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2화 (262/427)

“…….”

루아가 유린을 모함한 거라고, 유린이 그런 속셈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게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데뷔 전부터 겉과 속이 다른 거짓말쟁이를 워낙 많이 겪은 탓일까. 한번 피어오른 의심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또 상처받게 될까 봐.

“…….”

“…….”

루아가 멤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가서 앉아있자. 우리가 선배님들보다 순서가 뒤잖아.”

어색한 공기 속에서 눈치를 살피던 멤버들이 조용히 이동했다. 진은수도 멤버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살벌하구먼….”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길우성이 중얼거렸다. 스카이러너의 하신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은 RMMA 오프닝 무대 리허설을 위해 일찍 나왔다가, 지금은 다 마치고 팀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해자는 왜 안 오냐.”

한율은 대본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원카운트는 3부 공연이라 늦게 올 거야.”

원카운트는 어제 전세기에 함께 타지 않았다. 듣기론 컴백 준비로 한창 바빠, 오늘 아침 비행기를 탔다고.

“한율 씨.”

RMMA 총연출을 맡은 <락뮤닷> PD가 한율을 불렀다.

“네.”

한율이 PD, 스태프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길우성과 하신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 음료수를 마셨다.

“쟨 오늘 리허설 끝날 때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지? 힘들겠다.”

“그거 아냐? 써한, 영어 대본까지 다 외웠다.”

“히익. 쟤 학교 다닐 때도 공부 잘했지?”

“성적은 별로. 시험을 아주 시원하게 포기했거든. 그나저나 너 운전면허 아직도….”

“말하지 마.”

“운전 연습용으로 차 빌려주거나 옆에서 가르쳐주는 사람 없어?”

하신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응….”

다른 팀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던 조유찬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우성아, 여기는 추우니까 대기실에 가서 따뜻하게 있자. 하신 씨도 같이요.”

“그럼 써한 혼자 남잖아요.”

“내가 있을 거니까 괜찮아. 가자. 가서 밥도 먹어야지.”

조유찬이 등을 토닥거렸다. 리허설을 하면서 흘린 땀이 식어 춥기도 해, 길우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넹.”

한율은 길우성과 하신이 이동하는 걸 힐끗 보고선 다시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아이허니의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어제 이런저런 소란이 있었지만, 6년 차는 6년 차. 아이허니는 큰 실수 없이 리허설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갔다.

사이드 스테이지. 아이허니의 노래가 끝나기 전부터 카메라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던 한율은,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자 망설임 없이 큐카드에 적힌 멘트를 했다. 한국어에 이어 영어로도.

뮤닷 를 통해 데뷔한 IOMU 멤버들이 한율을 보며 감탄했다.

“한율 선배님 진행 정말 여유롭게 잘하신다. 목소리도 좋고 발음이랑 딜리버리도 장난 아니야.”

“큐카드도 전혀 안 보시는데? 시선도 프롬프터가 아니라 카메라랑 객석으로만 향하잖아. 진짜 멋있다.”

“영어도 대박. 눈 감고 들으면 현지인이라고 착각할 정도야.”

한율과 같은 WB래빗 소속 멤버들은 어깨를 으쓱이며 우쭐거렸다. 한 명은 한때 한율과 열애설이 터졌던 김서우였다.

최초로 열애설 의혹을 제기한 사이버 렉카가 얼마 안 가 망상으로 짜깁기한 거짓이었다며 공식 사과했지만, 그래도 한율을 언급하는 데에 위축될 법도 한데 김서우는 당당하게 자랑했다.

“우리 회사 선배님이십니다. 엣헴.”

“좋겠당.”

“쟤들은 좋겠다.”

IOMU와 조금 떨어진 곳. 퍼플아워의 송의연이 그들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하곤 진은수를 돌아보았다.

“별걱정 없어 보여서. 서로 사이도 좋아 보이고. 그렇지?”

“…….”

“그러기에 내가 유린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 느낌도 별로고, 소문대로 남자도 밝히고. 생각 안 나? 작년 연말에 루아 언니가 그랬잖아.”

바로 곁에 스타일리스트들이 있었지만 송의연은 거침없었다.

“유린이 언니한테 사람 보는 눈 좀 키워야겠다고 말했다고. 그게 설마 그런 뜻이었을 줄이야. 그때부터 이미….”

“그만해.”

“진은수 넌 속도 없냐? 설마 루아 언니랑 사귀는 줄 모르고 나 씨랑 만났다는 그 말을 믿는 건 아니지?”

“나, 네가 내 폰으로 유린 선배님이랑 통화한 거 들었어.”

“…어? 무슨… 통화?”

RMMA 스태프가 큰소리로 외치며 지나갔다.

“퍼플아워, 이동할게요!”

