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은 여기저기에다 자료를 백업하는 습성이 있다. 한율을 게이트를 막은 그림자 집단 소속으로 의심한다면, 미스터리 해커의 존재도 경계하고 있을 터.
“하….”
이런 평화로운 시간도 4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되도록 쓸데없는 잡음은 만들기 싫은데.
한율은 한숨을 푹 내쉬곤 눈을 감았다.
한편 그 시각, 이해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마나 유동을 멈췄다.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계단에서 밀쳐서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불태워서 죽였대요. 그러면서 자신은 벌 받아야 한다고,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날뛰는데… 사실은 실제로 벌어진 적 한번 없는, 모두 강상지의 망상이거든요.』
오늘 아침, 정 기자에게서 들은 이야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강상지가 받는 벌이 합당한지가 아니에요. 만약 서한율 씨가 강상지를 그렇게 만들었다면, 멀쩡한 사람을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미치광이로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단 거잖아요. 굉장히 무섭지 않아요?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게?』
서한율도 물었다.
사람 한 명의 정신을 망가뜨려서 실망했냐고.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느꼈다. 서한율은 사람에 따라 굉장히 가차 없다는 걸.
‘참 이상하지. 정 기자처럼 나도 한율이를 무서워하는 게 정상일 것 같은데… 오히려 더 대단하게 느껴지니.’
그리고 이런 스스로가 이상하게 여겨져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JE에게 정 기자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강상지 일을 알게 된다면 서한율을 경계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어서.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정 기자를 가만히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모르쇠로 일관하느라, 왜 무서워하는 서한율과 굳이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지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머리 좀 식히자.’
이해원은 결국 마나 유동을 그만두고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그날 밤. 야근을 마치고 퇴근한 정 기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침대와 책상, 벽걸이 TV, 싱크대와 옷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원룸이었다.
“……!”
그런 까닭에 정 기자는 들어가자마자 집에 있는 타인과 바로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퇴근이 늦으시네요?”
침입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치킨을 먹고 있었다.
“여기….”
굉장히 편한 모습으로 TV까지 보고 있어, 정 기자는 순간 자신이 집을 잘못 찾아왔나 싶어서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싱크대에 놓인 컵도, 책상 위 노트북이나 인형도 전부 자신의 물건이었다.
정선지는 가방끈을 세게 잡은 채 외쳤다.
“너 누구야?! 경찰 부른다!”
“소리 지르지 마세요. 안 그러면.”
계나리가 정선지를 향해 히죽 웃었다. 그리고 시뻘건 양념으로 범벅 된 닭다리를 들었다.
“이거 베개에 떨어뜨린다?”
“…뭐 이런 또라이 같은?!”
나중에 하늘에서 만나
짜증 나는 협박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지만, 정 기자는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침입자는 살짝만 툭 쳐도 어디 부러질 것처럼 키도 작고 가냘팠다. 그러나 오늘 아침 이해원을 만나 서한율 얘기를 하자마자 찾아온 침입자다. 절대 평범한 사람일 리 없었다.
“당신… 누가 보냈어? 서한율이야? 설마 내가 대비도 하나 안 하고 이해원을 찾아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리고 이렇게 나오는 거야말로….”
툭. 새하얀 베개에 시뻘건 닭다리가 떨어졌다.
“……!”
정 기자는 터져 나오려던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이우그룹 부회장이 미스터리 해커를 만났다는 건 거짓일지 모른다, 이우그룹이 주가와 명성을 회복하려 대국민 사기를 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동료 기자에게 말했더라고요? 그걸 증명하기 위해선 미스터리 해커, 그리고 서울 게이트를 막은 집단과 접촉해야 한다고도.”
“…그래서?”
“이우그룹의 악행을 몸소 겪었으니 뭐든 부정적으로 비틀고 의심하는 거야 이해해요. 그런데 진짜라면 어쩌려고요?”
계나리는 치킨 상자를 책상에 올려놓곤 티슈로 손을 닦았다.
“의심은 당연한 거 아니야? 게이트 사태를 대비하는 데에, 하고많은 곳에서 하필이면 이우그룹을 선택한다고? 미스터리 해커도 처음엔 이우그룹을 협박했는데? 만약 미스터리 해커가 정말로 이우그룹 부회장과 만난 게 사실이라면, 알려주고 싶어. 아니, 꼭 알려주고 싶어요. 이우그룹을 선택한 건 정말 잘못된 일이라는 걸.”
정 기자는 계나리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정말로 이 여자가 게이트를 막은 집단 소속이라면.’
“지금도 봐요. 미스터리 해커와 단독으로 만났다는 점을 이용해 청와대, 국회, 전경련 등 많은 곳을 휘두르고 있잖아요. 얼마 전에는 미국 국방부 장관과 만나기까지 했고. 이우그룹과 관계된 방산업체 관련 주식이 가파르게 오르는 것만 봐도, 이우그룹이 현재 얼마나 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는지….”
