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해 보이는 평판.
찬형은 아직 [읽지 않음] 표시가 사라지지 않는 톡창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그로부터 20여 분 뒤. 기다리던 답장이 왔다.
-[지금 막 헤어졌어. 그런데...]
-[그 사람이 은수한테 이거 선물이라고 줬거든. 받아도 괜찮은 걸까?]
-[막 비싼 건 아니겠지?]
-[(사진)]
호수가 보낸 사진 속엔, 현재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그래픽카드 상자가 놓여있었다.
찬형은 잠시 멍해졌다.
‘…대체 무슨 대화가 오갔던 거지?’
키에에엑
“정말 미안해.”
“…….”
“정말 미안해, 은수야.”
진은수는 말없이 앞에 앉은 루아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이우그룹 사람들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루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직접 얼굴을 보며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고. 그래서 외출하기 싫다고 말했더니, 그녀가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정말로 올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혼자 오해했다곤 해도 루아는 진은수를 때렸다. 그걸 본 호수는 루아의 머리채를 잡았고. 그러니 이 집에 오는 게 무서웠을 법도 하건만.
“사과보단 왜 그랬는지 이유를 듣고 싶어요, 언니. 자극적인 단서만 툭툭 던지면서 저 혼자 추측하게 만들지 마시고요. 솔직히… 그동안 언니의 행동, 태도 때문에 많이 피곤했거든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건 없기에, 진은수는 담담하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데뷔 전부터 지금까지. 이 시간에도 퍼플아워를 위해 일하는 수많은 사람. 그리고 팬들. 그분들의 노고와 마음을 배신하기 싫어서, 적어도 내 몫을 하려고 참았던 거지, 언니한테 기대가 있어서, 언니가 좋아서 참은 게 아니에요. 언니 한 사람 때문에 그걸 다 등져야 할 정도로, 언니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루아가 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응.”
“지금도 미스터리 홀이랑 관련된 소문 때문에, 언니 마음 편해지려고 사과하러 왔구나. 이런 생각만 들어요. 제가 왜 언니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됐을까요?”
“…미안해, 은수야. 내가 진짜 미쳤었나 봐. 돌았었나 봐….”
흐윽. 루아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처음엔 질투였어. 네가 호수 언니 동생이라서…. 회사 사람들 모두 네가 호수 언니 동생이라서 잘해주는구나, 더 칭찬해주고 아껴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싶었는데, 네가 정말 너무 잘해서… 더 샘이 났었어….”
진은수는 말없이 루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울음 때문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녀 스스로 이야기를 그칠 때까지 조용히.
들으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루아 언니도 겁이 덜컥 난 거구나.’
밉기는 했지만,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나를 싫어한 건 아니구나.
“…그래서, 은수 네가 날 미워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네가 유린을 도와줬다고 여겼어. 내가 나랑 네 사이를 그렇게 만들었단 것도 깨닫지 못하고… 나기혁 그 새끼가 뭐라고 한심하게…….”
* * *
14일. 월요일이 되자 길우성은 1130 증상자 신고 등록을 마친 뒤, 부모님과 함께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몇 시간 동안 여러 검사를 받아서 그런지, 그는 아주 녹초가 돼서 돌아왔다.
“내가 아주 건강하다는 사실만 확인받으러 갔던 것 같다….”
“그럼 다행인 거 아냐?”
포털사이트 실검 1위에 올라간 [미스터리홀 지도]는 시간이 지나도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우그룹과 정원그룹에 압박을 가했다. 아무리 협박받아 방공시설을 지었어도, 지금껏 그 해커에 대해 따로 알아낸 사실이 전혀 없진 않을 거 아니냐. 빨리 정보를 내놓아라.
-이우그룹에서 1130 증상자 따로 조사하고 있다던데. 이놈들 분명히 아는 거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음? 지도에 표시된 곳은 서울인데, 왜 방공시설을 경주랑 수원에다 지으라고 한 거지?
ㄴ협박범이랑 지도 뿌린 애가 동일 인물이면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ㄴ서울 땅값 ㅂㅅ아
ㄴ아 땅값ㅋㅋㅋ
재난 상황 대비 물품 수요는 급격히 커졌다. 빨간색 점으로 미스터리 홀이 표시된 해외 어느 지역에서는, 마을 전체가 이주 준비 중이라는 뉴스도 떴다.