진은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송의연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올해 2월 14일, <뮤직센터> MC 대기실에서 나한테 걸려온 전화 멋대로 받았었잖아. 내가 좀 멍청하고 착해서 받아주니까,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

놀라서 한 걸음 물러나는 송의연.

『우리 은수 언니가 좀 멍청하고 착해서 받아주니까 아무것도 모른다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유린과 통화할 때 자신이 했던 말인 까닭이었다.

진은수는 눈물이 올라올까, 미간을 찡그린 채 입가를 올렸다. 가뜩이나 속상하고 혼란스러운데 너까지 그러지 마.

“다음엔 통화 녹음 표시가 떴는지 잘 확인하고 받아, 의연아.”

그러곤 다른 멤버들과 스태프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송의연은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다가 어이없는 웃음을 뱉었다. …하.

‘그럼 그걸 알면서도 여태껏 말을 안 했던 거야? 진은수 쟤 인내심 대박이네.’

아침부터 시작된 RMMA 리허설은 저녁이 되어야 겨우 끝났다. 거의 온종일 서서 시끄러운 음악 소리, 인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스태프들의 목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한율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여기에 어스래빗 무대에 오르기까지.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그리고 온종일 공연장, 그것도 주로 무대에 있다 보니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돌들의 행동과 팀 분위기,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가.

“원카운트는 금방이라도 싸움 날 것처럼 분위기가 살벌하더라.”

어스래빗이 묵는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 안. 버스엔 기사를 제외하고 한율과 조유찬, 경호원뿐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몇 시간 전 리허설을 마친 뒤 먼저 호텔로 돌아갔다.

“네.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아림이 RMMA랑 잘 안 맞나 봐. 3년 전 RMMA 땐 히아신스 라움이랑 블블 티스트 열애설이 터져서 히아신스가 급히 귀국했었잖아. 작년엔 나기혁이 스태프로 위장하고 들어온 수상한 사생 스토커를 추격했었고. 그땐 무사히 잡아서 칭찬받았지만… 어쨌든.”

그게 벌써 1년 전이구나.

한율은 길우성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우유팩 사건 패드립 가해자였던 김철영을 떠올렸다. 당시 계나리를 끌어내는 미끼로 사용하고자, 한율은 그가 길우성을 향해 가진 악의와 피해망상을 교묘히 증폭시켰다. 그리고 김철영은 스스로 RMMA 공연 업체 측 알바생의 출입증을 훔쳐 들어왔었다.

“시간 참 빠르네요.”

“그러게. 저녁은 어떻게 할래? 먹고 싶은 거 있어?”

“불고기?”

“OK.”

호텔에 도착하자, 매니저 윤승우가 불고기 도시락과 음료가 담긴 봉투를 한율에게 내밀었다.

“오늘 수고했어, 한율아.”

“고마워요, 형.”

객실은 한 명씩 사용하게 되어, 한율은 들어가자마자 외투부터 벗곤 침대에 편히 드러누웠다. 그리고 잠시 멍하니 꺼진 TV를 보다가 다시 일어났다.

‘일단 씻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몸을 담가 느긋하게 목욕을 즐기고 나왔을 땐 어느새 밤 10시. TV를 켜놓은 채 식은 도시락을 먹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온종일 안 본 사이, 새로운 기사와 가십거리로 가득 채워진 포털사이트.

[인기 남자 아이돌 A씨 양다리 의혹에 팬심 술렁]

굳이 클릭하지 않아도 누구 이야기인지 알 것 같은 연예 기사. 그래도 심심해서 클릭해보았다.

내용보단 베댓이 눈에 들어왔다.

-님들 [<2019 RMMA in JAPAN> 스페셜 비하인드 ‘나의 친구를 찾아서’] 이 너튜브 영상 보셈. ㅅㅎㅇ 빼박 알고 있었음. 이 댓글은 성지가 될 것이다.

ㄴㅆ소름;

ㄴ원래 저 바닥에서 바람둥이로 유명했나 본데?

ㄴㄹㅇㅇ:사탕 두 개 필요할 것 같은데/ㅅㅎㅇ:아니에요. 사탕 세 개는 들고 가셔야 해요.<<<< 확실한 건 둘 다 ㄴㄱㅎ이 바람피우는 거 알고 있었단 거고, ㅅㅎㅇ이 봤을 땐 ㄹㅇ랑 ㅇㄹ말고 한 명 더 있었단 거임

ㄴ와씨; 서한율이 A씨라는 줄 알았잖아요ㅜㅜ

ㄴ저도 순간 심장 철렁;;;

ㄴ저 말 들었을 때 ㄴ모씨 표정 관리 안 됐던 이유가ㅋㅋㅋㅋ...

ㄴ“저는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이 바닥의 숨은 인싸 선배님이십니다.” 방송에서 이렇게 대놓고 멕였는데 왜 아무도 몰랐지?

