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0화 (280/427)

“어스!”

“래빗!”

“가자!”

앞 순서인 퍼플아워의 무대가 끝나고 조명이 꺼졌다.

한율은 작은 야광 표식을 보며 무대로 올라갔다. 시선이 습관적으로 토끼 모양 푸른빛 응원봉 물결을 찾았다. 이프림이 모인 곳. 여러 기발한 슬로건이나 머리띠가 응원봉 불빛에 물들어 반짝거렸다.

[지구♡♡파랑요정 서한율♡♡토끼] 슬로건을 발견한 것도 그때.

“……?”

‘파랑 요정’은 한율의 미스터리한 점을 모아놓았던 너튜버가 제목에 썼던 그의 별명이었다.

왜 하필 미스터리 홀로 소란스러운 지금, 저런 슬로건이 등장했을까.

음악이 시작되며 조명이 환해졌다. 한율은 작은 의아함을 미룬 채 무대에 집중했다.

한편 그 시각, 이우그룹 부회장의 차남 이채욱의 집.

서한율이 나온다고 해서 TV에 KBC <뮤직뮤직 대축제>를 틀어놨던 이채욱은, 잠깐 화면에 스친 [지구♡♡파랑요정 서한율♡♡토끼] 슬로건을 보고선 경악했다.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는 곧바로 이채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혹시 KBC에 사람 보내셨습니까?!”

-[어. 왜?]

“진짜로… 서한율이 미스터리 홀을 막은 초능력자 중 한 명이면 어쩌려고 그런 겁니까? 협조 구하려면 지금부터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네 정체 알지롱’ 이렇게 떠보면서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생방송에서 저런 문구를 쓰면…!”

-[왜 이렇게 오버야. 모르는 사람 눈엔 별 뜻 없는 주접으로 보일 텐데.]

“모르는 사람이요? 모르는 사람이요?”

답답함이 밀려와, 이채욱은 한숨을 크게 훅 내쉬었다.

“해커 찾는 게 지금 우리뿐입니까? 우리가 해커를 찾아낼 걸 기대하면서 주시하는 눈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가 계나리를 찾아간 것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직원들한테 저런 슬로건을 들고 가라 했단 사실이 알려지면….”

-[그냥 가볍게 놀라게 해주려고 그런 건데?]

“서울 미스터리 홀을 막았던 거대한 보호막, 무슨 색이었습니까.”

-[…….]

핸드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한참 만에 이채환이 대답했다.

-[파란색. …야, 그런데 고작 그거 가지고 서한율이랑 연관 지을 사람이 누가 있냐? 우리야 계나리랑 이해원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거란 걸 알고 있으니까….]

“내 말은, 서한율도 그렇게 생각할까 이거죠. 서한율로선 우리가 정체를 까발려 버리겠다 도발하는 걸로 보일 수 있단 소립니다.”

이채환이 하하 웃었다.

-[그렇게 꽉 막힌 친구는 아닐 거야. 평소에 기부도 많이 하는 착한 친구잖아. 같은 팀 멤버들이랑 부모님을 위해서 튼튼한 단독주택이나 별장, 독채가 여럿 있는 펜션까지 준비할 만큼.]

“아니요. 그것만 봐도 단순히 착한 친구 아닙니다.”

이채욱은 TV에 나오는 서한율을 보며 말했다.

“정말 착한 친구라면 진작 미스터리 홀과 괴물의 위험성을 널리 알렸겠죠. 인기 많은 아이돌이니 믿어줄 사람도 많을 테고요. 하지만 서한율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만 조용히 준비했습니다. 이건, 자신의 영역 테두리가 분명한 사람이란 증거라고요.”

-[그래도 미스터리 홀에서 쏟아져 나오던 괴물들 막았잖아? 진짜 서한율이 ‘파랑 요정’이면 말이야.]

“네, ‘파랑 요정’이란 전제하에, 당진 미스터리 홀엔 코빼기도 안 비췄죠. 하필이면 우리가 나리 씨랑 해원 씨를 찾아간 그 날 당일!”

