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1화 (281/427)

우웅.

그때 길우성의 핸드폰이 울렸다.

“엉, 남석 씨. 웬일… 엉? 통화 중이야. …그게 뭔 소리여.”

차남석의 전화를 받는 길우성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한율은 일단 고재영과의 전화를 끊었다. 길우성도 비슷하게 핸드폰을 내리며 눈을 끔뻑거렸다.

“남석이 형이 뭐래? 무슨 일 있대?”

길우성이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한율과 라이언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하곤, 핸드폰 메모 앱에다 글을 썼다.

[이우전자에서 우리, 광고 모델로 쓰고 싶다고 연락 왔대.]

한율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번엔 무슨 속셈이야.

[도레미피자 새 광고 모델 서한율, 부드러운 치즈처럼 환한 미소로 여심 저격]

[어스래빗 서한율, 남자 우수상 후보]

[이우그룹 이채환, 아마추어 자선 연극 통해 소외 계층 아동에 5억 기부… 서한율이 후원한 연극]

[대세 아이돌그룹 어스래빗, 이우전자 광고 모델 발탁!]

-갑자기?

-대박

-오

-이우그룹 3세가 서한율이 후원했던 자선 연극 통해서 5억 기부했다던데. 둘이 뭐 있나?

-처음에 어스래빗이 이우전자 광고 모델 됐다고 떴을 때 서한율이 담당자한테 돈 먹였다느니 이런 헛소리 나왔었는데, 이채환 등장하니까 전부 입 다물었음ㅋㅋㅋㅋ 왜냐하면 이채환은 자산이 수천억대거든ㅋㅋㅋㅋ

ㄴ아무리 돈 많은 건물주 연예인이라도 재벌 3세는 못 이기지

-좀 파격적이네. 핸드폰 광고 모델 했어도 놀랐을 텐데

-어떤 제품 광고인지 안 나온 거 보면 이우전자마트 광고일 듯ㅇㅇ

12월 30일 오후. 이동 중인 차 안.

어스래빗 멤버들은 잔뜩 긴장했는지 굳은 어깨나 목을 연신 풀었다.

이건우가 중얼거렸다.

“살다 살다 이우전자 광고 미팅에도 가보고. 이게 무슨 일이냐, 진짜….”

한율은 기사 댓글을 훑다가 차창 밖을 보며 한숨 쉬었다. 왠지 지금 가는 광고 미팅 자리에 이채환이 나올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착한 마법사라 천만다행이다

광고 미팅은 광고주의 의뢰를 받은 광고 업체, 섭외된 모델의 소속사 담당자들이 만나 진행하는 게 보통으로, 모델이 직접 미팅에 참여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광고주인 이우전자 측에서 자기네 쪽에서 미팅을 진행하자며, 어스래빗까지 초대했다.

이우전자 내 회의실. 상당히 점잖은 분위기라, 멤버들은 평소보다 차분한 어조와 표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인사드립니다!”

이우전자 직원들과 광고 업체 직원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실물이 훤칠하시네요.”

이채환이 나타난 건 모두와 인사를 마쳤을 때였다. 어스래빗 멤버들에게 이우전자 역사관을 보여주고 싶다며 이우전자 직원이 안내하려 할 때, 도 대리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아직 미팅 시작 안 했죠?”

“어…. 아닙니다, 실장님.”

이우전자 직원들은 그가 올 걸 전혀 몰랐는지,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인사했다. 광고 업체 측과 WB래빗 측 직원들도 의자에 앉으려다가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났다.

“반갑습니다. 이우그룹 전략기획실의 이채환 실장입니다.”

이채환은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어스래빗 멤버들과도.

“어휴, 이분은 상당히 키가 크시네. 몇 cm인지 물어봐도 돼요?”

“우리 이우전자 새 모델이라고 해서 영상을 찾아봤어요.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는데?”

“아이, 눈부셔. 나랑 같은 종족 맞아요? 목소리도 대박이네.”

재벌 3세 아니었으면 학창 시절 매일 맞고 다녔을 것이다, 돈으로 학위 땄다, 매일 클럽 룸에서 술 마신다더라. 좀 또라이 같다더라 등등. 여러 안 좋은 소문과 달리, 이채환은 적당히 예의 바르고 사교성 좋아 보였다.

곧 그가 한율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한율 씨. 영화 <고양이 난로> 정말 감명 깊게 봤어요.”

해커로 의심 중인 계나리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 ‘파랑 요정’ 슬로건으로 한율을 떠보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없는 사람처럼.

