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온다고 들은 것 같아.”
“미스트 가진 사람?”
“나.”
“빌려줘.”
“선배님, 건우 선배님.”
퍼플아워의 송의연이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이건우에게 말을 걸었다.
“미스트 안 필요하세요?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제가 언제든지 빌려드릴게요.”
이건우가 얼떨떨한 얼굴로 웃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피부가 너무 좋으셔서 안 뿌리셔도 되겠당. 헤헷.”
“송의연? 미스트를 찾은 건 언니잖니?”
“메롱.”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뒤, 안전띠 착용을 해제해도 된다는 사인이 울리자 슬슬 돌아다니며 떠드는 사람도 나왔다. 앞에선 스카이러너 멤버들이 축구와 게임 얘기를 신나게 했다. 다른 잡담도. 초콜릿 먹을 사람? 저요! …이언아,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야. 손 내려.
다들 탑승객이 아이돌 혹은 관계자라, 음방 대기실처럼 마음이 퍽 놓이는 모양이었다. 쉬는 시간의 고등학교처럼 참 시끌벅적했다.
길우성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기분 탓인가. 왜 한 번도 안 가본 수학여행을 가는 기분이 들지?”
“그러기엔 다들 나이가.”
“쉿.”
“나 이어폰 어디 갔지? 내 이어폰 본 사람?”
“이어폰 하니까 생각났다. 가람이 형, 전에 빌려 간 이어폰….”
“미안! 새 걸로 하나 사줄게! 남은 한 짝도 잃어버렸어!”
“저런.”
주변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한율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러다 길우성이 어깨를 잡고 흔들어서 깨어났을 땐, 주부국제공항에 도착한 후였다.
“써한 너 진짜 잘 자더라. 어떻게 중간에 한 번도 안 깨고 내리 자냐. 안 시끄럽디?”
“별로.”
앞뒤에 앉아있던 스카이러너와 퍼플아워 멤버들은 이미 비행기에서 내리고 없었다. 오 팀장이 멤버들에게 말했다.
“다들 핸드폰이랑 여권, 지갑, 사과패드랑 노트북 등등 두고 내리는 물건 없는지 잘 살피세요.”
“어라. 여기 누구 자리였지?”
가방을 꺼내던 강보배가 뒷좌석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화장품 파우치 놓고 갔는데?”
“거기 은수 씨 자리였을걸?”
“아직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쫓아!”
“내가 은수한테 전화해볼게.”
비행기에서 내리자 진은수가 사람들을 거슬러서 오는 게 보였다. 유호가 진은수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곤 강보배 손에 들린 파우치를 가리켰다.
“혹시 이거 찾으러 온 거야?”
어?!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진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람 반, 반가움 반 섞인 표정을 지었다.
어스래빗 멤버들과 진은수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여기요. 안은 안 열어봤어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진은수가 강보배를 향해 꾸벅 인사하곤 파우치를 받았다. 유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멤버들이랑 매니저는?”
진은수가 앞쪽을 가리켰다.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 어요.”
“…….”
도중에 말이 살짝 흐려진 건, 한율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진은수가 머쓱하게 웃더니 재차 고개를 꾸벅였다.
“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래. 뛰지 말고. 다쳐.”
“네!”
씩씩하게 대답하곤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진은수. 어스래빗 멤버들도 잠깐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좀 서두를까?”
RMMA 공연 리허설은 내일. 오늘 오후엔 회사에서 빌린 장소에서 자체 콘텐츠를 촬영하기로 했다. 빨리 움직일수록 호텔에서 쉴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응. 아까 음료수를 너무 마셨나 봐. 화장실 가고 싶다.”
“비행기는 다 좋은데, 화장실을 이용하기가 좀 그래.”
“동감.”
그러나 멤버들은 얼마 안 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먼저 비행기에서 내린 이들이 한곳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거나, 혹은 힐끗거리면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파우치를 품에 꼭 안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진은수도 보였다.
“무슨 일 있나?”
의아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하. 퍼플아워의 루아가 누군가를 향해 대놓고 비웃었다.
“순진한 애 이용해서 남의 남자한테 집적거린 년 맞잖아. 내 말이 틀려?”
루아 앞에 선 것은 다름 아닌 아이허니의 유린.
유린은 당황한 듯 입을 뻐끔거리다가 뒤늦게 날을 세웠다.
“…뭐? 년?”
“뭐야? 내용보단 욕부터 걸고넘어지는 거야? 봤지, 진은수.”
루아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너 얘한테 내내 이용당한 거야. 내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자연스럽게 캐내려고, 너한테 친한 척 접근한 거라고. 오죽하면 나기혁 사생이 나한테 알려줬겠어.”
진은수의 표정이 멍해졌다.
“…….”
“잠시만요, 잠시만요!”
뒤늦게 소란이 일어난 걸 들었는지, 퍼플아워 매니저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루아 씨, 은수 씨! 빨리 이동할게요!”
