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얘한텐 사치 아닐걸요.
-다 명품임?
ㄴ전부 다는 아닌 듯.
-서한율 신발 사이즈 280.
ㄴ나랑 같다.
ㄴ한다. 응모. 기다려라. 신발.
-그냥 돈 조금 더 주고 새것 사고 말지 뭐하러 번거롭게 응모하고 줄 서서 기다리냐ㅋㅋ 요즘은 명품도 직구로 다 구할 수 있는데
ㄴ속아서 짝퉁 살 위험이 없잖아.
ㄴ진짜 매장이나 면세점에서 샀을 테니 정품 확실할 거고, 몇 번 신거나 걸치지도 않아서 새것이나 다름없는데 반값 정도로 나올걸?
ㄴ좋아하는 아이돌 소장품이면 정가의 몇 배를 주고서라도 사는 해외 빠순이들 있음. 거저먹는 장사임.
-얘도 설마 팬이 준 선물 팔아치우거나 여친한테 주진 않겠지?
ㄴ팬한테 받은 선물은 따로 나눠서 보관하는 애라 걱정ㄴㄴ
-그렇게 막 비싼 건 없네
-오른쪽 사진 끝에 있는 신발, ㅇㅇㅎㄴ ㅅㄹ도 똑같은 거 갖고 있던데
ㄴ아이돌 즐겨 사는 브랜드 다 거기서 거기예요. 겹치는 게 당연하죠.
-고양이 이동 가방 탐난다.
21일과 22일 이틀 동안은 타이틀곡 M/V 촬영, 24일엔 한율이 단독으로 광고를 찍었던 도레미 피자 팬 사인회를 진행, 25일과 26일엔 후속곡 M/V를 촬영했다.
M/V 촬영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
“나 내일은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거다. 남석이 넌 뭐 먹고 싶냐?”
“폭립이요.”
“폭립 좋지. 내일 형이랑 같이 먹으러 갈까?”
“네.”
“나도!”
“우리 모레 몇 시 비행기지?”
어스래빗은 미국 쇼케이스 투어에서 내보낼 영상을 찍기 위해 28일, LA로 출국하기로 했다.
“두 시 반.”
“우성이랑 한율이, 내일 같이 외출한다고 했지? 정말 안 태워다줘도 괜찮아?”
“네, 괜찮아요.”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 운전 조심히 하고.”
“네.”
숙소로 돌아왔을 땐 어느새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한율은 내일 입을 새카만 정장과 넥타이, 구두를 미리 골랐다.
솔직히 길우성을 따라 경기도 봉안당까지 운전해서 다녀오려니 퍽 귀찮았다. 하지만 제일 친한 친구 행세를 하는 게, 나중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테니.
한율은 며칠 전, 길우성 어머니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우성이 혼자 보내면 괜히 그 사람들 말에 휘둘려서 안 해도 될 말, 안 해도 될 약속 같은 걸 하게 될 것 같거든. 그렇다고 아줌마가 같이 가면 우성이가 들어야 할 이야기를 못 듣게 될지도 모르고….』
『걱정하지 마세요. 길우성, 호구 잡히지 않게 제가 잘 단속할게요. 친구잖아요.』
『우리 우성이 옆에 한율이 너처럼 든든한 친구가 있어서, 아줌마가 얼마나 안심되는지 몰라. 고마워, 한율아.』
다음 날 이른 아침.
방에서 나오자, 길우성이 이미 나갈 준비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잠 제대로 못 잤냐?”
“봉안당에 가는 게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검색 좀 하다 보니. 이른 아침부터 운전하게 해서 미안하당.”
“됐어. 경기도의 어느 곳인지는 아직 못 들은 거지?”
“엉. 수원에서 만나면 알려주겠대. 미리 알려주면 마음 바뀔 거라 생각 드나 봐.”
길우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한율은 현관에서 구두를 신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외투 안 걸치고 그대로 가게? 추울 텐데.”
“아.”
길우성이 도로 구두를 벗고 2층으로 올라갔다.
길우성의 조모, 그리고 사촌을 만난 곳은 경기도 수원의 한 역 앞이었다.
“봉안당은 화성에 있어요. 그런데… 한율 씨에겐 미안하지만, 우성… 씨가 저희 차에 타도 괜찮을까요? 봉안당에 도착하기 전에, 할머니가 우성… 씨랑 조용히 얘기 나누고 싶어 하셔서요.”
어색한 인사 직후, 길우성의 사촌인 김지완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길우성의 조모는 한 걸음 뒤에서 면목 없는 얼굴로 웃을 뿐.
“아….”
어머니로부터 친가 사람들하고만 있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았는지, 길우성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피가 이어져서 이 자리까지 왔다곤 해도, 외면한 채 살아온 세월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므로. 자신 때문에 여기까지 온 친구를 혼자 운전해서 따라오게 하는 것도 미안하고 말이다.
“이야기는 도착해서 나누면….”
길우성의 조모가 슬픈 얼굴로 길우성의 손을 꼭 잡았다.
