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동의 턱 안쪽에 아주 연한 갈색 털이 자라있었다. 머릿속에 한율이 했던 말이 스쳤다.
『죽을 때가 되면 털 색이 변한다는 이야길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설마.
“그래서 급히 절 찾은 거예요?”
저녁. 고향에서 막 서울로 돌아온 한율은 JE의 연락을 받고 그의 집을 찾았다. JE의 얼굴은 구동을 향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어. 아무리 봐도 뭐가 묻은 것 같진 않아서. 당장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잠깐 살펴볼게요.”
한율은 구동을 품에 안았다. 마력을 휘감은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자, 구동이 기분 좋다는 듯 스륵 눈을 감았다.
뀽.
“…어? 돌아왔다.”
한율의 손길이 닿은 갈색 털에 반짝반짝 윤기가 돌더니 하얗게 변했다. 한율은 이유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털을 새하얗게 유지할 마력이 부쳤나 보네요. 지구의 마나가 ‘그쪽’보다 불순물이 많고 질이 떨어져, 단순히 잠자며 쉬는 것 만으론 마력 보충이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럼 수명이랑은 상관없는 거야?”
“음…. 이 정도는요. 나무가 많고 공기가 맑은 곳으로 자주 나가면 큰 문젠 없을 거예요. 저처럼 마력을 나눠주는 게 더 빠르지만.”
후우. JE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 그럼 이 녀석은 우리처럼 집중해서 마나를 유동하고 정제하지 않아도, 주변 마나를 자기 마력으로 만든다는 거네?”
“마물이니까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일걸요.”
“그래…. 그럼 나한테도 마력 쌓는 거 가르쳐주는 거지?”
한율은 구동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네. 두 달 후에 가르쳐드릴게요.”
“…….”
JE는 가늘어진 눈매로 한율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 쉬었다.
“호랑 박가람은 어때? 어제 네가 아무렇지 않게 결계 안으로 화염 마법을 사용하고, 또 네가 교장이란 사실에 아주 놀란 눈치던데.”
구동을 내려놓자 한율의 발치에 앉아있던 달냥이 쭈욱 기지개를 켜며 구동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할짝할짝 정성스레 세수를 시켜준다.
“오늘은 상당히 피곤할 테니, 내일 천천히 다시 얘기하려고요.”
“다른 세상에서 마법을 배우고 돌아왔다는 것도?”
“네. 앞으로 더 큰 진짜 재앙이 찾아올 텐데, 이 이상 무언가를 감추거나 속이면서 신뢰를 잃고 싶지 않네요.”
“로건 워커였다는 것도?”
“그 사실은 묻어도 되지 않을까요? 재앙이랑 아무런 상관도 없고… 6·25 참전 미군이었다고 하면 절 굉장히 나이 든 사람으로 취급할 것 같거든요. 특히 가람이 형이.”
JE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이해했다. 나도 비밀 지켜줄게.”
“감사합니다.”
어스래빗 숙소로 돌아왔을 때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집안 전체가 조용했다. 단톡방을 확인해보니 유호는 회사, 차남석은 남양주 본가, 제주로 내려가려던 길우성은 반대로 올라온 부모님을 만나러 나간 상태였다.
똑똑. 한율은 빵이 잔뜩 든 봉투를 들고선 이건우와 라이언이 사용하는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라이언이 활짝 문을 열었다.
“왔어?”
“뭐 하고 있었어요?”
“이어폰 끼고 지구 종말 영화 보고 있었어. 도움 될 것 같아서.”
“도움 안 될 것 같은데. 건우 형은요?”
한율은 라이언을 향해 빵이 든 봉투를 벌렸다. 라이언이 냉큼 카스텔라를 집었다.
“3층에서 운동하는 것 같아.”
“네.”
아침부터 미스터리 홀 때문에 시끌벅적했지만, 추가로 밝혀지는 사실도 없고 정부도 당장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상태였다. 뉴스도 똑같은 내용, 다 아는 내용만 반복하는 중. 그래서 계속 불안해하기보다는 평소처럼 시간을 보내기로 한 걸까.
한율은 2층에 있는 유호와 박가람의 방을 찾았다. 활짝 열린 문 안을 들여다보자, 박가람은 오랫동안 뒤척이다가 겨우 잠든 모양새였다.
박가람이 손을 움찔거리며 잠꼬대한다.
“안 돼…. 내 밤빵…. 놔라, 괴물아……”
“…….”