한율도 시치미를 뚝 떼고 그의 악수에 응했다.

“감사합니다.”

“‘못난이’ 연기한 고양이들은 잘 지내요?”

“네. 잘 지내는 것 같더라고요.”

영화 <고양이 난로>에서 ‘못난이’ 역을 맡은 고양이 중 하나인 ‘미미’는 여전히 부윤방 감독이 키우고 있었다.

영화가 흑자를 내며 소소하게 흥행 성공한 후, 부 감독은 미미의 안부를 알려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으로 고양이들과의 일상을 너튜브에 올리곤 했는데, 점점 채널 인기가 많아지면서 현재는 감독 수입보다 너튜브 수입이 훨씬 많아졌다고.

다른 ‘못난이’ 역의 ‘제유’는 배우 이희우가 키우는 중인데, 이쪽은 이희우가 SNS에 자주 사진을 올리며 근황을 전하고 있었다.

“나도 고양이 너무 키우고 싶은데, 집에 고양이 털 알레르기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니까 피부가 굉장히 좋으시네요. 지금 화장품 모델하고 있죠? 이번에 우리 이우전자에서 피부 케어하는 가정용 기기가 나왔는데….”

이채환이 광고 업체 측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것도 그 동종업계 광고 출연 금지에 걸릴까요?”

“아니요. 전자기기와 화장품이잖습니까. 목적이 같아도 엄연히 종류가 달라서 괜찮습니다.”

“그렇다네요, 한율 씨.”

잘 됐지? 이런 얼굴로 생글생글 웃는 이채환.

그래서 그 기기 모델로 기용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그렇게 해줄 수 있다는 뜻인가.

한율은 어색하게 입가를 올리곤, 여태 잡혀있던 손을 슬쩍 놓았다.

“네.”

이채환이 한율 옆에 있던 길우성에게 시선을 옮겼다.

“우성 씨, 하이! 얼마 전에 우리 도단희 대리 만났죠?”

아무리 이채환이 그룹 본사에 소속된 오너 일가라 하더라도, 업무상 아무 상관도 없는 계열사 일에 불쑥 끼어드는 건 상당히 비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채환은 인사를 마친 뒤 당당히 회의실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이우전자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사내에 작게 마련된 이우전자 역사관으로 향했다.

“이곳이 이우전자의 역사를 모아둔 곳입니다.”

어려운 일 얘기가 오가는 미팅 자리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 멤버들은 들뜬 얼굴로 이우전자가 초창기에 만든 가전제품을 구경했다.

“어? 이거 드라마에서 본 그거다.”

“선생님, 이거 지금도 작동해요?”

“네, 작동합니다.”

“와….”

“이건 우리 아빠보다 나이 많아.”

수십 년 전 출시된 제품부터 몇 달밖에 안 된 신제품까지. 멤버들은 각자 관심이 가는 제품 앞으로 흩어졌다. 한율은 365일 털을 뿜는 달냥을 떠올리며 펫 케어 기능이 있는 공기청정기를 살폈다.

슥. 이채환이 조용히 다가왔다.

“한율 씨도 1130 증상자란 거 알았으면 그날 도 대리 통해서 선물 전하는 건데.”

“괜찮습니다. 병원 가서 정밀 검사받아 결과 공유하고, 미스터리 홀이 열릴 때마다 연락 주고받는 거 보니까 참 번거로워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미팅, 벌써 끝나셨어요?”

“재미없어서 나왔어요. 정상인 코스프레도 피곤하고.”

“네….”

애초에 진짜 정상인이면,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미팅 자리에 불쑥 끼어들 생각조차 안 할 텐데.

이채환이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리, 나리, 개나리~.”

“…….”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이채환이 씩 웃었다.

“난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가볍게 장난치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눈치 없다고 욕하더라고. 심지어 내 자식들도. 그러니 내 행동에 불쾌했다면 ‘저 아저씨 눈치 없이 또 나대네.’ 이러고 이해해줘요, 친구.”

한율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혹시 지난번 제가 후원한 연극에….”

“그거 말고. 알잖아.”

이채환이 속닥거렸다.

“그리고 앗싸가 입수한 사진, 내가 샀어. 최초 제보자도 찾아서 원본 파일 싹 없앴으니까, 나리 나리 계나리한텐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

툭툭. 이채환이 한율의 어깨를 감싸듯 두드렸다.

“아이돌 팬 중에 살벌한 애는 정말 살벌하잖아. 예전에 배우 이희우가 네 사생한테 당할 뻔했던 것처럼. 만약 그 사진이 풀렸다면 우리 귀여운 나리 나리 계나리는… 어후, 상상만 해도 끔찍해.”

