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보니까 중국에 레드 게이트 많던데. 그럼 걔넨 대비도 안 하는 거야?”
“7월 게이트 예고 믿는 기색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공안에서 잡아간다더라.”
“저런.”
본래 세상, 안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실제로 중국은 게이트로 인해 매우 큰 피해가 발생한 나라 중 하나였다. 계나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하지만 따로 강하게 경고하지 않는 걸 보면….’
단체 연습이 끝나고 유호의 작업실. 박가람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우리나라로 피난 와서 오히려 약탈하고, 사람들 핍박하고 아주 생난리를 쳤던 게 대부분 중국인이었다더라.”
“나리 씨한테 들었어요?”
“어. 중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산 땅이랑 집이 많잖아. 처음엔 그걸 빌미로 들어왔다가, 뒤늦게 우리나라 상황이 점점 나아지니까 아예 눌러앉으려고 별 수작 다 부렸대. 그리고 나리 씨 오빠는 다국적 용병 집단한테 맞아 죽을 뻔했다더라. 그 얘기 들으니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도…. 하아.”
박가람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한텐 미안하지만, 역시 우리나라부터 단단하게 지키는 게 우선일 것 같아.”
우웅. 매니저들과 함께 있는 단톡방에 새 글이 올라왔다.
-[미국 토크쇼 <크리스 라터쇼>에서 출연 문의 왔습니다.]
-[미주투어 시작 전인 3월 1일로 일정 조정 중입니다.]
박가람의 표정이 확 풀어졌다.
“오잉?”
* * *
2월 12일 설날. 한율은 부모와 함께 시골로 내려갔다.
친척들은 오래간만에 보는 한율을 향해 ‘너 정말 성공했더라. 장하다’, ‘내 친구들도 다 너 안다더라’라며 칭찬 비슷한 말을 던졌다. 그러나 반가운 인사 시간도 잠시. 어른들은 7월 게이트 예고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진짜 무슨 일이 생길 것 같기는 한데.”
“형님은 서울 집, 파셨습니까?”
“아직. 그런데 주변 사람들 얘기 들어보니까 서울, 특히 고층 아파트가 상당히 위험할 거란 이야기가 돌아서 집이 잘 안 나간다더라.”
“그런데 지난번 서울에 미스터리 홀이 열렸을 때, 거기에서 나오던 괴물들을 막은 사람들 있잖아요. 이번에도 그 사람들이 막아주지 않을까요?”
“괴물들은 그때 그 초능력자들이 막아주고, 원자력 발전소나 상하수도 시설처럼 꼭 필요한 곳은 군인들이 지키면….”
“그 초능력자들, 한국인이란 게 사실일까요? 미스터리 해커도 한국인이라던데.”
한율은 사촌 누나인 서한림과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지난번에 가방 선물 고마워. 나 진짜 아껴서 잘 쓰고 있어.”
“네. 고양이들은 잘 지내요?”
“응. 그런데….”
서한림이 슬쩍 어른들 눈치를 살피곤 조용히 한숨 쉬었다.
“7월에 정말 게이트가 다 열리고 난리 나면…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릴 수 있겠지만, 애들 사료랑 모래, 제대로 구할 수 있을까 그게 걱정이다.”
“저도요.”
“너도?”
“네. 아무래도 전쟁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동물을 위한 공장은 멈추기 마련이니까요.”
“무서워 죽겠다…. 난 내가 살아있을 때 커다란 재앙이나 전쟁 같은 거 안 겪을 줄 알았는데….”
서한림이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이제야 취직도 하고 썸도 탈까 말까 중인데….”
한율은 서한림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그러다 서한림의 핸드폰에 뜬 기사를 보았다.
[오늘 12일, 어스래빗 이우전자 광고 드라마 1화 대공개!]
잠시 후. 외가로 이동하자 몇 달 전, 영상통화로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넸던 쌍둥이들이 달려왔다.
“옵빠아!”
“율이 옵빠!”
와락.
한율은 품에 안기는 두 쌍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래간만이야. 잘 지냈어?”
“아니?”
“옵빠.”
나란히 선 두 쌍둥이가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지구가 멸망한다는 게 사실이야?”
응, 사실이야.
한율은 속으로 진실을 삼켰다.
“아냐. 지구 멸망 안 해.”