한율은 조용히 밤빵을 꺼내, 그의 머리맡에 두고 방을 나왔다.
찾았습니다
WB래빗 엔터테인먼트.
한창 곡 작업에 열중하던 유호는 문득 피로감을 느끼곤 마른세수를 했다. 며칠 동안 게이트 때문에 내내 긴장하다, 어젯밤부턴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하….”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검붉은 빛을 띤 거대한 게이트와 그 안에서 나왔던 크고 작은 괴물들, 그것들이 결계에 갇힌 채 불타 죽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금까지 속여서 죄송해요.』
차가운 겨울바람에 실린 고약한 탄내와 역동적인 마나의 흐름, 귓가를 파고든 서한율의 목소리도.
『제가 마법 학교 교장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생각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될 정도로 심신이 피곤하고 혼란스러운 그 와중에, 너무나 좋은 음률과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래서 숙소에서 쉬는 대신 회사 작업실로 왔다.
푹 자고 난 뒤 정신이 맑아진 뒤에 다시 들으면 아주 엉망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은 수면 대신 작업을 택한 게 후회되지 않았다.
유호는 파일을 저장한 뒤 의자에 편히 몸을 기댔다.
‘그나저나 한율이가 교장이라니….’
마법과 마나, 앞으로 찾아올 재앙에 관해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얼굴 한번 비추지 않는 교장에 대해 잔뜩 의심했던 것도.
박가람이 서한율을 교장으로 의심하긴 했지만, 본인에게 직접 들으니 더 놀라웠다. 그렇게 큰 게이트를 감싼 결계도, 팀 반지의 보호 마법도 전부 서한율의 작품이란 소리니.
‘한율인 대체 어떻게 그런 강한 마법사가 된 걸까?’
처음 서한율을 만난 게 4년 전이었다. 그때 고작 열일곱 살이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준다고 했으니까….’
우웅.
“……?”
유호는 의아한 얼굴로 핸드폰을 집었다. 크리스탈 래빗의 은영이 웬일로 톡을 보냈다. 평소 핸드폰을 사나흘에 한 번 확인하던 애가 어쩐 일로.
-[호호. 어디야?]
[회사 작업실. 왜?]
-[지금 가도 돼?]
은영은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9년 지기 친구이기도 했다. 고민이 있거나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마다 종종 작업실에 와서 조용히 작업하는 걸 구경했었기에, 유호는 긍정 답변을 보냈다.
[ㅇㅇ]
그러자,
벌컥.
“……?”
작업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은영이 등장했다. 유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바로 앞에 있었으면 그냥 노크하지….”
“유호.”
“어?”
은영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뭐 할 거야? 나는, 미래를 위해서 지금까지 참고 노력했던 게 다 허무하게 날아간다는 생각에 정말 화날 것 같거든? 진짜 억울할 것 같거든?”
유호는 가만히 은영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희미하게 알코올 냄새가 났다.
“술 마셨어?”
“나 좀 도와줘, 호.”
“뭘?”
은영이 살며시 주먹을 쥔 채 말했다.
“복수.”
“……?”
가짜 게이트 출현 다음 날인 21일 아침.
어젯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한율은 15시간을 내리 푹 자고 일어났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채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훑었다. 세상은 여전히 미스터리 홀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일부 학교 휴교… 각종 크리스마스 기념행사 연달아 취소 고심]
[[미스터리 홀] 군·경찰 초비상사태 대기]
[또 다른 미스터리 홀 예정 지역 돔구장, 인기 아이돌 콘서트 예정 잡혀 논란]
[서울 미스터리 홀에 전 세계 충격… 시위 벌어진 곳도]
[20일 새벽 서울에 발생한 미스터리 홀 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며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미국과 유럽 등 여러 지역에서는 미스터리 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폭력 사태로 번지기도 했다.
지난 11일 미스터리 홀 추정 형태가 목격된 일본 나고야에서는…(중략).]
-얘들아, 국민 재난 안전 포털 들어가면 지역별 대피장소 확인할 수 있다. 미리미리 너희 동네 확인해둬라
ㄴ굳이? 학교 건물 전부 대피소 아님? 주민센터나 경로당 같은 곳도?
