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개인 팬이 맞기는 하는데.
한율은 솔직한 대답을 삼켰다.
“네. 어스래빗이나 제 개인 스케줄에 온 적 한 번도 없어요.”
“다행이다. 팬이랑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게 더 골치 아프거든.”
조유찬이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추잡스러운 소설을 써대겠죠.”
“그럼 기사 나가는 건 막을 수 있는 건가요? 이 애한테 너무 미안해서요.”
“노력해 볼게.”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면담이 끝났다. 한율은 비어있는 보컬 연습실로 들어가 계나리와 통화했다. 다행히 기자가 학교까지 찾아오진 않고, 전화로만 서한율과 따로 아는 사이냐 물었다고.
“미안해. 기자가 따라붙은 줄도 모르고, 괜히 너만 곤란하게 했네.”
-[아니에영. 알아봤는데, 그때 거기에 있던 사람 중 누가 사진을 찍고선 앗싸에다 돈을 받고 판 것 같아요. 정말로 기자가 붙었다면 펜션이랑 해원 씨에 대해서도 다 알게 됐을 텐데, 그런 건 전혀 모르는 눈치더라고요. CCTV에 특별히 찍힌 것도 없고.]
“그나마 다행이네.”
-[그래도 불쾌하니까 혼내주고 싶은데. 앗싸일보, 평소에도 참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죠? 어쩔 땐 사생보다 얘네가 더 악질적이잖아요.]
“하지만 지금 당장 날려버리면 타이밍 때문에 의심받을 수 있잖아. 그러니 12월 31일은 어때?”
매년 1월 1일마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수집한 대형 이슈를 터뜨리며 적잖은 광고 수익을 내던 곳이다. 그런데 그 전날 데이터가 몽땅 날아가고 서버까지 다운된다면 참 볼만할 터.
이유를 설명하자 계나리가 감탄했다.
-[크으. 천재세요?]
“그나저나 이우그룹이랑 정원그룹은 어때? 서울 한복판에 미스터리 홀이 나타났으니, 널 찾는 데에 더 혈안이 됐을 것 같은데. 정부도 그렇고.”
-[저도 모르게 저지른 실수가 없다면 괜찮을 거예요. 만에 하나 저를 찾아내도, 평범한 고등학생이 대기업 두 곳을 털고 협박까지 했다곤 순순히 믿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널 찾아낼 수도 있어.”
-[네, 조심할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계나리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넵! 내일 방송 수고하세요!]
“그래. 들어가.”
-[넵!]
통화를 마친 뒤, 한율은 그제야 어스래빗 연습실로 향했다. 멤버들은 모두 메이크업을 지우고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쭈욱. 강보배가 스트레칭을 하다가 불안을 표했다.
“그런데 미스터리 홀이 갑자기 또 나타날 수 있잖아. 이렇게 느긋하게 연습해도 되는 걸까?”
“우리나라의 남은 표식은 노란색이고, 우리 회사랑은 거리가 좀 있잖아. 그러니….”
“으윽….”
그때 박가람이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한국에도 빨간색 점 두 개야. 어제 나타난 미스터리 홀이랑 겹쳐서 하나로 보이는 것뿐이라고! 당장 이렇게 외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괜찮은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이건우?”
“그게 아니라, 어제 새벽에 나타난 미스터리 홀도 누군가가 막았잖아. 그리고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우리나라 휴전 국가라서 군부대도 많고, 현역 나와서 총 다룰 수 있는 사람도 많잖아.”
길우성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리 중엔 없지. 총도 없지.”
“그렇게 하지….”
“3월에 잡힌 미주 투어가 더 큰 일 아닐까?”
라이언이 사과패드에 미스터리 홀 지도를 띄웠다.
“봐. 미국에 빨간색 많아.”
“아이고, 저런.”
“빨간색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남은 표식 있는 곳 근처에 돔구장 있잖아.”
강보배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거기, 이번 주말에 잡힌 아이돌 콘서트 취소해야 하는 거 아니냐 난리래. 4만 명이 한꺼번에 모였을 때 미스터리 홀이 생기면 책임질 거냐고.”
“…….”