유찬이 형 잘 부탁드립니다
설 연휴가 지났다. 여러 기관에서 국가적 재난 대응 훈련을 시행하는 동안, 어스래빗은 사흘간 경기도에 있는 한적한 실내 스튜디오와 야외에서 화보 촬영을 진행했다.
“데뷔 축하해.”
“데뷔 축하해요.”
18일엔 바로 내일 데뷔하는 WB래빗 엔터의 두 번째 남자 아이돌그룹, ‘SPRabbit’의 연습실을 찾았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런데….”
유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룹 이름은 어떻게 정해진 거니.”
“형들 때랑 똑같이 사내 공모 통해서 투표로.”
변지욱의 미소가 흐릿해졌다.
“스페이스 래빗은 너무 길잖아. 그래서, SP래빗으로 줄였어.”
“발음상 고작 한 글자 차인데. 그래도 입에 붙으면 익숙해질 거야. 우리도 그랬거든.”
오래 방해할 순 없었다. 임승준과 현강희, 변지욱은 이번이 두 번째 데뷔라 따로 조언할 것도 없고. 어스래빗 멤버들은 후배들에게 데뷔 축하 선물을 건네곤 내일 보자며 연습실을 나왔다.
“벌써 우리 밑으로 후배 그룹이 둘이라니.”
“그런데 애들 살 진짜 많이 빠졌더라.”
“어. 우리 데뷔 때 생각나더라.”
지금도 겉으로 보면 마르긴 매한가지지만, 지금은 근육으로 탄탄하게 다듬는 중이었다. 소년미를 벗어난 다양한 콘셉트를 소화하고, 카메라에도 멋있고 예쁘게 잡히기 위해.
“그나저나 유찬이 형 결혼식도 얼마 안 남았네.”
“형은 신혼여행 끝나자마자 미주 투어 가게 돼서 어떡하냐.”
“형수님이, 오랫동안 담당한 아티스트의 중요한 스케줄이니까 꼭 동행하라고 이해해주셨대요.”
“우리, 축하 무대 진짜 잘하자.”
이미 조유찬의 신혼집에다 여러 가전제품을 선물로 채워놓았으나, 다들 그거론 부족하다 느낀 모양이었다. 연습실로 돌아간 멤버들은 미주 쇼케이스 연습에 앞서, 결혼 축하 무대 연습부터 했다.
“자리가 그렇게 넓진 않을 테니까 조금 더 간격 좁히자. 그리고 너무 잘생긴 척, 멋있는 척 금지. 결혼식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다.”
단체 연습이 끝난 뒤, 한율은 보컬 연습실로 향했다. 보컬 연습실에는 보컬 트레이너인 왕연수, 크리스탈 래빗의 라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괜찮아.”
조유찬은 크리스탈 래빗의 매니저로도 일했었다. 그래서 크래 멤버들도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 무대를 하기로 했는데, 잔잔한 축가는 각 팀에서 조유찬과 가장 친한 한율과 라나 둘이서만 부르기로 했다.
왕연수가 두 사람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럼 바로 연습에 들어가 볼까요?”
다음 날인 19일. SP래빗이 무사히 데뷔 쇼케이스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음방 순회에 들어갔다. TV와 너튜브엔 어스래빗이 찍은 이우전자 브랜드 광고 드라마 2화가 공개되었다.
-다른 남돌은 배우 메이크업하면 갑자기 못생겨지거나 흔한 얼굴 되던데 얘네는 참 잘 뽑았네
-서한율 능청스러운 연기 너무 좋아
-테니스공으로 창문 박살 낸 애 이름 뭐예요?
ㄴ이건우입니다.
-길우성 폰에 커피 엎질렀을 때 표정 리얼 그 자체ㅋㅋㅋ
-이우전자 어스래빗 팬미팅 응모 어떻게 해요?
ㄴ이우전자 매장에서 광고에 나오는 제품 사면서 응모하면 되는데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당. 팬미팅이 바로 다음 주라 화요일에 당첨자 발표될 거임.
-시커먼 남자 놈들이 모델인데 사고 싶냐?
ㄴ원래 가전제품은 모델이 아니라 가성비 보고 사는 거지
ㄴ아이돌 한정판 굿즈랑 팬미팅 당첨 노리고 사는 사람들 은근히 많을걸요. 그리고 우리는 중고로 나오는 신제품을 저렴하게 사면 되는 거다
ㄴ고작 사은품이랑 팬미팅 가려고 가전제품을 산다고? 도랐나ㅋㅋㅋㅋㅋ
ㄴ돌팬들 포카 모으려고 앨범 수백 장씩 사는 거 보면 기절하겠네 이 아저씨
-서한율 연기 복귀 언제 하냐
ㄴ서한율 곧 미국 가요.
