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돌아가실 때 영양 보충이라도 하시라고, 더 넣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마무리로 청소를 깔끔하게 한 뒤, 한율은 2층에 마련된 자신의 방을 살폈다. 오늘 다시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라, 새 매트리스 포장 비닐은 일부러 뜯지 않았다.
후우. 한율을 따라 방으로 들어온 길우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좀 섭섭하다.”
“뭐가?”
“너 그 집에서 되게 오래 살았다며. 몇 달간 신세를 졌던 나도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드는데, 넌 안 그러냐? 이젠 남의 집인 거잖아.”
한율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집 안 팔았어.”
“엉? 그래?”
“어. 이젠 내 거라서 언제든 다시 들어갈 수도 있고.”
“나 조만간 인터넷에 뜰 기사 제목 맞춰본다. [어스래빗 서한율, 50억 대 아파트 증여받아].”
이틀 후, 정말로 길우성이 말한 제목의 기사가 포털사이트 연예 뉴스란 메인에 떴다.
얼마나 위험한 게이트이기에
-이젠 놀랍지도 않다.
-전생에 무슨 덕을 쌓은 거냐 대체
-흙수저로 태어났어도 외모랑 재능으로 본인 건물 올렸을 법한데 또 ㄷㄷ
-얘 재산 이제 650억?
ㄴ그건 게이트 정보 뜨기 전이고. 요즘 서울 부동산 시세 떨어지는 중이라
ㄴ그동안 벌어들인 수익은 계산 안 하셨나 봐
ㄴ서한율 1년 동안 찍은 광고 수익금만 10억은 그냥 넘을걸요
-기자는 이런 정보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거임?
ㄴ이미 저 아파트 단톡방인가 카페에 떴어요. 서한율네 집 이사하는 거 보고 부동산에 얼마에 나왔냐 물어봤는데 그냥 아들한테 줬다고ㅇㅇ
-인기 아이돌 부모님도 게이트 예고 때문에 서울 벗어난 게 중요 포인트 아닐까.
ㄴ게이트 예고 뜨기 훨씬 전부터 귀향 계획 잡고 고향 동네에 있는 집 사서 리모델링 공사했대요. 연관ㄴㄴ
WB래빗 엔터테인먼트 구내식당. 인터넷에 뜬 기사를 보던 이건우가 물었다.
“그럼 이제 바빠지면 달냥인 어디에 맡겨?”
“JE 선배님이 봐주기로 했어요.”
“그 집에 고양이용품 있어?”
“사다 두면 되죠?”
강보배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이랑 진짜 친하구나. 고양이 안 키우는 사람이 고양이 맡아주는 거 정말 쉽지 않은데. 털이랑 모래 휘날리고, 또 비싼 가구랑 옷 망가질 위험성도 있어서.”
“JE 선배님 토끼 비슷한 거 키우지 않냐? 괜찮냐?”
“가끔 만나게 하는데, 둘이 사이좋아요. 꼭 붙어서 낮잠도 자고.”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고. 예전에 달냥이가 내 가방에서 그 녀석 냄새난다고 막 헤집었었잖아. 그러고 보니… 처음에 그 토끼 찾으러 매니저 숙소 갔을 때도 달냥이 데려갔었지?”
“네.”
우웅. 오 팀장이 톡을 보냈다.
-[시간 되면 사무실로.]
잠시 후, 2층 사무실 내 회의실.
오 팀장이 한율에게 조용히 물었다.
“연기. 아직도 다시 할 생각 없니?”
작년 <서울 구미호> 이후 한율에겐 엄청난 양의 대본과 캐스팅 문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한율은 당분간 연기할 생각이 없다며 못 박았고, 회사는 그런 결심을 전하며 들어온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보면 생각이 바뀔 거란 자신감을 가지고 계속 연락하는 곳이 한 트럭이었다.
“<서울 구미호>가 작년 3월 28일 종영됐으니 벌써 1년이 지났다, 한율아. 네가 그룹 활동을 우선시하고 싶단 마음은 당연히 존중해. 하지만 이제 어스래빗은 컴백마다 더욱 성장한 모습, 더 좋은 노래를 들고 오기 위해 그만큼 공을 들여야 하는 시기야. 그만큼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릴 거고.”
“네.”
“우린 그 시간 동안 다른 멤버들에게도 개인 활동 기회를 주고 싶어. 그 시기를 6월 이후로 보고 있고.”
“하지만 팀장님. 6월이 지나면….”
한율이 말을 흐리자 오 팀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7월 게이트 대란이 일어나면 엔터 업계부터 망하겠지. 하지만 그 불확실한 예고 하나만 믿고 모든 걸 멈출 순 없잖아. 나쁜 미래도 대비하고, 밝은 미래도 대비해야지.”