박가람이 이번엔 목 막힌다는 얼굴로 한율을 돌아보았다. 내년 6월까지는 다른 게이트가 열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해 답답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안 될 일. 한율이 천천히 고개를 젓자, 박가람은 입을 꾹 다문 채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차남석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 미주투어는 아직 취소 안 됐잖아. 미리 불안해하고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어. 그러니까 연습이나 하자.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할 일을 해야지.”
“응….”
“전 메이크업 좀 지울게요. 먼저 시작하세요.”
“OK.”
짝짝. 이건우가 손뼉을 치면서 앞으로 나갔다.
“자, 한율이 제외하고 다들 몸 풀었지? 타이틀곡부터 힘내서 가봅시다!”
3월 미주 쇼케이스 투어, 26일 KBC 연말 특집 <뮤직뮤직 대축제>를 대비한 연습은 저녁 먹는 시간을 포함, 밤 10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숙소로 돌아온 건 밤 11시 즈음.
한율이 유호와 박가람, 통화로 연결된 이해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 건 자정께였다.
“그러니까…. 어….”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박가람이 고개를 기울이며 더듬거렸다.
“미래에서, 게이트 너머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 마법을 배웠는데… 다시 지구로 오니까, 어… 지금의 과거로 돌아왔단 거지?”
“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기어 다니는 갓난아이였을 때로 돌아왔더라고요.”
박가람이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애늙은이였던 이유가 있었구먼….”
“가람아.”
“그리고 제가 겪은 미래랑 나리 씨가 겪은 미래는 달라요. 원래 전 형들 앞에 없었던 사람이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야?]
한율은 제 무릎에 자리 잡은 달냥을 쓰다듬으며 태연히 말했다.
“아이돌은커녕 방송 쪽 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말이에요.”
한편 그 시각, 앗싸패치 사무실.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 평범한 고등학생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데이트하는 사진을 입수, 기사를 작성하던 김 기자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서한율 스캔들 잡았다면서요? 그거, 저희한테 넘기시죠.]
너 누구냐고
“한율이,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막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려던 박가람은 건너편 침대의 유호를 돌아보았다.
“응?”
“예전에 가람이 네가 이렇게 떠봤었다며. 교장이 우리를 조금 더 빨리 영입했으면 좋았을 텐데. 한율이는 제자를 들여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최근에야 하게 돼서 그럴 거라 대답했고.”
“어.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글쎄요. 좀 부정적이었나 보죠.’라고 대답했지. 옆에서 지은이 형은 지금도 썩 긍정적인 것 같진 않다고 말했고.”
JE에겐 어쩌다 보니 수상쩍은 모습을 들켜, 먼저 교장이란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했다.
“난 그 자리에 없어서 그렇게 말한 두 사람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유호는 천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천장은 창밖에서 들어오는 밤 특유의 검푸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리 몇 명에게 마법을 가르쳐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만큼 닥칠 재앙과 미래가 끔찍하고 절망적이란 거 아닐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막내나 나리 씨처럼 능력을 각성하는 사람들도 있다잖아. 가르쳐도 자신처럼 대단한 마법을 부리지 못할 걸 알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어중간하게 힘을 갖고 있어봤자, 오히려 그 어중간한 힘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지로 앞장서게 되는 상황을 걱정한 걸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겠다. 한율이가 팀 반지에 보호 마법을 새긴 걸 보면.”
하하. 유호는 작게 웃었다.
“겉으론 무뚝뚝해도, 멤버들 잘 챙기고 걱정하는 애니까. 일부러 이런 숙소를 마련한 것만 봐도.”
“우리를 속인 게 좀 괘씸한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아니,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우리보다 한참 형인가? 그 자식 몇 년을 산 거야? <서울 구미호> 형호 역이 걔한테 딱 맞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거 아냐?”
“그래도 연기 실력은 별개잖아.”
“그렇긴 하지.”
으음. 박가람의 앓는 소리를 끝으로 방엔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예전에 칠레에서.”
유호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남석이가 사고를 피하게 된 것도,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한율이가 남석이 감싸듯 잡아당겼잖아.”
“사실은 나, 예전에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무슨 이야기?”
