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7화 (287/427)

“네.”

-[잘났다. 오면 좀 보자.]

“네.”

LA국제공항은 당장 이 지역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여러 말소리. 멤버들은 경호원과 스태프들에게 둘러싸인 채 절차를 마치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항공사 VIP 라운지도 소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일곱 살 정도 된 아이가 울면서 부모에게 떼쓰고 있었다. 목청이 참 좋았다.

“싫어어! 오늘 쥬라기공원 간다고 했잖아아!”

“할아버지가 당장 들어오라 했다고 몇 번을 말해! 뚝 안 그쳐?!”

“엄마랑 아빠만 한국 가면 되잖아아! 나 동생이랑 쥬라기공원 갈 거야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희만 거기를 어떻게 가!”

“애들한테 인증샷 찍어서 보낸다고, 선물 사 간다고 약속했단 말이야아! 공료옹!”

그 모습을 보던 이건우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저 나이 때 공룡에 환장했었는데. 옛날 생각난다.”

“그제 보니까 지금도 좋아하는 것 같던데?”

이틀 전, 어스래빗은 유니버셜 시티에서 자체 콘텐츠 촬영을 했었다. 쥬라기공원도 촬영장소 중 하나.

“참 이상하지. 어릴 땐 왜 그렇게 공룡이 좋은 걸까?”

“글쎄. 하지만 미스터리 홀에서 공룡 비슷한 게 나오잖아? 참 싫어질 것 같아.”

“동감.”

부모에게 떼 쓰던 아이가 급기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흐아앙!

“기념품점에서 산 공룡 인형, 캐리어에 담아서 부쳐버리지만 않았어도 하나 나눠주는 건데.”

주섬주섬. 그때 라이언이 가방에서 쥬라기공원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꺼냈다. 그리고 부모도 한숨을 쉬며 외면하는 아이에게 다가가 내밀었다.

“자.”

히끅. 아이가 울음을 삼키며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뚝 그치면 이거 선물로 줄게.”

“…….”

“싫으면 말고.”

“…진짜? 진짜 줄 거야?”

“응. 그러니까 울지 말고 뚝.”

아이가 훌쩍거리며 부모의 눈치를 살폈다. 부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라이언을 향해 웃었다.

“괜찮아요. 울음 그치라고 선물 안겨주면 나중에 버릇 나빠져요.”

“……!”

충격받은 아이의 얼굴. 라이언은 자기 일처럼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안 일어났어요.”

“네?”

“버릇 나빠지는 거, 아직 안 일어난 미래에요. 울게 된 원인은 과거. 확실하잖아요. 그리고 아이의 행동엔 뭐든 원인이 있고, 원인이 중요하잖아요.”

“…….”

“쥬라기공원 기대 많이 했을 텐데. 갑자기 못 가게 돼서 속상하지?”

훌쩍.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대 많이 했는데 엄마랑 아빠가 갑자기 안 된다고 했어. 가서 실컷 놀자고 약속해놓고선….”

“정말 속상했겠다. 약속 깨놓고선 일방적으로 잔말 없이 이해하라고만 하고. 솔직히 이해도 안 되는데. 그렇지?”

“응….”

“…….”

결국 아이의 부모는 라이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모자 선물을 받아들였다. 라이언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선 멤버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라이언 이제 다 컸네. 아이 달래줄 줄도 알고.”

“나 다 큰 지 오래야. 그리고….”

라이언이 소파에 앉으며 뚱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 우는 소리, 듣기 싫어.”

은퇴하세요

약 13시간을 날아 한국에 도착. 입국장으로 가는데, 길우성이 돌연 우뚝 섰다.

“아!”

“아, 깜짝이야. 왜?”

“신발 사다 주기로 한 거 깜빡했어.”

“누구 신발?”

“그때 내가 안 사도 되게끔 네 사촌한테 말했는데, 기어코 사다 주기로 했냐?”

