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태국에 이어 한국에 나타난 미스터리 홀 영상을 봤을 때도, 오로지 그로 인해 요동치는 돈의 흐름만 보였다.
미스터리 홀이 이우 자동차 핵심 공장 위에 뜨고 집채만 한 괴물이 나타나도, 두려움보다는 화가 났다. 공장이 멈추는 동안 발생할 막대한 손실 때문에.
그러나 서한율을 마주하는 순간, 그는 처음으로 미지의 공포를 느꼈다. 서한율의 말을 거스르면 당장 알 수 없는 힘이 심장을 죄어 비틀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사람에게 직접 저주를 내리는 건 오래간만이라 강도 조절이 안 될 수 있으니, 매사에 조심하세요. 아드님들 단속도 잘, 하시고.』
저주뿐만이 아니었다. 서한율은 당진 미스터리 홀에서 나타난 괴물의 축소 버전을 허공에 띄우기도 했다.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핵심 계열사가 하나씩, 물리적으로 분해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협박과 경고, 요구가 절반 이상인 대화가 끝나고 정신 차렸을 땐, 팔 안쪽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저주. 철없던 어릴 적 허무맹랑한 매체에서 접했던 단어.
더 두려운 건, 체감상 30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실상은 2시간이나 흘렀다는 사실이었다.
‘두 시간을 채울 만큼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어떻게?’
곧 이유를 깨달았다.
기억이 듬성듬성 비었다.
그는 문부터 활짝 열어 도망치듯 서재를 빠져나갔다.
이채환과 이채욱을 급히 호출해 해커 추적 진행 상황을 물었더니, 다행히 두 아들 모두 계나리를 비롯해 한패로 의심 가는 자들에게서 잠시 손을 떼기로 한 상태였다.
『일단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잘 구슬려서 협조를 구하려 합니다.』
부회장은 두 아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둘 다 더는 그들 주변에 얼쩡거리지 말고 완전히 손 떼라. 내가 직접 맡겠다.』
부회장은 TV를 노려보았다. 서한율 대신 다른 배우가 웃으며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뒤늦게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돈도 힘도 없던 어린 시절, 자신을 한입에 물어 죽일 수 있는 맹견을 만났을 때의 무력감이 되살아났다.
“으아악!”
결국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TV를 향해 골프채를 휘둘렀다.
쾅!
* * *
[서한율, 남자 우수상 수상]
한율은 그새 연예 뉴스란 메인에 뜬 자신의 기사를 훑다가 고개를 돌렸다.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지만, 인공조명으로 환한 거리는 차와 사람으로 가득했다.
“한율아, 슬슬 옷 갈아입는 게 좋을 것 같아.”
드라마 <서울 구미호>가 한류상을, 주·조연 배우들도 좋은 상을 타면서 <서울 구미호> 팀은 가볍게 축하 파티를 하기로 했다. 장소는 이제설이 예약한 수제 맥줏집. 스태프와 배우 모두 편히 즐길 수 있도록 가게를 통째로 빌렸다고 했다.
현재 그곳으로 가는 길.
“네.”
한율은 창마다 커튼을 치곤, 샵에 갈 때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뒤에 스타일리스트가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쇼케이스나 콘서트 도중 초 단위로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도와주던 사람이라 속살을 보이는 데에 민망함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웅.
한율은 입었던 슈트와 구두를 정리하곤 핸드폰을 확인했다.
-[우수상 축하해! 새해 복 많이 받아!]
우웅, 우웅.
-[서한율 올해는 더 대박 나자!]
-[선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D]
연달아 날아오는 지인들의 메시지.
시간을 확인해보니, 자정이 지나 2021년 1월 1일이었다.
한율은 좌석에 편히 몸을 묻은 채, 계속해서 들어오는 새해 인사 메시지를 보았다.
‘앞으로 6개월.’
우리 한율이도 톱 배우잖아
2021년 새해가 밝았다.
여전히 포털사이트 실검엔 [미스터리 홀]이 떠 있었지만, 상위권은 [새해 인사]나 [방송 연예 대상], [tvMu드라마어워즈 이제설] 등이 차지했다.
매년 1월 1일마다 큼직한 연예인 스캔들을 터뜨렸던 앗싸일보도 올라갔다. [앗싸일보 서버다운]으로.
-앗싸 아직도 복구 안 됨? 어쩐지 조용하더라ㅋㅋㅋ
ㄴ기자들 컴까지 싹 털렸대요. 급한 대로 블로그랑 SNS로 상황 전하던데
-멀쩡했다면 올해는 누구 터뜨렸을지 궁금함. 아무리 컴이 다 날아갔어도 중요 데이터는 다른 데다 백업했을 테니 결국 터뜨리긴 터뜨릴 것 같은데
ㄴ대체 누구 심기를 건드려서 저 꼴 났는지가 더 궁금함
ㄴ재벌 얽혔나?
