 진은수가 오다리 루머 중 한 명이잖아
ㄴ진은수 서한율 짝사랑한 거 퍼플 팬들은 다 알고 있었음. 하지만 그게 호수랑 뭔 상관인지 난 이해가 잘??
ㄴㄹㅇㅋㅋ 이제 다 지난 일인 거지
-왜 이번엔 서한율의 신들린 칼질에 대해선 아무도 언급 안 해줌
-오늘 방송 보고 느꼈는데, 서한율 또래 여돌한텐 좀 무뚝뚝하게 대하는 듯. 한 번도 상대 향해서 가식적으로라도 미소 짓는 걸 못 봄
ㄴㅇㅇ송아 쌤이나 다른 사람들한텐 가볍게 예의상 미소라도 짓더니, 박세은이랑 호수랑 대화할 땐 별 표정 없음
ㄴ하도 사람들이 툭하면 오다리니 뭐니 루머 만드니까 그런 거자나
-진짜 오죽했으면 서한율도 본인 잘못 하나 없는데, 자기 때문에 이상한 루머에 휘말렸다고 박세은한테 미안하다고 그러냐...
ㄴ박세은도 괜찮다고 말하는데 괜히 짠하더라. 대체 얼마나 두 사람을 두고 정신 나간 소설을 써댔길래 애들이 서로 미안해하냐고
연애 금지 조항 만들자
퍼플아워 두 번째 숙소. 진은수를 거실로 데리고 나와 함께 <시골집밥>을 본 멤버가 방송 반응을 살폈다.
“진짜 서한율이랑 박세은, 그냥 여사친 남사친 같더라.”
진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해주었다. 거실엔 두 사람밖에 없었다.
“응.”
“그런데도 어디에서 주워들은 몇 가지 단서만 갖고선 함부로 이야기 지어내는 애들은 정말…. 이 바닥에서도 신빙성 있는 목격담은 한 번도 뜬 적 없는데. 은수 너도 그런 루머에 많이 당했지?”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진은수는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응….”
한동안 오빠 집에 머물던 진은수가 숙소로 돌아온 건 어제. 루아, 송의연과 숙소를 바꾼 멤버들은, 진은수 혼자 방에 틀어박히지 않도록 불러서 같이 TV를 보거나 간식을 먹거나 하며 대화하려고 했다.
오늘 단체 안무 연습을 하러 회사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 루아는 진은수의 시선을 피했지만, 다른 멤버들은 전보다 진은수를 살갑게 챙겨주었다.
송의연은 친했던 루아에게서 등을 돌렸다.
『남자랑 헤어졌다고 애먼 사람한테 화풀이할 줄은 진짜 꿈에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언니한테 사과 제대로 안 하는 거 봐. 그걸 본인 자존심 깎아 먹는 행위로 생각한다는 거잖아. 그게 더 쪽팔린 일인 걸 진짜 모르는 건가?』
진은수는 이런 변화가 낯설었지만, 썩 달갑지도 않았다. 아직도 루아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듣지 못했고, 멤버들이 자신의 눈치를 살핀다는 느낌도 받았기 때문이었다.
“저기….”
“응?”
진은수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혹시 실장님이 뭐라고 하셨어?”
“어? 실장님이… 무슨 말?”
“…아니야. 그럼 난 방으로 들어갈게.”
“응. 잘 자, 은수야.”
“응, 너도.”
순간 당혹스러워하던 게 보여, 진은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러곤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다른 사람들 앞, 카메라 앞에서 적당히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왠지 불편했다.
‘게임이나 하자.’
그러나 PC 앞에 앉은 진은수는 바로 게임에 접속하지 않고 너튜브에 들어갔다. 어스래빗 팬튜버가 만든 ‘어스래빗 웃긴 영상 모음’이 추천란에 새로 떠 있어서, 클릭.
음방 대기실. 박가람과 길우성이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서서 <서울 구미호>에서 서한율이 연기했던 장면을 따라 한다.
[넌 언제부터 알았느냐.]
[내가 발견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던 서한율이, 돌연 두 사람의 무대 표정 연기를 과장되게 따라 하더니 정색하며 지나간다. 박가람과 길우성이 충격받은 얼굴로 서한율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
[내가 언제 그렇게 했냐, 서한율! 내가 언제 그렇게 했냐, 서한율! 내가 언제 그렇게 했냐, 서한율!]
[내가 언제 그렇게 얼굴 막 썼냐, 써한율! 어? 어? 어?]
이리저리 왔다 갔다 장난치는 세 사람.
진은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다른 사람 눈엔 ‘이게 뭐?’란 생각이 들겠지만, 팬의 눈엔 최애 아이돌 영상은 늘 재밌다.
‘언니한테 <시골집밥> 촬영 때 어땠는지 묻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괜히 또 오해를 살 수 있으므로, 참기로 했다.