길우성이 한율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할머니 모시고 병원 다닌다고 하니까….”

“너희 어머니한테 이른다.”

“안 된다, 이 고자질쟁이야!”

“뭐, 이 호구야.”

“얘들아, 공공장소에선 조용히.”

“막내들 고등학생 땐 안 싸우더니 왜 다 커서 싸우냐.”

입국장에는 어스래빗을 찍고자 하는 기자들과 팬들이 모여 있었다.

미스터리 해커로 추정되는 자의 예고 대로, 미국 서쪽 해상에 미스터리 홀이 열려 괴물들이 나왔다. 그래서 7월에 모든 미스터리 홀이 열릴 거란 예고 역시 사실이 아니냐 모두가 불안해하는 와중에도, 이들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미국으로 출국했을 때부터 내내 멤버들을 따라다닌 사생들도 곁에 붙어서 카메라를 들이댔다. 차칵차칵.

“한율아, 이쪽 좀 봐줘!”

서울로 돌아가는 회사 차 안.

“인터넷 속 세상은 굉장히 심각해 보였는데, 왜 막상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지?”

“그래도 설 연휴 때 해외여행 계획했던 사람들, 다 줄취소 중이래. 마트나 약국에서도 사재기 현상 일어나고 있고.”

한율은 모친에게 무사히 도착했다고 전화한 뒤 인터넷에 들어갔다. 이우그룹이 또 실검 1위에 올라가 있었다. 미 국방부 장관이 이우그룹 부회장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온다는 기사 때문인 듯했다.

‘이제 와서 경솔하게 입을 놀리진 않겠지.’

미국으로 가기 전, 한율은 이우그룹 부회장을 다시 찾았다. 한국이 7월 게이트 사태에 단단히 대비할 수 있도록 힘 좀 써달라고 부탁했더니, 그는 정말로 발 빠르게 움직여주었다.

우웅. 스타믹스 JE의 톡.

-[언제 시간 나냐?]

[오늘이요.]

-[나 오늘 오프.]

[선배님 집으로 갈게요.]

잠시 후. 한율은 숙소에 짐만 둔 채 JE의 집으로 향했다. 끼웅. 구동이 한율을 보자마자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구동을 쓰다듬어주며 건강 상태를 살핀 뒤, JE의 마나 유동 수준을 체크했다.

“네가 말한 적정 시기보다 조금 이르지만, 이만하면 나도 마력 쌓는 단계로 넘어가도 되지 않냐?”

“공기 맑은 곳에서 열심히 하셨나 봐요.”

“쉬는 날마다 구동이 데리고 해원이 있는 데에 갔었거든.”

JE가 기대하는 얼굴로 물었다.

“어때?”

한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본래 세상이었다면 불합격 수준이지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으니. 박가람과 이해원도 이 정도였을 때 마력 쌓는 단계로 넘어갔고.

“오늘은 제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힘들 것 같고, 둘 다 여유 있는 날을 따로 잡죠.”

“내가 최대한 네 시간 맞출게. 넌 언제가 괜찮냐?”

“선배님 요즘 한가하세요?”

“월요일 보이는 라디오 MC 빼곤 고정 스케줄 없어. 그리고 내가 지금 본업이 중요할 때냐.”

“전 본업이 중요한데.”

“그래, 존중한다. …아참.”

JE가 사과패드를 내밀었다.

“너 이 기사 봤냐?”

한율이 게이트를 만들었던 채널 아일랜드 국립공원의 섬. 그곳을 샅샅이 조사하던 경찰과 군인들이 섬 절벽 아래에서 신원 미상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영문 기사였다.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요. 예전에 여기서 죽은 사람이 이번 조사 중 우연히 발견된 거겠죠. 설마 선배님, 제가 죽였다고 의심하는 건.”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어째 안 좋은 예감이 들어서.”

