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진은수도 놀란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나기혁과 길우성, 진은수가 괴로워하던 모습이 여러 카메라에 찍히던 그때, 한율은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으므로.
“…아, 맞다.”
나기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돔구장에서 나랑 같이 그 소리 들었었지?”
“네. 사탕 세 개에 찔린 선배님이….”
“그만.”
웃을 수 있을 때 웃자
나기혁이 호수와 진은수의 눈치를 살피며 빠르게 말했다.
“그 얘긴 지금이랑 아무 상관 없잖아.”
그러곤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들린 소리도 미스터리 홀이랑 관련된 거였나? 그땐 소리만 들리고 몸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그때도 소리가 났었어?”
한율을 가늘게 째려보던 길우성이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물었다.
“어. 돔구장 천장 문젠가 싶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음악 소리도 아주 컸고, 비바람도 세게 불었잖아.”
“그날….”
진은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송 끝나고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들리지 않았어요? 저 그때 선배님이랑 눈, 마주친 것 같아서요.”
“네, 그때도 들렸어요. 솔직히 은수 씨랑 내 귀에만 들린 것 같아 이상하기는 했는데…. 그 뒤로 별일이 없어서 그냥 넘겼어요. 다른 일로 바쁘기도 했고.”
호수를 제외한 넷은 지금껏 겪은 증상도 털어놓았다. 다들 비슷했다. 하늘이 찢어지거나 무너지는 듯한 천둥소리, 호흡 곤란, 온몸을 옥죄는 압박감, 눈앞이 핑 도는 아찔함 등.
“인터넷에 올라온 공통 증상과 다 맞아떨어지네요.”
“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 100% 믿긴 힘들겠더라. 다른 데서 보고 들은 내용을 자기 경험담처럼 쓰고, 거기에 허풍이랑 과장, 거짓말까지 하는 관종들도 있어서.”
“1130 증상자들이 모인 오픈 채팅방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내가 들어가서 계속 봤는데.”
나기혁이 자신의 핸드폰을 툭툭 두드렸다.
“정부가 만든 사이트 있지? 거기 신고 등록 인증만 해도 참여 가능한 곳이라 못 믿겠더라. 외계인이었던 전생이 떠올랐다고 헛소리하는 놈도 있고, 어릴 때 일부 기억이 없다는 둥, 만화나 소설 주인공들이 겪었을 법한 과거를 늘어놓는 놈도 있고.”
“어질어질하네.”
“애초에 1130 증상자란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잖아. 우리야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RMMA에서, 하늘에 미스터리 홀 형상이 만들어진 것과 동시에 똑같은 증상 일으키면서 쓰러졌으니 본의 아니게 까발려진 거지만. 솔직히… 다들 알리기 싫지 않았어? 본인이 1130 증상자란 거?”
길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가 사람들 모아서 실험한다느니, 해외 출입국이 막힌다느니 그런 이야기가 있었잖아요. 왠지 이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될까 봐 겁도 나고.”
“저도요….”
“옆에서 계속 들어보니까 약간 의문이 생기는데.”
호수가 살짝 손을 들며 말했다.
“돔구장은 미스터리 홀 지도에도 표시된 곳이잖아요. RMMA가 열렸던 나고야도 그렇고. 그래서 1130 증상자가 미스터리 홀이랑 연관된 건 알겠는데… 정작 11월 30일엔 미스터리 홀이 어디에서도 목격되지 않았단 말이죠? 20일이랑 바로 어젯밤은 미스터리 홀이 나타났음에도, 1130 증상자들은 별 탈 없이 넘어갔고.”
진은수도 조심스럽게 의문을 표했다.
“항상 같은 사람들에게만 증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상해요. RMMA가 열린 날, 나고야 1130 증상자들은 두 번이지만 우리는 작년 돔구장까지 치면 세 번 겪은 거잖아요.”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이건 진짜 우연 아닌 것 같은데?”
한율은 어느새 식은 커피를 마시며 속으로 대답을 삼켰다.
그야 예비 각성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전조 증상이니까.
‘그래도 여럿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니 핵심 의혹도 나오네.’
“지금 은수가 말한 의혹.”
나기혁이 그들을 둘러보며 의견을 물었다.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좋겠지?”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 1130 증상자 관리 부처에다 알리는 게 좋겠어요. 조금이라도 정보가 수집되어야 나라에서도 원인을 찾기 쉽겠죠.”