-[은수ㅎㅇㅎㅇ]
영상을 다 보고 나서 게임에 접속하자, 걸그룹 아이허니의 유린이 먼저 귓속말로 인사를 건넸다.
-[무슨 일 있었어? 지난주부터 접속 안 하던데ㅜㅜ]
지난주 랜선이 잘렸었던 이후로 일주일만이었다. 진은수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선배님, 안녕하세요ㅎㅎ]
[조금 일이 있었어요ㅎ]
-[그렇구낭]
-[아]
-[지난주 수욜에 전화 제때 못 받아서 미안]
-[그때 촬영 땜에 정신없어서 은수 너한테 전화 왔던 거 깜빡 잊고 연락 안 했어ㅠ]
‘수요일?’
진은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지난주 수요일은, 루아가 진은수의 핸드폰을 가져간 뒤 난리를 친 바로 그날이었다.
‘왜 내 폰으로 유린 선배님에게 전화를?’
* * *
12월 9일 아침. 어스래빗은 11일 일본 나고야에서 열리는 <2020 RMMA in JAPAN> 참석을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찾았다. 오늘 출국하는 아이돌이 많아서 그런지, 공항은 연예 기자들과 팬들로 혼잡했다.
“한율아, 서한율! 사랑해!”
“잘하고 와, 얘들아!”
항공사 라운지에도 아이돌 팀이 많았다. RMMA를 주최하는 뮤닷 측에서 참석자들을 위해 전세기를 준비해준 덕분이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다른 선후배 아이돌과 인사를 나눈 뒤, 빈자리에 모여 앉았다.
“와, RMMA도 벌써 네 번째 출석이다. 감개무량하다!”
박가람이 주변에 자랑하듯 떠들었다.
“와, 우리 팀 멤버가 RMMA MC다아…!”
와아. 근처에 앉아있던 후배들이 작게 손뼉 쳤다.
“멋져요, 선배님…!”
“엣헴.”
“한율인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난리냐, 박가람.”
“자랑스러운 멤버는 널리 알리고 자랑해야지.”
“서한율.”
한율은 고개를 돌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율을 부른 스타믹스의 JE가 커피머신 앞으로 향하며 물었다.
“뭐 마실래?”
“아메리카노요.”
“구동인 엄마가 봐주기로 했어.”
JE가 준비된 캡슐과 컵을 커피머신에 넣어 작동시켰다.
“상당히 예민한 녀석이라 가까이 다가가거나 만지면 스트레스로 아플 수 있으니, 하루 세 번만 조금 떨어진 채 사진 찍어서 보내달라고 했거든. 별일은 없을 거야.”
“네.”
“그나저나 그 녀석, 처음 만났을 때보다 점점 자는 시간이 늘고 있는데. 괜찮은 걸까?”
“수십 년 동안 낯선 생태계에 적응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고, 나이도 있어서 그럴 거예요.”
“원래 수명이 몇 년인데?”
금세 커피가 완성됐다. 한율은 컵을 꺼냈다.
“그건 저도 잘. 죽을 때가 되면 털 색이 변한다는 이야길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후우. JE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커피 캡슐을 골랐다.
“아직 새하얘서 다행이다. 그거 아냐? 그 녀석, 털에 스파게티 소스가 묻어도 저절로 털이 하얘지는 거? 목욕시켜도 안 빠지던 색이, 시간 지나니까 저절로 옅어지다가 감쪽같이 사라지더라.”
“왜 애한테 스파게티 소스를 묻히고 그래요.”
“일부러 묻힌 거 아냐. 그 녀석이 소스가 묻은 내 옷 위에 눕다가 그렇게 된 거라고.”
걸그룹 아이허니 멤버들이 라운지로 들어왔다. 6년 차 아이돌의 등장에, 후배들이 하던 일을 멈추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한율과 JE도 그쪽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아이허니의 유린이 JE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지만, 그는 못 본 척 캡슐을 머신에 넣었다. 유린의 표정이 못마땅하게 변했다.
“그런데 나 마력 쌓는 건 언제 배워?”
“해원이 형도 거의 8, 9개월 만에 배웠는데요.”
“난 진도를 더 빠르게 나가도 되지 않아?”
“무슨 자신감이시죠?”
잠시 후, 비행기 탑승 시간.
탑승 대기 줄에는 라운지에 들어오지 않았던 다른 팀들이 있었다. 걸그룹 퍼플아워도 그중 한 팀. 퍼플아워 멤버들은 선배 아이돌들을 향해 꾸벅꾸벅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탑승하고 보니, 어스래빗의 자리는 퍼플아워 바로 앞이었다. 뒤에 앉은 퍼플아워 멤버들의 대화가 생생히 들렸다.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도.
“나 오늘 화장 좀 뜬 것 같지 않아?”
“괜찮아. 그런데 기내식 나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