“네 아버지에 관해 알려주고 싶은 게 많아, 우성아. 지난번엔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잖니. 너희 엄마가 너한테 하지 않은 이야기, 몰라서 못 한 이야기도 많을 테고. 우성이 너도 네 친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잖니.”
본래 세상, 그리고 지구로 와서 수십 년 동안 참 다양한 인간을 겪었다. 그래서일까. 한율은 이 두 사람에게서 가식의 냄새, 수작질의 냄새를 짙게 맡았다.
몸이 아픈 건 사실 같지만.
“그럼 제 차에 함께 타고 가시는 건 어떠세요?”
한율의 제안에 김지완이 끼어들었다.
“아뇨, 죄송하지만 민감한 가족사라….”
한율은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실수 한 번으로 억 단위가 가볍게 날아갈 수 있는 직업이라서요. 민감한 가족사는 흘려들을 테니, 친구이자 동료로서 길우성 헛소리 못 하게 단속 좀 할게요.”
“헛소리라니!”
그럼 이 영상 올린 건 누구야?
길우성의 조모는 내키지 않는 눈치였으나, 실수에 억 단위 운운하는 말을 듣고도 거부하면 의심을 사겠다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우리 우성이가 참 든든한 친구를 뒀네.”
김지완은 뭐라 말하려다, 눈치를 살피고선 조모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그럼 나중에 봐요, 할머니. …할머니 잘 부탁해요, 우성 씨.”
“네.”
차에 탄 뒤 길우성의 조모가 알려준 봉안당을 내비에 찍었다. 30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거리였다. 고작 두 번째 만남인 손자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기엔 짧은 시간.
‘하지만 평소 연락을 자주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충분한 시간이지.’
길우성의 조모는 안부부터 물었다. TV 속 길우성을 보며 느낀 놀라움과 ‘네 아빠가 살아있었다면 정말 자랑스러워했을 거다’라는 아쉬움 섞인 말도 자주 덧붙였다. 당신 아들 역시 끼가 많았다며.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참 맞는 것 같아. 네 아빠도 어릴 적에 엉뚱하게 해맑았거든. 지금 우성이 너처럼. 그랬던 애가 군대 다녀오더니 스스로 다 컸다고….”
그녀의 시선이 차창 밖을 향했다. 점점 쓸쓸해지는 광경을 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서울에서 돈 많이 벌어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살겠다며 씩씩하게 나갔었는데…. 너희 엄마도 날 무척 미워하고 싫어하겠지만, 솔직히 나도 그랬어. 착하고 정 많던 둘째를 뺏어갔다고 생각했거든. 하물며 너희 엄마는… 아니, 아니다. 아무튼.”
이야기는 길우성 친부 사망 이후로 흘러갔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이런저런 말들을 했지만, 사업 실패로 인한 빚, 그리고 둘째 아들의 사망으로 금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힘들었단 게 요지였다.
“혼인 신고도 빚쟁이들이 찾아갈까 봐 못 하게 했던 건데, 너희 엄마는 우리가 보험금이나 피해보상금을 가로채려 나타났다고 여기니… 나도 견딜 수가 없었다.”
한탄으로 가득한 후회.
“그래도 그때 너희를 끌어안고 어떻게든 살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형편이 어려웠어도, 이렇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된 지금에야 만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나 길우성이 어머니에게 들은 내용과는 사뭇 달랐다. 아무리 빚 문제가 있었다곤 해도, 병원에서 쫓아내고 장례식에도 못 오게 하며 봉안당까지 알려주지 않는다고?
길우성도 짙은 의구심이 들었겠으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많이 편찮으신 거예요?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 거예요?”
“원래 이 나이 되면 여기저기 아픈 법이야. 그래도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괜찮아. 하지만….”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건너뛰었다.
“네 아빠가 사고로 그리된 뒤 장례 뒤처리하랴, 빚 갚으랴, 가족들 챙기느라 고생한 네 큰아버지 생각하면…. 네 큰아버지… 조금 전 본 지완이 아비가 너희 가족도 살뜰히 챙겼던 거 알고 있니?”
길우성의 백부 이야기로.
“그랬어요?”
“그래도 형이라고 동생이 힘든 건 못 보겠는지, 네 아빠한테 분윳값, 기저귀 값하라고 몰래몰래 생활비를 보태줬다고 하더라. 네 아빠 죽은 이후에도 너희 가족 챙기려고 했는데, 내가 반대했어. 작은아들에 이어서 큰아들도 어떻게 될까 봐 겁났거든.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건강이 안 좋은 걸 내세워 길우성에게 봉안당에 가자고 한 진짜 이유가 또렷해졌다. 백부에 대한 포장.
“지난번 널 만나는 자리에 함께 나가자고 했는데, 동생 식구를 외면한 자신이 무슨 염치로 만나냐며 아직도 어찌나 미안해하던지….”
‘바로 금전 문제를 얘기하면 반발감을 살 테니, 밑밥부터 까는 건가.’
상당히 부정적인 의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릴 때 버려놓고선 자식이 죽어서야 유산과 보험금을 받으러 나타나는 부모도 있는 마당에, 제 배로 낳은 자식도 아니고 20여 년 만에 찾은 손자임에야.
