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박가람이 가늘게 뜬 시선으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중요한 날에 교장이란 작자는 대체 어디 가서 뭐 하길래 코빼기도 안 비춰?”
“바쁜가 보죠.”
태연히 대답한 한율은 모두에게 새카만 마스크와 모자를 나눠주었다.
“다들 보호 마법이 새겨진 아이템은 잘 챙겼죠? 그럼 가요.”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새벽 4시.
달리는 차량도, 인적도 드문 서울 도심 한복판.
쩌적, 쩍…. 콰쾅!
검붉은 빛을 띤 거대한 게이트가 건물을 뭉그러뜨리며 나타나, 이형의 괴물들을 쏟아냈다.
키에에엑!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몇 시간 전.
마법 학교 일행은 공사 중인 건물로 들어갔다. 한겨울 밤인데다 창이 있어야 할 자리마다 뚫려있어 무척 추웠다.
“몇 년째 공사가 중단돼서 방치된 건물이에요. 그 덕에 교장 쌤이….”
허억. 5층까지 올라가자 앞장선 계나리의 숨이 거칠어졌다.
“운동 좀 할걸…. 후우, 교장 쌤이 여기 옥상에다 결계 제어 주문을 새겼어요.”
“제어 주문이요?”
“올라가서 설명해드릴게요.”
아무것도 없는 건물 옥상에 도착. 17층까지 걸어서 오른 터라, 다들 마스크와 모자를 벗고 한참 동안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아이고, 내 연골…. 내려갈 땐 또 어떡하냐….”
“아까, 공사용 엘리베이터… 후우, 보였는데….”
“그거 전기 끊겨서 작동 안 되는 것 같더라.”
“나리 씨, 괜찮아요?”
“아니요, 안 괜찮아요…. 욱, 토할 것 같아….”
어느 정도 진정된 후에서야 옥상 바닥에 새겨진 주문을 살폈다.
“이게 무슨 언어지? 외계언가?”
“고대 언어 중의 하나가 아닐까?”
“나 이런 거 게임에서 본 것 같아. 여기에 손대봐도 돼요?”
“네. 마력만 불어넣지 마세요. 바로 발동될 수 있거든요.”
박가람이 주문에다 살며시 손을 얹었다. 보기엔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작은 낙서였으나, 박가람은 곧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이거 대박이다. 형, 손만 살짝 대봐. 느낌 되게 이상해.”
유호가 그 옆에 쭈그려 앉아 따라서 손을 댔다. 그러곤 박가람처럼 놀란 눈으로 회수.
“잘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그렇지?”
박가람이 히죽 웃으며 한율에게 말했다.
“서한율아, 너도 와서 만져보렴.”
“됐어요.”
흐. 못나게 웃는 박가람의 얼굴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이미 네가 교장이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속아주는 거란다, 동생아.
계나리가 뒤를 가리켰다.
“게이트가 열리는 장소는 바로 이 뒤에 있는 건물 상공이에요. 여러분 혹시, 미국 뉴욕에 생겼던 게이트 생각나세요? 그땐 게이트와 일부 겹쳤던 전광판이나 건물에 아무 이상이 없었잖아요.”
“네. 마치 신기루처럼.”
“하지만 이번엔 달라요.”
“물리적인 영향을 준다는 거죠?”
“네. 그래서 보호 마법 결계를 준비하는 거고요. 게이트 생성 지점을 중심으로 다른 건물 옥상에도 결계석을 놨어요. 제가 이곳에서 마법을 발동시키면, 결계석이 서로 연결되면서 게이트를 통째로 감쌀 수 있는 마법 장막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계나리가 한율과 이해원, 박가람을 차례로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마력을 지닌 세 분이 결계석 앞을 지키셔야 해요.”
“그 말은… 다시 17층을 내려가야 한단 겁니까?!”
“박가람 넌 그게 더 충격이냐?”
“걱정하지 마세요. 바람으로 감싸 옮겨드릴게요.”
박가람이 울상을 지었다.
“저 고소공포증 있어요, 선생님…. 놀이기구도 못 타는데….”
“그럼 걸어서 내려가야지.”
