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0화 (290/427)

“써한!”

똑똑, 벌컥!

길우성이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이거 사실일까? 은수 씨가 이우그룹 사람들한테 들은 이야기 말이야!”

“조용히 말해도 다 들려.”

길우성이 뒤로 문을 닫으며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진은수가 정리해서 올린 설명회 파일이었다.

“너도 봤지? 1130 증상자들한테 기초 체력 훈련을 포함해서 응급 처치 방법 등등 가르쳐주고 선물도 준다는 거.”

“어.”

“대체 왤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냐? 이우그룹, 대체 미스터리 해커한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증상자들을 이렇게 신경 쓰는 거지? 너무 수상한데, 너무 수상해서 안 받으면 왠지 손해 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받고 싶으면 받아. 대신, 미주 쇼케이스 투어에선 빠지겠네.”

길우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이 되는 소릴 하쇼.”

“그럼 호들갑 그만 떨고 방으로 돌아가서 짐이나 싸. 그런 건 우리가 따로 배울 수 있는 거잖아.”

“음. …달냥아.”

므앙? 활짝 펼쳐놓은 캐리어에 들어가서 뒹굴뒹굴하던 달냥이 대답했다. 길우성이 달냥의 배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우리 없어도 밥 잘 먹고, 잘 놀고….”

꾸욱.

“아얏.”

다음 날 아침. 한율은 숙소 앞으로 찾아온 부친에게 달냥이 들어간 이동장을 넘겼다.

“사의는 표명하신 거죠?”

“그래. 하지만 인수인계할 게 많아서 다음 달 말에 퇴사하기로 했다. 괜찮지?”

“네, 딱 적당하네요. 그럼 달냥이 잘 부탁드려요.”

“그래. 너도 조심히 잘 다녀와라.”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약 15시간. 뉴욕에 도착한 어스래빗 멤버들은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헤어 메이크업을 받은 뒤 음악 전문 채널, 그리고 잡지사 두 곳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린라이브와 너튜브에 올릴 짤막한 영상까지 촬영하고 호텔로 돌아온 건 밤 9시가 될 무렵. 멤버들은 매니저들이 준비한 도시락과 간식을 받았다.

“시차 적응할 새 없이 일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만 푹 쉬고, 다들 내일 아침 10시에 봅시다.”

“유찬이 형은 언제 와요?”

“내일 정오 즈음 도착할 겁니다.”

“결혼하고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거의 한 달간 떨어져 지내야 한다니. 우리, 새신랑한테 너무 몹쓸 짓 하는 거 아냐?”

“당분간 사무실 업무 보라는 대표님의 말에도 ‘우리 애들 첫 영어 앨범에다 미주 쇼케이스 투언데 제가 빠질 순 없습니다’라며 괜찮다고 한 사람입니다. 일주일 정도만 부려 먹고 한국으로 쫓아내도록 하죠.”

“오.”

라이언이 살짝 손을 들었다.

“나랑 같이 밥 먹을 사람. 혼자 먹기 싫어.”

“저요.”

“나도.”

“전 먼저 들어가서 쉴게요. 오늘 다들 수고했어요.”

“오냐.”

객실로 들어간 한율은 도시락과 간식 봉투를 테이블에 내려놓곤 TV부터 켰다. 손을 씻고 나서 핸드폰을 가지고 테이블 앞에 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TV에선 뉴스가 흘러나왔다.

[채널 아일랜드 국립공원 섬을 포함한 인근 해상의 봉쇄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며, 첫 게이트 사망자인 로버트 씨의….]

한율은 가족 단톡방에다 이제야 스케줄이 끝나 저녁을 먹는다는 보고를 올린 뒤,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실검 1위에 [진은수]가 떠 있었다. 2위는 [진은수 폭행].

“……?”

한율은 연예 뉴스 탭을 클릭했다.

[퍼플아워 진은수, 팬 폭행 혐의로 신고당해]

[인기 걸그룹 퍼플아워 멤버인 진은수(19)가 팬으로부터 폭행 혐의로 경찰에 신고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 26일, 팬이라고 다가온 남성 A씨에게 사인을 해준 진은수는 A씨가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시도하며 성희롱을 하자 피했지만, A씨 일행인 B씨가 모욕적인 말을 입에 담자 화가 난 매니저가 그들에게 항의, 그 과정에서 일어난 싸움을 말리려다 A씨를 밀쳤으며 넘어진 A씨가 진은수를 폭행 혐의로 신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은수의 핸드폰에 A씨와 B씨의 성희롱과 폭언이 모두 녹음된데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라 무혐의…(중략).]

댓글은 분노로 가득했다.

