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2화 (282/427)

“뭐냐, 이건우?! 나 두 손 무릎에 공손히 포개고 있었거든? 나 바빠! 안 가!”

“미안한데 가람이 형이랑 저, 같이 나가기로 해서 안 돼요.”

“엉?”

박가람이 금시초문이란 얼굴로 한율을 돌아봤다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나 서한율이랑 약속 있어.”

“뭐지? 방금 박가람이가 처음 듣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은데?”

“둘만 또 어디 가? 재밌는 데면 나도 데려가.”

“내일 에 신고 갈 구두 찾으러. 가람이 형도 구두 하나 맞추고 싶다고 해서 같이 가는 거야.”

“나도! 구두!”

한율은 길우성을 향해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안 돼. 예약제로만 운영되는 곳인데, 예약 시간에 최대 두 명으로 된 한 팀만 받거든.”

“……!”

“꽤 좋은 곳인가 봐.”

“완성된 구두를 봐야 알겠지만, 이제설 선배님이 소개해 준 곳이에요.”

“오오.”

“음, 탑 배우가 소개해준 곳이면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졸지에 수제화를 맞추러 가게 된 박가람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많이… 비싸겠지?”

“생각보단 저렴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잠시 후, 직접 차를 몰고 수제화 전문점으로 가는 길.

한율은 신호에 걸렸을 때 박가람에게 팔찌 하나를 건넸다.

“웬 팔찌? 오, 예쁘다. 비싼 명품이다.”

“차세요.”

박가람이 왼쪽 손목에다 팔찌를 차면서 물었다.

“나 주는 거야? 왜?”

“간단한 실험 좀 해보려고요.”

환했던 박가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너 여기에 무슨 짓 했냐.”

두 시간 후.

박가람은 피곤한 얼굴로 팔찌를 벗었다.

“세상에, 투명 인간이 되는 팔찌라니…. 네가 가정교육 잘 받은 착한 마법사라 천만다행이다.”

협박했어요

인기 연예인을 타깃으로 한 자극적인 이슈몰이로 명성을 크게 얻으며, 아예 앗싸일보의 레이블로 독립한 앗싸패치. 현재 이곳은 내일, 2021년 1월 1일에 올릴 기사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김 기자가 촬영 장비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다녀오겠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어? 이거 왜 이래?”

“뭐지?”

“아이씨! 뭐야!”

데스크마다 당황한 목소리와 욕설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까지 잘만 되던 PC가 한꺼번에 멈춘 까닭이었다. 그러곤 동시에 뜨는 블루스크린.

“아악! 저장 못 했는데!”

“뭐야! 뭔데!”

“잠깐만, 지금 PC가 한꺼번에 먹통 된 거야?”

“다들 랜선부터 빼! 뭔가 이상하다!”

그동안 PC는 멋대로 재부팅됐지만, 새카만 DOS 바탕에 알 수 없는 영문만 나열되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가? 윈도 진입 자체가 안 되는데?”

“어? 됐다.”

“뭐? 됐어?”

한 직원의 PC가 윈도로 진입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한데…. 왜 바탕화면이….”

본래 설정했던 이미지가 아닌 윈도 기본바탕이 떴다. 어지러이 널려놓았던 폴더나 파일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 자료! 내 기사!”

마우스를 잡은 기자의 손이 덜덜 떨리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딩! 디디디딩! 그 순간 시스템 오류 알림창이 연달아 뜨더니 다시 블루스크린, 재부팅 시작. DOS 화면에 온갖 파일 경로 리스트가 줄줄이 떴다.

“이거 지금… 파일 삭제 중인 것 같은데?”

“이런 미친?!”

당황한 기자는 반사적으로 본체 코드를 뽑았다. 후웅. 데스크톱이 잠잠해지며 모니터엔 ‘신호 없음’ 문구가 떴다.

대표가 큰소리로 외쳤다.

“공유기 끄고! 다들 노트북 살펴!”

“서버 접속이 안 돼요! 이거 아무래도 디도스 공격….”

“노트북도 난리예요. 동시에 이러는 거 보면 서버 통해서 바이러스 퍼뜨려놓고 한날한시에 다운되게 만든 것 같은데…. 어떡하죠, 부장님?”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당장 보안 전문가 불러와! 이미 PC 꺼둔 녀석들은 켜지 마! 아무것도 만지지 마!”

어떡하지. 김 기자는 가방끈을 잡은 채 갈팡질팡했다. 취재를 하러 가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 자리를 비워도 괜찮은 걸까.

대표가 그런 김 기자를 발견하곤 외쳤다.

“취재 갈 놈들은 움직여! 기사는 내야 할 거 아냐!”

그때 옆 사무실인 앗싸일보에서 사람이 뛰어왔다.

“앗싸패치는 괜찮아요?! …아. 여기도 당했네….”

* * *

[모 유명 언론매체 서버 다운, 디도스 공격 추정]

-앗쌐ㅋㅋㅋ 꼴 좋닼ㅋㅋㅋㅋㅋ

-이 기사를 남몰래 연애 중인 연예인들이 좋아합니다. :D

ㄴ이 기사를 뒤가 구린 연예인들이 좋아합니다. :D

ㄴ이 기사를 앗싸 때문에 망한 연예인들이 좋아합니다. XD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ㅈㄴ 통쾌하네

-그러게 프라이버시 침해랑 스토킹 좀 작작 하지 그랬냐. 누군지 몰라도 얼마나 빡쳤으면 연말에 이런 공격을 의뢰함

ㄴ보통 해커들이면 랜섬웨어 감염시켜서 돈 요구했을 텐데 깡그리 날려버린 거 보면

-대체 누구를 건든겨ㅋㅋㅋ

어스래빗 숙소.

