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2화 (272/427)

“엉. 한적한 동네에 있는 단독주택 사셨대.”

“잘됐네.”

“잘됐다고 해야 하나….”

후우. 길우성이 한숨을 내쉬더니 멋대로 한율의 커피를 가져갔다.

“미스터리 홀 때문에 아파트가 위험하단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단독주택이라고 꼭 안전하리란 법은 없잖아. 오히려 1층에도 문이랑 창이 나 있어서 침입하기도 쉬울 것 같은데. …앗, 뜨!”

“우성, 친구 걸 뺏어 먹으면 안 돼.”

한편 그 시각.

계나리는 교실 책상에 엎드린 채 멍하니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반 친구들은 온통 어제 새벽에 생겼던 미스터리 홀에 관해 떠들거나 관련 영상을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계나리는 바로 내일 방송될 <락뮤닷> 예고 영상을 보고 있었다.

[하양 토끼 까망 토끼 <바다와 산타토끼> 무대 최초 공개!]

<바다와 산타토끼> M/V 속 어스래빗 멤버들의 얼굴이 스친다. 그러자 문득, 이들이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훌쩍.

‘빌어먹을 게이트.’

지나가던 친구가 놀란 얼굴로 계나리를 쳐다보았다.

“뭐냐? 계나리 너 지금 우냐? 야! 계나리, 어스래빗 보면서 울어!”

“꺼져, 저리 가….”

친구가 교실 창문을 활짝 열고 외쳤다.

“동네 사람들! 우리 반 계나리 울어요! 무야호오!”

“야, 추워! 문 닫아!”

저딴 것도 친구라고.

계나리는 벌떡 일어나 친구의 뒤통수에다 쿠션을 힘껏 던졌다.

퍽.

“악!”

우웅.

“……?”

훌쩍. 계나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선 핸드폰을 보았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마법 학교 학생들이 번호를 자주 바꾸다 보니, 그들 중 한 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네, 여보세요.”

그러나 돌아온 건 처음 듣는 여자 목소리였다.

-[계나리 학생?]

“누구세요?”

* * *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이 아니에요. 내내 양평을 벗어나지 않던 이해원이, 왜 하필이면 미스터리 홀 발생 하루 전날인 그제 외출했겠냐고.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이우그룹 부회장실. 이채환이 부회장인 아버지와 동생 이채욱 앞에서 흥분한 얼굴로 떠들었다.

“걔, 분명히 초능력자라니까요? 미스터리 홀 발생했을 때 근처에 사람 그림자들 보였다잖아. 그 시간에 분명히 거기에 있었어. 미스터리 홀에서 튀어나온 괴물들을 막은 인물 중 한 명이라고, 걔가. 내 감이 그래.”

“…….”

“그래서 내가 이해원 잘 캐보라고 했잖아, 동생아. 그런데 넌 자신만만하게 맡겨달라고 말해놓고선 해커도 못 찾아, 이해원한테서 정보도 못 얻어. 그동안 대체 뭐 했냐?”

이채욱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해커로 의심 가는 인물, 찾았습니다.”

“뭐? 찾았어? 언제? 어떻게?”

“조용히 해라, 이채환. …그래. 어떤 자들이든?”

“그게….”

이채욱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직은 의심 단계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찾으면….”

“우리가 경찰이냐? 증거는 의심 가는 자를 털어서 찾으면 된다. 어떤 놈들인지나 말해.”

“그래. 빨리 말해, 빨리.”

이채환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이채욱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열여덟 살 여학생입니다.”

부회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

“…와우.”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잠시 입을 벌린 채 굳었던 부회장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우리 이우그룹이… 그리고 정원그룹이 열여덟 살짜리 여자애한테 털려서 놀아났다고? 세계적인 해커 집단도 아니고, 고작 어린애 하나한테?”

“채욱이 말이 진짜면 정확히는 열일곱 살 애한테 털린 거죠? 처음 털린 게 작년이었으니까.”

이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

부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나 이채욱은 장남 이채환처럼 황당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실없는 녀석이 아니기에, 울컥 올라오는 화를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래. 어떻게 성인도 안 된 애를 의심하게 된 건지, 그 얘기나 들어보자.”

“네.”

이채욱은 이우그룹을 협박해 대규모 방공시설을 짓도록 한 해킹 용의자, ‘계나리’를 찾게 된 경위를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난 평범한 사람이었어

뮤닷 <락뮤닷> 스튜디오.

“수고하셨습니다!”

“와줘서 감사해요!”

“이프림! 조심히 들어가요!”

하양 토끼 까망 토끼의 <바다와 산타토끼> 사녹이 끝났다. 어스래빗과 크리스탈 래빗 멤버들은 사녹 방청을 온 팬들과 스태프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하며 무대에서 내려갔다.

대기실로 돌아가는 복도에선 서로 인사.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수고하셨어요. 다들 내일 봐요.”

툭. 크래의 은영이 유호의 팔을 가볍게 치더니 손을 흔들었다. 유호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끄덕이곤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탈 래빗 멤버들과 어느 정도 멀어지자 유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웬 한숨? 은영 선배님이랑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아무것도.”

“어?”

길우성이 막 모퉁이를 돌아 이쪽으로 오는 누군가에게 손을 들었다.

“민솔 씨, 하이.”