세차게 고개를 흔든 정 기자는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미스터리 해커에게 다시 생각해달라고 전해줘요. 다른 사람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기억을 지워도 상관없으니까. 부탁이에요.”
“아까부터 뭔가 크게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계나리는 정 기자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난 미스터리 해커가 아니라 이우그룹 쪽 사람이에요.”
정 기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이우그룹 허물을 캐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작 우리가 이해원을 감시하고 있단 사실은 전혀 몰랐나 봐요? 어쨌든 이야기 잘 들었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속내를 털어놔 줘서 고맙네. 그런데.”
멍해진 정 기자를 향해 계나리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서한율 얘긴 뭐에요? 서한율도 미스터리 해커랑 뭐 관련 있나?”
“……!”
“예전부터 서한율이 왜 그렇게 이해원을 감싸고 도나 의아하긴 했는데, 기자님이 이렇게 나올 정도면 뭐가 있긴 있나 보네요. 그게 뭔지 알려줄 수 있어요? 보상은 섭섭하지 않게 드릴게요. 조금 전에 했던 말도 잘 걸러서 위에 전달하고요.”
정 기자는 낭패를 느꼈다. 이 무례한 여자가 이우그룹 쪽 사람이라면, 자신은 서한율에게 큰 피해를 준 것과 다름없었다.
‘만약 서한율이 게이트를 막은 그림자 중 한 명이고, 이우그룹이 뒤에서 몰래 미스터리 해커 집단을 추적하는 상황이라면… 나 때문에….’
계나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 상대방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세요.”
삑삑. 전자자물쇠가 해제되고 문이 열렸다. 순식간에 안으로 들이닥친 사람들이 정 기자의 두 팔을 붙잡고 입을 틀어막았다.
“……?!”
계나리는 정 기자의 어깨를 잡고선 귓가에 속삭였다.
“이야기는 천천히, 조용한 곳으로 가서 들을게요.”
* * *
-[얼굴이랑 목소리 변조 아이템을 미리 준비하기 잘했어요. 생각보다 마력 소모가 심해서 속으로 조마조마하긴 했지만요.]
계나리의 보고를 들은 한율은 사과했다.
“미안해. 자꾸 귀찮은 일을 맡겨서.”
-[아니에요. 상대방이 내 진짜 얼굴과 목소리를 못 알아본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재밌더라고요?]
“설마 아이템을 사용한 상태로 나쁜 짓 한 건 아니지?”
-[앗, 편의점 가서 술이라도 살걸! 아쉽당. 30대로 보이니까 민증 검사도 안 했을 텐데.]
한율은 웃음기 실은 목소리로 말했다.
“술은 내년 되면 같이 한잔하자. 아직 너 미성년자잖아.”
-[넵! 그럼 오빠는 이제 댈러스로 가는 거예요?]
“어. 슬슬 체크아웃해야 해.”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너도 조심해. 이우그룹이 내가 국내에 없는 틈을 타 허튼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여차하면….”
한율은 계나리에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마련한 곳을 알려주곤 통화를 끝냈다.
똑똑. 누군가 객실 문을 두드렸다.
“한율아, 준비 다 했어?”
조유찬의 목소리.
“네, 금방 나갈게요.”
한율은 캐리어와 가방을 챙겨 객실을 나섰다. 그리고 조유찬을 가볍게 놀렸다.
“일주일 만에 한국으로 쫓겨나는 소감이 어때요, 형?”
“하하하하.”
몇 시간 후. 어스래빗 멤버들은 텍사스주 댈러스에 도착했다. 조유찬은 LA국제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아까 유찬이 형, 가기 싫다 하면서도 눈은 웃고 있더라. 입가도 좋아서 움찔거리던데.”
“전에는 우리가 최고라고, 우선이라고 했었는데. 정말로 막상 돌아간 거 보니까 조금 섭섭하기도? 역시 결혼하면 가족이 우선인가.”
“그런 거지. 그리고 유찬이 형이 한국 가서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잖아. 얼마나 좋으냐. 신혼부부를 위한 배려. 크.”
“이건우 얼굴에 대박 부럽다고 적혀있다.”
“행복해 보이는 커플이나 부부 보면 이런 생각 들지 않냐? 부럽다. 나도 저런 알콩달콩 겪어보고 싶다.”
척. 박가람이 이건우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곤 윙크했다.
“아이돌 때려치워. 그럼 당장 가능해.”
“10년 후에 말이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
“뭐야, 호 형? 왜 사람을 안쓰럽게 쳐다봐?”
유호가 깜짝 놀랐다.
