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3화 (293/427)

[안녕, 한율.]

조금 전부터 기대와 동경이 담긴 반짝거리는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던 소녀가 다가왔다. 수줍게 웃으며 내미는 사인지에는 ‘벨라 워커’란 이름이 적혀있었다.

워커란 성이 이렇게 흔했던가?

한율은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반가워요, 벨라. 어디에서 왔어요?]

[샌안토니오에서 왔어요!]

멈칫. 사인지에다 펜을 놀리려던 한율의 손이 멈췄다. 샌안토니오는 로건 워커의 고향이자, 그의 본가가 있는 곳이었다.

‘설마. 이런 우연이 있을 리가.’

한율은 사인지에 적힌 질문을 훑는 척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벨라를 바라보았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메이슨이 보이는 듯했다.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벨라. 우린 언제부터 알았어요?]

[2년 전에 할아버지 따라서 한국에 간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TV에 나오는 어스래빗을 보고 첫눈에 반했어요!]

[정말요?]

하필이면 또 로건 워커의 가족이 한국을 찾았던 2년 전에.

한율은 더 깊게 묻지 않기로 했다.

[고마워요, 벨라. 항상 건강하고 행복해야 해요.]

벨라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한율을 만났으니, 앞으로 한 달간은 문제없어요!]

입국 거부당함

[어스래빗, 美 댈러스 쇼케이스 성료!]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이 첫 영어 앨범 [STEP]의 미주 쇼케이스 투어 두 번째 도시인 댈러스에서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작년 월드투어…(중략).]

이우그룹 부회장은 사과패드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기사에 잔뜩 달린 어스래빗 팬들의 애정 어린 댓글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철딱서니 없는 것들.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화려한 겉껍데기에 속아선.’

서한율은 당진 게이트 괴물의 축소 버전을 만들어내며 협박한 자였다. 물론 그것만 가지고서 서한율이 모든 게이트를 열었다고 단정 지을 순 없다. 7월 게이트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는 것만 봐도.

스스로 게이트와 괴물을 만들어서 막아내는, 영웅 놀이나 하려는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말이다.

“보고해.”

기다리던 비서가 입을 열었다.

“네. 계나리와 이해원, 손지은의 어제 행적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서한율은 핵심 계열사가 물리적으로 분해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가 무슨 속셈을 가졌든,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힘을 지닌 것도 틀림없는 사실.

그러나 명색이 대기업인데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는 없는 법이다. 서한율에게 토사구팽당했을 때를 위한 대비, 더 나아가 반대로 그를 이용할 실마리라도 찾아야 한다.

푸른 명상센터에 드나들었던 인원은 총 6명. 서울 게이트 현장에서 목격된 그림자 수와 일치했다. 부회장은 서한율과 같은 팀 멤버인 유호와 박가람을 제외한 나머지 셋에게 감시를 붙였다.

‘아무리 대단한 힘을 지녔어도, 먼 해외로 나간 이상 일일이 간섭하긴 힘들 테니.’

세 사람도 서한율처럼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태 들키지 않은 걸 보면 그런 걱정은 접어도 될 것 같았다.

“…이처럼 이해원과 손지은의 행적에선 여전히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계나리는?”

“오늘 19시경, 학원 가는 길에 돈을 갈취하려는 양아치들과 시비가 붙어 다투고 돈을 뺏긴 것 외엔 특이사항 없습니다.”

“양아치들에게 돈을 뺏겼다고?”

“네.”

정원그룹과 이우그룹의 기밀을 털어 협박하고, 게이트 괴물들을 막은 그림자 중 한 명인 미스터리 해커가?

‘이해할 수 없군.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론 평범하게 지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부회장은 김이 빠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알았어, 계속 감시해.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고.”

“네.”

“누구패치의 정선지는? 6일에 이해원을 찾아간 뒤 별다른 움직임 없나?”

“네. 어제는 내내 집에 있었고, 오늘 아침엔 정상 출근했습니다.”

* * *

미국 날짜로 12일 시카고, 14일 애틀랜타에서 쇼케이스를 마친 어스래빗은 마지막 도시인 뉴욕으로 향했다. 그동안 미국에선 기초 체력 훈련과 응급 처치 교육, 사격 훈련을 받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한국에서도.

[초중고 응급 처치 교육 및 재난 안전 훈련 시간 늘리기로]

[군 3,000억 원 규모 불량 장비 납품 적발]

[행정안전부 공식 앱 미리 설치하고 지역 대피소 확인하세요]

[사격장 전례 없는 호황, 제주 소총 사격장은 내년까지 예약 차]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때였다. 핸드폰으로 기사를 살피던 강보배가 말했다.

