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4화 (284/427)

“다음에 또 초대장 오면 그땐 가라. 기꺼이 매니저로 동행해주마, 친구.”

“너 일 못 할 것 같아서 싫은데.”

차남석이 슥 손을 들었다.

“내가 매니저 할게.”

“웬일로 남석 씨가 농담을.”

“진담인데.”

“오우….”

“앗싸패치 서버 살렸나 봐. 스캔들 단독 기사 터뜨렸어.”

“누구 스캔들?”

유호의 말에 멤버들이 궁금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거나 만지작거렸다. 한율은 길우성의 핸드폰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포털사이트 실검 1위에 [앗싸패치], 2위에 [윤승권 순형]이 올라와 있었다.

“순형? 감성소녀 순형 선배님?”

“실검에 [감성소녀 순형] 올라온 거 보니 맞는 것 같은데?”

“이건 또 무슨 조합이냐. 두 사람이 접점이 있었어?”

“순형 선배님 야구 선순가 축구 선수랑 사귄다고 하지 않았나?”

“워낙 남자친구가 자주 바뀌던 분이라….”

길우성이 앗싸패치 단독 기사를 클릭했다. 두 사람이 제주도의 한 펜션에 함께 드나드는 사진이 찍혀 있었다. 서울의 한적한 공원 주차장에서 밀회를 나누는 사진, 윤승권이 취한 듯한 순형을 부축하며 차에 태우는 사진도.

“윤승권 이 사람도 이성 관련 소문이 썩 좋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전에 남석이가 말했었잖아. 작품 할 때마다 상대 여배우랑 썸을 타거나, 반대로 틀어지거나 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고. 회원제 클럽에 드나든다는 소문도 있고.”

“제희 선배님이 윤승권 나오는 드라마에 같이 출연할 때, 로드 매니저 대신 유 팀장님이 직접 동행한 것도 윤승권 때문 아니었어?”

“그건 제 추측에 불과했는데영.”

“…….”

그때 조유찬이 뭔가 말하고 싶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가, 조용히 다물곤 고개를 돌렸다. 적어도 길우성의 추측을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정말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

음. 박가람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쨌든, 소문이 좋지 않은 사람들끼리 만난다는 거잖아? 난 이 커플 찬성일세.”

한율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이 겪은바, 둘 다 성격도 별로였다. 순형의 경우엔 별것 아닌 일로 드림래빗 후배들에게 시비를 걸었었고, 윤승권은 샵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불나불 참 시끄러웠다. 입을 꿰매버리고 싶을 만큼.

‘끼리끼리라더니.’

이틀 후, 이우전자 브랜드 광고 촬영이 모두 끝났다. 이채환은 오늘도 나타나지 않았다.

촬영장에서 철수 준비를 할 때, 라이언이 한율에게 다가왔다.

“하뉼, 내일 휴일이잖아. 뭐 할 거야?”

“플리마켓에 내놓을 물건들 미리 정리하려고요. 왜요?”

“응….”

라이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고마운 사람이 곧 한국에 와. 만나기로 했는데, 미리 깜짝 선물을 준비하고 싶어.”

“고마운 사람이요?”

“나 어릴 때 돌봐줬던 베이비시터.”

“아. 지금 고고학자 조수로 있다던?”

“기억해? 아주 잠깐 말했었던 것 같은데.”

“직업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나 봐요. 내일 선물 사러 같이 갈까요?”

라이언이 활짝 웃었다.

“고마워, 하뉼.”

단속 좀 할게요

일요일, 어스래빗 숙소.

알람 없이 자연스럽게 잠에서 깬 길우성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무음으로 설정한 핸드폰을 집어, 어스래빗 단톡방부터 확인했다.

-나 하뉼이랑 외출ㅎ

-올 때 맛있는 거

-지금 숙소에 누구 있음?

-작업실

-우성다람

-난 염색하러 샵ㅇㅇ

-남석이랑 건우는?

-운동이요.