“어? 아, 과연 10년 후에도 가능할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
“건우 형이 호 형 눈으로 욕하는 건 처음 보는 듯.”
“아니, 내 뜻은 그게 아니라, 7월 예고 때문에.”
“우울한 소리는 하지 맙시다.”
내일 쇼케이스가 열릴 공연장은 작년 월드투어 ‘The CARNIVAL’로 콘서트를 열었던 곳이었다.
리허설 전, 한율은 무대에 서서 빈 객석을 둘러보았다.
작년 바로 이 자리에서 멘트 타임을 가질 때였다. 돌연 무대 위 조명이 꺼지더니 팬들의 응원봉이 하트 모양으로 빛났다. 그날 공연장을 가득 채웠던 팬들의 생일 축하 노래가 귓가에 선명히 재생되었다.
어쩌면 그날이, 팬들에게 생일 축하를 받은 마지막 날이었을지도.
“써한, 몸 안 풀고 뭐 하냐? 리허설이라도 다치지 않도록 만전에 기해야 할 거 아냐!”
“왜 잘난 척 잔소리야.”
“그냥!”
무대 아래에서 현지 공연업체 측 직원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워커! 에릭 워커! 아직 멀었어?!]
[네, 잠깐만요!]
‘워커’란 성에 한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스태프 명찰을 목에 건 청년이 자신을 부른 직원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로건 워커’의 가족과는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
성만 같은 사람이구나. 한율은 그럼 그렇지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아무리 같은 텍사스주라고 해도, 이 넓은 땅에서 로건 워커의 가족과 마주칠 확률은 극히 희박할 터다.
문득 예전에 JE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크리스티나의 손녀, 배우 엠마 애커먼이 로건 워커의 가족과 함께 그의 마지막 목격 장소로 추정되는 서울 관악산을 찾았었단 이야기.
옆에서 길우성이 촐싹거렸다.
“스트레칭, 스트레치잉.”
“…….”
“왜 그렇게 봐?”
길우성을 보고 있자니 문득, TV를 준다는 말에 신나서 막춤을 췄던 조카 메이슨 워커가 떠오른다. 외모가 아니라 산만한 행동이.
“못생겨서.”
“이프림한테 이를 테다!”
리허설을 마치고 호텔에 체크인. 객실은 이번에도 한 명씩 배정되었다. 그 덕에 한율은 유호의 객실로 찾아가 편히 마나 유동을 봐줄 수 있었다.
“내일 쇼케이스가 끝나면 마력 쌓는 법 가르쳐드릴게요.”
“정말? 고마워.”
“그럼 쉬어요.”
“한율이 너도 잘 자. 오늘도 수고했어.”
객실로 돌아온 한율은 씻고 난 뒤 잘 준비를 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는데, JE로부터 톡이 왔다.
-[모르고 있다면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링크)]
의아한 마음에 클릭한 한율은 순간 호흡을 멈췄다.
엠마 애커먼의 SNS.
[사랑해요, 할머니. 나중에 하늘에서 다시 만나요.]
크리스티나의 장례식이 있고 나서 열흘. 오늘 올린 글이었다.
“…….”
한율은 입을 다물었다.
한때 그의 마음을 흔들었던 여성이었으나, 완전히 잊고 지낸 날이 더 길었던 가짜 인연이었다. 나이가 있으니 얼마 살지 못하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지난번 재회 이후에도 일부러 소식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뒤늦게 접한 그녀의 부고에 왜 이렇게 속이 쓰린 걸까. 가까이 지내던 이의 죽음도 무수히 겪었건만, 왜 새삼.
하. 크게 숨을 뱉어내며 일렁거리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리고 JE에게 답장했다.
[감사합니다.]
금세 톡을 읽었다는 표시가 떴지만, JE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한율은 창으로 다가가 댈러스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휴스턴의 양로원에서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한 말이 떠올랐다.
『나중에 하늘에서 다시 만나면, 그땐 짐을 소개해줄게요. 하지만 각오해야 할 거예요. 당신을 만나면 날 마음고생시킨 벌로 한 대 때려주겠다고 단단히 벼르던 사람이니까.』
미안해, 크리스티나. 난 당신과 당신의 남편이 있는 하늘론 못 갈 거야. 내 하늘은 다른 곳에 있거든.
한율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술이 무척이나 생각나는 밤이었다.
다음 날 오후. 쇼케이스가 열릴 공연장에선 VIP 티켓 소지자를 대상으로 한 미니 팬미팅이 한창이었다.
한율은 팬들과 웃으면서 짤막한 인사와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어젯밤엔 술을 마시지 않았다. 피곤한 몸은 침대에 눕자마자 크리스티나와의 기억을 꿈으로 가져가다 흩트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