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4화 (274/427)

“히익.”

대기실로 돌아왔을 땐 어느새 생방송 20분 전이었다.

“한율아.”

조유찬이 한율에게 손짓하더니 속닥속닥 기쁜 소식을 알렸다.

“앗싸 건, 잘 해결됐어. 그쪽에서 사진 전부 파기하기로 했대.”

“다행이네요.”

그래도 계나리를 말릴 생각은 없지만.

오후 4시. <락뮤닷> 생방송이 시작될 무렵, 경기도 양평에 있는 이해원의 거처.

[2020년 12월 22일, 크리스마스 특집 <락뮤닷>! 오늘의 1위 후보부터 소개합니다!]

이해원은 거실 TV에 <락뮤닷>을 크게 틀어놓은 채 이른 저녁을 준비 중이었다. 이곳에선 마나 유동 외엔 할 일이 전혀 없다 보니, 그는 조금씩 요리에 취미를 붙이고 있었다. 아직 할 줄 아는 요리라곤 찌개 몇 가지와 계란말이 정도지만.

‘나 진짜 요리에 소질 없나 보네. 왜 항상 뭔가 모자란 맛이 나지?’

그리고 오늘도 맛없는 음식을 완성. 하지만 입맛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라서, 먹고 배탈만 안 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밥상을 차렸다.

그때였다.

까악! 밖에서 들리는 커다란 까마귀 울음소리에 이해원은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집안 전체에 울렸다.

누굴까. 이해원은 긴장한 얼굴로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다. 오늘 이곳을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불청객만 제외하면.

이해원은 인터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엔 무슨 일로 오셨죠?”

대문 앞엔 이우그룹의 이채욱이 서 있었다.

[이우그룹을 대표해, 이해원 씨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 찾아왔습….]

까악! 까악!

푸드덕!

[…으악!]

“…….”

이해원은 까마귀에게 공격당하는 이채욱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그 시각, 계나리가 다니는 고등학교.

“계나리! 담임쌤 호출!”

“왜?”

“몰라?”

계나리는 토끼가 잔뜩 그려진 망토 담요를 두른 채 교무실로 향했다. 담임이 계나리를 보곤 인상을 썼다.

“학교가 너희 집 안방이니? 그거 안 벗어?”

“추워요, 쌤. 감기 걸리면 쌤이 책임지실?”

“까분다. 따라와.”

“어디 가는데요?”

담임이 계나리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며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교장실이었다. 여긴 왜? 계나리는 무언가 싸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미 교장실에 찾아온 손님과 눈이 마주친 뒤였다.

많아봤자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주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학생이 계나리구나? 와아, 진짜 반가워요. 정말로 꼭! 보고 싶었어!”

계나리는 순간 굳을 뻔했던 표정을 의아함으로 채웠다.

“누구… 세요?”

사실은 누군지 아주 잘 안다.

이우그룹 부회장 아들, 이채환. 별명은 또라이.

이채환이 활짝 웃었다.

“나야, 나! 네가 골탕 먹인 대기업 삼촌! 아유, 사진보다 훨씬 깜찍하고 예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사 오는 건데. 삼촌이 용돈이라도 줄까? …아. 백만 원짜리 수표밖에 없다. 이거라도 가져.”

“…….”

계나리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망했다. 내가 해커란 거 알고 찾아왔구나.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어디에서 실수를 저지른 거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설마 어제 왔던 앗싸일보 기자의 연락까지?’

어쨌든 당장 자리를 벗어나는 건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여기까지 찾아왔다면 이미 집 주소와 부모님 직장까지 모두 파악한 상태일 터. 어쩌면 벌써 집에 있는 PC를 포함해 방을 탈탈 털어봤을지도.

‘혹시 몰라 들키는 상황을 대비해두긴 했지만.’

계나리가 수표를 받지 않고 수상쩍다는 시선만 보내자, 이채환은 씨익 웃으면서 수표를 도로 지갑에 넣었다.

“우리 나리 친구, 용돈 받기 싫은가 보다. 하긴, 착한 어린이는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걸 함부로 받으면 안 되지.”

“저기….”

“교장 선생님, 잠깐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학교 후원금 관련 이야긴 나리 학생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하고 싶네요.”

교장과 담임이 서로를 보며 망설였다. 아무리 상대가 후원하겠다며 찾아온 대기업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학생과 단둘이 남겨두고 가기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이채환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오, 혹시 이상한 상상하시는 거면 마음 놓으세요. 저 변태 새끼 아닙니다.”

“어이쿠, 그런 오해는 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 학생이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요. 저희가 여기에 같이 있으면….”

“괜찮아요, 교장 선생님.”

계나리는 이채환을 힐끗 보곤, 조금 겁이 나지만 그래도 용기 낸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까지 알고 찾아왔는지 파악부터 해야겠어.