ㄴ내진 설계 안 된 곳도 있음
ㄴ미스터리 홀에서 나오는 건 괴물이지 지진파가 아니잖아
ㄴ고층만 피해. 고층은 무너지면 끝장이다. 비상약품이랑 식량 잘 준비해두고
-괴물 대비하라면서 명품샵 습격하는 폭도들 개웃기던뎈ㅋㅋㅋㅋ
ㄴ안 웃겨. 여기 ㅈㄴ 살벌하다..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로 조사단 보낸다던데. 제발 원인 찾아서 막았으면 좋겠다
-정원이랑 이우 뭐하냐 아직도 해커 못 찾았냐?
ㄴ정부에서도 나서서 찾고 있는데 아직도 못 찾은 거 보면ㅋ
ㄴ내부에 있을지도 모르지.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임.
ㄴㅇㅇ잘 아니까 안 잡히고 쏙쏙 잘 빠져나갔던 걸지도
-방금 대형마트 갔더니 아직도 생수랑 라면, 화장지 전부 쌓여있더라ㅋㅋㅋ 우리나라 사람들 느긋한 건 알아줘야 함ㅋㅋㅋ
ㄴ솔직히 건물 좀 망가진 거 빼고 진짜 피해당한 게 있나? 누군지는 몰라도 괴물 몽땅 가둬서 소각했잖음
ㄴ건물주 피해는
ㄴ그 정도 건물이면 보험 들었을걸ㅋ
‘거기 건물주에겐 조금 미안하게 됐지.’
덩달아 출입 금지된 주변 회사 수십 곳도.
사실 한율은 결계 주문을 새겼던 폐건물 위에 가짜 게이트를 띄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연치곤 너무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바로 뒤 건물로 지점을 바꿨다.
스윽. 누군가 살금살금 한율의 방으로 다가와, 달냥이 드나드느라 열린 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
박가람과 한율의 시선이 마주쳤다.
“오, 드디어 일어났네. 아침으로 밤빵에 커피 한잔하실?”
한율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일단 씻고요.”
잠시 후 거실. 한율은 소파와 식탁 앞에 앉아있는 차남석, 라이언과 가볍게 아침 인사를 나누곤, 따뜻한 커피를 내렸다. 박가람이 빵칼로 밤빵을 숭덩숭덩 썰며 흥얼거렸다.
“맛있는 밤빵, 밤빠라밤, 밤빵.”
“호 형은 일어났어요?”
“아니. 엄청 피곤했는지 내가 옆에서 맨손 체조하는데도 안 일어나더라.”
“형은 몸 괜찮아요?”
“말도 마. 자다가 중간에 근육통 오고, 가위까지 눌려서 장난 아니었다. …괴물 나오는 꿈까지 꾸고.”
“밤빵 뺏어가는 괴물 꿈이요?”
툭. 도마 위로 빵칼이 힘없이 떨어졌다.
“어떻게 알았냐?! 너, 남의 꿈도 읽을 수 있는 거냐?!”
식탁 앞에 앉아 밥을 먹던 라이언이 고개를 기울였다.
“근육통이 왜 생겨? 가람, 운동 안 하잖아.”
“하거든? 계단 오르기 운동 열심히 했거든?”
타닥, 타닥. 길우성이 요란스럽게 계단을 내려오며 큰소리로 물었다.
“우리 이따 몇 시에 나가?”
진지한 얼굴로 TV를 보던 차남석이 대답했다. TV에선 미국 뉴욕 미스터리 홀 조사단이 막 입국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1시에 데리러 온다고 유찬이 형이 단톡방에 올렸잖아.”
“응. 대답 듣고 싶어서 일부러 물어봤엉.”
오늘 오후, 어스래빗은 크리스탈 래빗과 함께 <락뮤닷> 사녹 스케줄이 잡혔다. ‘하양 토끼 까망 토끼’의 <바다와 산타토끼> 무대였다.
길우성이 식탁 앞에 앉았다.
“써한 넌 잘 잤냐? 어제 일찍 자는 것 같던데.”
“어. 아주 푹 잘 잤다.”
“가람이 형도 어제 일찍 자던데. 우리 멤버들이지만, 참 대단해.”
“뭐가?”
“어제 그 난리가 났는데 아무렇지 않게 각자 볼일 보러 돌아다니고,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잘 자잖아. 스카이러너 맹이 형이 전화했다가, 우리 멤버들 다 자고 있다고 하니까 놀라더라. 비상약품이랑 식량은 잘 챙겨둔 거냐고.”
그야 진짜 게이트 사태가 내년 7월에 벌어진다는 걸 잘 아니까.
한율은 완성된 커피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화제를 돌렸다.
“어제 부모님은 잘 뵙고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