사실은 두 가구가 예정된 이사를 진행한 걸 해당 지역 너튜버가 조회 수를 끌기 위해 부풀린 것이었지만, 그 거짓 기사는 반나절 내내 포털사이트 메인에서 이목을 끌었다.
“해외에선 사재기 현상이 일어나는 지역도 있대. 이것 봐. 마트 진열대가 텅텅 비었어.”
18일 금요일 오후 6시. 어스래빗과 크리스탈 래빗의 ‘하양 토끼 까망 토끼’의 네 번째 디지털 싱글 <바다와 산타토끼> 음원과 M/V가 공개되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M/V 리액션 촬영을 위해, 샵에서 가볍게 단장을 받고 회사 2층 회의실에 모였다.
“우리도 비상식량 잔뜩 사둬야 하나? 즉석식품 같은 거.”
“즉석식품, 생각보다 유통기한 별로 안 길더라. 라면도 그렇고.”
“알아본 거야?”
“사람들이 집에다 비상식량을 쌓아둬야 한다길래….”
“나 복숭아 통조림 잔뜩 살래.”
잡담은 콘텐츠 촬영 스태프들이 들어오며 중단되었다. 멤버들은 커다란 노트북 앞에 모여 앉아, <바다와 산타토끼> M/V 완성본을 처음 본다며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M/V 촬영 당시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떠들고.
“11월 24일에 촬영했으니까… 와. 한 달도 안 지났네.”
“그때 스태프분들이 난방을 아주 빵빵하게 틀어주셔서, 진짜 더웠던 걸로 기억해.”
“맞아, 맞아.”
“그럼, 재생해보겠습니다. …오, 우리 회사 로고. 언제봐도 반반 토끼가 귀엽네요.”
리액션 촬영은 20여 분 만에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M/V를 볼 때 사용한 노트북은 회사 것, 설치된 카메라는 콘텐츠 제작 업체 물건이라 멤버들은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눈 뒤 그대로 회의실을 나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시작 아니었어? 서한율 네가 대관료 후원한 연극.”
“네. 지금쯤 2회차 공연 끝났을 것 같네요.”
“안 가봐도 돼?”
“다음 주중에 가려고요. 오늘 금요일이라 대학로에 사람도 많을 것 같고.”
“나도 연극이 보고 싶구나, 친구야.”
대학병원에서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받았어도 여전히 불안할 텐데. 길우성은 이전처럼 실없이 굴었다.
“우아하게 문화생활을 즐긴 뒤, 우아하게 모금함에다 현금 봉투를 슈슉, 집어넣는 거지.”
“갈 때 같이 가든가.”
길우성이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엉.”
하지만 20일 이후, 과연 마음 편히 연극 관람을 할 수 있을지.
다음 날인 19일. 어스래빗이 광고 모델로 활동 중인 화장품 브랜드의 팬 사인회 이벤트가 있는 날.
“명색이 화장품 광고 모델인데, 오늘은 특히 더 피부가 반짝거려야지. 다들 피부과 예약했으니까….”
한율은 살며시 손을 들었다.
“전 안 가도 될 것 같은데요.”
이어서 유호와 박가람.
“저도요.”
“나도.”
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던 조유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샵에 갈 시간 되면 데리러 올게.”
그렇게 숙소엔 세 사람만 남았다.
후우. 유호가 천천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된다.”
바로 내일 새벽, 게이트 하나가 7월보다 훨씬 이르게 열린다. 그들은 오늘 밤 게이트가 열리는 장소로 가서 보호 결계를 친 뒤 지켜보기로 했다. 아직 마력을 쌓는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유호와 JE도 함께하기로 했다.
“어떤 괴물이 나올까?”
“나리 씨가 그러는데, 구동이처럼 작고 귀여운 마물을 상상하고 있다면 냉큼 머릿속에서 지우래. 그리고 게이트에서 나온 괴물들도 이곳이 낯설고 두려웠는지, 닥치는 대로 들이받아 공격하고 날뛰었다더라.”
“옥상에 가서 유동하도록 하죠.”
한율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 가지 걱정 때문에 집중이 잘 안 되겠지만, 이대로 시간을 죽이는 것보단 낫잖아요.”