“부검하면 대충 언제 죽었는지, 사인이 뭔지 다 나올 텐데요. 섬 출입 인원도 꼼꼼하게 체크하는 곳이고.”

“음모론 쉽게 믿거나 사이비에 빠진 인간들이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짚어준 팩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 봤냐.”

“아.”

JE가 께름칙한 얼굴로 미간을 긁적였다.

“뭐, 그래도 너무 엉뚱한 방향으로 오해가 생기진 않겠지? 죽어서 발견된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고작 한 명이고.”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JE와는 이틀 뒤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의 집을 나와 향한 곳은 본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이곳에 맡겨두었던 달냥은, 한율을 보자마자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비비적거렸다. 므아앙.

“슬슬 이사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어요.”

부친의 귀가를 기다렸다가, 함께 저녁을 먹은 뒤 가족회의를 열었다.

“7월이 다가올수록 서울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이 무척 많아질 테니까요. 그때가 되면 작은 트럭 하나 빌리는 것도 힘들어질 거고.”

“한율이 너도 7월에 모든 미스터리 홀이 열린다는 주장을 믿는 거냐?”

“완전히 믿지는 않지만, 대기업이랑 정부가 아무 생각 없이 그 루머에 휘둘리고 있단 생각 역시 들진 않아서요.”

“으음…. 나도 신경이 쓰여서 의원직에 있는 동창에게 연락해봤는데.”

부친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이우그룹 부회장이, 7월 게이트 대란이 사실이 아니면 이우그룹이 모든 책임을 다 지겠다고 장담해서 대통령이 움직인 거란 얘기가 돈다더라.”

“네…. 아버지.”

“음?”

한율은 덤덤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참에 은퇴하세요.”

“……!”

“어차피 어머니 혼자 고향으로 보낼 생각 없으시잖아요.”

“그야 당연히 그렇지만… 갑자기?”

“7월에 모든 미스터리 홀이 열리면 아버지도 언론인으로서 현장에 나가거나 방송국을 지켜야 하잖아요. 전 그 모습, 불안해서 못 볼 것 같거든요.”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7월이 평화롭게 지나가면 그땐 제가 어머니랑 아버지의 느긋하고 여유로운 전원생활, 그리고 노후까지 확실히 보장해 드릴게요. 그러니 봄이 오기 전에 은퇴하세요.”

“하하…. 이 녀석이 이젠 다 컸다고 아버지한테 이래라저래라하네?”

부친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모친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한율이 넌 어떻게 할 거야? 아이돌… 계속할 거야?”

“네. 정말 지구에 큰일이 생긴다면 두 번 다신 하지 못할 직업이니까… 계속하고 싶어요.”

부친이 툴툴거렸다.

“부모는 시골로 쫓아내고 넌 너 하고 싶은 일 계속하겠다고?”

“당신은 왜 갑자기 삐치고 그래요? 우리 아들이 하고 싶은 일 하겠다는데?”

“당신. 아들이야, 나야.”

“당연히 우리 율이가 우선이죠?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모친이 부드러운 미소로 제 남편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여생은 내가 곁에서 끝까지 지켜줄게요.”

“……!”

서운함으로 가득했던 부친의 얼굴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한율은 달냥을 안아 들고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음 날, WB래빗 엔터 어스래빗 연습실.

쇼케이스 무대 연습 도중 잠시 쉬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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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으로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기사를 훑던 한율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JE가 보여준 기사. 채널 아일랜드 국립공원의 섬에서 발견된 시신이 게이트 사망자로 인정된 모양이었다.

한율은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히 그때 아무도 안 죽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미쳤나 봐.”

“……?”

옆에 드러누워서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박가람이 헛웃음을 흘렸다.

“중국이랑 북한이, 미스터리 홀은 우리나라랑 미국이 대놓고 군사 장비 일제히 점검하고 훈련하려고 꾸민 대규모 시나리오라고 주장하고 있대.”

“걔넨 진짜 왜 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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