“네…. 그렇죠.”
“그렇지?”
오 팀장이 씨익 미소 지었다.
“그럼 이참에 시나리오 하나 봐볼까?”
“아니요. 7월 게이트 대란과 별개로, 정말로 당분간은 연기할 마음이 없어서요.”
“그래, 알았다.”
* * *
4월 13일. 어스래빗 데뷔 4주년을 기념한 첫 번째 포토북이 오프라인 서점에 진열되었다. 온라인 서점에선 지난주부터 배송이 시작된 터라, 이미 인터넷엔 이프림의 구매 인증이 넘쳤다.
-비하인드 DVD에 팬송 뮤비 들어있는 거 나만 감동임ㅠㅠ?
-깜짝 영상도 하나 들어있다더니 팬송이었어ㅜㅜ
-나중에 너튜브에도 풀릴 테지만 그래도 이런 깜짝 선물 너무 좋다♡♡♡♡♡
-첫 포토북이라 뭔가 더 특별할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번 팬송 가사 듣고 진짜 울컥
-미주 쇼케이스 투어로 정신없었을 텐데 언제 또 이런 걸ㅠㅠ
-지상의 은하수가 잠겨도 우리의 푸른 물결 기억해. 지상의 은하수=도시 불빛?
다음 날인 14일. 어스래빗 데뷔일엔 어스래빗이 미국에 있을 때 촬영한 데뷔 4주년 기념 영상이 너튜브를 통해 공개되었다. 밤에는 단체 라이브 방송이 진행되었다.
[데뷔 초와 비교해서 달라진 것.]
[아…. 많죠. 정말 많죠.]
박가람과 차남석이 동시에 대답했다.
[일단 물질적으로 풍족….]
[멤버들 간의 우애.]
[…….]
[박가람 의문의 1패.]
[우애 깎이는 소리가 들리네요.]
학원 수업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 이어폰을 꽂고 어스래빗 라방을 보던 계나리는 소리를 죽여 웃었다.
“야.”
탁. 누군가가 계나리의 머리를 스치듯 때렸다.
“……?!”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이라, 계나리는 놀란 얼굴로 휙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얼마 전, 돈 3만 원을 뺏어갔던 양아치 무리의 여학생 셋이 서 있었다. 속옷이 보일 것 같은 짧은 교복 치마에 진한 화장을 한 모습으로.
담배 냄새가 역겹게 훅 다가왔다.
“뭘 그렇게 재밌게 보냐?”
계나리는 전원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옆에 있던 다른 학생들은 어느새 정류장 밖으로 피한 채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내가 뭘 재밌게 보든 무슨 상관이야. 아무튼 너희 잘 만났다. 전에 나한테서 뺏어간 3만 원 내놔, 이 거지 년들아.”
“얘 존나 귀엽지 않냐? 꼭 치와와가 왕왕거리는 거 같아. 언니가 쭈쭈바 사줄까?”
“언니 같은 소리 하네. 단체로 학교 꿇었냐? 나 열아홉 살이야, 이 노안들아.”
“꺄~ 우리보다 두 살 언니래! 더 귀여워, 미친!”
“…….”
계나리는 씨익 웃으며 살기를 감췄다. 이것들을 어떻게 혼내줘야 잘 혼냈다는 소문이 날까.
그때였다. 바로 앞에 차 한 대가 멈추더니 조수석 창이 내려갔다.
“나리 씨?”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계나리를 향해 손짓했다.
“타요. 집까지 태워다 줄게.”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계나리는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스타믹스의 JE였다.
“네!”
계나리는 씩씩하게 대답하고선, 자신의 뒤통수를 때린 여학생에게 가방을 휘둘렀다. 퍽.
“악!”
그러곤 재빠르게 JE의 차에 올라타며 외쳤다.
“집에나 처 기어들어 가, 이 년들아! 거지처럼 길바닥 싸돌아다니지 말고! …출발, 출발!”
“사이좋게 웃고 있던데. 친구들 아니었어요?”
JE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차를 움직였다. 계나리는 끼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도로까지 뛰쳐나와 쌍욕을 뱉어내는 여학생들이 멀어졌다.
“전에 나한테서 삥 뜯었던 양아치들이에요. 혼자 있을 때 여럿이 우르르 몰려와 둘러싸지만 않았어도, 그때 단단히 혼내주는 거였는데.”
“아.”
“지은 씨는 여기 어쩐 일이에요?”
스륵. JE는 창을 올린 뒤에야 안경을 벗었다.
“이 근처에서 중고 거래가 있었거든요. 구동이한테 어울릴 법한 귀여운 강아지 옷을 내놓은 사람이 있어서, 방금 직거래로 사고 온 참이에요.”
“크. 나이스 타이밍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어딘지 아세요?”