“…….”

“아 참.”

휙. 몸을 돌려 서너 걸음 이동하던 그가 다시 한율에게 돌아왔다. 멤버들이 의아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지만, 이채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명함을 한율에게 건넸다.

“이걸 전해준다는 걸 깜빡했네. 뭐든 필요하면 연락해, 요정 친구.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협조할게.”

이 인간이 대체 뭐라는 거야.

한율은 이런 속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애쓰는 사람처럼 이채환을 바라보았다.

“네?”

잠시 후. 이우전자를 떠나는 이채환의 차량.

“연기인지 아닌지 참 헷갈린단 말이야.”

이채환은 차창 밖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곤 고개를 갸웃했다.

“차라리 신들린 연기 실력을 몰랐다면 그냥 속아 넘어갔을 것 같기도 하고.”

운전하던 도 대리가 룸미러를 통해 흘끗했다.

“서한율 말씀하시는 겁니까?”

“계나리랑 찍힌 사진 얘기할 때 외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단 반응이더라고. 왜 이렇게 친한 척하는 건지 은근히 부담스러워하기도 하고.”

“네….”

“도 대리는 어떻게 생각해? 도 대리가 봐도, 서한율이 미스터리 홀 괴물들을 막은 초현실적인 영웅으로 보여?”

“전혀요. 서한율 조사 보고서는 실장님도 보셨잖습니까. 가정환경이 유복한 것 외엔 평범하고 평탄하게 자랐고, 현재 연예인으로 승승장구하는 것도 노력과 재능으로 이뤄냈다는 게 환히 보이고요. 그리고 그만큼 대단한 초능력이 있었다면, 왜 연예인을 하겠습니까.”

“그럼 뭘 해야 하는데?”

“네?”

“대단한 초능력을 갖고 있으면 뭘 해야 하냐고.”

도 대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비밀 요원이나….”

“시시하네. 요즘은 힘을 숨기는 게 유행이거든? 가진 재능이랑 하고 싶은 일은 또 다른 법이고. 이렇게 요즘 애들을 몰라요, 우리 도 대리가.”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일은 아니고. 어쨌든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해커 찾는 데에 집중해. 요란하게.”

“네, 증거 찾는 데에 더 노력….”

퍽. 이채환은 운전석을 가볍게 찼다.

“계나리 말고, 다른 유력 용의자를 찾은 것처럼 꾸미라고. 정원그룹이랑 정부에 계나리 이름 들어가기만 해 봐? 가만히 안 둔다, 진짜.”

“네.”

“뭐든 선점과 독점이 중요해. 그게 정보든 기술이든.”

치익. 이채환은 휴대용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끄며 중얼거렸다.

“사람이든.”

* * *

“이게 여러분이 찍을 이우전자 광고 콘셉트입니다.”

“벌써 나왔어요?”

“뭔가… 많은데요?”

WB래빗 2층 회의실. 멤버들은 오 팀장이 나눠주는 서류를 살폈다.

“특정 제품이 아닌 이우전자 브랜드 광고입니다. 편당 5분 남짓한 광고 드라마 세 편을 일주일에 한 편씩 공개할 예정이고, 이우전자마트에서 팬 미팅도 진행할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광고 출연료.”

멤버들이 오 팀장을 주목했다. 오 팀장은 말 대신 서류로 보여주었다.

“…히익?!”

“미쳤?!”

“와우, 역시 대기업 클라쓰….”

“…….”

유호와 박가람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한율을 바라보았다. 이우전자가 난데없이 어스래빗에 러브콜을 보낸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되는 까닭이었다.

이대로 이우전자 광고 모델을 해도 괜찮은 걸까. 그런 걱정이 깃든 눈빛들.

오 팀장이 모두를 둘러보며 당부했다.

“다들 서류에 적힌 내용 및 광고 출연료는 절대 외부로 발설해선 안 됩니다. 그리고 계약서는 늦어도 다음 주엔 나올 겁니다. 이우전자에서 광고 촬영을 서둘러서 진행하고 싶다더라고요.”

“그럼 계속 피부랑 몸 관리하고 있어야겠네요?”

“당연하죠. 다들 지금이 적당히 보기 좋으니까, 유지에 힘써주세요.”

“네.”

“나랑 운동 갈 사람, 손.”

“…….”

“OK, 박가람 당첨.”

고개를 반대로 돌렸던 박가람이 들썩거리며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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