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 후련하다!”
백스테이지로 돌아온 멤버들은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백업 댄서들과 수고했단 의미로 포옹하고 손을 맞부딪쳤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수고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멋있었다!”
“감사합니다!”
3부 오프닝을 열 예정인 스타믹스 멤버들과도 인사를 나눈 뒤, 한율은 임시 탈의실에서 새로운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한율이 이번 RMMA MC를 맡게 되었다고 알려진 직후 여기저기에서 협찬 연락이 들어왔는데, 그중에서 회사와 한율이 고심해서 고른 두 번째 옷이었다.
“나중에 보자, 한율아!”
“홧팅!”
“네!”
피어싱을 제거하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한율이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동안, 스타믹스가 RMMA 3부를 열었다.
한율은 최소한의 조명만 켜진 어둑한 통로를 통해 사이드 스테이지 뒤로 이동했다. 그곳엔 다음 공연 순서인 원카운트의 멤버, 나기혁과 원카운트의 리더가 대기하고 있었다.
꾸벅 인사하자 원카운트 리더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
나기혁은 뚱한 얼굴로 한율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곤, 한율의 팔을 툭 쳤다. 음악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진 않았지만, 그의 입 모양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중에 보자.’
한율은 어깨를 으쓱이곤 계단을 올랐다.
스타믹스의 공연이 끝났다. 한율은 불과 몇 분 전, 언제 무대를 신나게 활보했냐는 것처럼 태연하게 진행했다. 이제 남은 수상 부문과 공연할 팀을 언급하고, RMMA를 끝까지 시청해 달라고 당부했다.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 3개 국어로.
-토종 한국인의 원어민 수준 영어ㄷㄷㄷ
-말하는 데에 머뭇거림이나 막힘이 없네 역시 배우 클라쓰
-아까까지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한 애 맞음?
-피부 개부럽다ㅜㅜ 아까 땀 많이 흘리고 메이크업 수정할 시간도 별로 없었을 텐데 환한 조명 아래에서 클로즈업해도 굴욕 하나 없어
[…퍼포먼스상 시상은 배우 이준환 님과 감석 감독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
시상자 등장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한율은 머리 위 조명이 꺼지고 나서야 사이드 스테이지에서 내려갔다.
척. 아래에 있던 원카운트 리더가 잘했다는 듯 엄지를 치켜세웠다. 한율은 고맙다는 의미로 가볍게 꾸벅인 후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짤막한 인사와 소감, 대화를 나눈 시상자들이 큐카드를 든다.
[<2020 RMMA in JAPAN> 퍼포먼스 상. 우선 여자 아이돌그룹 퍼포먼스상 시상이 있겠습니다. 후보팀부터 보실까요?]
준비된 후보 영상이 흘러나왔다. 두 손을 꼭 모으고 간절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던 아이허니 멤버, 서래의 모습도.
[……?!]
영상이 끝난 직후 자신의 얼굴이 전광판에 나오자 화들짝 놀란다. 카메라는 다시 시상자들을 비췄다.
[<2020 RMMA in JAPAN> 여자 아이돌그룹 퍼포먼스상.]
[축하합니다! …히아신스!]
히아신스 멤버들이 감격한 얼굴로 무대로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는 히아신스 되겠습니다!]
히아신스 멤버들의 수상 소감이 끝나고, 이어서 남자 아이돌그룹 퍼포먼스상 시상. 후보엔 스카이러너와 원카운트, 그리고 어스래빗도 포함되었다.
올해도 월드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며 인지도가 훌쩍 뛰어오른 어스래빗. 그러나 두 대형기획사 소속인 스카이러너와 원카운트는 ‘소속사 내리사랑 팬덤’의 힘을 등에 진데다, 방송 출연 기회도 많아 대중의 인지도가 어스래빗보다 높았다.
‘하지만 해외 팬덤은 우리가 조금 더 커.’
과연 어느 팀이 받게 될까.
[<2020 RMMA in JAPAN> 남자 아이돌그룹 퍼포먼스상.]
[축하합니다!]
시상자가 힘차게 외쳤다.
[어스래빗!]
대형 전광판에 입을 쩍 벌리고 놀란 표정을 짓는 어스래빗 멤버들의 모습이 잡혔다.
“축하해!”
원카운트 리더가 한율의 등을 두드리며 크게 외쳤다. 나기혁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웃으며 손뼉 쳤다. 조유찬은 얼른 올라가라는 듯 한율을 무대 계단 쪽으로 가볍게 밀었다.
시상자가 아티스트 석에서 올라오는 어스래빗 멤버들, 그리고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사이드 스테이지에서 올라오는 한율을 보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메라도 양쪽을 번갈아 잡았다.
[정말 축하합니다, 어스래빗.]