“허튼짓하면 호신용 전기충격기로 지져버릴게요.”

“……!”

잠시 후. 교장실엔 이채환과 계나리만 남았다.

이채환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후룩. 계나리는 그를 여전히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누구신데 저를 찾아온 거예요?”

“그만해, 나리야. 다 알고 왔어.”

이채환이 커피를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미스터리 홀 지도, 뿌린 사람 너잖아.”

하. 계나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어깨에 두른 후드 망토를 잘 여미며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치마 안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어, 다리도 편히 꼬았다.

“사람 말을 잘 못 알아들으시네요.”

계나리는 입가의 웃음기를 지웠다. 정말로 주머니에서 호신용 전기충격기를 꺼내 손안에서 굴리며, 이채환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저씨 자기소개부터 하라고요. 아까부터 누구냐고 물었잖아.”

열여덟 살 여학생의 패기 넘치는 태도에, 이채환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와우.”

저 미친놈 아닙니다

이우그룹과 정원그룹을 해킹하고 대규모 방공시설을 짓도록 협박한 해커. 두 그룹은 각 회사의 보안 전문가들을 시켜 해커를 뒤쫓았다. 그러나 해커는 어떤 경로로 추적할지 환히 다 아는 듯 가는 길마다 함정을 깔아두고 그들을 따돌렸다.

그리고 다른 해커에게 추적을 의뢰하면 그들 또한 오히려 이쪽을 털어버릴 수 있다는 전문가의 경고. 결국 두 기업은 순순히 방공시설을 짓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미스터리 홀이 나타나며 상황이 달라졌다.

해커는 미스터리 홀이 나타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해커를 잡아 정보를 얻어내면 더 큰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겠다는 계산. 정부에서도 해커를 잡는 데에 힘써달란 부탁을 해왔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추적할 수 있었으면 진작 잡았을 상대라, 이채욱은 그쪽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해커의 사사로운 도움을 받았던 이해원 주변을 더 파보기로 했다. 그중 가장 수상쩍은 장소는 이해원이 드나들었던 ‘푸른 명상센터’.

이채욱은 고전적이면서도 무식한 방법을 사용했다. 돈과 시간, 인력을 쏟아부어, 해커가 이해원을 도와준 시점부터 최근까지 명상센터 건물을 드나든 사람을 모두 조사했다. 인근 CCTV, 주변에 자주 주차되었던 차량 블랙박스, 심지어 이해원 뒤를 따라다니던 VEL 엔터 깡패들의 목격담과 자료까지 캤다.

그 결과 ‘계나리’를 찾아냈다.

처음엔 2층에 있는 독서실 혹은 학원에 다니는 평범한 학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초등학생 때 세계 주니어 해킹 대회에 나간 이력이 발견되었다. 물론 이 정도로 그쳤다면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 관련 과목도 필수로 배운다고 하니.

미약한 연결고리가 발견된 건 다른 곳이었다.

형인 이채환이 조사 중인 1130 증상자 자료. 이해원과 친분이 있는 서한율. 그와 같은 팀 멤버인 길우성이 1130 증상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목을 끈 작은 메모.

[2019. 10. 양상원- 시퍼런 귀신 눈깔 여자애? 경찰 못 찾음.]

시퍼런 귀신 눈깔 여자애?

이게 무슨 메모냐고 묻자, 형의 부하직원인 도 대리는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좀, 판타지다운 사건이요.』

2019년 10월, 양상원이란 남자가 길우성에게 앙심을 품고 그의 본가에 침입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다. 그때 양상원이 눈이 시퍼렇게 빛나는 여자애에게 공격당했다 주장했다고.

『이 양상원이란 사람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행방불명입니다. 깡패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잠적한 것 같다던데요.』

해커에 대한 단서를 제대로 찾지 못해 막막했던 상황. 이채욱은 별생각 없이 도 대리가 정리한 자료를 더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양상원 공격자로 추정되는 이가 찍힌 블랙박스 사진을 발견했다. 계나리와 체격이 비슷했다.

설마.

이해원이 초능력자라는 둥, 세상이 판타지처럼 변할 거라는 형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믿고 싶진 않다. 그러나 미스터리 홀 자체가 상식을 무너뜨리는 미지였다.

형의 헛소리에 휘둘리는 것 같아 내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려 조사했다. 그리고 그날, 하필이면 계나리가 결석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양상원이 사이드 브레이크가 망가져 언덕에서 내려온 차량에 치인 날도.

‘이게 뭐야….’

혹시 몰라 해커가 이우그룹과 정원그룹을 공격한 시간대나 날짜를 확인해봤더니, 계나리가 학교와 학원 수업을 마친 뒤거나 쉬는 날에만 공격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 몇 달 전, 계나리 할아버지 명의 신용카드로 고가의 PC 장비와 노트북을 결제한 흔적도 발견했다.