“우리도 응급 처치 교육받는 게 좋지 않을까? 7월 예고가 사실로 이뤄지든 아니든, 받아도 손해 볼 거 전혀 없잖아.”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어릴 때 학교에서 특강으로 배우긴 했지만, 솔직히 잘 기억나지도 않고.”

옆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오 팀장이 끼어들었다.

“그럴 것 같아서 24일, 대표님이 응급 처치 교육 출강을 신청했습니다.”

“오. 그럼 회사에서 받는 거예요? 다른 애들하고?”

“네. 요즘 응급 처치 교육을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상당히 바빠서요. 그래도 남녀 따로 받을 겁니다.”

“에이….”

“방금 에이 누구야.”

그때였다. 한 외국인 여성이 다가왔다.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 혹시 한국에서 온 K-POP 그룹, 어스래빗 맞나요?]

경호원들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계했다. 오 팀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1130 증상자 협회 뉴욕 지부의 애니 크루즈입니다. 어스래빗의 1130 증상자 두 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방해되지 않는다면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멤버들과 스태프들의 시선이 한율과 길우성을 향했다. 두 사람이 1130 증상자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크리스 라터쇼>에 출연했을 때 크리스가 언급하기도 했고.

[여기, 제 명함입니다.]

명함을 확인한 오 팀장은 한율과 길우성을 돌아보았다. 한율은 길우성에게 애니의 용건을 통역해 전달한 뒤 직접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아서요. 10분 후 이곳 다른 테이블에서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천천히 드세요.]

길우성은 애니가 자리를 떠난 후에야 한율의 대답을 이해했다.

“이걸 10분 안에 다 먹으라고?!”

잠시 후. 한율은 길우성과 함께 애니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향했다. 길우성은 통역사 없이 직접 영어로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한 눈치였다. 영어권 나라에서 팬미팅을 진행할 때도 되도록 영어를 사용하지만, 이번 상대는 팬이 아니기에.

“어려운 말은 너한테 맡긴다, 써한.”

[다시 제 소개를 할게요. 저는 미국 1130 증상자 협회 뉴욕 지부의 애니 크루즈입니다.]

[서한율입니다.]

[안녕하세요, 길우성입니다.]

세 사람은 악수하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직원에게 음료를 주문한 뒤, 애니가 두 사람에게 명함을 나눠주었다.

한율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국에 1130 증상자 단체가 있다곤 들었지만, 실제로 회원을 뵙는 건 처음이네요.]

마침 외국의 예비 각성자 명단도 손에 넣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명단 정도야 이우그룹이나 계나리를 통해 몰래 입수할 수도 있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연이 닿는 것도 좋았다. 그것도 이쪽에서 먼저 다가오다니.

[저도 유명한 K-POP 보이밴드를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나누고 싶은 이야기라는 게?]

애니의 용건은 다른 게 아니었다.

[미스터리 해커와 직접 만난 이우그룹이란 회사가, 한국의 1130 증상자를 특별관리한다고 들었어요. 그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이우그룹이 1130 증상자를 일일이 만나 조사한 건, 부회장이 미스터리 해커를 만났다고 발표한 것보다 이른 시기였다. 주체도 부회장이 아니라 그의 아들인 이채욱이었고. 그러나 이런 세세한 사정은 사소한 모양.

[음…. 우선 이우그룹이 1130 증상자를 특별관리한다는 게 잘못된 사실이란 걸 알려드리고 싶네요. 이우그룹은 1130 증상자를 향한 자격이나 권리를 갖고 있지 않거든요. 반대로 증상자들 또한 그들의 말에 따라야 할 의무도 없고요.]

아. 애니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현재 저희가 따로 알려드릴 만한 정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우그룹의 1130 증상자 행사에 참석한 적이 없거든요. 이미 많은 사람이 경험담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고요. 그래도.]

한율은 애니를 향해 미소 지었다.

[원하신다면, 앞으로 괜찮은 정보를 얻게 되었을 때 알려드릴게요.]

애니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국적은 달라도 우리 서로 비슷한 경험과 두려움을 겪은 사람들이잖아요. 당연히 협력해야죠.]

열심히 머릿속으로 해석하던 길우성이 한율의 말을 따라 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협력해야죠.]

[정말 고마워요, 한율! 정말 고마워요, 우성! 실은 두 분을 만나려고 결심하기 전에, 한국에서 스스로 1130 증상자라고 밝힌 분들에게 SNS를 통해 연락했었거든요. 그런데 언어 문제도 있고.]

애니가 쓴웃음을 지었다.