이우그룹의 이채욱은 앗싸일보에 벌어진 사이버 테러 기사를 보며 경악했다.
‘이거 설마 계나리 짓인가? 우리가 유력 용의자로 주시하고 있단 걸 알면서도, 대놓고 이런 짓을 한다고?’
당장 계나리나 이해원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그러나 바로 어제 새벽, 아버지가 그와 이채환을 호출해 더는 계나리 일행 주변을 얼씬거리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대체 왜 갑자기….’
그러나 아버지의 말이 곧 법이라, 이채욱은 치밀어오르는 호기심을 죽였다.
‘무언가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한편, 이채환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앗싸일보·앗싸패치, 사이버 테러로 이틀째 업무 마비]
‘우리가 가진 사진을 뿌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다는 경곤가? 아니, 단순히 사진이 아니라 자신들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는 거겠지. 애초에 사진 찍히는 게 무서웠다면 느긋하게 데이트하지도 않았을 거고.’
이채환은 서한율이 에서 우수상을 받았단 기사를 클릭했다.
“도 대리야.”
“네.”
“나 공통점 하나 발견했다?”
“무엇의 무슨 공통점 말입니까?”
어스래빗, 스타믹스 JE, 이해원 사진도 검색해 각기 다른 창에 띄웠다.
“명상센터 드나들었던 애들, 다 피부가 좋아.”
“네?”
“봐봐.”
도 대리는 또 무슨 엉뚱한 소릴 하는 거냐는 얼굴로 이채환의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다들 외모가 중요한 아이돌이니 비싼 피부 관리를 받겠죠.”
“이해원은 은퇴한 지 오래됐잖아.”
“타고난 거겠죠.”
“아니야. 내 딸이 그러는데, 아이돌들은 가까이서 보면 피부가 엉망이 경우가 많대.”
“그러니까 비싼 피부 관리를 받겠죠.”
“나리 나리 계나리도 피부가 굉장히 좋았고.”
“타고난 거겠죠.”
“주변에 얼쩡거리지 말라고 했으니, 광고 찍을 때 보러 가는 것도 안 되겠지?”
“부회장님께 불호령 받고 싶다면 실험해보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가서 일해.”
“네.”
도 대리가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계속했다. 1월 1일부터 회사에 나왔는데도 별 불만 없는 담담한 얼굴로.
‘나도 집에 있기 싫어서 출근했다만.’
새벽부터 이우그룹 회장인 조부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자마자, 일이 밀렸다는 핑계로 말이다.
이채환은 의자에 몸을 푹 묻은 채 늘어졌다.
“아, 시시해. 김빠져….”
“실장님.”
“왜.”
도 대리는 몇 시간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40대 진입 축하드립니다.”
“우리 도 대리가 이렇게 애사심이 넘치는 줄은 몰랐네. 정초부터 사흘 연속 야근도 자청하고.”
* * *
1월 4일 월요일.
오 팀장이 어스래빗 멤버들을 2층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올해는 <설 특집 아이돌 스포츠 대회>를 하지 않습니다.”
길우성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안 돼! 이번에는 우리 엄마표 돼지갈비찜 도시락을 이프림에게 먹이고 싶었는데!”
“어쩐지 슬슬 녹화 시기가 다가오는데도 잠잠하더라니.”
“아스대 일정이 사라졌으니, 우리는 3월 영어 앨범 및 미국 쇼케이스 준비에 집중합시다. 할 일이 많아요. 데뷔 4주년 기념 첫 번째 포토북이나 팬 콘서트도 준비해야 하고….”
잠시 후, 한율은 회의실을 나오며 사과패드에 정리한 스케줄을 살폈다.
‘해외에 다녀올 만한 시간이 없네.’
당진 미스터리 홀 사건 이후 대략 2주가 흘렀다.
더는 중국에서 미스터리 홀 괴물이 목격됐다느니 하는 뉴스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넷에선 카더라 목격담이 심심찮게 나타났다. 증거랍시고 올라온 사진이나 영상은 하나같이 흐릿하거나 조작된 것들뿐이지만.
너튜브에선 ‘한국 미스터리 홀 사건은 모두 한국의 주작이다.’라는 해외 너튜버 영상이 큰 화제를 몰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 ‘미스터리 해커’가 대규모 방공시설을 짓도록 협박한 두 회사도 한국 기업, 시설을 짓도록 한 장소도 한국이잖아. 두 회사 전문가들도 ‘미스터리 해커’가 한국인이라고 의심하고 있고]
-[우린 미스터리 홀로 인해 다친 사람이 없단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건물 일부가 무너졌는데 다들 멀쩡해. 괴물의 피조차 발견되지 않았어.]
-[미국 미스터리 홀 조사단이 허탕을 치고 돌아온 걸 보면 한국의 주작이 분명함. 특히 당진 미스터리 홀 영상은 짜고 친 영화일 듯.]
