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5화 (295/427)

“…….”

철퍼덕. 길우성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지며 얼굴을 감췄다.

이젠 내 겁니다

라이언이 놀란 얼굴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하뉼이 욕하는 거 실제로 처음 들어…!”

털썩. 길우성이 아예 엎드린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난 몇 번 들어서 아무렇지 않지. 하하.”

“자랑이야?”

“아무렇지 않다면서 왜 친구 얼굴을 못 보니, 우성아. 잘못한 거 있니?”

“아니?”

길우성이 벌떡 일어났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 써한 너한테 일일이 허락 맡아야 할 의무가…!”

한율은 길우성에게 사진을 들이밀었다.

“나도 네가 이상한 기사나 루머에 실릴 가능성 없으면 간섭 안 해.”

“…….”

“뭔데 그래?”

차남석이 한율의 핸드폰을 빼갔다. 길우성은 다시 바닥으로 얼굴을 감췄다.

차남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야, 이 양아치들은? 너 이런 놈들이랑 어울리냐?”

“사촌 형님 친구들이야….”

“사촌? 설마… 얼마 전에야 처음 만난 친할머니 쪽?”

“응…. 미국에서 사다 주기로 한 게 있어서 그거 전해주러 갔는데, 형 친구들이 다 있어서 엉겁결에 인사하고 술 한 잔 마셨다가…. 아얏, 아야얏.”

박가람이 길우성의 뺨을 잡아당기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사진 속에 클럽 간판이 보이네, 막내야? 들어갔어, 안 들어갔어?”

“아, 안 갔어…! 가자고 했는데 일 있다는 핑계 대고 도망쳤어…!”

그사이 한율의 핸드폰은 이건우에게 넘어갔다. 이건우는 사진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문신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시대착오적이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대중적인 인식이 별로란 거 알고 있지? 그런데 아직 이 쌀쌀한 날씨, 그것도 밤에 보란 듯이 목에서 팔까지 문신한 걸 자랑스레 내놓고 다니는 사람들이랑…. 아이돌만 보면 어떻게든 끌어내리고 싶어서 안달한 사람들에겐 좋은 먹잇감이 되겠는데?”

“잔소리 그만. 우성이라고 그걸 모를까.”

“하나만 묻자.”

차남석이 길우성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네 사촌 말고, 양아치처럼 생긴 그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사진 찍었냐? 그것만 대답해.”

박가람이 길우성의 뺨을 놓아주었다. 길우성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서 앉았다.

“안 찍었소. 함부로 사진 찍히면 안 된다고 해서 피했소.”

“한율이 넌 이 사진 어디에서 난 거야?”

“민준 선배님이 보내주셨어요. 길우성 혹시 이상한 사람들이랑 어울리냐고.”

핸드폰을 돌려받은 한율은, 그다음으로 온 민준의 톡을 확인했다.

“선배님 지인이 ‘어스래빗 길우성이 맞나?’ 긴가민가해서 찍어서 보내준 거래요. 민준 선배님은 일단 전혀 아니라고 부정했고.”

유호와 이건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남석은 길우성을 향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넌 내가 아버지 때문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바로 옆에서 보고도 느끼는 바가 전혀 없었냐? 그런데 알게 된 지 고작 몇 달밖에 안 된 사촌? 같은 팀 멤버로서 말하는데, 너 사람 가려가면서 만나. 혈연이라도 예외는 없어. 만약 네가 이상한 루머에 휘말리면 네 이미지만 깎이는 걸로 끝날 것 같아? 우리야 비즈니스 파트너로 여겨질 수 있으니 그렇다 쳐도, 실제로 너랑 제일 친한 저놈한텐 백퍼 불똥 튀거든?”

“……!”

잔뜩 겁을 주는 차남석의 말. 길우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도 투어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밤에 술집이랑 클럽 있는 거리에서…. 하.”

차남석이 말하다 말고 고개 돌리며 한숨 쉬자, 길우성은 어깨를 힘없이 축 늘어뜨렸다.

“죄송합니당. 거기까진 생각 못 했어….”

그러곤 한율을 힐끗했다.

“미안.”

“나한테 사과할 일 아니니까 됐어.”

“엉….”

짝짝. 강보배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우성이도 반성하는 것 같으니까 잔소리는 여기서 끝! 연습 준비합시다!”

그날 밤, 어스래빗 숙소.

똑똑. 길우성이 한율의 방을 찾아왔다.

“자냐?”