“으으….”
괴로워하는 박가람을 향해 계나리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딱 한 번만 눈 꼭 감으면 돼요. 안전하게 옮겨드릴게.”
잠시 후. 어둑한 빌딩 상공에 볼품없는 비명이 작게 퍼졌다.
…으아으아!
새벽. 모의 훈련용 가짜 게이트 생성 5분 전.
한율은 결계석을 둔 곳 중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 홀로 있었다. 난간으로 가까이 가면 다른 일행이 환히 보였다. 무선 이어폰에서 계나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들 잘 들리시죠?]
-[네. 단체 통화는 처음이라 낯서네요.]
-[난 무전기 쓸 줄 알았어.]
-[번거롭게 무전기는. 핸드폰이 멀쩡히 잘 되는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
긴장한 계나리의 목소리에 잠시 정적.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징조가 보이는 즉시 결계를 발동시킬 거예요. 여러분은 지켜보다가, 제가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면 결계석에다 마력을 불어넣어 주세요. …그래야 할 지경까진 가지 않기를 바라지만.]
-[네.]
한율은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난간에서 서너 걸음 물러났다. 펼친 두 손에다 대기에 흐르는 자연의 마나를 응집,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 어루만지며 수식을 계산했다.
고개를 높이 든 한율의 눈이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사아아.
‘…전개.’
마법 시전 당사자, 웬만한 수준에 도달한 마법사가 아니라면 절대 눈으로 잡을 수 없는 마력의 흐름.
빙글빙글. 한율의 눈에 구체 형태로 회전하며 상공으로 날아가는 자그마한 응집체가 비쳤다. 목표 지점에 도착한 응집체는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내 시커멓게 물들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
그제야 그것을 알아차리는 계나리. 다른 이들도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거 설마….]
“나리 씨.”
-[아, 네! 보호 마법 결계, 발동하겠습니다! 함께 갇힐 수 있으니 다들 결계석에서 물러나 주세요! …하나, 둘, 셋!]
파앗. 계나리가 결계 주문을 발동시켰다. 주문이 새겨진 자리에서 강렬한 푸른빛이 생겨나, 순식간에 다른 결계석으로 이어지며 마름모 형태를 이뤘다.
-[……!]
헉. 누군가 놀라 헛바람을 들이켜는 소리.
우웅. 결계석이 소리를 내며 떨렸다. 결계석끼리 이어진 푸른 선을 중심으로 반투명한 장막이 일렁일렁 커진다. 구체를 이루며 게이트를 가두는 신비로운 광경에 유호가 감탄했다.
-[와….]
-[꼭 스노우볼 같네.]
-[그런데….]
박가람이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게이트가 결계 중심부보다 좀 높은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조정할게요. 결계석이랑 멀리 떨어지지 않으면 어느 정도 위치를 움직일 수 있거든요.]
계나리가 주문에 손을 댄 채 집중하자 구체가 슬슬 위로 올라갔다. 그동안 한율이 만든 환영 게이트는 붉은빛을 띠며 몸집을 키웠다.
그리고 현재, 새벽 4시.
조용했던 서울 도심 한복판에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쩌적, 쩍…. 콰쾅!
마치 쇠공으로 건물을 때려 부수는 듯한 소리. 끼이익! 빠앙! 그 소리에 적잖이 놀랐는지, 급정거시키며 경적을 울리는 차.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거나 비명을 질렀다.
“깜짝이야! …뭐야! 뭔데!”
그러나 계나리가 보호 마법 결계를 펼쳤을 때부터 푸른빛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충격으로 굳어버렸다. 누군가는 핸드폰 카메라 렌즈를 최대로 확대한 채 멍하니.
미국과 중국, 태국에 생겨났던 미스터리 홀. 그것과 매우 흡사한 미스터리 홀이 빌딩 위를 뭉그러뜨리고 있었다. 우지끈, 쿵. 박살 난 건물 파편이 미스터리 홀을 가둔 반투명 구체 아래로 떨어지며 쌓인다.
“어, 엄마….”
밤새워 놀다가 이제야 집으로 돌아가던 대학생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울먹거렸다.