박가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유호에게 말했다. 본인 귀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서한율이 우리 생명줄이래.”
“응?”
다음 날인 22일. <락뮤닷> 생방송 한 시간 전.
리허설과 사녹은 어제 모두 마쳤기에, 어스래빗 멤버들은 샵에서 단장을 받고 나서 느지막하게 출근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어스래빗 대기실 앞 복도엔 그들에게 인사하고자 기다리는 후배들이 복작거렸다.
“에고, 언제부터 기다렸어요?”
“얼마 안 됐습니다, 선배님!”
“다음부턴 이렇게 인사하러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것도 생방송 바로 전인데, 피곤하잖아요.”
“괜찮습니다, 선배님! 스스로 인사드리고 싶어서 온 거니 부담 갖지 마세요!”
“그래도 부담스러운데.”
“아….”
“농담이에요, 울지 마세요.”
멤버들은 대기실에 짐을 놓곤 후배들과 바쁘게 앨범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드디어 마지막 후배 팀이 떠나고, 멤버들은 그제야 편히 소파에 앉았다.
“다음엔 생방만 뛰는 날이라도 조금 더 빨리 오자.”
“엉. 그런데 우리도 인사하러 가야겠지?”
“가야지. 일어나.”
오늘 출연팀 중 선배는 크리스탈 래빗을 포함해 세 팀이 고작이라, 인사 순회는 금방 끝났다.
한율은 선물 받은 앨범을 든 채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바삐 움직이는 스태프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참 평화롭네.’
모의 훈련을 하기 전만 해도, 가짜 게이트가 생기면 잠시나마 일상이 멈출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듯하다가도,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조금 전 간 샵에는 여전히 손님들이 많았으며, 방송국 앞에 모인 팬들은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외쳤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그때 모두 소각한 것처럼 꾸미지 말고, 십여 마리 정도 풀어서 날뛰게 해야 했나.’
사실 개별적인 환영에 물리적인 힘까지 둘러서 통제하는 건 조금 귀찮다. 가까이에 다른 이들도 있었고. 그래서 괴물 환영 하나만 떨어뜨렸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개체 몇 개를 더 떨어뜨려 사람을 공격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는 후회가 든다. 그 과정에서 인명피해가 조금 발생하더라도.
-미스터리 홀이 또 생기면, 그때처럼 다시 누군가가 해결해주지 않을까?
-조금 충격이긴 했는데, 별로 큰 피해가 생긴 것도 아니잖아. 괜찮을 거야.
이렇게 안이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고.
“써한, 연극 보러 언제 가?”
다음엔 조금 더 과감하게 경각심을 줘야겠어.
한율은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한가한 소리를 꺼내는 길우성에게 대답했다.
“못 가. 바빠.”
길우성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같이 보러 가자고 했잖아! 우아하게 슈슉!”
그가 입에서 내는 소리에 맞춰 엉터리 슛 자세를 취한다.
“모금함에 기부금을, 응? 슈슉!”
“다른 사람이랑 같이 가. 공연 두 시간 전까진 늘 두 자리 비워두겠다고 했으니까, 보러 가는 날짜랑 시간만 미리 알려주고.”
“우리 팀 멤버가 여덟 명인데 딱 두 자리?”
“항상 여덟 자리씩 비워뒀다가 직전에 채우는 건 번거롭잖아.”
차남석이 넌지시 끼어들었다.
“후원한 건 서한율 혼잔데, 우리가 뭐 했다고.”
“우음….”
“갈 거야, 말 거야?”
“아니, 후원자도 아니고 후원자 친구들이 떡하니 그 자리 차지하는 건 웃기지 않냐? 나도 그 정도 염치는 있거든?”
“그래. 놀랍네.”
타닥. 길우성이 복도 반대쪽 벽에 붙었다.
“싸우자, 서한율!”
유호가 점잖게 타일렀다.
“복도에서 싸우지 마.”
뒤를 따라오던 박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럽지만, 우리 막내가 제일 애 같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두 번째고.”
“싸우자, 이건우!”
“복도에서 싸우지 마시라고요. 열흘 뒤면 우리도 5년 찬데, 복도에서 싸우면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