한율은 룸미러를 통해 어두워진 길우성의 안색을 살폈다. 잠시 멈춘 대화. 한율은 덤덤하게 물었다.
“저기인 것 같은데, 맞아요?”
메마른 들판 사이, 저 멀리 낮은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지어져 있었다.
“네, 맞아요. 이런 곳은 낯설 텐데, 잘 찾아왔네요.”
기특하게 보는 미소. 한율은 작게 고개를 꾸벅이곤 봉안당 쪽으로 차선을 바꿨다.
* * *
정오가 될 무렵, 어스래빗 숙소.
이건우가 유호 옆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막내들은 오늘 어디 간 거야? 새벽 일찍 나가는 것 같던데.”
“우성이 친아버지 봉안당에.”
“아…. 혹시 오늘이 기일이야?”
“아니. 우성이네 할머니가 같이 가자고 하셨나 봐. 얘기 들어보니까, 몸이 좀 편찮으신 것 같더라.”
“어째 좀 불안하다. 20년 가까이 외면하고 살다가, 우성이가 연예인 됐다는 사실 알고 나서 찾은 사람이잖아.”
“한율이가 같이 갔으니까 별일 없겠지.”
“그렇겠지? 우리보다 어른스러운 애니까. 그런데 형.”
이건우는 거실에 유호와 달냥만 있는 걸 확인하곤 조용히 물었다. 달냥은 벽에 설치된 고양이 전용 통로에 드러누워서 꼬리만 까닥거리고 있었다.
“요즘 연애해?”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안 해.”
“진짜 안 해?”
유호는 재차 단호하게 부정했다.
“안 해. 곡 작업으로 바빠죽겠는데 그런 거 할 시간이 어디 있냐.”
“그럼 어젯밤에 통화한 여자는 누군데.”
“혹시 3층에서 통화하는 거 들은 거야?”
“어.”
“그거 은영인데.”
이건우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야심한 시간에 은영 선배님이랑 통화를 왜 해.”
“곡 때문이지, 뭐긴 뭐겠냐. 둘 다 통화 가능한 시간이 그때뿐이라서 그때 한 것뿐이야.”
“…….”
“십년지기 친구다. 나랑 걘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 전혀 없으니까, 의심의 눈초리 거둬. 너도 중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낸 여사친 있잖아.”
그제야 이건우가 고개를 돌리며 한숨 쉬었다.
“걔랑 연락 끊긴 지 오래야.”
“어쩌다가?”
“그냥, 자연스럽게. 바빠지는 동안 제때 답장을 못 보내다 보니 점점 연락 주기가 길어졌거든. 그러다 지난번 월드투어 끝나고 연락했는데 번호가 아예 바뀌었더라고. 톡 친구 목록에는 여전히 있는데.”
이건우가 고양이 낚싯대를 집었다. 달냥이 벌떡 일어나 계단식으로 된 선반을 밟고 내려왔다.
“괜히 섭섭하기도 하고, 걔 말고도 다른 친구 몇 명도 그렇게 연락이 끊겼거든. 그래서 그런가. 먼저 연락할 엄두가 안 나더라. 남은 친구들하고도 시간이 갈수록 공통 대화 주제가 사라지고, 자주 만나지 못해 소원해지는 마당에.”
이건우가 낚싯대를 역동적으로 흔들었다. 휙, 휙. 달냥이 낚싯대에 매달린 인형을 향해 앞발을 휘두르다 덥석 잡았다. 므옭!
“그런데 뭐 어쩌겠어. 아이돌로 데뷔하면 친구들이랑 멀어질 거란 이야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도 내가 선택한 길인데. …응? 나 왜 한탄 중이지?”
“친구가 없어서?”
“전혀 없는 건 아니거든?”
“그래도 좋은 친구는 잡아. 혼자 사이가 멀어졌다고 머뭇거리다간 정말로 멀어진다. 친구들은 네가 바쁠까 봐, 너한테 방해될까 봐 먼저 연락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잖아.”
까닥. 유호는 턱짓으로 TV를 가리켰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세상이기도 하고.”
TV에선 미스터리 홀 관련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스터리 홀 위치가 표시된 해외의 한 지역에, 사이비 종교 집단이 모여 정체불명의 의식을 행하고 있단 소식이었다.
진지한 유호의 조언에, 이건우도 따라 TV로 시선을 옮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얏!”
뫙!
“달냥이랑 놀아줄 땐 집중 좀 하고.”
한율과 길우성이 숙소로 돌아온 건 저녁 무렵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쿵쿵. 크게 말한 길우성이 2층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던 강보배는 뻐끔거리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우성이 왜 저래? 단단히 삐친 얼굴인데?”
한율은 구두를 챙기며 대답했다.
“멍청한 호구 새끼라고 욕했거든요. 그래서 저래요.”
식탁 앞에 앉아 등갈비를 먹던 라이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욕을 했다고? 하뉼이?”
“네. 하도 답답한 소릴 지껄이기에.”
“우성 진짜 바보같이 굴었나 봐.”
라이언 맞은편에 앉은 박가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