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6화 (286/427)

“서한율 같이 보내길 잘했다니까.”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리고 우성이 얘기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강보배가 안쓰러운 얼굴로 말하자 차남석이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안 들어봐도 뻔해. 그런데 욕했다는 건 호구 짓 하는 걸 막지 못했다는 거야?”

“일단 막기는 했어요.”

“잘했어. 저녁은?”

“먹을 거 있어요?”

“시켜줄게. 뭐 먹을래?”

한율은 욕실로 들어가 씻는 동안, 몇 시간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길우성은 처음 보는 친부의 유골함 앞에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훌쩍거렸다. 그리고 챙기고 온 가족사진을 그 안에다 넣었다. 어머니와 누나, 길우성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봉안실을 나온 후엔 그곳에 조성된 작은 공원을 걸었다. 길우성이 조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한율은 조용히 그들 뒤를 따르며 주변을 살폈다. 한산했다.

‘게이트 열리고 나면 이런 곳도 사람들로 미어터지겠네.’

김지완은 길우성에게 편히 말을 놔도 되냐고 물었다. 길우성이 그러라고 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내밀었다. 사촌끼리 연락처 교환하는 걸 막을 명분은 없기에, 거기까진 두고 봤다. 그러나 함께 점심을 먹자는 이야기에는 길우성보다 빨리 나서서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시간 관계상 점심을 먹긴 힘들 것 같아요. 돌아가서 내일 출국 준비도 해야 하거든요.』

『30분도 안 될까요? 기껏 만났는데 이대로 헤어지기엔….』

김지완이 실망하고 조모도 쓴웃음을 짓자 마음이 흔들린 걸까. 길우성이 한율의 팔을 잡았다.

『30분 정돈 괜찮잖아, 친구. 힘들면 운전은 내가 할게.』

조모와 대화하면서 이해 안 되는 모순을 여러 번 느꼈을 텐데. 연락처 어떻게 알아냈냐는 물음에 어물쩍 말을 돌리는 사촌의 태도에도 수상함을 느꼈을 텐데.

그 모순을 깨려고 이러나 싶어서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길우성은 김지완이 떠드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가 스스로 호구를 자처했다.

『형님도 그 브랜드 좋아하는구나. 미국에서 올 때 하나 사 올까요?』

그래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욕했다.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고 지완이 형네도 고생 많이 했다잖아. 고작 신발 하나 사다 주는 게 뭐가 호구 짓이냐?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닌데. 나 바보 아니거든?』

두 번 욕했다.

차남석이 시켜준 음식이 온 뒤, 먹으면서 간단히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막았어. 일은 늘 ‘이 정도쯤이야’란 생각으로 시작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쌍욕 한 건 사과하자. 친구일수록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지.”

“네.”

다음 날 아침.

한율은 큼지막한 캐리어를 가지고 거실로 내려오던 길우성과 마주쳤다. 한율은 어제 유호의 조언대로 사과했다.

“어제 멍청한 호구 새끼라고 쌍욕 한 거 미안하다, 호구야.”

“…싸우자, 서한율!”

한편 그 시각, 구독자 10만 명을 보유한 사이버 렉카의 채널에 한 동영상이 올라왔다.

[2021년 7월 대비하세요. 지구 멸망합니다.]

여러 연예기획사에 고소당하며 한동안 잠잠했던 사이버 렉카가 뜬금없는 주제로 동영상을 올리자, 사람들은 호기심에 클릭했다. 영상은 미스터리 홀 지도로 시작됐다. 평소처럼 변조한 목소리나 BGM 없이 자막과 이미지만 흘러나왔다.

[2021년 7월]

[이 지도에 표기된 모든 게이트가 열립니다.]

[빨간색 게이트는 2020년 12월]

[대한민국 서울과 당진처럼]

서울과 당진 미스터리 홀 촬영 사진.

[위험한 괴물이 쏟아져 나올 예정이며]

[서울은 지리상 가까워 하나로 보일 뿐]

서울을 중심으로 확대되는 미스터리 홀 지도.

[두 곳입니다.]

[돔구장에 표기된 회색 게이트는]

비 내리는 날의 돔구장 사진.

[수년 동안은 꽉 막힐 테지만]

[언제 열릴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갖고 있으며]

확신에 가득 찬 영상 속 주장. 인터넷은 난리가 났다. 해당 채널 주인인 사이버 렉카가 SNS를 통해 너튜브 계정이 해킹당했다고 밝힌 까닭이었다.

-그럼 이 영상 올린 건 누구야?

세상이 어떻게 될는지

“7월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미스터리 홀이 일제히 열리면서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는 거 아냐?”

주로 인기 많은 아이돌을 타깃으로 삼았던 사이버 렉카였다. 해당 영상은 금세 어스래빗 멤버들에게도 알려졌다.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길.

강보배가 영상을 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회색은 몇 년 동안 꽉 막히는 게이트고, 빨간색은 괴물이 쏟아져나오고? 그런데 지도에 표기된 건 거의 빨간색이잖아.”