“이우그룹에는? 거기도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 있다 싶으면 꼭 알려달라고 했잖아.”
“거기는 부처 담당자가 말해도 괜찮다고 하면 그때 알려줘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으음.”
길우성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그날 상품권 선물을 받는 게 아니었어.”
“너도 상품권 받았냐?”
“나 선배도?”
“은수한텐 그래픽카드 주던데.”
“오잉.”
1130 증상자 관리 부처엔 한율이 대표로 말하기로 하고, 그들은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혹시 몰라 단톡방도 하나 만들었다.
“개인적인 연락은 자제하도록 해요.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죠?”
호수의 시선이 나기혁을 향했다. 나기혁이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네, 은수 보호자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배님.”
“퍼플아워도 <뮤직뮤직 대축제> 출연하죠? 그날 봐요, 은수 씨.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배님.”
“네. 인형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 봐요. 수고하세요, 선배님.”
한율과 길우성은 진은수, 호수와 인사를 나눈 뒤,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기혁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도 놀랍네.”
나기혁이 한율에게 물었다.
“너 RMMA에서 멀쩡히 있지 않았어? 그래서 아무도 네가 1130 증상자란 거 의심 못 했던 거고.”
“전 다른 사람들보다 증상이 약하게 오더라고요. 숨 쉬는 게 조금 답답한 정도?”
길우성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런데 왜 나한텐 말을 안 했냐고.”
“말할 필요를 못 느껴서?”
“싸우자, 서한율!”
“남의 회사에서 싸우지 마, 이것들아.”
한편, 진은수는 어스래빗 굿즈 인형을 품에 안고선 호수와 함께 연습실로 향했다.
호수가 물었다.
“그렇게 좋아?”
“응. 귀엽고, 촉감도….”
“아니, 한율 씨 말이야. 아직도 좋아해?”
“…….”
진은수는 입을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호수는 귀까지 새빨갛게 물드는 동생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누가 나한테 그러더라. 미스터리 홀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오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으로 악화하면 그때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라고. 그때가 되면 팬들도 이해해줄 거라고. 나 그 얘기 듣고 다짐했다?”
“…무슨 다짐?”
“괴물이 회사로 쳐들어오는 순간, 라방이든 어디든 라이브로 고백할 거야.”
호수는 토끼 인형으로 외치는 시늉을 했다.
“야, 나 너 좋아한다! 1분 만이라도 좋으니까 나랑 사귀자!”
“…….”
“그냥, 그럴 거라고.”
멍하니 언니를 바라보던 진은수는 뭐라고 대답할까 망설이다가, 농담으로 받아치기로 했다.
“공개 고백은 열에 아홉, 사이가 더 멀어지는 최악의 방법이라던데?”
“앗, 그래? 나는 요란하게 공개 고백받고 싶은데.”
“응. 전해줄게, 언니.”
“고마워, 동생아.”
* * *
“모임은 어땠어?”
회사로 돌아온 한율은 유호의 작업실을 찾았다. 한율은 소파에 편히 앉아, 조금 전 아림 엔터에서 나눈 이야기를 간추려서 들려주었다.
“그런데 한율이 너도 1130 증상자라는 거 감추고 싶어 했잖아. 왜 갑자기 밝힐 생각이 든 거야?”
“구체적으로 어떤 증상을 겪었냐, 신고 등록해라, 검진받아라, 무슨 이상 있으면 바로 알려달라 등등. 솔직히 이런 질문이나 요구받는 게 귀찮아서 미뤘는데, 지금이라도 밝히는 게 나중에 각성자 리스트 얻기 수월할 것 같아서요.”
유호의 얼굴에 ‘굳이 리스트를 얻어야 할 이유가 있나?’라는 의아함이 스쳤다. 그러나 곧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서로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
만에 하나 그들이 계획에 방해될 경우를 대비해 신상을 알아둬야 한다. 그래야 없애기 수월하므로.
“그나저나 당진엔 정말 안 가봐도 괜찮을까? 아무리 이우그룹이 우리까지 주시하고 있다곤 해도….”
유호가 머뭇거리다가 한율에게 물었다.
“이참에 솔직히 마법의 존재를 밝히고 나라를 돕는 건 어때? 그렇다면 적어도, 더 큰 재앙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할 수 있지 않을까?”