-[…….]

이채환이 조용해졌다. 이채욱은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심한 비약일 수도 있지만… 미스터리 홀을 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해본 적 없습니까?”

-[…에이, 그거야말로 말이 안 돼. 그건 완전히 모순이잖아. 우리 동생, 나보다 상상력이 풍부했구나? 처음 알았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에게 그런 말을 듣자 이채욱은 순간 발끈해, 전화를 뚝 끊었다.

평범하게 평화롭다

‘칭찬한 건데 왜 화를 내지?’

서재 소파에 드러누워 이채욱과 통화하던 이채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핸드폰을 보다가, 소파 옆 탁자에 툭 던졌다. 그리고 통화하느라 줄였던 TV 볼륨을 높였다. <뮤직뮤직 대축제>에서 어스래빗이 두 번째 곡을 시작했다.

평소 남자 아이돌은커녕 이런 음악방송을 볼 일이 거의 없던 터라, 참 화려하단 생각부터 들었다. 화장한 게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무대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고.

‘상대방이 도발로 오해한다면, 그 오해를 풀어주면 되는 거 아닌가?’

이채환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이불을 걷으며 일어났다. 책상 앞에 앉아 이우그룹 계열사별로 정리한 바인더를 몽땅 꺼내 살폈다.

‘뭐든 금융치료가 최고지.’

10분 뒤. 이채환은 도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 대리, 자?”

-[…깼습니다.]

* * *

<뮤직뮤직 대축제> 스케줄을 끝내고 돌아와 씻었더니 어느새 새벽 2시.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지만, 한율은 마법 아이템으로 쓸만한 액세서리를 고르며 계나리와 통화했다.

-[아름이가 그러는데 그 슬로건 든 사람들, 한눈에 봐도 팬 아닌 것 같았대요.]

“아름이? 혹시 이아름?”

-[네. 오빠랑 남석 오빠 1호 팬 아름이요. 작년에 저랑 같은 학원 다니면서 친해졌어요.]

오래간만에 듣는 반가운 이름이었다. 어스래빗으로 데뷔하기 4년 전, WB래빗 엔터 앞에서 처음 만났던 당찬 후드 소녀.

팬 이벤트 경쟁률이 낮았던 초기엔 곧잘 보였으나, 어스래빗 인기가 많아지면서 점점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다 더순한화장품 팬 사인회에 매번 당첨돼서 나타난 ‘개나리 오빠’ 계마루, 그를 통해 계나리 SNS를 들여다봤다가 계나리와 이아름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이 친구 사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한율은 가슴 한쪽이 간지러운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직도 우리 팬이구나.

-[응원법은커녕 가사도 잘 모르는 것 같았대요. 박자에 맞춰 슬로건만 열심히 흔들었다고. 제 생각엔 이우그룹 이채환이 보낸 사람들 같아요.]

“날 떠보려는 거면 너무 약한데?”

-[제 딴엔 장난치는 거에 가까울 거예요. 공감 능력 떨어지는 또라이니까.]

“그래도 날 의심하고 있단 게 핵심인데….”

-[그렇죠….]

계나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너튜브 영상을 일찌감치 날려버렸어야 했어요.]

“그런 영상이 석연치 않게 삭제되면 더 수상하지 않았을까? 그거 하나만 지운들, 좋아하는 아이돌 영상이라면 무조건 저장하는 사람이 많잖아. 그것보다, PC 돌려받았을 때 별일 없었어?”

-[네. 며칠 동안 가져가서 미안하다고 상품권 주더라고요. 다시 사용하기 찝찝하면 아예 새로 사라고. 그래서 내일 새 걸로 사려고요.]

한율은 그 외에도 계나리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액세서리를 툭툭 가지고 놀다가 잠든 달냥을 쓰다듬으며, 어제 왔던 고재영의 톡을 재차 살폈다.

-[내일이 연극 마지막 공연인데 진짜 안 올 거냐ㅜㅜ?]