루아가 걸음을 옮기며 주변에 있는 다른 아이돌에게 다 들리도록 말했다.
“남의 남자나 건드리는 싸구려 년.”
“…….”
퍼플아워 매니저가 멍해진 진은수를 챙겼다.
“…은수 씨, 가요.”
그때, 유린이 루아의 등에다 대고 외쳤다.
“너랑 아무 사이 아니라고 했어!”
멈칫. 루아가 굳은 얼굴로 유린을 쏘아보았다.
“거짓말도 정도껏 해.”
그러곤 화가 난 발걸음으로 빠르게 멀어졌다.
별안간 루아와 나기혁 사이의 스캔들 내막을 알게 된 아이돌들도 서로 얼떨떨하거나 놀란 얼굴로 수군거리면서 이동했다.
“뭐야, 대체….”
“대박….”
유호가 어스래빗 멤버들의 팔이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가자, 우리도.”
멤버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걸음을 옮겼다.
“…….”
“언니….”
두 주먹을 꽉 쥔 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유린과 아이허니 멤버들을 남겨두고.
잠시 후, 어스래빗 버스 안.
내내 조용히 있던 박가람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기혁이 루아 씨랑 사귀면서, 유린 선배님이랑 바람을 피웠다는 거지? 이게 사실이면 진짜… 와, 나기혁 개새끼. 어떻게 그러냐?”
“…….”
한때 아이허니의 팬이었던 이건우는 복잡한 얼굴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건 웬 거예요, 형?”
하아. 조용히 한숨을 쉬는 이건우의 품엔,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없었던 납작한 종이 가방이 안겨져 있었다.
강보배가 대신 대답했다.
“퍼플아워의 의연 씨가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에 건우 형한테 줬어. 팬으로서 주는 선물이라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유호가 씩 영혼 없는 웃음을 지었다.
“우리, 연애 금지 조항 만들자.”
“이제야?!”
서한율은 알고 있었음
“불미스러운 일은 아예 싹부터 자라지 못하도록 원천 차단하자고.”
버스 안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인간의 본능이거늘.”
“그건 청개구리 아니야?”
“지금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현재 썸타거나 그럴 준비 중이라고 봐도 되는 거지?”
“아니, 뭐 이런 극단적인 의심을? 모쏠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지 마쇼, 리더.”
“여기 모쏠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
“…….”
“라욘 형이랑 건우 형 고개 돌리는데?”
“저 둘은 어릴 때 잠깐 여친 사귀었었다고 팬들한테 직접 밝혔었잖아.”
“아 참.”
“그나저나 나기혁은 이제 이 바닥에서 기피 대상 되겠네. 외부로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겠다.”
“응.”
“바람피우는 것들은 아주 귀싸대기를 세게 때려야 해.”
길우성은 가슴에 손을 얹고 후련하단 표정을 지었다.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게 조금은 내려간다.”
“우성이 너 알고 있었어?”
“누구를 만나는 것 같기는 했는데, 상대가 유린 선배님이란 건 몰랐어.”
“나기혁보다는 아이허니 분들이 더 걱정이다. 우리도 진실은 정확히 모르지만… 일단은 유린 선배님이 일부러 여친 있는 남자 만났다고 믿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 아냐.”
“그래서 연애가 위험하다는 거야.”
“그럼 언제까지 금지야?”
“군대 다녀오기 전까지?”
“인간적으로 너무 긴 거 아냐?”
“난 군대 안 가는데?”
“…….”
한율은 멤버들의 이야기를 대충 흘려들으며 사과패드에다 펜을 끼적거렸다. RMMA 큐시트와 MC 대본이었다.
옆에 앉은 차남석이 함께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거 다 외워야 하는 거야?”
“큐카드도 있고 프롬프터에도 뜰 테니 꼭 전부 외워야 할 필요는 없지만, 외우는 게 말도 매끄럽게 잘 나오고 좋을 것 같아서요.”
“이렇게 보니 양이 장난이 아닌데. 여기에 영어 멘트까지.”
우웅. 길우성과 한율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두 사람과 크리스탈 래빗의 미랑이 함께 있는 단톡방.
-[아까 공항에서 루아랑 유린 한판 붙었다던데 무슨 일이야? 설명해줄 사람?]
차남석이 조용히 물었다.
“이 단톡방 아직도 있었냐?”
“네.”
한율은 빠르게 답장했다.
[길우성이 할 거예요.]
길우성의 톡.
-[이따가 전화할겡ㅇㅇ]
다음 날인 10일. RMMA 공연 리허설이 한창인 공연장엔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필이면 퍼플아워와 아이허니 리허설 시간이 비슷하게 잡혀, 두 팀이 정면으로 마주친 것.
어색한 인사가 오갔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네, 안녕하세요….”
“…은수야.”
진은수를 부르는 유린. 그러나 진은수는 대답 없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