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가긴 한다는 거네?]
“네. 6월 앨범 활동이 끝나면 곧바로 가려고요.”
한율은 달력을 확인했다. 아슬아슬했다. 6월 활동이 끝나는 예정 날짜가 6월 25일이므로.
사실 길우성만 허튼짓 못 하도록 단속하면 되지만, 계나리가 겪은 미래에서 자신이 ‘제일 위험한 게이트라 지키는 중이다’라고 말했으니 그에 맞추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고향으로 연결되는 게이트가 열리는 걸 직접 보고 싶기도 하고.’
건너갈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혼자 괜찮겠냐? 나도 같이 갈까?]
“선배님은 선배님 가족 지켜야죠. 그러라고 제자로 거둔 건데요.”
-[…….]
한율은 담담하고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살벌한 총싸움보단 낫네
4월 중순. 어스래빗은 5번째 EP앨범 녹음을 마쳤다. 이제 M/V 촬영이 얼마 안 남은 터라, 한율은 휴일인 주말에도 자발적으로 나와 안무 연습을 했다. 덕분에 매일 피곤했지만, 마나 유동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미스터리 해커가 게이트 대란을 예고한 7월이 점점 다가오면서 쌀과 라면 등 식료품과 비상약품 사재기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에 정부는….]
26일. 앨범 재킷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띡. 조수석에 앉은 길우성이 라디오 채널을 바꿨다.
[어려운 이웃을 향한 온정의 손길이 줄고 있습니다. 특히 푸드뱅크 기부가 줄어 취약계층이 어려움을….]
띡. 다시 채널 변경. 뮤닷 프로젝트 걸그룹, IOMU의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길우성이 박자에 맞춰 어깨를 들썩거렸다.
“나, 푸드뱅, 크, 기부할, 거당, 당, 당.”
“아까 뉴스에서 사재기가 기승을 부린다고 말했는데. 어디에서 물량 확보하려고?”
“그래도 쌓인 곳이 있지 않을까?”
“있겠지. 조직적으로 사재기해서 비싸게 되파는 사람들 물건.”
“식품 회사들이 공장 풀 가동하면서 공급에 차질 없도록 한다던데, 수입 원재료 가격 자체가 상승해서 소비자 가격도 더 오를 거래. 지금 전 세계가 7월 대비하느라 난리잖아.”
“결국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만 제대로 대비 못 하는 거지….”
하아. 차에 무거운 한숨 소리가 퍼졌다. 운전하던 매니저 허진영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피커에선 여전히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제 두 달밖에 안 남았네요.”
“그러게요.”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하던 한율은 충격적인 기사를 접했다.
[지중해 마요르카섬, 7월 관광객 입도 제한 추진]
“…….”
“서한율, 뭘 그렇게 심각하게 봐.”
“…아니에요, 아무것도.”
“우리, 이번 컴백 역조공 선물로 가정용 구급키트 어때?”
“좋을 것 같기는 한데, 그것도 지금 사람들이 사재기하는 품목 아니야? 물량 제대로 확보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라도 준비하면 되지 않을까? 반대하는 사람?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손들어보시오.”
역조공에 들어가는 비용은 멤버들의 정산금에서 차감되므로, 한 사람이라도 거부하면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없습니당.”
“그럼 팀장님한테 톡 보낸당.”
“OK.”
숙소에 도착. 한율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거쳐 팔마로 가는 항공권을 예약했다.
‘7월 전에 들어갈 거니 괜찮겠지.’
문제는 길우성이었다.
길우성은 조건이 맞지 않으면 능력이 발동되지 않는 특이 능력자다. ‘이전’에도 게이트 사태가 벌어진 지 5년이 지나, 게이트 안으로 발을 집어넣은 뒤에야 최초로 능력이 발동되었다.
‘어차피 전 세계 1130 증상자 중 특이 능력자들은 당장 발동되는 능력이 없어 보일 테니, 길우성도 그런 케이스로 보이게 두고 따로 사람을 붙이는 게 나으려나.’
솔직히 감시할 수 있는 범위에 두고 싶다. 게이트를 결계로 막아두면 들어가지도 못할 테고. 하지만, 굉장히 걸리적거릴 게 뻔했다.
‘아직 두 달 남았으니, 천천히 생각하자.’
* * *
[어스래빗, 5월 가정의 달 기념 소외 계층 위해 5억 기부]
[어스래빗 길우성, 푸드뱅크에 1억 원 상당 쌀 기부]
-감사합니다.
-회사는 고소가 취미고 소속 아이돌은 기부가 취미고
ㄴ악플 합의금으로 기부하는 거 아니냐ㅋㅋ
ㄴ얘네 합의 안 해주기로 유명함. 합의금 얼마 제시하든 ㅗㅗ 치고 끝까지 법으로 팸. 미성년자도 절대 안 봐줌.
ㄴㅅㅂ 존나 멋져
-돈 많이 벌어도 억 단위 기부하기 쉽지 않은데 진짜 장하다ㅠㅠ
-얘 어릴 때 학폭 피해당했다던 걔 아님?
ㄴ맞음. 초등학교 6년 내내 가정사 들먹거리면서 따돌림당했었다고 함.
ㄴ잘 컸네.
ㄴ그런데 웃긴 게 얘네 누나는 진짜 예뻐서 따돌림당한 적 한 번도 없었음. 친구도 크리스탈 래빗의 미랑이었고.
ㄴ선행 기사 보면 칭찬만 하자. 아픈 과거 들추지 말고.
