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크리스 라터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진지하고 무거워졌다. 방청객들도 조용히 멤버들의 대답을 들었다.
[저뿐만이 아니라 멤버들도 다 연락을 받고 깨서, 거실 TV 앞에 모여 몇 시간 동안 뉴스를 봤던 기억이 나요. 정말….]
[비현실적이었어요.]
[맞아. 무섭기도 한데, 그땐 솔직히 크리스처럼 ‘이게 정말 현실인가?’ 안 믿어졌어요.]
또 다른 질문.
[그런데 7월 예언을 염려하면서 가장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곳 또한 한국이잖아요. 어때요? 정말로 7월에 지도의 모든 게이트가 열릴 것 같나요?]
한율은 다른 멤버들보다 먼저 마이크를 들었다.
[열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미 우린 비현실적인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고, 지난달 캘리포니아 채널 아일랜드에서도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잖아요. 그래서 어느 정도는 경계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그만 좀 물어.
한율은 속마음을 삼킨 채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리 해커와 접촉한 기업에서 한국의 1130 증상자를 모아 모종의 설명회를 열었다는데, 한율과 우성도 거기에 참석했었나요?]
잠시 후. 대형 포털사이트 연예뉴스란에는 <크리스 라터쇼> 리뷰 기사가 여럿 올라왔다.
[어스래빗, 美 <크리스 라터쇼>에서 첫 영어 앨범 타이틀곡 선보여]
[<크리스 라터쇼> 어스래빗 서한율, “게이트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
[美 <크리스 라터쇼> 이러려고 어스래빗 불렀나? 게이트 질문은 왜]
-이번 노래도 대박 좋다.
-미국인 중 한국 의심하는 사람 많다더니 그거 의식하고 질문 던진 듯
-게이트 얘기 나오자마자 애들 당황해하는 거 보니까 사전에 약속된 질문이 아니었나 봄
-우리나라 아이돌은 회사에서 정해준 답변밖에 못 한다구ㅜㅜ
-서한율ㅋㅋㅋ 거기에 간 지인이 이러저러한 내용 들었다고 솔직히 다 말해버리네ㅋㅋㅋㅋ
ㄴ이미 인터넷에 경험담 여럿 올라왔으니까 딱히 비밀은 아니지
ㄴ그런데 이우그룹은 왜 1130 증상자들한테 기초 체력 훈련이랑 응급 처치 가르쳐 준다는 거임?
ㄴ지인=ㅍㅍㅇㅇ ㅈㅇㅅ?
-내 친구가 KBC 다니는데, 서한율네 아빠 서석진 국장 아직 정년 남았는데 이달 말에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살기로 했다고 함.
ㄴ연예인 아빠 일 그만두는 것까지 우리가 알아야 하냐?
이틀 뒤. 어스래빗은 미주 쇼케이스 투어 첫 번째 도시인 LA로 향했다. 미국 인터넷 기사나 SNS에서도 <크리스 라터쇼>에서 멤버들이 한 게이트 이야기가 화제로 떠올랐으나, 크게 신경 쓸 정돈 아니었다.
-1130 증상자들이 일정 인원 이상 모이면 게이트가 열린다! 한국에서 온 K-POP 아이돌의 공연을 막아야 한다!
가끔 이런 황당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도 있고,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보였지만 현실은 조용했다. 지난달, 많은 사람이 짐을 싸 들고 급히 떠나려 한 LA국제공항도.
“평소보다 적은 팬이 찾아왔는데도 괜히 소란스럽게 군 것 같아 다른 이용객들에게 죄송했다.”
“…라고 혼자 떠드는 박가람 씨.”
“겉으론 이렇게 평화로운데.”
“그 섬이랑 여기랑 좀 많이 떨어져 있잖아.”
그리고 3월 5일 금요일.
어스래빗의 첫 영어 앨범 [STEP]이 공개되던 그 시각, 한국.