-나 일어났다

단톡방에다 글을 올려놓곤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확인했다. 최근에 번호를 바꿨더니 사생과 안티들의 연락이 확 줄었다.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다른 메시지에 휩쓸려 묻혔을 법한 메시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길우성 씨. 저는 길우성 씨의….]

별생각 없이 장문의 메시지를 읽던 길우성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밝은 어머니의 목소리.

-[어, 우성아. 웬일이야, 이 시간에?]

“엄마, 있잖아….”

길우성은 머뭇거리다가 용건을 꺼냈다.

“할머니… 편찮으셔?”

어머니의 목소리가 차갑게 굳었다.

-[그 사람한테서 연락 왔어? 네 번호는 어떻게 알고?]

한편, 한율은 라이언과 함께 차에다 쇼핑백을 잔뜩 싣고 있었다.

“고마워, 하뉼. 덕분에 예쁘고 튼튼한 가방 샀어.”

“뭘요. 형도 옷 고르는 거 도와줬잖아요. 나온 김에 점심 먹고 갈까요?”

“응. 맛있는 거 먹자.”

우웅.

“……?”

한율은 차에 타고 나서야 스타믹스 JE에게서 온 톡을 확인했다.

-[한 달 남았다.]

지난달, 마력 쌓는 걸 배우려면 최소 두 달은 더 있어야 한다고 했더니 내내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모양.

[평소에 제대로 안 하면 더 늦어질 수 있어요.]

-[ㅇㅋ]

한율은 JE가 새롭게 프사로 설정한 구동의 사진을 눌렀다. 웬 작은 중절모를 삐딱하게 쓰고 눈을 반쯤 뜬 모습이 참 귀여웠다. 꾸벅꾸벅 졸 때 찍은 모양.

우웅.

박가람의 톡.

-[우성이네 집에 뭔 일 있나 봐.]

-[말은 안 하는데 좀 우울해 보인다.]

[네, 제가 물어볼게요.]

한율은 답장을 보낸 뒤 안전띠를 맸다.

잠시 후, WB래빗 어스래빗 연습실.

레스토랑에서 포장한 폭립 스테이크 봉투를 들고 들어가자,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던 길우성과 박가람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오오, 맛있는 냄새!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

“호 형도 점심 아직이라고 해서요.”

연락을 받은 유호가 연습실로 내려왔다.

“나중에 건우랑 남석이 오면 화내겠다. 몸 만드느라 식단 조절 중인데, 연습실에 맛있는 냄새 풍긴다고.”

“맛있는 냄새도 이겨내는 게 식단 조절의 핵심. 이건 결코 복수하는 게 아니다.”

“가람이 너 다이어트할 때 건우한테 많이 당하긴 했지….”

“보배 형은 몇 시쯤에 올까?”

“오늘 탈색 두 번 한다고 했으니까 좀 늦지 않을까?”

“우리 다음엔 죄다 흑발로 컴백하는 거 어때? 모두의 두피 건강을 위해서.”

길우성이 히죽 웃으며 젓가락으로 스테이크 조각을 집었다.

“그럼 나 혼자만 염색해서 튀어야지.”

“그래. 그리고 남들보다 탈모 걱정을 일찍 시작하렴.”

“괜찮아. 엄마가 그러는데, 돌아가신 친아버지 머리가 굉장히 풍성했대.”

“막내야, 너 혹시 격세 유전이라고 아니?”

“검색해보니까 탈모는 알려진 거랑 다르게 격세 유전 아니라더라.”

“격세 유전이 뭐야?”

“호 형 벌써 탈모에 대한 검색을?”

유호의 얼굴이 슬퍼졌다.

“지난번에 오래간만에 작은아버지를 뵀는데, 많이 허전해지셨더라고….”

“저런.”

한율은 커피를 마시며 길우성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평소와 똑같았다.

“너 집에 무슨 일 있냐?”

하지만 은근히 상처를 감추는 데에 익숙한 놈이라, 같이 라방이나 하자며 보컬 연습실로 갔을 때 물었다.

