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지금 우린 섣불리 움직이면 안 돼요. 오히려 그들에게 발목이 잡혀, 우리를 위한 대비조차 못 하게 될 가능성이 커요. 몇 년 동안 마력 쌓는 수련에 매달려도 이런 괴물 하나 상대하기 힘든데.”
“그럼 어떡해…?”
한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라에 맡겨야죠. 우린 영화 속 영웅이 아니에요.”
인형 갖고 싸우지 마
-이 괴물, 다시 우리나라로 오는 거 아니야?
-중국인들 지금 미스터리 홀이랑 괴물 전부 우리나라가 만든 거라고 떠드는 중임ㅋ 한 명도 안 죽은 게 그 증거래ㅋㅋ
ㄴ진짜 우리나라가 만든 거였으면 아무것도 없는 데다 만들지 미쳤다고 서울 한가운데랑 산업단지에 띄움? 무엇보다 그런 걸 어떻게 만들어;;
ㄴㄹㅇㅋㅋ
-왜 이번엔 파란 구슬 안 나타났지?
ㄴ당진은 미스터리 홀 지도에도 표기 안 된 곳임. 그래서 몰랐던 거 아닐까?
-미스터리 홀 지도에 ‘미완성’이라고 적힌 게 이런 뜻이었네 당진처럼 예고 없이 아무 데나 생길 수 있다고
-이번에도 1130 증상자들 조용했죠?
ㄴ네
ㄴㅇㅇ
ㄴ나고야에 미스터리 홀 형상 나타났을 때, 그 지역 1130 증상자들 또 호흡 곤란 증상 심하게 일으켜서 다음 미스터리 홀 나타나면 죽는 거 아닌가 했는데 아니었나 봄
‘나 진짜 안 죽는 건가?’
길우성은 따뜻한 이불 속에서 얼굴과 손만 내민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 자다가 저절로 눈이 떠져서 핸드폰을 봤더니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메시지와 전화가 여러 건 들어와 있었다.
-[우성아, 당진에 미스터리 홀 떴대ㅠㅠ 괜찮아?]
마치 친한 친구가 걱정해주는 메시지 같지만, 사생 스토커의 연락이었다.
길우성은 수신 차단한 뒤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간밤에 충남 당진에 미스터리 홀이 나타났으며, 날개 달린 거대한 괴물이 서해로 날아갔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번에도 지난 일요일처럼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정말 세상이 어떻게 될지, 또다시 미스터리 홀에서 정체불명의 위험한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서고 무섭다.
그러나 다른 1130 증상자들이 이번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댓글을 보자, 다음 미스터리 홀이 나타나면 죽을지도 모른단 두려움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괴물도 위험해 보이지만, 그래도 괴물은 눈에 보이기라도 하니까.
므앙. 언제든 달냥이 들어올 수 있도록 살짝 열어놓은 문. 달냥이 울면서 불쑥 들어왔다. 길우성은 반갑게 손을 쭉 뻗었다.
“달냐앙, 일어났어?”
킁킁. 달냥은 길우성의 손 냄새를 맡고선, 방 여기저기를 어슬렁어슬렁 살폈다. 그러곤 별 이상 없다고 판단했는지 미련 없이 길우성의 방을 나갔다.
길우성은 흐뭇하게 웃으며 손을 회수했다.
‘매일 아침 숙소 순찰도 하고. 참 성실해.’
…아니, 흐뭇하게 웃을 때가 아니지 않나?
길우성은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눈을 감으며 한숨 쉬었다. 왜 갑자기 만화나 게임 같은 일이 세상에 벌어지는 걸까.
우웅. 이번엔 이우그룹의 도 대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대학병원 검사 결과가 나왔을 때, 사흘 전 서울에 미스터리 홀이 나타났을 때에 이어서 세 번째 연락이었다.
-[당진에 미스터리 홀이 생겼다는 이야긴 들으셨나요? 몸에 자그마한 이상이라도 느꼈다면 편히 말씀해주세요. :)]
[아무 이상 없이 멀정합니다.]
[멀쩡]
-[네. 이후에도 이상증세가 느껴진다면 편히 연락 부탁드립니다^^]
[넹.]
그러고 보니 퍼플아워 진은수와 원카운트 나기혁은 괜찮은 걸까. 길우성은 인터넷 속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 실제로 아는 1130 증상자를 떠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라욘 형한테 나기혁 번호 물어봐야겠다.’
한편, 스케줄 장소로 이동 중인 원카운트의 차 안. 멤버들은 연예 뉴스란 메인에 뜬 기사를 보며 떠들었다.