“어….”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아침. 어젯밤 이해원의 집에서 묵고, 구동과 함께 운동 겸 산책을 나서던 JE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문 옆에 웬 낡은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이우그룹 사람인가? 서한율이 분명히 우리한테 접근하지 않도록 단단히 경고했다고 했는데?’
달칵. 차에서 사람이 내렸다. JE는 황급히 구동을 안아 들었다. 일반 토끼와 달리 날카로운 발톱이 난 구동의 발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차에서 내린 사람은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안녕하세요, 손지은 씨. 이른 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누구시죠?”
그녀가 명함을 내밀었다.
“저는 누구패치의 정선지 기자라고 합니다. 안에 이해원 씨 계신가요?”
‘누구패치의 정선지?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아.’
이해원이 이우그룹 별장에 감금되었을 때, 경찰에 신고하면서 그가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줬었다던 기자였다. 이해원은 그때의 은혜를 갚기 위해 그녀를 찾아가 VEL 엔터의 실상을 폭로했고.
그러나 JE는 명함을 받지 않고 수상한 눈으로 정선지 기자를 바라보았다.
“기자님이 은퇴하고 조용히 사는 녀석을 왜 찾아오신 거죠?”
“까마귀.”
“……?”
까악. 이 집 정원에 곧잘 찾아오는 까마귀가 때마침 울었다.
정선지 기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까마귀의 비밀을 눈치챘다고 전해주시겠어요?”
베개에 떨어뜨린다
혹시 서한율이 훈련한 까마귀를 말하는 건가?
그러나 눈앞에 갑자기 귀신이 튀어나오거나 알 수 없는 귀곡성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데에 도가 텄다. 별의별 돌발 상황이 일어나는 연예계에서도 6년을 보냈고.
JE는 수상함을 넘어 이상하단 시선으로 정 기자를 바라보았다. 까마귀의 비밀? 그게 무슨 소리야? 둘만의 암혼가? 아니, 암호를 주고받을 정도로 긴밀했다면 연락처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대체 뭐야, 이런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어리둥절하게.
“하하….”
정 기자가 민망한 얼굴로 내밀었던 명함을 회수했다. 자신도 이상하게 보일 걸 안다는 듯. 그러곤 말을 돌렸다.
“토끼가 참 귀엽네요. 이름이 뭐예요?”
“이해원 아직 자는 중입니다. 그리고 용건 있으면 직접 초인종 눌러서 부르세요.”
“아, 네. 그럼 조금 더 기다렸다가 누를게요. 아직 시간도 이르고.”
“…….”
JE가 빤히 쳐다보자, 정 기자가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뺨이 살며시 붉어졌다.
“왜… 그러세요?”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그건… 이해원 씨한테 직접 설명할게요.”
“그러세요, 그럼.”
JE는 도로 몸을 돌려 대문을 열쇠로 열었다. 타악. 보란 듯이 대문을 닫고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 기자는 열이 오른 얼굴에다 손으로 부채질했다. 평소 연예인을 직접 만날 일이 없다 보니, 잘생긴 사람에 대한 면역력이 약했다.
‘역시나 경계하네. 하긴, 나라도 기자가 갑자기 찾아오면 그렇겠지만. 그나저나….’
의외였다. 스타믹스 JE도 어느 정도 인지도 높은 인기 아이돌인데, 스폰을 받았다고 고백하며 은퇴한 사람과 집에 드나들 정도로 가깝게 지낸다니.
‘혹시 JE도?’
한편, 집 안으로 들어간 JE는 이해원에게 정 기자의 말을 전했다. 이해원은 너튜브 요리 채널을 참고해 반찬을 만들고 있었다.
“까마귀의 비밀…. 마법사의 존재를 눈치챈 걸까요?”
“저 기자가 어떻게?”