바빠서 못 갈 것 같다고 말했지만, 한 번쯤은 오겠거니 기대하고 있을 터.

‘꼭 가야 할 정도로 의리 있는 사이는 아니지만.’

한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27일 오후. 뉴스와 인터넷은 미스터리 홀과 괴물에 대한 불안감으로 넘쳐났지만, 대학로엔 2020년 마지막 휴일을 즐겁게 보내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율은 신나게 떠드는 무리 옆을 지나쳤다.

‘평화롭네.’

모자를 쓰고 목도리로 코까지 가린 터라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천천히 걷다가 공연장 건물에 도착. 입구 옆에는 대학 연극 동아리 ‘달달’과 시즈닝 극단이 합동 공연하는 연극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한율은 다른 사람들처럼 매표소에 예매권을 보여주고 표를 끊은 뒤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고재영이 언제든 한율이 관람할 수 있도록 공연 두 시간 전까지 두 자리를 비워두겠다고 했지만, 오늘 새벽에 확인했더니 마침 취소 표가 나와서 직접 예매했다. 두 자리는 연극도 보고 기부도 하고 싶다고 말한 길우성에게 양보하고.

‘아직 안 왔네.’

라이언과 함께 오기로 한 길우성은 보이지 않았다. 뒷자리 관객들의 대화가 들렸다.

“오늘이 이 연극 마지막이지? 서한율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왔다던데. 오늘은 올까?”

“와도 저녁에 하는 마지막 회차 때 오겠지. 배우들이랑 같이 뒤풀이도 할 겸. …어?”

그때 길우성과 라이언이 당당히 얼굴을 드러낸 채 입장, 앞쪽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저 둘, 아이돌 아냐? 대박, 머리랑 얼굴 진짜 작아.”

“서한율 대신 왔나 보다.”

라이언이 한율을 찾으려는 듯 뒤를 돌아 두리번거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라이언은 한눈에 한율을 알아보곤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에 앉은 여성들이 즐거운 소리를 냈다.

“봤어? 진짜 예쁘게 잘생겼다…!”

“진짜 연예인은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멀리서 봐도 아우라가 막.”

관객 입장이 끝나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객석이 어두워진 뒤에야 한율은 모자를 벗고 목도리를 살며시 내렸다. 헉. 옆에 앉은 여성이 무심코 한율을 봤다가 깜짝 놀라는 게 느껴졌으나, 한율은 연극이 끝날 때까지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던 두 집. 어느 날 갑자기 서로를 향한 집 벽이 투명해지며 벌어지는 두 가족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사람이 아닌, 가족처럼 꾸며진 마네킹이었다는 소소한 반전.

등장인물들 대사나 행동에 단서와 묘한 위화감이 있었기에, 관객들은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도 매우 놀라지 않았다. 기발한 반전이나 아이디어보다는 감동을 주는 데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인 까닭이었다.

짝짝짝. 모든 배우들이 나와 인사, 그들이 무대에서 퇴장하고 공연장 내부가 환해질 때까지 박수는 그치지 않았다.

한율은 다시 목도리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썼다. 그리고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망설이는 옆자리 관객들에게 꾸벅 묵례 후 공연장을 나왔다.

길우성과 라이언이 뒤따라 나와 한율을 잡았다.

“인사하고 갈 거지?”

“어, 해야지. 같이 갈래요?”

“응. 재밌었다고 얘기할래. 우린 공짜로 봤잖아.”

마침 관객들에게 인사하러 로비까지 나온 배우가 있어, 그의 안내를 받아 준비실로 향했다.

“서한율!”

어린아이처럼 옷을 입은 고재영이 두 팔을 벌린 채 다가왔다. 슥. 한율은 그의 포옹을 피한 뒤, 준비해온 선물을 내밀었다.

“연극 잘 봤다.”

“고맙다!”

“이쪽은 나랑 같은 팀 멤버 라이언.”

“연극 재밌게 잘 봤어요. 이건 맛있는 선물.”