“여러 곳에서 고소로 털리니까 조회 수 끌어보려고 수작 부리는 거겠지. 빨간색이 위험하고 파란색이 안전한 거란 추측은 예전부터 나왔던 거잖아.”

“하지만 서울의 빨간 미스터리 홀이 실은 두 개가 겹친 거란 주장은 처음 아니야?”

“이거, 미스터리 해커가 렉카 계정 해킹해서 올린 것 같은데? 다른 해외 너튜버 채널이랑 SNS에도 똑같은 내용이 1, 2분 간격으로 올라왔었대. 봐.”

이건우가 강보배와 차남석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조금 전까지 심드렁했던 차남석의 얼굴이 굳었다.

“…….”

“다른 해커 장난이었으면 좋겠다. 7월이면 앞으로 5개월 정도밖에 안 남은 거잖아.”

유호는 멤버들의 불안에 동조하는 표정을 짓다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박가람은 한율의 눈치를 살피곤 한마디 했다.

“세상이 어떻게 될는지.”

한율은 영상 댓글을 훑었다. 차남석의 말처럼 조회 수 끌기 위한 수작이 아니냔 의심이 대부분이었다. 채널 주인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경찰에다 PC를 제출했다고 밝혔음에도.

당연했다. 평소 허위 사실을 퍼뜨리던 사이버 렉카의 말을 누가 믿을까. 영상 속 주장 역시 그걸 뒷받침할 근거 하나 없는데.

‘하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큰 집단이 나선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공항에 도착, 항공사 라운지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릴 때였다. 포털사이트 실검 1, 2위에 [이우그룹], [이우그룹 미스터리해커]가 올라왔다.

[이우그룹 부회장, “미스터리 해커와 직접 만났다”]

[이우그룹 이 부회장, 오늘 아침 대통령과 단독 면담]

[[단독]이우그룹, 7월 게이트 사태 대비 TF팀 구성 예정]

-미침?

-본사에 TF팀까지 만든다는 건 찐이란 소린데

-부회장 치매 걸린 듯

-이우그룹 또 협박당한 거 아님?

-서울 빨간 미스터리 홀이 실은 두 개라던데

-이우그룹 본사 다니는 친구가 그러는데, 진짜로 TF팀 모집 공고 내려왔다고 하더라. 특수부대 출신 우대

ㄴ특수부대 출신이 대체 왜 필요한 건데ㄷㄷㄷ

-이미 당진 자동차 공장 위에 뜬 미스터리 홀로 큰 손해 봤으니, 7월 게이트 예견이 사실이든 아니든 대비하고 싶은 거겠지

-미스터리 해커 만났다는 건 서울의 다른 미스터리 홀 정확한 위치를 들었다는 거 아님?

ㄴ겹친 거 보면 지난번에 뜬 곳 근처 아닐까요

-7월 대재앙 구라면 존나 재밌겠다

-미스터리 홀 말고 게이트라고 불러야 하는 거?

-지금 해외에서도 이우그룹이 근거 없는 7월 재앙설 믿고 대비한다는 뉴스 나오는데 쪽팔린다 진짜ㅋㅋㅋ

-와 주가 내려가는 소리 들려

-정부까지 믿고 대비하면 레전드

-처웃지 마 ㅅㄲ들아 지금 군부대 다 점검으로 비상 걸렸다

ㄴ??

ㄴ지금 여러 기관에도 건물 안전 점검 시행하라고 공문 내려옴. 시에선 안전 감찰까지 뜬다던데

ㄴ??????

-ㄹㅇ 무섭다

누군가는 불안에 떨고 누군가는 냉소적으로 조롱하고.

그러나 하루, 이틀.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불안에 휩싸였다. 이우그룹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업에서도 재앙에 대비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정부까지.

2월 3일. 미주 쇼케이스 투어 때 선보일 영상과 자체 콘텐츠 촬영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 어스래빗 멤버들은 LA 대한민국 총영사관 앞에 모인 사람들과 그들이 든 팻말을 보았다.

[한국 정부는 미스터리 해커의 정체를 공개하라!]

[미스터리 홀 정보 독점이야말로 재앙]

[한국은 진실을 말해라]

“으아,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나라만 독점한 정보가 따로 있나?”

“이우그룹 부회장이 미스터리 해커랑 직접 만나서 얘기 나눴다잖아. 그 과정에서 따로 알아낸 사실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는 거겠지.”

“미스터리 홀이 일제히 열리면 우리나라도 위험해지는 건 매한가진데, 무슨 이득이 있다고 우리가 정보를 독점한다는 건지.”

“미스터리 해커가 우리나라만 신경 쓴다는 인상을 받아서 그런 거 아닐까? 그 해커, 지도 뿌린 것 외엔 다른 나라에 직접 경고한 적 한 번도 없잖아. 이우그룹이나 정원그룹에 했던 것처럼 대규모 방공시설 지으라는 협박도 한 적 없고.”