“제가 이우그룹 별장에 갇혔을 때, 정 기자가 2층 창에서 떨어진 사람을 봤다고 신고했었어요. 사람이 끌려간 듯한 핏자국도 봤다고. 그런데 전 떨어지지 않았고, 정 기자가 가리킨 곳도 깨끗했어요. 창도 멀쩡했고.”
“설마….”
이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엔 저도 정 기자가 이우그룹을 곤란하게 하려고 거짓 신고했다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까 한율이가 마법으로 만든 환영을 본 것 같아요. 정 기자가 신고하기 전, 한율이가 그곳으로 절 찾으러 왔었거든요. 까마귀도.”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 가지고?”
“정 기자는 오랫동안 사장님… 이채현 씨와 이우그룹을 캤어요. 어쩌면 지금도 쫓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 과정에서 뭔가 알아낸 것일지도 몰라요.”
“이우그룹 형제처럼 의혹이 심증이 될 가능성을 보고 찾아왔을지도 모르지. 아까 잠깐 봤는데 상당히 호기심이 많아 보이더라고. 특히 구동이를 살피는 눈빛이.”
이해원은 JE의 품에 안긴 구동을 보며 웃었다.
“그건 구동이가 귀여워서가 아닐까요?”
구동이 앙증맞은 입을 벌려 울었다. 뀨?
“우리 구동이, 이름도 알아듣고 똑똑하네?”
끼웅.
두 시간 후, 초인종이 울렸다. 이해원은 담담한 얼굴로 정 기자를 맞이했다. 집안이 아닌 테라스 테이블로 안내한 뒤 커피를 내왔다.
“오랜만이에요, 기자님. 잘 지내셨어요?”
“네. 해원 씨는요?”
이해원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예쁘게 지어진 집과 정원을 가볍게 둘러보곤 미소 지었다.
“전 보시다시피. 본론에 앞서, 어떻게 제가 여기에서 지낸다는 걸 알아낸 건지 들을 수 있을까요?”
“해원 씨가 너무 잘생겨서요. 종종 인터넷에 목격담이 올라와요.”
“아.”
“연락처가 바뀌셨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불쑥 찾아왔어요. 해원 씨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해원은 커피를 정 기자 앞으로 내밀곤 맞은편에 앉았다.
“뭔데요?”
“커피 감사합니다.”
작게 고개를 꾸벅인 정 기자가 용건을 꺼냈다.
“석 달 전 서울에서 열린 게이트. 그거 서한율 씨가 막은 거죠?”
커피를 들던 이해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작년 2월, 해원 씨가 이우그룹 별장에 갇혔을 때 제가 경찰에 뭐라고 신고했는지 기억하세요?”
이해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람이 떨어졌다고, 그게 저인 것 같다고요.”
“그 신고를 하기 전에, 별장으로 찾아온 서한율 씨를 봤어요. 굉장히 커다란 까마귀도요. 그 까마귀가 별장 쪽으로 날아간 뒤 사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광경을 핸드폰으로 찍으려 할 때 또 그 까마귀가 제 머리 바로 위를 지나가면서 방해했어요.”
정 기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덕에 핸드폰을 떨어뜨린 전 증거를 전혀 찍지 못했고, 거짓말쟁이가 돼서 회사에서 엄청나게 깨진 뒤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했어요.”
“네….”
“그런데 한가해지니까, 문득 까마귀가 얽힌 신기한 사건이 떠오르더라고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정원그룹 정이장 실체 폭로 사건. 기자들 사이에선 까마귀의 은혜라고 불리던 사건이에요. 웬 까마귀가 새벽에 옥상에 있던 기자를 향해 정이장 자료가 담긴 USB를 건네고 사라졌거든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무슨 그런 일이 있냐며 웃었는데….”
“…….”
“아무튼 그 일이 생각나서 당시 사건을 들여다보니까, 정이장 실체 폭로 기사 덕에 억울함을 풀었던 포토그래퍼 김 쌤이, 어스래빗 앨범 재킷 촬영을 앞둔 상태였더라고요?”