[직접 와서 이야기해 줄 테니 비행기 푯값부터 입금하란 분도 계셔서 곤란했었거든요.]

[이상한 사람에게 걸리셨네요. 같은 한국인으로서 사과드립니다.]

[아니에요. 그래도 마침 1130 증상자라고 알려진 두 분이 미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K-POP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장소를 물어물어 찾아오게 됐어요. 솔직히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흔쾌히…. 정말 고마워요.]

[그럼 이 명함에 적힌 메일로 연락하면 될까요?]

[네, 언제든 편히 연락해주세요. 전화를 주셔도 되고요.]

주문한 음료가 나온 후엔 작년 11월 30일의 경험을 공유했다. 애니는 일본 나고야 RMMA에서의 일도 물었다. 두 사람을 찾아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다며. 그러나 슬슬 리허설을 하러 갈 시간이라 이야기는 오래 나누지 못했다.

[오늘 대화 즐거웠어요. 꼭 메일 보낼게요.]

[저도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커피값은 제가 계산할게요.]

[커피 잘 마셨어요, 애니.]

[조심히 가세요.]

애니가 먼저 자리를 떴다. 후식을 먹으며 기다리던 멤버들이 다가왔다.

“우성이 흉내.”

박가람이 빈 의자에 앉아 허리와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러곤 옅은 미소를 띤 채 눈을 끔뻑끔뻑. 길우성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 딴엔 최대한 말을 잘 이해하고 한마디라도 하려고 집중한 모습이었소, 형님. 하…. 영어 공부를 더 빡세게 하든가 해야지.”

“그래도 말은 잘 알아듣는 것 같던데, 뭘.”

“슬슬 움직입시다.”

19일. [STEP]의 미주투어 마지막 순서인 뉴욕 쇼케이스를 무사히 마친 밤. 어스래빗은 오래간만에 단체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미주 쇼케이스 투어를 마친 소감과 도중에 있었던 소소한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하고, 채팅을 읽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냐고요? 전 일단.”

“비이미일.”

신나게 대답하려는 강보배의 말을 유호가 막았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재차 강조했다.

“비이미일.”

-비밀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바로 컴백 준비하는 것 같은뎈ㅋㅋㅋ

-호의 대답이 바로 스포

-ㅋㅋㅋㅋㅋㅋ

-이번엔 어떤 콘셉트야?

-빨리 한국에서 보고 싶다

-스텝 한국어 버전은 언제 나와?

라방을 마친 뒤엔 바로 각자 객실로 흩어졌다. 내일 뉴욕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진행할 예정이라 컨디션을 챙기기 위해.

다음 날 아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한율은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나기혁과 길우성, 진은수와 호수가 있는 단톡방에 나기혁이 톡을 올렸다.

-[와ㅡㅡ]

-[나 일본 입국 거부당함.]

[왜요?]

나기혁이 바로 대답했다.

-[‘명확한’ 1130 증상자라고.]

-[정 입국하고 싶으면 일주일 격리 기간 거쳐서 일본 병원에서 검사받고 괜찮다는 결과 나와야 가능하다더라ㅋ 시간이 없어서 그렇겐 안 된다고 했더니 싫으면 돌아가래.]

-[그래서 멤버들만 놔두고 나만 도로 한국행 비행기 탐ㅋ]

작년 말부터 일본 정부가 1130 증상자 격리를 검토한단 소식을 듣긴 했다.

‘아직 국가 간에 1130 증상자 명단 공유 협의가 된 게 아니니, 일단 공개적으로 알려진 유명인의 입국을 막은 건가.’

길우성의 톡.

-[그럼 나랑 써한, 은수 씨도 일본 못 들어가는 거?]

-[그렇겠지. RMMA에서 실시간으로 쓰러지는 모습 찍혔잖아. 라방이나 방송에서도 스스로 1130 증상자라고 밝혔고.]

-[한동안 일본 스케줄 없어서 별 상관없기는 한데... 좀 그렇네용ㅋ]

-[내가 못 들어갔으니까 너희도 못 들어가ㅋㅋㅋㅋ]

뒤늦게 진은수가 톡을 올렸다.

-[일주일 후 일본 스케줄 있는데 어떡하죠ㅠㅠ]

-[오늘이라도 바로 가서 격리 기간 거치든가 해야지ㅋ]

-[ㅠㅠ]

나기혁이 일본에서 입국 거부당한 사실은 금세 기사로 떠서 실검 1위를 차지했다.

너 어젯밤에 누구 만났어

[‘1130 증상자’ 인기 아이돌 일본 입국 거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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