멤버들이 입에 올리는 의문은 언젠가 한율도 계나리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미국 같은 강국에 게이트 사태를 미리 알릴 계획은 없었느냐고.

『우리나라부터 챙기고 싶어서요. 믿도록 증명하는 것도 힘들고. 그리고….』

계나리는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솔직히 오빠도 그렇지 않아요? 게이트가 열린 이후,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떠올리면.』

계나리에게 ‘난 원래 한국인이었다’라고 거짓말했던 터라 한율은 더 깊게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

“그런데요, 팀장님. 올해는 정말 플리마켓만 열고 봉사활동은 안 해요?”

영사관이 멀어졌다. 길우성의 질문에 오 팀장이 그들을 돌아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요.”

“이프림이랑 같이 도시락 싸고 김장하는 거 재밌었는데. 올해는 아스대도 안 하고….”

“아쉽지만 올해는 기부로 대신해야겠당.”

“오늘 자기 전에 한잔하실 분?”

“전 저녁 먹고 바로 잘게요. 좀 피곤하네요.”

내일은 한국으로 돌아간다. 한율의 말에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푹 쉬어.”

잠시 후. 호텔 객실로 돌아온 한율은 정말로 곧장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새벽 1시가 되었을 무렵, 맞춰둔 알람 소리를 듣고 깼다.

“…….”

새벽 3시경, 미국 서쪽의 채널 아일랜드 국립공원의 한 섬.

부스럭, 부스럭. 캠프장에서 텐트를 치고 자던 톰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여기 여우가 배낭 뒤지는 데에 선수라더니.’

그래서 식량을 모두 철제 상자에 보관했지만, 톰은 문득 야심한 새벽에 찾아온 여우 사진을 찍고 싶단 생각이 들어 조용히 일어났다.

부스럭, 부스럭. 레인저의 말처럼 참 뻔뻔하기도 하여,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을 텐데 도망도 안 친다.

톰은 슬며시 텐트 지퍼를 열어, 카메라 앱을 켠 핸드폰만 틈 사이로 내밀었다.

‘요 귀여운 도둑 녀석, 면상 좀 보자.’

녹색으로 빛나는 한 쌍의 눈이 화면에 잡혔다. 그러나 너무 어두워서 전체적인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다. 조명을 켜면 도망가려나. 잠시 망설이던 톰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여우의 눈 위치가 너무 높았다.

‘여우가 이렇게 컸던가?’

배낭을 앞발로 건드리던 짐승이 고개를 돌려 옆에 놓인 톰의 신발에 관심을 가졌다. 톰은 두 눈으로 직접 짐승을 보기로 했다.

“……?!”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이 짐승의 실루엣을 잡아냈다. 그러나 톰은 짐승의 모습보단, 핸드폰 카메라가 담지 못했던 넓은 광경에 놀라 뒤로 물러났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섬의 새벽하늘은 수많은 별로 가득해 아름다웠다. 하지만 섬의 절벽 부근 하늘,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거대한 구멍에서 크고 작은 무언가가 섬과 바다로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끔찍한 상황에 톰이 멍해진 사이, 그의 신발을 문 짐승 같은 괴물이 텐트 사이로 주둥이를 불쑥 들이밀었다. 톰과 괴물의 눈이 마주쳤다.

…털썩. 톰은 까무룩 기절했다.

[[속보] 현지 시각 새벽 3시경, 미국 캘리포니아 해상 미스터리 홀 출현!]

* * *

“지구가 미친 것 같아.”

LA에서 차로 한 시간. 그리고 또 배로 90여 분 정도 가면 있다는 해상 국립공원에 미스터리 홀이 열렸다는 소식에, 어스래빗 멤버들은 예정보다 더 일찍 일어나 공항으로 출발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이번에도 지도에 미 표기된 지역이었지?”

“어. 그런데 발생 30분 전에, 7월에 모든 게이트가 열릴 거라고 예고한 사이버 렉카 채널 있잖아? 거기에 미국 서쪽 바다에 미스터리 홀이 나타날 거란 예고 영상이 올라왔었대.”

“세상이 진짜 미치려나 봐.”

한율은 현지 뉴스를 봤다. 오늘 새벽, 섬의 레인저들이 미스터리 홀에서 떨어진 괴물들을 총으로 쏴서 물리치고, 캠핑 중이던 관광객들과 함께 무사히 섬을 빠져나왔다는 소식이었다. 가까운 다른 섬에서도 관광객들 대피가 끝났다고.

“우리, 비행기 탈 수 있겠지?”

“당연히 탈 수 있지. 괴물이 바다 건너 뭍으로 상륙한 것도 아니고.”

“당진에 나타났던 날개 달리고 힘센 괴물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인 것 같아.”

불안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강보배가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지금 공항 가는 길이야. …괜찮아, 별일 없어. LA 근처라곤 해도 실제론 좀 떨어진 곳이거든.”

한율도 모친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국에 도착하면 바로 연락해달란 이야기였다. 스타믹스 JE에게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후우.]

그는 한숨부터 푹 내쉬곤 짧게 물었다.

-[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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