[25일부터 사흘간 돔구장 콘서트 예정 아이돌, 진행 결정에 비난 여론]
“고작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쉽게 취소할 수 있겠냐고. 팔린 티켓 값만 수백억 원인데다 정가보다 수십, 수백 배 웃돈까지 주고 산 팬들, 일부러 비행기 예매, 숙소까지 잡아서 오는 해외 팬도 엄청나게 많은데.”
“팬들이 공연 취소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난리 쳤다는 건 기사에 싣지도 않았네. 또 우리 같은 아이돌은 단독 콘서트 할 때마다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데, 언제 열릴지 모르는 미스터리 홀 때문에 그걸 홀라당 날려? 내가 이 팀 소속사 대표라도 진짜 고민 많이 됐을걸. 나라에서 하지 말라고 강제 명령이라도 내리면 또 모를까.”
“음방 포함해서 예능 프로 몇 개도 휴방 검토 중이라더라. 미스터리 홀 특집 방송한다고.”
“<뮤직뮤직 대축제>랑 연말 특집도? 스페셜 무대 빡세게 준비했는데….”
“그 두 개는 이미 제작비가 만만찮게 들어가서 예정대로 진행할 것 같아. 무엇보다 돔구장이랑 거리가 있잖아.”
“아니, 미스터리 홀 지도에 표시 안 된 곳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다 같이 모여서 기도라도 해?”
“왜 이렇게 까칠하게 반응해? 가뜩이나 무서워 죽겠구먼.”
“나기혁. 넌 괜찮냐?”
나기혁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어. 이번에도 멀쩡해.”
찬형이 나기혁을 돌아보았다.
“어스래빗 길우성이 형 번호 물어본다는데. 알려줘도 돼요?”
“어.”
잠시 후. 나기혁은 길우성이 보낸 톡을 보곤 전화를 걸었다.
“길우성. 시간 되면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 물어볼 것도 있고. …어. 끝나면 톡이나 전화할게.”
* * *
‘이번 당진에 열린 게이트. 분명히 율이 오빠가 만든 것 같은데… 왜 나한텐 미리 말을 안 해준 걸까? 괜히 연락했다가 이우그룹 감시망에 걸릴까 봐? 그런데….’
터덜터덜. 계나리는 학교를 향해 걸어가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군용 헬기를 종잇장처럼 가볍게 삼키고 찢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모습.
‘오빠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강한 마법일수록 주변에 미치는 파장 또한 크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율은 환영이란 게 들통나지 않도록 아주 깔끔하게 헬기를 찢는 물리력을 발휘했다.
‘으으, 어떻게 했는지 빨리 물어보고 싶다! 어떻게 했을까? 역시 기본 마력이 탄탄하게 받쳐줘야겠지? 이런 환영을 현실감 넘치게 구현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니까 마나를….’
“계나리 학생?”
“깜짝이야!”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터라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계나리가 놀란 고양이처럼 펄쩍 뛰자, 이채욱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저는 이우그룹의 이채욱이라고 합니다.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계나리는 이채욱을 째려보며 까칠하게 반응했다.
“저 학교 가야 하는데요?”
“학교 측엔 저희가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이우 자동차 핵심 공장 인근에 미스터리 홀이 생겼다. 그래서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이채욱은 상당히 피곤한 모습이었다. 이마엔 반창고까지 붙어 있고. 그러나 계나리는 그를 대놓고 경계하는 척했다.
“또 황당한 누명 씌우고 우기시려고요? 가져간 제 컴이나 빨리 돌려주시죠? 저 어제 부모님께 엄청나게 혼났거든요? 무슨 짓을 했길래 대기업에서 컴을 가져가고, 또 한밤중에 사람이 불쑥 찾아오냐고? 자꾸 이러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제발.”
이채욱이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
계나리는 잠시 고민했다.
이채욱은 계나리가 겪은 미래에서 그나마 상식적으로 행동하다가, 영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한 인물이었다. 그래서일까. 슬며시 마음이 약해졌다.
계속 거절해도, 어제 이채환이 그랬던 것처럼 강제 면담 시간을 만들 수도 있고.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다 큰 어른이 길에서 울지 마요. 꼭 내가 울린 것 같잖아.”
“안 울었습니다.”
그날 밤. 한율은 길우성과 함께 아림 엔터테인먼트를 찾았다.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아림 엔터 경비원은 운전석에 앉은 한율을 보곤 주차차단기를 올려주었다.
길우성이 신기하단 얼굴로 주차장을 살폈다.
“이곳이 바로 대형기획사 주차장! 와, 넓다. 멋진 차도 많아.”