ㄴ왜 멋대로 사람을?
ㄴ??? 아니 진짜로 미국에 일하러 간다고
21일 일요일. 조유찬의 결혼식이 진행될 강남의 한 호텔 웨딩홀. 입구에는 경호원들이 서서 하객들의 청첩장을 일일이 확인했다.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을 걸러내기 위함이었다. WB래빗과 계약한 경호업체 경호원들은 오늘 하객으로 참석했다.
“어?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아, 너희 회사가 맡았구나. 이렇게 만나니까 반갑다. 사생들이 어떻게 뚫고 들어올지 모르니까, 아무리 직원으로 보여도 그냥 통과시키지 마. 긴장해.”
“네.”
어스래빗과 크래 멤버들은 신랑과 신부가 도착하기 전 미리 와서 축하 무대 리허설을 진행했다.
“와, 여기 스피커 쩌렁쩌렁 투박하게 울리네.”
“카메라는 어디에 서는 거예요?”
“너희들 카메라 말고 신랑 신부, 그리고 하객들 봐야 한다. 음방 무대 아니야.”
“네.”
곧 헤어 메이크업을 마친 신랑 신부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크래와 어스래빗을 담당한 청담동 샵에서 단장 받았는데, 비용은 좌기훈 대표가 결혼 축하 선물로 대신 내줬다고 했다. 샵에서도 절반만 받았고.
“형.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요.”
턱시도가 어색한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옷매무새를 매만지던 조유찬이 웃었다.
“고마워, 한율아. 다 네 덕분이야.”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조유찬은 더 환하게 웃으며 한율을 와락 안았다.
“아이구, 우리 복덩이.”
“…….”
한율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다가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행복하게 잘 살아요, 형.”
“응. …하하.”
조유찬이 포옹을 풀었다.
“이러니까 오래간만에 만난 옛 동료 같네. 계속 같이 일할 사인데. 그래도 날이 날이니까, 낯간지러운 말하는 거 이해해줘.”
“네.”
“형 이따가 우리 축하 무대 기대해.”
“살살 부탁할게. 기물 파손하면 안 돼.”
“아니, 우릴 뭐로 보고?”
“그나저나 유찬이 형이 진짜로 장가를 가네. 뭔가 기분 이상하다.”
“아 참, 형.”
이건우가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형이 예에전에 도와줬던 애 기억나요? 형 결혼한다는 소식 듣고, 나한테 축하 인사 전해달라더라고요. 이건 걔가 보낸 축의금. 그때 형이 대신 내준 병원비래요.”
“……?”
조유찬이 의아한 얼굴로 봉투를 받았다. 그리고 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아. …가만. 건우 네가 이 사람을 어떻게 알아?”
“대학 동기예요.”
“아….”
이건우와 대학 동기?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가 옛 기억을 떠올렸다.
4년 전, 드라마 <별☆일없는 집> 촬영 초반. 스태프의 실수로 세트가 넘어져 이제설을 비롯한 다른 스태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
당시 그 스태프의 동생은 ‘이건 단순히 개인 과실로 벌어진 사고가 아니다, 수면 부족과 장시간 노동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며 촬영장 앞에서 일인시위를 했었다. 그러다 비바람이 거세게 치던 날. 조유찬이 정신을 잃은 듯한 그를 발견하곤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때 현우 통해서 고맙단 인사받았는데 이렇게 또…. 이 사람은 어때? 잘 지낸대?”
“네. 형이랑 같이 가게 운영한다더라고요.”
조유찬이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행이다. 솔직히 난… 안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금세 잊어버렸는데.”
“무슨 얘기야?”
박가람이 이건우에게 물었다. 이건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도 돼. 그나저나 현우는 오늘 안 와?”
“지방 촬영 때문에 못 온다고 연락 왔어.”
“그런데 형 웨딩 사진 진짜 잘 나왔더라.”
“오, 이거?”
아이돌 화보 전문 포토그래퍼이자, 며칠 전에도 어스래빗 포토북 촬영을 담당했던 김 쌤이 끼어들었다.
“내가 찍었지요.”
“역시 실력이,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