“괴물이…, 흐윽, 미스터리 홀에서 괴물들이….”
검붉은 빛을 띤 거대한 미스터리 홀에서 생전 처음 보는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은은한 푸른빛과 거뭇한 그림자로 물든 괴물들이 구체 벽에 부딪히고 발버둥 치면서 서로 짓밟는 모습이 상당히 기괴하다.
키에에엑!
-[얘가 새벽부터 무슨 소리야…. 너 술 마셨니?]
“흑, 흐윽….”
타악. 바들바들 떨리던 손이 핸드폰을 놓쳤다.
“안 돼….”
미스터리 홀이 생긴 곳은 굉장히 높았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일까. 또렷하게 보였다. 쿠웅, 쿵! 구체 아랫부분이 건물 파편과 괴물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쩍쩍 금이 가고 있었다.
“저, 저…!”
푸른빛이 번쩍거릴 때 누군가 신고한 걸까. 에에에엥! 위이잉! 소방차와 경찰차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도로에다 차를 세워놓고 달려온 사람들도 사태를 파악하고선 주춤거렸다.
“저거 깨지는 거 아냐?! 깨지면 저 괴물들이…!”
한편, 제어 주문이 새겨진 옥상.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지만, 결계가 깨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계나리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계나리의 시선이 한율이 있는 건물 쪽을 빠르게 살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난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계나리는 울컥했다.
‘오빠 너무해….’
아무래도 한율에겐 자신 또한 모의 훈련 대상자인 모양이었다. 보호 마법 안에서 날뛰는 힘이 너무 강해, 결계를 유지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사실 한율의 실력이라면 건물 수십 채가 무너져도 그걸 거뜬히 막을 수 있는 결계를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버겁게 버틸 정도만 힘을 넣었어.’
괴물은 환영이지만, 박살 난 건물 파편은 진짜. 지상보다 수십 미터 높은 곳에 잔뜩 쌓였으니, 결계가 깨져 그게 한꺼번에 떨어진다면 주변에 아주 큰 피해가 생길 것이다.
어쩌면 인명피해가 발생할지도.
‘내가 잘해야 해. 집중해야 해.’
“세 분, 결계석에 마력 불어 넣어주세요!”
-[…네.]
긴장한 이해원의 대답에 이어, 한율의 담담한 목소리.
-[네.]
-[…….]
그러나 나머지 한 명, 박가람의 대답이 없었다. JE가 크게 불렀다.
“박가람, 집중해!”
-[…어? 어, 어…!]
결계에 갇혀 몸부림치는 괴물들을 바라보던 박가람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한율이 물었다.
-[호 형. 아래 상황은 어때요?]
유호는 큰길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다른 건물 옥상에서 아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경찰들이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중이야. 소방관들은 보호 마법이 깨졌을 때를 대비하는 것 같고. 그리고… 기동대 버스 보인다. 줄줄이 오고 있어. 다른 소방차랑 구급차도.]
-[하지만 낙하물에 완전히 대비하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네요. 나리 씨.]
집중하던 계나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네, 오…, 아니, 한율 씨!”
-[아래쪽 강도를 높이세요.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점프력 좋은 놈은 없는 것 같으니, 위쪽은 조금 얇아져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 지금 그것까지 조절하는 건….”
-[힘들 것 같아요?]
‘진짜 너무해.’
계나리는 울상을 지었다.
“노력해 볼게요….”
-[해원이 형, 가람이 형. 지금까지 애써 쌓은 마력을 고스란히 쏟아붓지 말고, 그 마력으로 주변의 마나를 정제시켜 그 힘만 결계석에다 불어 넣으세요.]
박가람이 멍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뭔 소리여.]
-[원래 ‘내 마력’으로 만드는 작업은 불순물을 세심하게 걸러내야 해서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을 요구하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나한테 독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처럼 당장 외부로 운용하는 마력은 그렇게 순도 높을 필요가 없거든요.]
위이이잉. 지상에서 올라오는 사이렌 소리가 중첩되며 커진다.
-[조금만 더 버티면 낙하물 추락 대비도 끝날 것 같고.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