어스래빗 멤버들은 메인 무대에서 만나 트로피와 꽃다발을 받았다. 시상자들과도 악수하는데, 초면인 감석 감독은 한율과 아주 친한 사이인 것처럼 가볍게 포옹했다.
“다음엔 촬영장에서 만나면 좋겠네요.”
한율은 그에게 꾸벅 인사하곤, 멤버들과 나란히 일렬로 섰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RMMA에 문제가 발생한 건, 수상 소감과 감사 인사를 전하고 함께 아티스트 석 방향으로 퇴장할 때였다.
흠칫.
“……?!”
돌연 길우성이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었다. 조명이 설치된 구조물을 넘어, 돔구장 지붕 밖에서 불쾌한 소리가 내려왔다.
…드득.
그 소리는 한율에게도 닿았다.
“…….”
돔구장을 가득 채운 4만 명의 인기척과 아직 그치지 않은 박수, 그리고 인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스태프의 지시와 커다란 음악 소리.
방금 귀에 잡힌 전조 증상은 대체 언제부터 울리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지금부터 시작인가?
한율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어질 원카운트 공연을 위해 조명이 차례대로 꺼진다.
무대에서 완전히 내려오자, 멤버들은 한율의 팔과 등을 두드렸다. 네 덕에 상 받은 거야. 그동안 고생 많았다. 다시 MC로 돌아가는 거지? 수고해.
이런 뜻이 담긴 따뜻한 눈빛과 미소를 보내며.
…툭툭. 불안한 표정을 지었던 길우성도 웃으면서 한율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조금 전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려는 모양이었다.
‘아주 잠깐이었나?’
그들 머리 위 조명이 꺼졌다. 한율은 고개를 돌려, 사이드 스테이지에 올라온 원카운트 나기혁의 실루엣을 보았다.
원카운트의 노래 전주가 흘러나왔다.
쿵, 쿵! 그긍! 드드득…!
“……!”
돔구장을 가득 울리는 음악과 하늘에서 크게 내려오는 이질적인 소음이 섞였다.
무대 조명이 환해졌다.
……?!
관객들과 스태프들, 아티스트석에 있던 아이돌들은 놀라 술렁거렸다.
[……허억.]
춤을 추기 시작하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제 머리를 감싼 채 고통스러운 얼굴로 주저앉는 나기혁을 보고.
그런 증상을 보이는 이는 나기혁뿐만이 아니었다.
“은수야…!”
퍼플아워의 진은수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듯, 고통스럽게 헐떡거리며 쓰러지는 걸 옆에 있던 루아가 안았다.
“은수야, 왜 그래! 진은수…!”
덥석! 한율은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상체를 수그리며 괴로워하는 길우성을 잡았다. 뒤늦게 길우성의 상태도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린 멤버들이 그를 살폈다.
“야, 길우성! 왜 그래!”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 있던 사람들을 제외하곤, 당장 대다수 눈엔 무대 위 나기혁에게만 이상이 생긴 걸로 보였을 것이다. 돌발상황이 벌어졌으나, 원카운트 멤버들은 침착하게 무대를 계속했다. 나기혁은 그쪽을 향한 카메라 불이 꺼진 틈을 타, 스태프들이 황급히 올라가 부축해 아래로 데려갔다.
인이어에서 스태프의 지시가 흘러나왔다.
[한율 씨, 메인 백스테이지로 돌아와 대기해주세요.]
…하…. 지난번보다 조금 더 길게. 그러나 곧 정상적으로 호흡하며 고개를 드는 길우성. 위를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같은 증상을 겼었으니, 충분히 무서울 법도 했다.
[한율 씨?]
한율은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호와 박가람을 향해 괜찮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길우성을 멤버들에게 맡긴 채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그극. 하늘에서 내려오던 불쾌한 소음이 음악에 묻히다 사라졌다.
나기혁은 두 번째 곡이 시작되기 직전 무대로 복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꿋꿋하게 공연에 임했다.
* * *
<2020 RMMA in JAPAN>이 끝나고 어스래빗 대기실.
“대체 왜 말 안 했습니까.”
K-POP 최고 음악 시상식이라 불리는 RMMA에서 세 번째 수상, 그것도 이번엔 의미 있는 상을 받았다는 축하를 받기도 전, 멤버들은 오 팀장에게 혼났다.
“우성이, 11월 30일 증상자였다는 거.”
“정부가 비밀 실험을 한다는 둥 이런저런 무서운 이야기가 많아서 제가 비밀로 해달라고 했어요, 팀장님. 멤버들은 잘못 없어요….”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까지 말 안 하면 어떡해. 만에 하나 더 위험한 증상이 나타나서 제대로 된 처치를 못 받으면 어쩌려고. 우리에겐 미지의 증상처럼 보여도, 나라에선 적절한 방책을 갖고 있거나 연구 중일지도 모르잖아.”