“안녕하세요, 형님! 가까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냥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얜 누군지 알지? 같은 고등학교 나왔으니까.”

“안녕하신가, 고재영 씨. 연극 잘 봤네. 생각보다 제법 잘하던걸?”

“어. 오래간만이다, 길우성. 좋게 봐줘서 고맙다.”

한율이 들어왔을 때부터 반가운 표정을 짓던 다른 배우들도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한율 씨.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배우들은 이제 마지막 공연을 위해 쉬어야 하기에, 세 사람은 인사와 연극 감상을 짤막하게 나눈 뒤 금방 그곳을 나왔다.

고재영이 로비까지 배웅하며 조용히 물었다.

“서한율 너 일부러 이 시간에 온 거지? 오래 안 있으려고.”

“고생한 사람들이 온전히 누려야 할 시간을, 내가 뺏으면 안 되잖아.”

“섭섭하게 무슨 소리야. 너 아니었으면 애초부터 이 연극, 이렇게 좋은 공연장에 걸 엄두도 못 냈어. 네가 뒤풀이 내내 자리 지켜도 다들 좋아할걸? 아니, 오히려 네 감상평이랑 연기 노하우 듣고 싶어서 아주 눈에 불을 켜고 새벽 3시까지 붙잡을 궁리나 할 거다.”

“과장은.”

한율은 매표소에 놓인 기부금 모금함에다 봉투를 넣었다. 길우성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슥 집어넣으면 어떡하냐! 응? 나처럼 이렇게 우아하게….”

길우성이 3m 정도 거리를 벌리더니 정체불명의 춤을 추며 휘릭 휘릭 돌다가, 모금함에 봉투를 넣었다.

“슈슉!”

큭큭. 로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곤 웃음을 터뜨렸다. 라이언이 핸드폰을 꺼냈다.

“못 찍었어. 다시.”

“엉? 봉투 이미 넣었는데?”

라이언이 자신의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건넸다.

“다시.”

“엉. 잘 찍어. 모금함에다 나처럼 우아하게….”

“…….”

한율은 그들과 일행이 아닌 척, 뒤로 성큼 물러났다.

대학로 거리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3층 카페. 길우성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범하게 평화롭다. 이렇게 사람 많은 데로 오니까, 지금까지 본 뉴스나 무서운 소문들이 다 거짓말 같아.”

“그런 걸 느끼려고 일부러 나온 사람도 많을 것 같아.”

“두 사람, 뭐 타고 왔어요?”

“진영이 형이 차로 데려다줬어. 써한 넌 따로 들를 곳 있다며 먼저 나가더니, 어디 갔다 왔냐?”

가까운 자리에 앉은 손님들이 귀를 쫑긋 세운 채 이쪽을 힐끗거렸다. 슬쩍 핸드폰을 세우는 사람도 있었으나, 사진이나 동영상에 찍힐 것 감안하고 들어온 거라 모른 척했다.

“내 건물 확인하러.”

“다들 안녕하더냐?”

“아니. 미스터리 홀 때문에 지금 서울 집값이랑 건물값이 천천히 떨어지는 중이래. 아마 서울에 한 번 더 난리 나면 그땐 훅훅 떨어질 거라더라. 그래서 그 전에 파는 게 나을까 고민 중.”

“저런. 하지만 난 부동산에 문외한이니 네가 알아서 하렴.”

“그럴 거야.”

“갈 때 아이스크림 사자. 가람이 민트 초코 먹고 싶대.”

“네. 이 근처에….”

우웅.

“잠깐만요. …어.”

조금 전 헤어진 고재영이었다.

-[야, 서한율.]

고재영이 심각하면서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이우그룹에서 도… 도다리? 도….]

“도 대리?”

-[어. 도 대리란 사람이 왔는데, 좋은 일에 동참하고 싶다면서 ‘이채환’이란 이름으로 5억 기부 한단다? 뭐냐, 이거? 어? 이거 뭔데? 기부자 명단에 꼭 서한율 너 다음으로 이름 올려달라는데, 뭐냐고 이거 무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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