하.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이해원은 실소를 흘렸다. 정 기자가 급히 덧붙였다.
“알아요, 억측에 가까운 짜맞추기처럼 들린다는 거.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에요. 이해원 씨 혹시, ‘강상지’란 사람 알아요?”
“그게 누군데요?”
“서한율 씨를 쫓아다녔던 사생 스토커예요. 스토킹 혐의로 고소당한 뒤에도, 서한율 씨랑 함께 영화를 찍던 배우 이희우의 집까지 찾아가 테러했다고 거짓 자백한 사람인데… 현재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에요.”
* * *
-[끝까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시치미 떼긴 했는데…. 이미 마음속으론 확신하는 것 같았어.]
미국 LA의 한 호텔. 어스래빗 [STEP] 쇼케이스를 마치고 돌아온 한율은 이해원의 전화를 받았다. 거듭된 우연에 의혹을 품고 좇던 정 기자가, 한율이 게이트를 막은 그림자 집단 중 한 명이라 확신하고 있다는 이야기.
‘어쩐지, 내 별장으로 찾아왔을 때 이상하게 날 무서워하더라니.’
정 기자는 강상지 사건에서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했다. 강상지가 이희우에게 약품 테러를 했다고 주장한 그 시각, 그 장소인 주차장의 CCTV와 차량 블랙박스가 온통 정체불명의 검은색 물질로 가려졌단 사실이었다.
이후 정 기자는 단단히 미쳐버린 강상지와 면회했다. 환상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강상지를 보며, 자신이 이우그룹 별장에서 겪은 일을 떠올렸다.
무럭무럭 피어난 상상 중심엔 한율이 있었다. 한율을 조사하면서 [어스래빗 서한율, 그는 정말 파랑 요정인가?!] 영상도 보았다. 너튜버는 웃자고 모은 내용이었지만, 정 기자에겐 다르게 와닿은 모양이었다.
정 기자가 한율에게 신비한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하게 된 건, 이우그룹 이채욱이 사람들을 고용해 이해원 납치를 시도한 사건이었다. 하필이면 당시에도 이해원은 한율의 도움으로 양평 집에서 지내고 있었으며, 납치범들은 이해원을 놓치게 된 사고 당시의 기억을 깡그리 잃었다.
마법처럼.
“표적 수사가 무섭다더니 딱 그 짝이네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내용이 빠진 것 같은데요?”
-[게이트랑 널 연관 짓게 된 경위는 너한테 직접 얘기하고 싶대.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일을 허술하게 해서 꼬리가 잡힌 건데요.”
-[그런데….]
“네.”
-[강상지, 정말 네가 그렇게 만든 거야?]
한율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아….]
“실망했어요? 사람 한 명의 정신을 망가뜨려서?”
-[아니.]
묻기 무섭게 이해원이 부정했다.
-[한율이 네가 그럴 만했으니까 그랬겠지. 난 다만.]
이해원의 목소리가 웃음기가 섞였다.
-[인섭이 형이 생각나서. 그 형, 자꾸 본인도 기억 못 하는 일들이 벌어져서 한동안 쩔쩔맸었잖아.]
“아. 그 사람은 요즘 뭐 하고 지낸대요? 재판 아직 안 끝났나?”
-[나도 오늘 정 기자한테 들었는데, 얼마 전에 조용히 입대했대.]
“저런. 게이트 열리면 고생 좀 하겠네요.”
이해원과 통화가 끝났다. 한율은 이해원이 보내준 정 기자의 연락처를 확인했지만, 바로 전화를 걸진 않았다.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서 전신욕을 즐기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이우그룹이 게이트에 대한 경각심을 갖도록 기사와 뉴스를 내보내는 중이라, 작은 언론사 기자는 솔직히 쓸모가 없는데.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아내서 입을 막자니 귀찮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