“가람이 형이 너 우울해 보인다고 걱정하던데.”

“그래서 같이 라방하자고 한 거야?”

“팀장님이 가끔은 멤버들이랑 하라 그래서.”

“하긴. 넌 단체 아니면 거의 혼자 하니까. 그렇다고 자주 하지도 않고.”

보컬 연습실 문을 닫은 길우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침에 사촌한테서 메시지가 왔는데, 할머니가 편찮으신가 봐. 몸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나랑 같이 친아버지 있는 봉안당에 가고 싶어 하신다더라.”

“언제?”

“내 스케줄에 맞춰서, 되도록 빨리.”

“봉안당은 어디에 있는데?”

“몰라.”

“모른다고?”

“어.”

길우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늘 엄마랑 통화할 때 들었는데, 친아버지 사고 나서 병원 실려 갔을 때 친가 쪽 사람들이 엄마 병원에서 쫓아내고, 장례식에도 못 오게 했었대. 어느 봉안당인지도 안 알려주고.”

“너무 했네. 너 어머니 배 속에 있었을 때잖아.”

“응. 그래서 엄마가 왜 그렇게 할머니를 싫어하는지 이해가 가더라. 할머니가 자꾸 누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도 조금 그렇고. 그런데….”

길우성이 재차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몸이 안 좋으시다니까, 마음이 좀 그렇다. 거절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데 그 사촌은 네 번호 어떻게 안 거냐? 너 할머니한테 따로 연락처 안 드렸다고 했잖아. 번호도 자주 바꾸고.”

한율을 바라보는 길우성의 얼굴에 과장된 공포심이 섞였다. 진지함이 사라졌다.

“나도 그게 의문이야, 친구.”

“메시지 보낸 사람, 네 사촌이 맞기는 해?”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맞대. 아무튼 그래서 고민 중이다. 엄마가 엄청나게 화냈거든. 본인 마음 편해지고자 이제 와서 별짓 다 한다고. 그래도 친아버지 있는 데에 한번은 찾아가는 게 도리니까, 갈 땐 엄마도 같이 가겠다고 하더라. 나 혼자 보내기 불안하다고.”

한율은 PC 전원을 켰다.

“거절하면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그럼 고민하지 말고 일단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봉안당 위치도 알아둘 겸. 나중에 누나한테도 알려줘야지.”

“으음….”

“어머니랑 할머니가 마주치는 상황이 부담스럽고, 또 어머니한테 죄송하면 내가 대신 같이 가고.”

길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싫으면 말고.”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길우성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끄덕였다.

“엉. 우리 엄마 스트레스받게 하는 것보단 네 시간 뺏는 게 나을 것 같다.”

“말 참 예쁘게 한다.”

그린라이브에 접속, 저장되어 있던 어스래빗 계정으로 로그인했다. 라방 제목은 간단하게 [00래빗]. 카메라가 켜지자마자 두 사람은 뚱했던 얼굴을 환한 미소로 채웠다.

“안녕, 이프림.”

“이프림, 안녕! 점심 맛있게 먹었어요?”

* * *

18일. WB래빗 엔터 플리마켓 입장 응모가 시작되었다. 한율은 올해도 플리마켓에 내놓을 물건 사진을 SNS에 올렸다. 그러자 한 시간도 안 되어 연예 뉴스란 메인에 기사가 떴다.

[어스래빗 서한율, 돌아온 플리마켓 기부 천사]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 올해도 플리마켓에 내놓을 물품을 공개했다. 18일 오전 개인 SNS에 ‘이번엔 해외 스케줄 나갔을 때 산 물건들이 많네요. :)’라고 쓴 서한율은…(중략).]

-정품 인증서도 꼼꼼하게 챙겨주는 센스

-예쁜 거 많다. 하지만 올해도 난 못 가겠지ㅠㅠ

-얘 작년에도 신발 많이 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도 많네. 대체 얼마나 사치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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