‘하지만 이렇게 작고 가냘픈 여학생 혼자 양상원처럼 건장한 남성을 제압하고, 대기업 두 곳을 탈탈 털었다고?’

그리고 계나리가 해커란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모든 건 정황에 따른 그럴싸한 의심뿐.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도, 이채환까지도 고개를 기울였다.

『한번 주시해보도록 하지.』

그런데 어제. 인기 연예인의 뒤를 집요하게 캐는 것으로 유명한 앗싸일보에 서한율과 계나리가 함께 찍힌 사진이 들어왔다.

이 정도면 결코 우연으로 보기 힘들다.

증거가 없으면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서 떠보면 된다.

“어떻습니까? 이해원 씨 당신이 듣기에도 허황한 판타지 소설 같습니까?”

이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원그룹 정이장의 폭행 및 갑질 사건을 까마귀가 제보했단 이야기가 돌았었죠? 그것도 소설 같습니까?”

이채욱이 제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 그의 이마에는 조금 전, 까마귀에게 쪼여 생긴 상처를 가린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아무튼 한율이를 통해 나리 씨를 알게 된 건 사실이지만….”

이해원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리 씨가 해커라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해원은 시치미를 뚝 떼고 거짓말했다. 그리 썩 좋은 성적을 내진 못했지만, 서한율처럼 실력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역시 한때 연기를 배우고 드라마를 찍은 적이 있었다.

“VEL 엔터 관련 자료를 받았을 때 바로 옆에 나리 씨가 있었는데요? 설령 예약 발송으로 보냈다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자료는 인섭이 형과 VEL 엔터 대표, 그리고 두 사람의 뒷배 말곤 아무도 존재를 모르는 것이었어요. 저도 처음 그 자료를 봤을 때 굉장히 놀랐는데, 그걸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알아내서 빼냈다고요?”

“해커는 미스터리 홀이 열릴 걸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해커, 그러니까 나리 씨가 미래에서 왔다면….”

“…….”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저 미친놈 아닙니다.”

* * *

“그게 혹시 양상원을 제압할 때 사용한 전기충격기야?”

양상원 일까지 다 알고 왔다?

계나리는 아주 혐오하는 시선으로 이채환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스토커예요?”

“스토커는 나리 너던데. 2019년 10월 29일. 길우성 따라 제주도까지는 왜 갔어? 양상원이 그 집 담을 넘을 거라는 걸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어떻게 그날 그 시각, 그 장소에 있었을까?”

“…….”

계나리는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 일 있기 훨씬 전부터 어스래빗 팬이던데. 서한율은 그 사실 다 알고서 너랑 만나는 거야? 아니면, 그쪽도 한패인가?”

“…한패는 무슨 한패요!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계나리가 펄쩍 뛰며 날카롭게 반응하자, 이채환은 씨익 웃었다.

“나리야. 지금 아저씨의 유능한 부하직원들이 네가 썼던 컴을 수거해서 조사 중이거든?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솔직히 다 말하자. 아저씨, 너 혼내려고 온 거 아니야.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네 미스터리 홀 지도 덕분에….”

“저기요, 아저씨.”

타악. 계나리는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후드 망토를 벗어 옆에 패대기치듯 놓았다.

“아까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 왜 자꾸 미스터리 홀 지도를 내가 뿌렸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예요?”

“그야 네가 뿌린 거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고 뿌려요?”

“조사하면 다 나온다니까?”

“아, 그래요, 맞아요. 나, 양상원이 그날 우성이 오빠 해코지할 거 알고 찾아가서 막았어요. 양상원이 다른 놈까지 끌어들여서 다시 해코지하려는 걸, 숙소까지 찾아가서 또 막았고요. 그러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된 한율이 오빠랑 친해진 거고. 그런데요. 저도 그거 다 누가 알려줘서 한 일이거든요? 그렇게 하면 오빠들이랑 친해질 수 있다고 해서?”

이채환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상체를 기울였다.

“누가?”

하아. 계나리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몰라요.”

“어?”

“예전에 오빠들이 직접 만든 인형 산다고 SNS에 글 올린 적 있었거든요? 그때 오빠들이랑 가까워지고 싶지 않냐고 연락이 왔어요. 자기 일 조금만 도와주면 된다고.”

우웅.

“아, 잠깐만.”

이채환이 전화를 받았다.

“어, 말해. …뭐?”

-[좀비 PC요. 나리 학생 컴, 죄다 감염된 상태예요. 아무래도 해커가 이걸로 원격 조종했던 것 같아요.]

“…….”

툭. 이채환은 전화를 끊고선 계나리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계나리의 눈이 ‘시퍼런 귀신 눈깔’처럼 은은한 푸른색으로 물들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홀린 듯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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