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9화 (279/427)

-애들 표정=내 표정

“…잠깐만. 서한율 너 RMMA 때 멀쩡했잖아.”

“저는 숨 쉬는 게 조금 답답할 뿐, 견딜 만했거든요. 이것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나 봐요.”

“아니 넌 무슨 그런 얘기를 케이크 먹으면서 하니?”

한율은 카메라를 향해 생긋 웃었다.

“어쨌든 저도 멀쩡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율톢 평소에도 참 쿨하다 생각하긴 했는데

-아니 진짜 무슨 이런 심각한 얘기를 케이크 먹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해ㅠㅠ

우웅.

“팀장님한테서 전화 왔네요.”

“한율아, 너 혹시 팀장님한테도 말씀 안 드렸니?”

“네.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아니야, 여기에서 받아. 방송 중이라 덜 혼날 거야.”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곤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으로.

-[전에 우성이가 숨겼다가 혼나는 거 보고도 한율이 너까지…! 내일 아침, 내가 직접 픽업하러 갈 테니까 혼날 각오 단단히 해.]

뚝.

“이건우 때문에 공개적으로 혼난 서한율.”

“…미안.”

-ㅋㅋㅋㅋㅋㅋㅋㅋ

-서한율 혼난대요ㅎㅎㅎ

-율톢도 혼나는 구나ㅎㅎ 그런데 이번 일은 혼날 만했어. 그런 중요한 얘기를 왜 안 해!

-혼나는 모습 직관하고 싶다

중간에 이렇게 잠깐 소동이 있었지만, 라방은 차남석 생일 선물 증정식까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다음 날. 취소 이야기가 나돌았던 KBC <뮤직뮤직 대축제>가 예정대로 진행된다고 하여, 어스래빗 멤버들은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차 운전석에는 오 팀장이 앉아있었는데, 그는 한율을 조수석에 앉게 한 뒤 KBC에 도착할 때까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평소 조용하던 사람이 화나면 가장 무섭다더니. 나까지 내내 혼나는 기분이었어.”

KBC에 도착, 리허설을 위해 스튜디오로 이동할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난 오 팀장님 래퍼인 줄 알았잖아. 어떻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쭉 말할 수 있는 거지?”

“오 팀장님도 예전에 아이돌 연습생이었으니까, 그 가락이 있으신 거겠지.”

“뭐?”

“으잉?”

멤버들의 시선이 유호를 향했다. 한율도 살짝 놀란 눈으로 유호를 바라보았다.

“정말요?”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

“블블의 수재 선배님. 나 스엔 연습생으로 들어가기 전에, 오 팀장님도 스엔에 있었대.”

“연예기획사 직원 중 연습생 출신이 은근히 있다더니….”

“안경 벗으면 잘생기긴 하셨지.”

“음.”

몇 시간이 지나 생방송 <뮤직뮤직 대축제> 한 시간 전. 방청객 입장이 시작되었다.

어스래빗 팬덤이 모인 자리에 짙은 선글라스를 낀 남녀가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가지고 온 기다란 슬로건을 무릎에 세웠다.

[지구♡♡파랑요정 서한율♡♡토끼]

착한 친구 아닙니다

올해 <뮤직뮤직 대축제>는 레드카펫이 생략되었다.

아침 리허설을 마친 어스래빗은 일단 퇴근했다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샵으로 가서 단장한 뒤 조용히 재출근했다.

대기실에 짐만 놓곤 단체 대기실 인터뷰가 열리는 장소로 이동 중.

“미스터리 홀이랑 괴물 때문에 시국이 불안하잖아요. 이 와중에 레드카펫 생중계로 태평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이 나오면 비난 여론이 일 것 같아 생략하게 됐대요.”

“누구한테 들었어?”

“아버지요.”

“으음…. 이런 때에 시끌벅적한 축제 분위기가 웬 말이냐고 다 때려치우라는 사람들, 있긴 있더라.”

박가람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미스터리 홀에서 위험한 괴물들이 튀어나와서 일상이 엉망이 되면, 두 번 다시 이런 연말 특집 방송은 꿈도 못 꾸게 될 텐데.”

“너답지 않게 웬 우울한 소리야. 우리, 내년에도 별 탈 없이 이 자리에 올 거야.”