첫 솔로 데뷔 스페셜 영상 녹화를 위해 출근하는 길일까.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매니저와 오던 정민솔이 덜컥 멈췄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어. 하이.”

“오래간만이다, 민솔아. 솔로 데뷔 축하해.”

“솔로 데뷔 축하해.”

“어. 고마워요, 형. …고마워.”

뚱한 얼굴로 정민솔을 바라보던 라이언이 허리에 두 손을 올렸다.

“선배님을 봤으면 인사 먼저 해야지.”

“…….”

정민솔의 얼굴에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스쳤다. 지난번 뉴욕에서 만났을 땐 멘탈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이더니, 시간이 지나며 많이 나아진 모양.

정민솔이 굳으려는 입가를 올리며 라이언이 아닌, 유호와 이건우 쪽을 향해 꾸벅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내일 솔로로 처음 데뷔하는 정민솔이라고 합니다.”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

“그럼 녹화 잘해, 민솔아.”

이건우가 라이언의 어깨를 감싸며 걸음을 옮겼다.

“우린 먼저 퇴근한다. 내일 생방송 때 봐.”

“네, 형. 들어가세요.”

“수고하세요.”

한율도 정민솔과 꾸벅이곤 멤버들과 함께 움직였다.

“어.”

“수고해, 민솔 씨. 데뷔 축하해~.”

“어. …아, 길우성.”

“엉?”

길우성이 정민솔을 돌아보았다. 정민솔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 몸은 좀 괜찮냐?”

“엉? 아, 응. 멀쩡해. 팔팔해.”

흐느적흐느적. 길우성이 두 팔을 흔들며 정체불명의 춤을 추었다. 정민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고. …가.”

“엉. 내일 봐.”

대기실로 돌아온 후, 길우성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못난이 민솔 씨가 달라졌어요.”

차남석이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달라진 건지, 달라진 척하는 건지.”

“한율아, 잠깐 이리로.”

구석진 곳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조유찬이 손짓했다.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다가갔다.

“왜요, 형?”

조유찬이 더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하더니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가 내민 핸드폰에는 검은색 마스크와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남자 옆엔 예쁘게 차려입은 왜소한 체격의 여자도 함께 찍혔다.

‘이 사진은….’

얼굴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한율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자신과 계나리였다. 지난번 양평으로 이해원을 만나러 간 뒤, 레스토랑에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누구야?”

조유찬이 다음 사진으로 넘기며 조용히 물었다. 한율과 계나리가 레스토랑 개별실에서 나오는 모습이었다.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확실히 나온 사진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때 자신의 차를 몰고 가기도 했고.

“친한 동생이요.”

“그냥 친하기만 한 동생이지?”

조유찬의 얼굴에서 간절함이 엿보인다. 제발 그렇다고 해. 여자친구 아니라고 해. 썸 타는 사이도 아니라고 해 줘.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 친한 애예요. 그런데 이 사진, 누가 보낸 거예요?”

조유찬이 주변을 살피더니 작게 대답했다.

“앗싸패치.”

“원래 앗싸일보 아니에요?”

“연예부만 따로 이름을…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일단 회사 가면 팀장님이랑 면담할 거야.”

“네.”

옷을 갈아입고 <락뮤닷>에서 퇴근. 한율은 차에 탄 뒤에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계나리에게도 앗싸패치 연락이 간 걸까.

-[13일에 같이 밥 먹는 것 ㅇㅆ기자한테 찍힌 것 같아요ㅠㅠ]

-[제가 금방 해결할게요ㅠㅠ]

-[거기 서버랑 데이터 다 날려버리고 바이러스도 심을 거야]

한율은 답장을 보냈다.

[그만둬;]

[회사랑 얘기한 뒤에 전화할게.]

-[넹ㅠㅠ]

회사에 도착. 멤버들은 지하로, 한율은 오 팀장과의 면담을 위해 2층 사무실로 향했다. 오 팀장은 담담한 미소로 한율을 맞이했다.

“녹화 수고했다, 한율아. 이쪽으로 와.”

한율은 오 팀장, 조유찬과 함께 사무실 내 회의실로 들어갔다.

오 팀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열어, 앗싸패치가 보낸 다른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개중엔 계나리의 얼굴이 환하게 나온 사진도 있었다. 함께 차에 타는 사진엔 차 번호판도 선명히 찍혀 있다.

“조금 전 앗싸 기자랑 통화했는데, 당장 이대로 터뜨릴 생각은 없다고 하더라. 내가 보기엔 상대가 비연예인이자 아직 미성년자고, 함께 찍힌 사진도 이것뿐이라 그런 것 같지만. …그래도.”

오 팀장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아무 사이 아니라야 해, 한율아. 연애는 아직 너무 일러.”

“정말로 단순히 친한 동생이에요. 제가 예전에 크게 도움받은 뒤로 종종 연락하면서 지내는. 원래 이날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 사람이 빠져서 둘만 가게 된 거예요. 그리고 미성년자랑 사귀다뇨. 절 뭐로 보시고.”

“맞아요, 팀장님. 우리 한율이가 양심이랑 개념 없이 미성년자랑 사귈 애는 아니잖아요. 그것도 기껏해야 중학생으로 보이는….”

“고2예요.”

“어, 그래? 되게 앳돼 보여서. …아무튼, 그럴 애가 아니잖아요.”

“팬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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