곧 도착한다는 길우성의 톡을 보고 내려왔는지, 건물 내부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 앞엔 나기혁이 서 있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그는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려 다가가자, 잠겨있던 공동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당.”
“초대는. 여기까지 오라고 해서 미안하다. 밖에서 편히 나눌 얘긴 아닌 것 같아서.”
나기혁이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더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은수도 나오기 힘들고.”
“잉? 은수 씨요?”
“은수도 1130 증상자잖아. 아까 길우성 너랑 회사에서 만난다고 했더니, 은수도 같이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더라. 그런데 좀 놀라겠네.”
“왜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삑. 나기혁은 출입증을 리더기에 댄 뒤 1층을 눌렀다. 출입증이 없으면 엘리베이터 작동이 안 되도록 설정된 모양이었다.
나기혁이 힐끗 한율을 보며 대답했다.
“서한율도 와서.”
“아.”
“…….”
나기혁을 따라 먼저 도착한 곳은 아림 엔터 내에 있는 카페였다. 그곳에서 각자 마실 음료를 산 뒤 3층으로 올라갔다. 지나가던 아림 직원들이 한율과 길우성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고, 두 사람은 꾸벅꾸벅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밤늦게 실례합니당. 저희 스파이 아니에요.”
나기혁은 안에서 블라인드가 쳐진 3번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안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본 그가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와.”
회의실에는 퍼플아워 진은수와 히아신스 호수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밤늦게 죄송합니당.”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나기혁의 말처럼 진은수는 한율을 보곤 상당히 놀란 듯 허둥거렸다.
“여, 기… 편히 앉으세요.”
민낯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지 머리카락도 앞쪽으로 슥슥 내리듯 정돈했다. 민낯은 광고 촬영장이나 음방에서 자주 봤었는데.
호수는 당황해하는 자신의 동생을 한번 보곤, 먼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두 분, 저녁은 드셨어요?”
한율과 길우성도 자리에 앉았다.
“네, 먹고 왔어요. 두 분은요?”
“저희도 가볍게.”
“아림 엔터는 처음 와 봤는데, 진짜 넓고 예쁘네요. 아, 조금 이르지만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이건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챙겨온 방문 선물이에요.”
나기혁이 ‘회의 중’ 팻말을 걸어놓고선 문을 닫았다.
“뭐 가져왔는데?”
“우리 팀 굿즈.”
지구를 품에 안은 토끼 인형 두 개가 테이블에 나란히 놓였다. 토끼 인형이 입은 검은색 티셔츠 뒤에는 어스래빗 로고가 멋지게 새겨져 있었다. 정품 인증 홀로그램 스티커가 붙은 태그도.
나기혁이 황당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남의 기획사에 본인들 굿즈 가져오는 아이돌이 어디 있냐.”
“어스래빗이 다녀간다는 깃발?”
“뭔 소리야.”
“이래 봬도 이거 우리 데뷔 초창기에 한정판으로 생산한 거라 이젠 짝퉁밖에 못 구하는 귀한 거거든요? 큰맘 먹고 팀장님 졸라서 두 개나 가져왔는데 이런 홀대라니!”
길우성이 호수와 진은수 쪽으로 인형을 내밀었다.
“나 선배님은 필요 없으신 것 같으니, 두 분께 선물로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와, 촉감 좋다.”
“한정판이면 나중에 열애 증거로 거론되기 딱 좋겠는데. 사진이나 동영상에라도 찍히면….”
찰칵. 나기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호수가 토끼 인형을 안고선 셀카를 찍었다. 그녀가 나기혁을 향해 쌀쌀맞은 어투로 말했다.
“기혁 씨가 남 열애 증거나 걱정하니 참 우습네요.”
“…….”
“아무리 우리 굿즈가 귀여워도 그렇지. 인형 가지고 싸우지 마십쇼, 다 큰 어른들이.”
“누가 인형 가지고 싸워.”
“당당하고 솔직하게 1130 증상자 모임으로 온 선배님이 방문 선물로 줬다고 말하면 돼, 은수야.”
“응.”
똑똑. 한율은 테이블을 두드리며 주의를 끌었다.
“시간도 늦었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그러자. 그런데 서한율 넌 길우성 보호자로 온 거야?”
“아니요.”
“아니었어?”
“왜 길우성 네가 놀라냐.”
한율은 네 사람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토끼 인형의 볼을 만지작거리던 진은수가 얌전히 인형을 두었다. 한율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도 작년 연말 특집 방송이 열린 돔구장, 지난 11월 30일, 그리고 12월 11일 RMMA에서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거든요.”
덜컹.
놀란 길우성이 의자 소리를 내며 경악했다.
“뭐라고?! 써한 너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한 번도 없었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