ㄴ[그럼 중국은 뭐야? 그곳에서도 괴물이 목격됐다고 떠들썩했잖아. 중국 전투기는 한국 영공 침범까지 했다고]
ㄴ[그치들의 주장은 무시해도 돼. 가짜 달걀도 팔아먹는 곳이야. 그리고 호시탐탐 한국을 노리고 있지]
-[이 너튜버 주장에 일리가 있는 게, 미스터리 홀 괴물을 가두고 불태운 그림자들 또한 설명이 안 돼. 그런 자들이 한국처럼 작은 나라에 있었다고? 계시라도 받고선 거기에 갔다는 거야? 한국을 지키기 위해? 웃겨. 그런 코딱지만 한 나라가 뭐라고.]
ㄴ[원래 붉은 미스터리 홀은 한국에서만 일어날 현상일지도 몰라. 여기에 세상을 끌어들인 거지]
-[전 세계는 미스터리 홀로 인해 벌어진 막대한 손실을 한국에 청구해야 한다.]
-[내 일본인 친구가 그러는데, 일본에 미스터리 홀 형상이 나타났을 때 공연 중이던 한국 연예인 세 명도 증상을 나타냈대. 원래 자신들이 증상자라는 걸 밝히지 않았다가 들통이 난 거지. 일본에선 증상자가 일정 이상 모이면 그곳에 미스터리 홀이 나타난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거든? 이게 사실이면 한국은 일본에 막대한 피해를 끼칠 뻔했다는 거야.]
‘할 수 없지. 이번 달 말에 미국으로 출국하면….’
그때 박가람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외쳤다.
“신이시여, 제발 우리 활동 땐 미스터리 홀이 나타나지 않게 해주십쇼! 으오오!”
길우성도 박가람을 따라 했다.
“으오오!”
“…….”
바쁘면서도 조용한 나날이 흘렀다.
어스래빗은 3월 미국에서 할 쇼케이스 투어 연습에 매진하면서 영어 디지털 앨범 녹음을 마쳤다. 이틀에 걸쳐 앨범 재킷 촬영도 진행했다.
그동안 포털사이트 실검에선 드디어 [미스터리 홀]이 사라졌다. 관련 기사도 확연히 줄었으며, 당진 미스터리 홀이 나타났던 주변 공장들은 정상 가동되었다.
1월 14일. 이우전자 브랜드 광고 촬영 첫날.
“아주 좋아요! 다들 얼굴도 작아서 카메라가 잘 받네요!”
“딕션 좋고!”
“어스래빗이 뜬 이유가 다 있었네요! 완벽해요!”
“역시 데뷔 5년 차 짬, 어디 안 가네요! 탁월한 섭외!”
“하지만 한번 더해볼까요? 조오금 아쉽다! 더 멋있게 찍어줄 수 있었는데!”
촬영 내내 칭찬을 아끼지 않는 제작진 덕분에 첫날 촬영은 기분 좋게 끝났다.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
박가람이 메이크업 티슈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그 아저씨, 오늘은 안 왔네? 지난번 광고 미팅 때 난데없이 끼어들어서 이번에도 올 줄 알았는데.”
“누구? 그때 그 이우그룹 본사 아저씨? 도 대리 아저씨 상사?”
“어. 이우그룹 회장 손자.”
길우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회장 손자였어? 재벌 3세?”
“엉. 몰랐구나.”
“오오…. 나 실제로 재벌 본 거 처음이야. 재벌들, 진짜로 집에 슈퍼카 여러 대 갖고 있을까?”
“글쎄.”
“재벌들한텐 백화점 명품관 직원들이 직접 집까지 찾아가서 신상 명품도 가장 먼저 보여주고 그런다던데. 백화점 쇼핑할 땐 다른 손님들 출입 금지해놓고 수행원들 거느린 채 아주 여유롭게….”
“우리 막내가 재벌에 대한 환상이 좀 있구나.”
이건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 정돈 진짜 아냐? 톱 배우들이 백화점 명품관 특별실 프리패스란 거 보면, 재벌들은 그보다 더한 혜택을 받으면 받았지, 덜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만큼 씀씀이가 아주 크잖아.”
“그런데 우리 한율이도 톱 배우잖아.”
강보배가 한율을 돌아보았다.
“얼마 전엔 남돌 브랜드 평판 2위까지 찍었고, 해외에서도 배우로 인기 엄청나게 많고.”
“맞아. 한율이 정도면 백화점이나 패션쇼에 충분히 셀럽으로 초대받을 만한데. 초대장 같은 거 온 적 없어?”
“글쎄요. 왔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저 아직 톱 배우 아니에요.”
“하뉼, 나한텐 톱 배우야.”
조수석에 앉아있던 조유찬이 말했다.
“해외 명품 패션쇼에서 한율이한테 초대장 보낸 적 있었는데, 투어 기간이랑 겹쳐서 정중히 사양했었어.”
길우성이 진지한 얼굴로 한율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