ㄴ것도 웃으면서ㅋㅋㅋ

ㄴㅅㅎㅇ이랑 ㄴㄱㅎ 친하지 않나? 끼리끼리라서 농담한 것일지도 모름. 언젠가 터지겠구나 생각하고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이지

ㄴ안 친해요.

ㄴ윗윗댓 뇌피셜은 누구를 위한 뇌피셜임?

ㄴ당시 양다리 혹은 세다리로 사귄 게 ㄹㅇ랑 ㅇㄹ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은 왜 안 함?

ㄴ으...

ㄴ달리 생각하면 바람피우는 거 알면서도 입 다물어줬다는 거 아님?

ㄴ엮이기 싫었겠죠.

ㄴ방송에서 대놓고 사탕 2개, 3개 운운하면서 멕였는데 입을 다물어준거라고요? ㄴㄱㅎ이랑 엮였던 여돌 중 눈치 빠른 애들은 바로 알아들었겠는데?

ㄴ요즘 세상엔 ‘님 남친 바람 피워요.’ 이렇게 말하는 것도 오지랖이고 끼어든 사람만 피곤해짐. ㅅㅎㅇ이 한가한 것도 아니고

ㄴ다 모르겠고 A씨 진짜 부럽다...

ㄴ괜히 동물의 왕국이 아녀

ㄴ이번 RMMA는 꼭 본방사수해야지^^ 생방 중에 치정싸움 거하게 벌어지면 개재밌을듯

ㄴㅋㅋㅋㅋㅋㅋㅋ

먹고 힘내

다들 신나 보이네.

한율은 다른 기사를 클릭했다.

다음 날 아침. RMMA이 열리는 공연장 주변엔 벌써 많은 사람이 모였다. 출연팀의 굿즈를 판매하는 팝업스토어 앞엔 줄이 길게 늘어섰고,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래를 부르거나 사진을 찍는 팬덤도 보였다.

버스 안에서 그 광경을 보던 박가람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어스래빗 공연은 2부 마지막이지만, 한율이 MC를 맡은 데다 길우성도 오프닝 무대에 서게 되어 다 함께 일찍 나왔다.

“날씨도 추운데, 우리 응원해주려고 이렇게 모인 거야?”

“그런 멘트는 단독 콘서트 때 합시다.”

“오늘 RMMA 관객이 4만 명이지?”

“다음엔 이렇게 큰 돔구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해보자. 일해라, 어스래빗! 노력해라, 어스래빗!”

지난번 월드투어로 일본에서 공연했을 땐 만 명, 만 오 천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을 모두 매진시켰다. 그러니 이대로 승승장구한다면 언젠가 4만 명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내년 7월. 게이트만 열리지 않는다면.

“하하…. 홧팅.”

길우성의 말에 소리 내어 웃은 유호의 눈빛이 씁쓸하게 변했다. 박가람도 목 뒤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홧팅.”

“…뭐야. 왜 갑자기 텐션이 처지는데.”

“아침을 안 먹었더니 힘이 없당.”

부스럭. 라이언이 가방에서 에너지 바를 꺼내 박가람에게 내밀었다.

“이거 먹고 힘내, 가람.”

박가람이 감동한 얼굴로 덥석 받았다.

“웬일이냐, 라이언. 네가 먹을 걸 다…. 너 이거 언제 산 거야.”

“유통기한 아직 남았어. 먹어도 괜찮아.”

공연장 안에 마련된 어스래빗 대기실에 도착. 한율은 짐을 풀자마자 무대가 설치된 곳으로 나갔다. PD를 비롯한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백스테이지로 이동했다.

올해 RMMA는 팀에서 메인 댄서를 맡은 아이돌 다섯 명이 메인과 사이드, 돌출무대에서 멋있는 퍼포먼스로 시작을 알릴 예정이었다.

한율이 간 메인 백스테이지엔 걸그룹 퍼플아워와 IOMU의 메인 댄서가 긴장한 얼굴로 대기 중이었다. 그다음 공연 무대 순서인 신인 아이돌그룹도. 길우성과 하신은 사이드 스테이지에서 등장할 예정이라 여기에선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후배들과 인사를 나눈 한율은 인이어와 마이크 팩을 착용하곤 가볍게 입을 풀었다. 낯익은 뮤닷 측 스태프가 다가와 격려했다.

“어제처럼 편하게 하시면 될 것 같아요. 홧팅.”

“네.”

힐끗힐끗. 이쪽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

“……?”

고개를 돌리자, 궁금한 게 많은 얼굴로 한율을 살피던 퍼플아워 멤버가 휙 시선을 피했다.

라이언과 한율이 원카운트 나기혁의 바람을 작년부터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도는 상황. 그에 관해 묻고 싶은 걸까.

누군가 외쳤다.

“최종 리허설 5분 전!”

한율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이것저것 메모한 큐시트와 큐카드를 확인했다.

한편, 한율과 길우성을 제외한 멤버들은 대기실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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