유호와 박가람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어스래빗 멤버 다섯 명을 태우고 이동 중인 차 안. 가방을 뒤적거리던 차남석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요, 형.”
“응?”
“죄송한데 다시 숙소로 가면 안 될까요? 지갑을 놓고 왔어요.”
“돈 걱정은 안 해도 돼, 남석아.”
“나오는 김에 은행에 잠깐 들르려고 했거든요.”
“그래.”
이건우와 길우성이 반응을 보였다.
“나도 이참에 은행 가봐야겠다.”
“나도. 엄마가 적금 통장 만들라고 했는데, 폰으로 하는 건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주택 청약 통장은 만들었어?”
“어릴 때 아빠가 내 이름으로 만들어준 거 있어. 그런데 그건 뭐에 쓰는 거야?”
“청약할 때 쓰지?”
“청약이 뭔데?”
“모르면 검색을 해보자, 막내야.”
“…더 모르겠어.”
차는 동네 한 바퀴를 돌아 어스래빗 숙소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남석만 내려준 뒤 다시 움직였다. 가만히 있으면 사생들이 차를 두드리며 소란을 피우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갑을 그 가방에 뒀던가?’
숙소 안으로 들어간 차남석은 거실을 가로질러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다 의아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
서한율과 박가람, 유호 세 사람과 달냥이 남아있을 텐데,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박가람과 유호의 방이 2층이라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뭔가 이상한데.’
열려 있는 서한율의 방문 안쪽을 들여다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세 사람.’
한밤중 옥상에서 명상하며, 혹시 사이비 종교에 빠진 건 아닐까 걱정하게 만든 이들이었다. 참 공교롭게도.
‘설마.’
차남석은 발소리를 죽이곤 계단을 밟았다.
그때였다.
므앙? 달냥이 사뿐사뿐 내려오더니 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다. 왼쪽으로 피해서 가려 하자 함께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가려 하자 오른쪽으로.
“…….”
그래봤자 고양이. 차남석은 달냥을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므아아앙. 달냥이 놓으라는 듯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차남석의 얼굴을 앞발로 마구 밀었다.
“야, 달냥. 야, 얼굴은 안돼.”
므아앙.
하는 수 없이 달냥을 내려놓았다. 므아앙! 달냥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한밤중에 우다다 하던 것처럼 기운이 넘치네. 차남석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계단을 올라갔다.
“형? 아까 멤버들이랑 같이 나갔던 거 아니었어요?”
3층. 운동기구에 앉아 손을 풀던 한율과 마주쳤다. 차남석은 옥상이 환히 보이는 창을 힐끗했다. 이불 빨래 건조대에다 이불을 너는 박가람의 모습이 보였다.
앞서 올라온 달냥은 캣휠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아…. 지갑을 놓고 가서 다시 왔어. 그런데 너무 조용하길래 뭐하나 싶어서. 호 형은?”
“방에 있을 거예요.”
“아아. 넌 운동하게?”
“네. 짧게 고강도로 땀 좀 빼려고요.”
“다치지 않게 조심해.”
“네. 나중에 봐요, 형.”
차남석은 리드미컬하게 이불을 두드리는 박가람을 힐끗하곤 계단을 내려갔다.
…후. 한율은 그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차가 온다며 알려준 까마귀와 시간을 끌어준 달냥이 아니었다면, 또 사이비 종교로 오해할 만한 모습을 보일 뻔했다.
“뭐야? 누가 왔던 거야?”
옥상으로 나가자, 이불에 펀치를 날리던 박가람이 물었다.
“남석이 형이요.”
“또 그 녀석인가! 원, 투!”
퍽퍽.
“…….”
그날 밤, 공사가 진행 중인 한 건물 앞.
새카만 차량이 그 앞에 잠시 멈췄다가 슬슬 이동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떨어진 골목에 주차되었다.
유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바로 근처에 다른 빌딩도 줄줄이 늘어섰고, 모퉁이만 돌면 바로 도로라서 정말 위험하겠는데?”
이해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그는 이우그룹이 뒤를 밟을까, 아침부터 나 홀로 첩보 작전을 펼치듯이 움직이다가 조금 전에 합류했다.
“도로로 뛰쳐나간 괴물들 때문에 연쇄 추돌이라도 나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