-기ㄹㄱ 이 XX야 제목 누가 이따위로 지으라 그랬냐 이 ㅆXX야 가독성이나 신경 써라

-양아치 새ㄲ들 합의금 노리고 시비 걸었던 거네

-19살짜리 애한테 신체 접촉이랑 성희롱? 개패고 싶다 썩을 놈의 XX들

ㄴ만으로 19임. 같이 패자

-커뮤에 이우그룹 1130 증상자 설명회 간다고, 진은수 보면 사진이랑 번호 따겠다고 한 ㅂㅅ들 같은데

ㄴ번호는 따겠네. 변호사 번호ㅋㅋㅋ

왜 그날 단톡방에 글 올리는 게 늦었나 했더니.

한율은 잠시 망설이다가, 단톡방에 있는 진은수 프로필을 클릭하곤 개인 톡을 보냈다.

[기사 봤어요. 괜찮아요?]

바로 답변이 왔다.

-[진심 인간 혐오 생길 것 같아요 언니ㅜㅜ]

언니?

한율이 고개를 기울였을 때였다.

-[메시지가 삭제되었습니다.]

조금 전 본 답변이 돌연 삭제되었다.

-[헉]

-[죄송해요 선배님 아는 언닌줄알고]

-[기본 프사라 슨간 헷갈렷어요ㅜㅜ]

오타에서 당황해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한율은 답변을 보냈다.

[괜찮아요.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 자주 겪으면 그럴 수도 있죠. 이해해요. :)]

나중에 진은수가 어떤 능력을 각성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이돌을 더는 하지 못하게 됐을 때, 아이돌을 하면서 차곡차곡 쌓인 감정과 경험이 각성자로서의 행보에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을까.

[그리고 갑자기 개인 톡 보내서 미안해요.]

진은수의 대답은 1분 정도 지나서야 돌아왔다.

-[아니에요, 선배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아빠한테 자랑해야지

‘최은수 이 바보 멍청이…!’

진은수는 제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옆에 있던 송의연이 깜짝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왜 이래? 묻혔던 흑역사라도 발견했어?”

“방금 만들었어….”

“뭔 소리래.”

좋아하는 사람과 처음으로 나눈 개인 톡이 ‘진심 인간 혐오 생길 것 같아요 언니ㅜㅜ’라니. 진은수는 그야말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펑펑 울다가 베개를 잡아 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틀렸어….”

이 언니 왜 이래? 송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멤버들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폭행 기사 때문에 그래? 기자가 제목을 뭣 같이 뽑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던데.”

진은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물을 삼키곤 고개를 들었다.

“기사 말고 팬인 척 다가와서 범죄 저지르는 사람들이요. 더 따끔하게 혼낼 방법 없을까요? 생각할수록 너무 분해…. 아니, 기자들한테도 화나요. 팬 아닌 사람들을 왜 팬이라고 적는 건지, 내가 왜 팬을 폭행했다고 글을 쓰는 건지.”

다 그 사람들 때문이야. 그 사람들이 원흉이야.

진심으로 분통이 터진 듯한 진은수를 보며 송의연이 혀를 찼다.

“은수 언니 이번엔 진짜 빡쳤나 보다.”

우웅.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진은수는 어깨를 떨면서 시선을 내렸다. 혹시 서한율이 톡을 보낸 건 아닐까.

기대와 달리 메시지를 보낸 건 이우그룹 도단희였다. 앞으로 이우그룹 1130 증상자 행사에, 진은수에게 불쾌한 짓을 저지른 그 남자를 제외하기로 했단 소식이었다.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은수는 차분하게 답장을 보낸 뒤 차창에 옆 머리를 기댔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아….”

한편, 한율은 계나리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채널 아일랜드 국립공원 섬에서 발견된 사망자 로버트요, 오빠 말대로 석연치 않은 점이 있더라고요. 이 사람이 그 섬으로 여행 간다고 나선 게 작년 12월이었거든요? 당시 섬으로 가는 배에서 그를 본 사람도 있었고, 가족들도 며칠 지나도 연락이 안 닿아서 실종 신고까지 했었어요.]

“그런데?”

-[그곳에 게이트가 열린 후 시신이 발견되니까 가족들이 돌연 말을 바꿨어요. 실종 신고 이후 로버트한테서 연락이 왔었다, 그곳에 다시 고래를 보러 간다고 했다, 그곳에서 당분간 머물 거라고 했다, 게이트 괴물로 인해 죽은 게 맞을 것이다.]

계나리가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채널 아일랜드 국립공원에 포함된 섬은 입도할 때 무조건 출입 명부를 작성하거든요? 개인 보트를 타고 가도요. 그런데 실수로 명단을 잃어버렸다는 둥 국립공원 측 태도도 보니.]

한율은 조금 전에 본 관련 뉴스를 떠올렸다.