“…….”
“아니, 한율이 네가 지금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건 잘 알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 놓고 싶지 않다는 것도. 나 역시 그러니까. 하지만… 군용 헬기가 맥없이 당하는 걸 봤더니 솔직히 마음이 편치 않아. 지금이라면 사람들도 나리 씨나 네 얘기를 믿어주지 않을까? 얼마 전 발생한 미스터리 홀을 막은 두 사람의 말이라면?”
“형의 생각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한율은 유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싫어요.”
너무 단호하게 거절해서 그럴까. 유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유… 물어봐도 돼?”
“지금 내가 가진 힘과 정체를 알리면 우리 가족, 내 주변 사람들을 인질로 삼아 대의를 위해 움직이라고 협박할 게 뻔하니까요.”
“……!”
한율은 그런 비슷한 일을 지겹도록 겪었다는 듯, 살며시 쓴웃음을 지었다.
연기였다.
“그래서 싫어요.”
“…미안해.”
유호는 슬픔에 가까운 복잡한 표정으로 한율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이 너도 지금과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가 있을 텐데,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다.”
『호가 걱정하더라. 미래가 상상 이상으로 굉장히 암울해서 네가 학생을 가르치는 데에 부정적이었던 거 아닌가 하고.』
어젯밤 JE가 들려준 말. 유호는 한율이 말하지 않은 시간을 추측하며 공감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쉽게 속는 것일까.
“아니에요, 형. …참, 이우그룹 사람이 또 나리 씨를 찾아왔대요.”
“당진 미스터리 홀 때문에?”
“네. 어젯밤엔 나리 씨가 집에 있는지 사람이 직접 와서 확인하고, 오늘 아침엔 부회장 둘째 아들인 이채욱이 찾아왔대요. 해원이 형한테 찾아갔던 사람이요.”
“그래? 나리 씨는 괜찮대?”
그들은 만약을 위해 한동안 마법 학교 단톡방을 포함, 계나리와 되도록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네, 괜찮대요. 이채환처럼 집요하게 심문하지도 않고. 다만.”
“다만?”
“해커랑 미스터리 홀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하. 한율은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나리 씨 붙잡고 한 시간 내내 하소연했대요.”
“…나리 씨가 참 곤란했겠네.”
다음 날인 24일 아침.
대형 포털사이트 뉴스란 메인.
[[속보] 당진 미스터리 홀 소멸!]
[약국마다 비상약품 품귀 현상… 정부, 사재기 자제 당부]
[[미스터리 홀 기획 취재] 비어가는 마트 진열대]
[전 세계 불안 확산, 크리스마스 행사 연달아 취소]
[미스터리 홀에서 나온 괴물, 어디로 사라졌나]
[[속보] 괴물이 삼켰던 군 헬기 조종사, 의식 되찾아]
-조종사 아저씨, 괴물한테 기관포 사격 가하고 눈 마주친 뒤로 아무것도 기억 안 난대요ㅠㅠ
ㄴ영상으로 본 나도 개충격받았는데 당사자는 오죽했을까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괴물이 삼켰다가 뱉어낸 거면 헬기에 위액이랑 타액 같은 것도 같이 묻었을 텐데 별다른 소식이 없네.
ㄴ하루 만에 결과가 나오겠냐
-작성자가 삭제한 댓글입니다.
ㄴ이미 정부가 헬기 발견된 곳 봉쇄해서 조사 중임. 서해 어업 행위도 어제부터 전부 중지됐고 군부대도 전부 비상 대기 태세 들어감. 그런데 군 관계자 말에 따르면 괴물이 당진에 나타났을 때부터 레이더에 안 잡혔다고 했음. 그래서 전투기까지 띄웠는데도 수색에 오래 걸리는 거라더라. 이 와중에 중국이랑 북한은 괴물 찾는 핑계로 영공 침공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ㅈㄹ 중이고
-괴물 중국 여행 감 ㅅㄱ
ㄴ괴물도 살기 싫다고 가버린 우리나라ㅋㅋㅋㅋ
ㄴ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거임? 괜히 킹받네. 돌아와라 괴물쉨ㅋㅋㅋㅋ
ㄴ먼데 이 ㅂㅅ들은ㅋㅋㅋ
ㄴ그래. 웃을 수 있을 때 웃어두자 위의 바보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