캔맥주 두 개를 들고.

므앙.

“우리 달냥이, 주인 대신 대답도 해주고. 참 기특한 고양이야. 그렇지?”

침대에 편히 누워있던 한율은 몸을 일으켰다. 자기 전에 잠깐 볼만한 영화가 있는지 고르던 중이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길우성이 맥주를 책상에 올려놓곤 달냥을 쓰다듬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너랑 둘이서만 술 마신 적 없는 것 같아서, 겸사겸사.”

어제 사촌과 그 친구들을 만난 일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려고 온 거겠지. 한율은 내심 귀찮았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차남석의 말처럼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달랑 두 캔 갖고 되겠냐?”

* * *

첫 영어 앨범을 내고 미주 쇼케이스 투어를 다녀온 어스래빗은 대외적으론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멤버들은 매일 회사로 출근했다. 회사 직원들과 함께 5번째 EP 앨범에 대한 구체적인 콘셉트 회의를 진행하고, 먼저 나온 안무 연습을 시작했다.

컴백 예정 날짜는 6월 11일.

“데뷔 5년 차. 병원 다니는 횟수가 늘었다. 슬프다. 나이는 못 속이는 것이다.”

매일 안무와 노래 연습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 상하거나 다치기 마련. 멤버들은 벌어들이는 수익만큼 더욱 몸 관리에 신경 썼다. 허리나 무릎, 발목 관절이 다치지 않도록 비싼 개인 트레이너에게 운동을 배우고, 병원에 다녔다. 필라테스를 배우러 다니기도 하고.

이는 한율도 마찬가지였다.

4월 9일 금요일 저녁. 한율은 박가람, 차남석과 함께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특별히 아픈 건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목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형 올해 몇 살이었죠?”

“내가 너보다 한 살 형이란 사실을 잊은 모양이구나, 차남석아. 혹시 네 나이를 잊어버렸니, 차남석아? 바보 같구나.”

“내가 진짜 그런 뜻으로 물었을까요?”

“시끄럽다, 차남석아.”

일반 진료 시간이 끝나 조용한 병원. 한율은 세 사람 중 마지막으로 진료를 받고 나왔다.

“왜 또 싸우고 그래요.”

“안 싸웠어.”

“이게 무슨 싸움 축에나 드냐. 별 이상 없지?”

“네. 이제 두 분은 어디로 갈 거예요?”

매니저 허진영이 대신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들은 자신들 때문에 퇴근이 늦어진 병원 직원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곤 그곳을 나왔다.

“난 필라테스. 서한율 너도 오늘 수업받으러 가는 날 아냐?”

“저 오늘은 패스요.”

“웬일이래. 학교엔 안 나가도 필라테스나 운동은 꼬박꼬박 잘 다니던 애가?”

“내일 부모님 집 이사하거든요. 가서 정리 좀 도우려고요.”

“아. 나도 가서 도와줄까?”

“괜찮아요. 대부분 일은 포장이사 업체 직원들이 할 거고, 사촌 누나도 와서 도와주기로 했거든요. 길우성도.”

엘리베이터에 탑승. 박가람이 가만히 한율을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누나 예쁘시니? 나이는?”

차남석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건 왜 물어요.”

“여자 형제 있는 사람한텐 이런 거 물어보는 게 국룰이라 그래서, 나도 한번 해봤어.”

“건우 형한테도 물어봤었어요?”

“아니.”

“보배한테는요?”

“미쳤니, 차남석아? 보배 동생 미성년자잖아. 그리고 전에 보배네 집에 놀러 갔을 때 직접 봤었고.”

한율은 가볍게 웃곤 다른 말을 했다.

“내일 좀 늦을 수 있어요. 이사 가는 곳이 서울이랑 좀 떨어져 있거든요.”

“엉. 달냥이는 내가 잘 놀아줄게.”

박가람과 차남석은 필라테스를 하러 가고, 한율은 숙소에서 내려 자신의 차를 몰고 본가로 향했다.

“이거 다 중요한 문서니까, 율이 네가 잘 챙겨.”

“제가요?”

안방 금고가 활짝 열렸다. 모친은 그 안에 있던 서류 봉투 뭉치를 한율에게 건넸다. 한율이 모르는 다른 건물과 땅이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다 네 거 될 거니까.”

“네….”

그리고 금고에 어떤 물건이 얼마나 들었는지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건 어머니가 결혼 때 받은 예물이에요?”