길우성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게 아니라 너 자신한테 미안해해야지. 몸에 이상이 생겼는데 왜 무섭다고 외면해. 네 몸인데.”
끔뻑끔뻑. 길우성이 고개를 들었다가 스스로 제 몸을 안고 토닥거렸다.
“미안.”
…하아. 오 팀장은 조용히 한숨을 쉬곤, 입가를 올리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어쨌든 올해 RMMA 남자 아이돌그룹 퍼포먼스상 수상, 정말 축하합니다. 회사의 부족한 서포트에도 열심히 노력해 성과를 이룬 여러분이 자랑스럽네요.”
그제야 멤버들도 하나둘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우리 좋은 상 탔다아!”
퍼포먼스상은 2년 전 소리구름어워즈에서도 받았으나, 기쁨은 이번이 더 큰 모양이었다. RMMA도 시상식으로서 권위가 점점 추락 중이기는 하지만, 소리구름어워즈에 비해선 양반이었으므로. 여기에 대형기획사 아이돌 두 팀을 제치고 받았으니.
오 팀장이 길우성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등록부터 하고, 검사받자.”
길우성이 울상을 지었다.
“피 검사 이미 받았는뎅….”
한편, 인터넷에선 난리가 났다.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 메인.
[<2020 RMMA> 원카운트 나기혁, 귀 틀어막은 채 호흡 곤란… ‘1130’과 동일 증상 보여]
온라인 커뮤니티.
[제목: 원카운트 나기혁 말고]
[퍼플아워 진은수랑 어스래빗 길우성도 그 시간에 똑같이 비슷한 증상 보임
(사진)
(사진)
(사진)]
-같은 시간에 RMMA 공연장이랑 좀 떨어진 하늘에서 미스터리 홀 비슷한 형체가 흐릿하게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함
ㄴ미친 개무서워ㄷㄷㄷ
그땐 죽을지도 몰라
-[상대가 나기혁이라 그런가. 좋은 향기가 나긴 했는데, 썩 기분 좋진 않더라.]
호텔 객실. 한율은 침대에 편히 앉은 채 스타믹스 JE와 통화 중이었다. 그는 오늘 나기혁에게서 진은수, 길우성에게서 났던 똑같은 향기를 맡았다고 했다.
-[그나저나 오늘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미스터리 홀은… 네가 한 게 아니란 거지?]
“네. 저도 놀랐어요. ‘그날’이 오기 전에 게이트의 형태가 목격됐다는 소린 들은 적이 없었거든요.”
-[이건 내 생각인데…. 사람들이 네가 만든 미스터리 홀을 인상 깊게 접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저거 혹시?’ 이러고 주시한 거지.]
“그럴 수도 있겠네요.”
JE와 통화를 마친 뒤엔 너튜브를 살폈다. 오늘 RMMA에서 예비 각성자 아이돌 셋이 같은 시각, 같은 증상을 겪는 걸 촬영한 영상이 여럿 올라온 상태였다.
‘길우성이 각성자란 사실은 웬만하면 숨기고 싶었는데.’
1130 증상자들이 게이트가 열린 뒤 능력을 각성한다면, 미리 신원을 파악했던 국가는 필시 철저한 관리에 들어가고 능력을 조사, 이용하려 들 게 뻔하니 말이다.
‘여차하면 인간이 접근하기 힘든 지역에다 결계를 치고 가둬버리면 되지만.’
포털사이트 실검엔 [2020 RMMA]를 비롯해 [RMMA 나기혁], [RMMA 서한율], [RMMA 길우성], [RMMA 진은수]가 올라와 있었다.
이중 한율이 실검에 오른 건, MC를 잘해서.
[<2020 RMMA> 첫 MC 데뷔 서한율, 반응 호평 일색!]
-나 얘 원래 아이돌인 건 알고 있었는데 별 관심 없어서 노래 한 번도 들은 적 없거든. 그런데 이번에 겸사겸사 봤는데bbb
-???: 큐카드는 손이 허전해서 들었다.
ㄴㅋㅋㅋㅋㅋ
-진짜 버벅거리거나 표정 어색하거나 그런 거 없이 여유롭게 잘하더라
ㄴRMMA MC 연기한다는 생각으로 잘한 것일지도 모름
-서한율 쓰리피스 정장이랑 구두 어디 건지 아시는 분? 첫 번째랑 두 번째 갈아입은 옷 둘 다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ㄴ둘 다 맞춤이겠죠
ㄴ우린 이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과 비율이다.
ㄴ맞춤이라도 이름은 있을 거 아냐
그러나 조금 전까지 메인에 있던 나기혁의 기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RMMA 리뷰 기사 어디에도 나기혁과 길우성, 진은수가 이상 증상을 나타냈다는 내용 또한 없었다.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음모론과 집단 패닉을 경계해, 위에서 지시를 내린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