박가람이 아련한 눈으로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이건우건우.”

“…느끼하게 왜 이래?”

단체 대기실에 모인 아이돌은 아침 리허설 때 인사했던 이들이라, 가볍게 묵례만 하고선 빈자리를 찾았다.

“서한율 너 어젯밤 라방에서 고백한 거 기사 수십 개 떴더라. 생활 뉴스란에도.”

원카운트 나기혁이 다가와 커피를 내밀었다. 비싼 캔 커피라, 한율은 기꺼이 받아 뚜껑을 열었다.

“네. 참 부담스럽게.”

“미스터리 홀 특조위나 관리센터에서 더 연락 온 건 없고?”

“다른 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조사해보겠다곤 하는데, 결과를 따로 알려주진 않을 것 같아요.”

라이언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사례?”

“그런 게 있어. 몰라도 돼.”

“응. 하뉼한테 친한 척하지 마. 옮아.”

나기혁이 발끈했다.

“내가 병균이냐, 옮게?”

“안 옮아요. 그런 건 그 사람 고유의 본성이자 인성 문제라.”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르는 건지 입에 담진 않았으나, 나기혁은 명치를 얻어맞은 얼굴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

“하뉼, 나이스 샷.”

“…너 커피 도로 내놔.”

“이미 입 댔는데요.”

“한율아.”

대기실로 블블의 민준이 들어오며 한율을 불렀다. 세 사람은 그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다른 후배 가수들도.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 안녕하세요. …너 진짜 몸 괜찮아?”

오늘 아침 민준과는 리허설 시간이 엇갈려 만나지 못했다. 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한율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픈 데는 없고?”

“네, 멀쩡해요. 괜찮아요.”

민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응, 괜찮아 보인다. 이젠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잔걱정이 많아져서 눈으로 직접 봐야 안심되더라.”

“나이가 들다뇨. 내년에야 고작 서른이면서 무슨 소리세요.”

진심이 담긴 한율의 말과 표정에, 민준이 쑥스럽게 웃었다.

“어….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

민준 뒤를 지나가던 스타믹스의 JE는 잠시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한율을 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막 대기실로 들어오는 아이허니 유린과 마주쳤다.

유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 손지은.”

“어. 하이.”

JE는 담담하게 인사를 받곤 멤버들이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그러나 다른 아이돌들은 유린과 나기혁을 번갈아 살피며 조용히 속닥거렸다. 그리고 대기실 분위기가 술렁거릴 때 즈음,

“안녕하십니까!”

아이허니 막내 멤버 서래가 밝고 큰 목소리로 인사하며 들어왔다.

“다들 미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부분 오늘 아침 리허설 때 만나 인사를 나눴는데 새삼스럽게.

유린을 둘러싼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걸 막고자 하는 게 눈에 보여, 눈치를 살피던 아이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답했다.

“…네, 선배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

나기혁은 유린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조용히 원카운트 멤버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유린 역시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한율의 뒤에 앉은 다른 아이돌들이 속닥속닥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여기에 퍼플아워까지 왔으면 진짜 숨 막혔을 듯. 인터뷰 시간 달라서 천만다행이다.”

“제작진이 일부러 떨어뜨린 것 같아.”

“솔직히 미스터리 홀이랑 증상자 이슈 아니었으면 더 난리 났었을걸. 같은 팀 멤버들은 무슨 죄야.”

거리가 있어서 뭐라고 떠드는지는 몰라도, 어떤 종류의 대화를 나누며 어떤 시선을 보내는지는 충분히 느껴질 터다. 그러나 유린은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사람처럼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고, 나기혁 또한 아예 남 일인 듯 아무렇지 않게 리더와 이야기를 나눴다.

단체 대기실 인터뷰를 마치고 어스래빗 단독 대기실.

박가람이 진지한 얼굴로 고찰했다.

“역시 그 정도로 뻔뻔해야 바람도 피울 수 있는 건가? 어떻게 안색 하나 안 변하고 웃으면서 인터뷰할 수 있는 거지?”

“본인 말론 그분이랑 헤어진 뒤에 만난 거라던데. 그 간격이 짧아서 오해가 생긴 거라고.”

“실망이다, 이건우건우! 동갑이라고 감싸주는 거냐?!”