“응. 예쁘지? 너희 할머니가 나한테 물려주신 거야. 나중에 율이 네가 결혼하게 되면, 그땐 재가공해서 네 처한테 물려줄 거고. 그리고 이것도 보여줄 거다?”

“아니, 이걸 왜 여기에….”

예물 케이스 옆에는 한율이 유치원 시절에 그린 그림이 액자로 보관되어 있었다.

모친이 그림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율이 네가 처음으로 그린 우리 가족 그림이잖아. 엄마의 보물 3호야.”

유치원 시절, ‘우리 가족을 소개합니다’ 발표 때 쓰고자 대충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린 낙서였다. 그런데 그걸 15년 동안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니.

“여기 네 유치 보관함도 있다? 그리고 이건 네가 입었던 배냇저고리.”

모친이 곱게 개켜져 있던 배냇저고리를 꺼내 펼쳤다.

“이렇게 작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대, 우리 아들?”

이 배냇저고리를 입었던 진짜 서한율은 이미 2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한율은 간지럽게 올라오는 죄책감을 미소로 덮었다.

“다 어머니, 아버지의 보살핌 덕분이죠.”

다음 날. 포장이사 업체 직원들이 오기 전, 길우성이 강보배와 함께 찾아왔다. 강보배가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고양이 케어는 나한테 맡겨.”

“나는 보배 형 조수다.”

고양이들에겐 동물병원에서 처방받은 안정제를 먹인 뒤 각각 이동장에 넣었다.

“운전은 내가 할 테니까, 애들 토하진 않는지 잘 지켜봐 주세요.”

“응. 걱정하지 마.”

“그럼 어무니, 아부지! 저희 먼저 출발하게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 애들 잘 부탁할게.”

세 사람은 고양이 네 마리와 귀중품, 중요 서류가 담긴 캐리어를 한율의 차에다 실었다. 캐리어는 조수석에, 강보배와 길우성은 이동장과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안정제 먹이기는 했어도 바깥 보면 불안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천으로 덮어줘야 해.”

“쓰다듬는 건?”

“주인 손길이 아니라서 오히려 스트레스받을 수 있어.”

다행히 고양이들은 새집에 도착할 때까지 토하거나 심하게 울지 않았다. 새롭게 꾸민 고양이 방에 들어간 뒤에도 금세 이동장에서 나와, 킁킁 냄새를 맡으며 서울 집에서 사용했던 캣타워에 올라가거나 방석, 화장실을 찾았다.

“적응력 대박.”

“네 마리 모두 바로 새집에 적응한다고? 진짜 놀랍다.”

“주인 닮아서 그런 게 아닐까? 써한 쟤도, 어느 날 갑자기 외딴곳에 떨어뜨려 놔도 바로 적응해서 잘 살 것 같잖아.”

한율은 미리 설치된 새 금고에다 귀중품과 중요 문서를 모두 넣어 잠갔다. 그리고 지금 짐을 다 싣고 출발한다는 서한림의 톡을 확인했다.

“전 잠깐 바깥 좀 둘러볼게요.”

“응.”

“집안 구경해도 돼?”

“어.”

한율은 몇 달 전 정원과 담 아래에 새긴 결계 주문을 꼼꼼하게 살폈다. 여전히 아무 이상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길우성이 흥분한 얼굴로 떠들었다.

“야, 이 집 원래 있던 곳 리모델링한 거라고 했지? 2층에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있어서 올라가 봤거든? 거기에 매트리스랑 책장, 천체 망원경 있더라? 네가 둔 거냐?”

“아니? 아버지나 어머니가 갖다 두신 걸걸?”

“오, 낭만 있으시다.”

몇 시간 후. 커다란 포장이사 트럭 여러 대와 부모와 서한림이 탄 차가 도착했다. 포장이사 업체 직원들은 척척 짐을 나르고, 원래 집에 있었을 때처럼 물건 정리까지 해주었다.

부친은 바쁘게 움직이며 두루 살폈다.

“옷은 저희가 직접 정리할 테니 드레스룸에만 넣어놔 주세요. 신발은 원래 집에 있었던 순서 그대로 진열해 주시고요. 신발장 너비가 같아서 다 맞게 들어갈 겁니다. …아, 그 캣타워는….”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낯선 사람 여럿이 들락거리자 심리적 불안 증세가 도지는지, 모친은 그릇 정리를 돕다가 고양이 방에 들어가 안정을 취했다.

이사는 늦은 오후가 되어야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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