한율의 방 침대에 걸터앉은 박가람이 인터넷 기사를 보며 키득거렸다.

“우리 작고 소중한 나리 씨를 건드리면 아주 큰 일 나지. 암.”

유호는 우려를 표했다.

“그런데 괜찮을까? 앗싸가 입수한 사진을 사고, 또 그 원본까지 처리한 게 이우그룹이라며. 앗싸일보가 해커에게 호되게 공격당한 걸 보면 더더욱 나리 씨를 해커로 의심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한율은 드레스룸에서 슈트케이스와 구두 상자를 들고나오며 대답했다. 샵에서 헤어 메이크업을 받은 뒤,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두 번 다시 우리를 건들지 않기로 약속했거든요.”

“이채환이랑? 어제 그 얘기 나눴던 거야?”

“그 말은… 순순히 우리 정체를 인정했단 거야?”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이채환 말고, 이우그룹 부회장한테서 직접 약속받았어요. 현 이우그룹 실세.”

놀라 입을 벌리는 두 사람.

“뭐?”

“언제? 어떻게?”

“두 분, 이우그룹 부회장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알 리가.”

“어디에 있는데?”

“네 집 건너요.”

두 사람의 표정이 멍해졌다.

“…아, 맞다. 여기 재벌들 많이 사는 부자 동네였지?”

“어젯밤에 직접 찾아가서 대화… 는 아니고, 협박했어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야?”

“넌 참 볼수록 놀라운 애야, 한율아.”

똑똑.

“한율아, 준비됐어?”

“네, 나갈게요.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할게요.”

한율은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곤 방을 나갔다. 박가람과 유호가 현관 앞까지 배웅했다.

“올 때 우수상 트로피.”

“조심히 잘 다녀와.”

거실에 있던 다른 멤버들도 한마디씩 했다.

“서한율, 남자 배우 우수상 가져와라. 생방송으로 지켜본다.”

“잘 가라, 스물한 살 써한. 스물두 살이 되어 만나겠구나.”

“너희들 벌써 스물두 살이야? 와…. 시간 참.”

“나이 얘긴 하지 말자. 조용히 웃는 리더처럼.”

“이건우. 오래간만에 리더한테 혼나볼래?”

“잘 갔다 와, 하뉼.”

“네, 다녀올게요.”

한율은 떠들썩한 숙소를 나섰다.

밤 8시. 레드카펫 현장이 생중계되었다.

[서한율! 사랑해!]

[한율아! 멋있다!]

앞서 레드카펫을 밟았던 다른 배우들보다 터지는 환호성이 요란하다. 그러나 서한율은 익숙하다는 듯, 포토월 앞에 서서 기자들의 요청에 따라 여유롭게 포즈를 취했다.

포토타임이 끝나고 레드카펫 MC와의 인터뷰.

[한율 씨, 2년 전 처음 에 참석했을 땐 신인상을 받으셨잖아요. 이번엔 우수상 후보에 올라 참석하게 됐는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서한율이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우선, 제게 <서울 구미호>를 같이 찍자고 제안해 준 이제설 선배님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2년 만에 다시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게 됐네요.]

[지금 TV를 보고 계실 부모님과 팬분들에게도 한마디 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머니, 아버지. 끝나고 전화할게요. 이프림, 새해에도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살자.]

다시 팬들의 환호성 섞인 큰 목소리.

[알았어!]

[한율아, 너도!]

MC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어스래빗 멤버들에게!]

[아까 숙소 나오기 전에 깜빡하고 말하지 않았는데 우리 멤버들, 2021년에도 잘 부탁해요.]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흔들.

“후우….”

이우그룹 부회장은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다, 다시 TV 속 서한율을 보았다. 인기 많은 아이돌이자 배우라더니, 키도 훤칠한데다 생김새도 예쁘장하면서 잘생겼다.

[네, 서한율 씨 인터뷰 감사합니다!]

레드카펫 MC와 스태프들, 앞에 포진한 기자들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시상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서한율.

걷는 자세도 저렇게 곧고 당당하니, 얼굴을 가리고 길을 걸어도 시선을 끌 터다.

그러나 부회장에겐 한낱 광대이자 딴따라였다.

어젯밤 일만 아니었다면.

‘정말 저런 핏덩이가?’

부회장은 간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젯밤 자정. 그는 바로 이 서재에서 남은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일어났다. 그리고 닫혀있던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잡이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 너머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마치, 이 넓은 집에 혼자 남은 것처럼.

『국가보다 빨리 미래를 대비하고 싶으시죠?』

『……!』

몇 시간 동안 혼자 있던 서재에서 들리는 타인의 목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는 놀란 가슴팍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앉았던 의자에 앳되면서도 곱상한 청년이 앉아있었다.

은은한 푸른색 눈으로 책상에 놓인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며 청년이 말했다.

『선만 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좋은 정보를 드릴게요. 어때요?』

장남인 이채환이 판타지니, 초능력자니 떠들어댈 때마다 골프채를 들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혼하고 자식까지 셋이나 본 장성한 자식을 매질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싶어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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