“로버트 아버지가, 미국 게이트 희생자 유가족을 도울 수 있는 단체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더라. 어쩌면 그 뒤엔 미국 정부가 있을지도 몰라. 게이트 첫 사망자가 미국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제 생각도 그래요. 어쩌면 있지도 않은 사실을 지어낼 수 있겠단 생각도 들고. 살아있는 괴물을 포획해 조사 중이다, 우리가 괴물에 대해 더 잘 안다. 다들 7월 게이트 대란이 사실일까 불안해하고 있으니까, 그 점을 이용하려고요.]

“벌써 나왔어.”

-[네?]

“호텔에 있던 가십 잡지랑 신문을 훑어봤는데, 미 정부가 게이트 괴물을 생포했다 주장하는 기사가 있더라고.”

-[아….]

“어쨌든 알아봐 줘서 고마워.”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일단은 그냥 둘 거야. 사람들에게 게이트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게 우선이니까. 해원이 형은 좀 어때?”

이런저런 일로 바빠, 그의 수련 상태를 봐주지 못한 지 오래됐다.

계나리의 목소리가 살며시 밝아졌다.

-[저 금방 따라잡힐 것 같아요.]

다음 날. 어스래빗 멤버들이 회사에서 빌린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였다. 조유찬이 로비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나 왔어, 얘들아.”

“오! 새신랑!”

“신혼여행 잘 다녀왔어요? 그런데 형 왜 여기에 있어요?”

“이 형 얼굴에서 광채 나는데?”

“정말로 여기로 곧장 왔어? 왜?”

“오래간만이에요, 형. 손에 든 선물만 주고, 한국으로 빨리 가요.”

“뭐지, 이 반가운 듯하면서도 반갑지 않다는 반응들은?”

말과는 달리 멤버들은 조유찬과 반갑게 포옹했다.

함께 객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조유찬은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멤버들에게 나눠주었다. 스페인의 유명 축구 구단 유니폼으로, 티셔츠마다 이름과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마드리드에 들렀을 때 공식 매장에서 샀는데, 거기에서 번호랑 이름 새겨주더라. 번호는 너희 나이순이야.”

“고마워요, 형.”

“예쁘다. 이거 아까워서 어떻게 입어.”

“가방 안에 마요르카섬에서 산 다른 선물도 있어. 거기 정말 풍경도 예쁘고 조용해서 좋더라.”

조유찬이 한율을 향해 웃었다.

“추천해줘서 고마워, 한율아. 진희 씨도 고맙다고 전해달래. 너무 좋았다고.”

“형수님도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실은 미스터리 홀 지도에 노란 점이 찍힌 곳이라 조금 불안했었는데, 가길 정말 잘한 것 같아. 7월 예고가 사실이면 앞으론 정말 가기 힘든 곳이 될 테니까.”

스페인 마요르카섬.

본래 세상, 고향으로 연결되는 게이트가 생길 장소.

한국과 상당히 떨어진 섬이라, 본래 시간대의 길우성이 어떻게 그곳을 찾았는지 아직도 의아한 곳이었다.

‘하지만 무슨 연유였는지는 평생 듣지 못하겠지.’

히히. 길우성이 축구 유니폼을 몸에 대며 방정맞게 웃었다.

“얼른 사진 찍고 아빠한테 자랑해야지~.”

* * *

미국 날짜로 3월 1일 월요일 밤 11시 55분.

인기 토크쇼 <크리스 라터쇼>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어스래빗은 이번 영어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오프닝을 열었다.

[와우, 와우, 와우! 우리 어스래빗 친구들이 더 강렬하게! 더 멋있게 돌아왔어요!]

무대가 끝나자마자 호들갑스럽게 등장하는 크리스 라터.

[그것도 아직 발표되지 않은 곡을! 우리 <크리스 라터쇼>에서 첫! 공개!]

휘익! 방청석에서 환호성과 힘찬 휘파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송 시작 전 대기실에서 미리 인사를 나눴지만, 멤버들은 다시 한번 크리스 라터와 반갑게 포옹했다.

[134일 만인가요?]

[아니, 그걸 다 계산 했어요?]

토크쇼 분위기는 지난번처럼 밝고 떠들썩했다. 어떤 질문과 이야기를 나눌지 미리 대본을 받았었기에 토크는 끊임없이 흘렀다.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질문이 나오기 전까진.

[그러고 보니 작년 12월에 한국에서 미스터리 홀… 아니, 게이트라고 해야 하나? 게이트로 통일하겠습니다. 바로 한국의 서울에서 게이트가 열리고 난리 났었잖아요. 나도 그때 너무 놀라서 ‘이거 진짜야? 와, X발!’ 소리를 질렀었는데, 우리 어스래빗 친구들은 어땠어요? 그때 서울에 있었죠?]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멤버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통역을 듣는 동안, 유호와 라이언, 한율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 그땐 정말… 깜짝 놀랐죠.]

[그때 한국은 새벽이었거든요. 곤히 자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지역에 사는 가족들이랑 지인들에게서 연락이 오는 거예요. 괜찮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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