“아니요.”
“그나저나 저 뒤늦게 걱정되는 게.”
계나리는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지은 씨 쫓아다니는 사생이나 기자한테 사진 찍혔으면 어떡하죠?”
“집에서 나오자마자 따돌려서 괜찮아요. 찍혀도, 친한 동생 태워줬다고 그러면 되죠?”
두 사람은 가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렇게 사적인 형태로 둘만 있는 건 드문 일이라, JE는 그동안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나저나 나리 씬 스페인 마요르카섬에 어떻게 가게 된 거예요? 서한율이 미리 그곳에다 결계를 쳐서, 아무도 거기에 게이트가 있단 걸 몰랐다면서요.”
계나리가 마요르카섬에서 서한율을 만난 건 2026년. 그리고 2년 후인 2028년에 시간을 거슬러왔다고 했다.
하하. 계나리가 교과서를 읽는 톤으로 웃었다.
“도망치러요.”
“도망이요?”
“아시다시피 제가 해킹 기술을 좀 익혔잖아요. 일하던 중 어쩌다 보니 한 각성자 단체의 지저분한 치부를 알게 됐는데, 그 단체의 윗대가리들이 내 입을 막겠다고 날뛰는 거예요. 원래는 벨기에에 있었는데 여기저기 도망치다 보니까 스페인까지 가게 되었고… 마요르카섬으로 가는 배를 탔어요. 그런데 웬걸.”
계나리의 입가에 진짜 미소가 걸렸다.
“내 학창 시절의 최애가 거기에 떡하니 있지 뭐예요? 보자마자 놀라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그때 서한율 혼자 게이트를 지키고 있었다고 했죠?”
“네. 아주 오랫동안…. 다행히 게이트가 섬에서도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있었고, 강한 힘이나 괴물들이 뛰쳐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도 아니라서 오랫동안 조용히 지킬 수 있었대요.”
JE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힘들기도 하고 외로웠을 것 같은데.”
“오빠 성격 아시잖아요. 전혀 그런 티를 안 내니까 더 마음이 그렇더라고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이, 제일 위험한 게이트를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혼자 지킨다는 게…. 그래서 마법사 스승님이기 이전에, 오빠가 참 존경스럽더라고요.”
“그…. 이런 질문 굉장히 실례될 것 같기는 한데.”
“솔직히 두근거린 적 한두 번 아니었지만, 철벽에 부딪혀 좌절 여러 번 겪고 나니 이젠 존경심과 팬심 외엔 아무 감정 없습니다!”
“…….”
계나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런 질문하려던 거 맞죠?”
“…네. 미안해요.”
“괜찮아요. 예전에 가람 씨도 물어봤었거든요. 율이 오빠를 마요르카섬에서 만났을 때가 내가 스물네 살, 오빠는 스물일곱 살이었고 2년 동안 가까이 지냈으니까, 그런 쪽으로 생각이 미치는 거야 당연하죠. 그런데 정말로.”
장난 섞인 아련한 얼굴로 먼 하늘을 바라보는 계나리.
“오빠랑 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철벽 진짜, 와. 레알 목석인 줄.”
“…….”
“아, 다 왔당. 태워다줘서 고마워요.”
“네. 다음에 봐요.”
JE는 계나리가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차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를 곱씹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얼마나 위험한 게이트이기에 7년 동안 계속 그 앞을 지킨 거지? 그럼 이번에도 그곳으로 가는 건가? 그 녀석 혼자?’
그러고 보니 7월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들은 적이 없었다. 마법 학교 학생들과 그 가족들이 지낼 안전 거처를 마련하고, 비상식량과 물품을 열심히 구비하기만 했을 뿐.
‘그 녀석이 ‘진짜’ 서울 게이트를 막을 수 있는지 생각할 때가 아니었어.’
JE는 대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핸드폰을 꺼냈다. 생각난 김에 물어보려고.
“아.”
그러나 핸드폰 상단에 뜬 어스래빗 라이브 방송 알림을 보곤 전화 대신 톡을 보냈다.
[한가할 때 전화.]
자정이 지나 15일. 한율은 라방 뒷정리를 마친 뒤에야 JE가 보낸 톡을 확인했다. 그러나 전화는 새벽 1시가 될 무렵, 숙소에서 걸었다.
-[너 7월 되면 다시…. 아니, 아직은 다시가 아니구나. 어쨌든, 마요르카로 갈 거냐? 나리 씨가 겪은 미래처럼 몇 년 동안 그곳에서 혼자 게이트 지킬 거냐고.]
“글쎄요. 일단 그 게이트를 직접 확인한 뒤 판단해야 할 것 같아요. 나리 씨 얘기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저도 몇 년 동안 혼자서 게이트 앞을 지키고 싶진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