“아니,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고. 나도 바람둥인 극혐이거든? 하지만 유린 선배님도 두 사람이 헤어진 걸로 알고 만난 거라니까….”

길우성이 허리에 양손을 올리며 훈계했다.

“아무리 팬이라도 무작정 편들어주는 건 옳지 않아, 이건우건우.”

“너까지 형 이름 막 불러라? 그리고 팬 아닌지 좀 됐거든?”

“지조까지 없다니…! 실망이다, 이건우건우!”

“…막내야. 내일 형이랑 오래간만에 운동하러 갈까?”

“싫다, 이건우건…. 살려줘!”

“이 버릇없는 막내, 혼 좀 내고 오겠습니다.”

이건우가 길우성을 끌고 대기실을 나갔다. 달칵. 한율은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을 제대로 닫고선 소파에 앉았다. 대기실에 설치된 TV에선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이어서 미스터리 홀 관련 소식입니다.]

나흘 전 당진 미스터리 홀에서 나타난 날개 달린 괴물, 괴물이 헬기를 뱉어냈던 장소와 서해 영상이 짧게 나왔다.

[22일 밤 충남 당진에 발생한 미스터리 홀에서 나타나 서해로 날아간 괴물을 목격했다는 중국 현지인들의 제보가 이어지면서 중국 당국이 긴장하고 있습니다. 26일 중국 해군은….]

크리스마스였던 어제부터 중국 칭다오 연안에서 괴물을 봤다는 목격담 신고가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

[오늘 새벽 2시경엔 중국 국적 전투기가 우리나라 영공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해 우리 군이 즉각 경고 사격 등으로 대응에 나섰으나, 중국 측은 괴물 수색 도중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며….]

심각하게 뉴스를 보던 차남석이 중얼거렸다.

“난 솔직히 괴물보다 이런 게 더 무서워.”

“어? 왜?”

“우리나라 영공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아?”

“어디까진데?”

차남석이 강보배 옆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공]을 검색해 지도를 보여주었다. 강보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생각보다 되게 좁네? 가깝네?”

조용히 곁을 지키던 매니저 현장전이 말했다.

“영공보다 범위가 넓은 카디즈에 들어올 때도 우리나라 공군 허가를 받는 게 관례인데, 그딴 것도 없이 영공까지 침범해서 대놓고 엿보고 간 거야. 미사일로 중무장한 외국 전투기가.”

“카디즈가 뭔데요?”

“한국 방공식별구역. Korea Air Defence Identification Zone. 줄여서 KADIZ. 자세한 건 검색해서 보렴.”

강보배가 멍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까, 중무장한 외국 전투기가 코앞까지 왔었다는 거죠?”

“정확히는 한 발 슥 집어넣었다가 간 거지.”

“으….”

“…….”

한율은 고개를 기울인 채 생각에 잠겼다.

23일 새벽에 없앤 환영이 바로 어제 중국 연안에서 목격?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기가 막힌 우연으로 마침 그곳에 진짜 게이트가 생겼어도, 똑같이 생긴 괴물이 나타날 리 없었다. 왜? 그 괴물은 한율이 멋대로 상상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너튜브를 통해 괴물의 모습이 널리 퍼졌으니, 다르게 생겼다면 진작 알았을 텐데.’

한마디로 중국의 수작질이었다. 자국 연안에서 목격됐으면 그쪽을 수색해야지, 왜 반대인 이쪽 영공을 침공하느냔 말이다.

[이어서 다음 소식입니다. 일본 정부가 1130 증상자 격리를 검토 중이란 사실이 알려지며….]

뉴스가 끝나고 생방송 <뮤직뮤직 대축제>가 시작되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대기실에서 지루하게 시간을 죽이다, 2부 중반이 되어서야 슬슬 몸을 풀고 백스테이지로 이동했다. 2부 마지막 순서인 까닭이었다.

마이크와 인이어 점검을 마치고 각자 무대 등장 위치로 갈라지기 전, 유호가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올해도 다들 정말 수고 많았어. 우리, 끝까지 다치지 말고 멋있게 하고 내려오자.”

오늘 <뮤직뮤직 대축제>가 어스래빗의 2020년 마지막 단체 스케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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