5월은 본격적인 컴백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한 주는 M/V 촬영만 하느라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고, 그나마 쉬는 날엔 그린 라이브와 너튜브에 올릴 자체 콘텐츠를 촬영했다. 한국과 일본의 패션 잡지 인터뷰와 화보 촬영도 연달아 잡혔으며, 컴백 시기에 맞춰 방송될 예능 섭외 조율도 이뤄졌다.
“패션쇼요?”
콘텐츠 촬영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온 한율은 오 팀장과 대면했다.
“응.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명품 패션쇼에서 한율이 널 초청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 날짜는 6월 27일. 마침 활동이 끝나서 딱 좋은 시기….”
“안 돼요.”
말이 끝나기 전 나온 단호한 거부에, 약간 들떠있던 오 팀장의 입가가 굳었다.
“작년에 월드투어랑 겹쳐서 못 간 곳인데?”
“이미 다른 일정 잡아서 참석 못 해요.”
아무리 인기가 많은 최정상급 아이돌이라 해도, 초청받지 않는 이상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바로 명품 패션쇼였다. 그래서일까. 오 팀장은 답답함보단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정인지 물어도 될까?”
“여행 가려고요. 항공권 예매랑 호텔 예약도 끝냈어요.”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탈리아도 여행 코스에 넣는 건 어때? 주최자가 초청한 한국 셀럽들을 위해 전세기도 보내준다던데.”
“그래요?”
“응.”
“잠시만요.”
한율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탈리아와 마요르카섬은 무척 가까웠다. 밀라노에서 팔마로 가는 직항 비행기도 있고.
힐끗. 한율은 오 팀장을 한 번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스래빗의 중요한 해외 일정엔 늘 오 팀장이 동행하는데, 이번 패션쇼에도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어차피 28일에 출국하려 했으니, 하루 이틀 더 빨리 나가는 정도야 뭐.’
“갈게요.”
한율이 명품 패션쇼에 셀럽으로 초대됐다는 이야기는 곧 멤버들에게도 알려졌다.
길우성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지난번에 미리 얘기했듯, 내가 써한의 매니저로 동행하겠다.”
“남석이가 매니저 한다고 하지 않았어?”
“우성 일 못 할 것 같다고 하뉼이 그랬잖아. 그러니까 내가 갈게.”
“내가 간다니까?”
차남석도 진지한 얼굴로 말했지만, 한율은 이들의 말이 모두 농담이란 걸 알고 있었다. 정말로 같은 팀 멤버를 매니저나 들러리로 데려간다면, 이프림부터 멤버를 대체 뭐로 생각하냐며 굉장히 화낼 게 뻔하므로.
“다른 초대받은 한국 셀럽은 누구래?”
“글쎄요. 아직 못 들었지만, 그리 많진 않을 것 같아요.”
강보배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괜히 내가 다 뿌듯하네. 우리 팀 멤버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패션쇼에 셀럽으로 초대받아서 간다니. 그런데 이거 미리 외부로 말하면 안 되겠지?”
“네. 시기가 시기니만큼, 도중에 취소될 수도 있잖아요.”
“응, 조심할게.”
5월 15일. 한율은 교육방송 채널 <일일 멘토> 녹화를 위해 움직였다. 작년에 만났던 배우 지망생 김경원을 다시 만나기 위해. 김경원은 올해 중학교에 입학, 현재 한 웹드라마에 아역으로 출연 중이었다. <일일 멘토> 제작진과 함께 그 촬영장으로 향했다.
한율은 새카만 밴에 앉아 김경원의 연기를 지켜봤다. 지난번처럼 김경원은 한율이 찾아올 줄 꿈에도 모르는 상태였다. 아니, <일일 멘토> 녹화가 있을 거라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웹드라마 PD와 작가 한 명을 제외한 다른 스태프들과 배우들 또한.
‘왜 제작진이 자신만만하게 연락했는지 알겠네.’
작년에 만났을 때 안 좋은 버릇을 교정해주고 팁을 몇 가지 전수해주긴 했으나, 기술적인 면이 훨씬 발전했다. 얼굴 근육만 봐도, 평소 얼마나 연기하는 제 모습을 꼼꼼히 모니터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카메라 빌려준 보람이 있어.’
기특했다. 곧 강제로 접게 될 꿈이라는 게 안타깝지만.
<일일 멘토> PD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한율 씨, 이제 슬슬 깜짝 등장 준비할까요?”
“네.”
한율은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10여 분 뒤,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리는 김경원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한편 그 시각, 대형기획사 중 하나인 아림 엔터테인먼트.
매니지 팀 직원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스타학교>에서 어스래빗을 완전체로 섭외한다고요? 이제 와서? 왜요?”
J본부의 인기 예능 <스타학교>는 아림 엔터 레이블 회사가 제작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래서 작년, 월드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어스래빗이 각종 방송에 출연할 때 견제를 위해 일부러 섭외하지 않았다.
실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난번에 <스타학교> PD가 섭외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지켜지지 않은 것에 관한 얘기도 많이 나왔었고…. 어스래빗 이번 앨범 해외 예약 주문량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지난번 미주 쇼케이스 투어랑 <크리스 라터쇼> 두 번째 출연이 크게 작용한 거죠.”
“아.”
“그나저나 은수는 요즘 어때요? 마음이 좀 풀렸나?”
두 달 전, 원카운트 나기혁이 1130 증상자란 이유로 일본 입국을 거부당한 적이 있었다. 이 일이 크게 이슈화되자 일본은 대학병원 검사 결과가 양호하면 하루 이틀 격리 후 입국이 가능하다고 방침을 바꿨다.
이후 걸그룹 퍼플아워가 새 앨범 활동 및 콘서트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진은수는 대학병원에서 받은 검사 결과를 들고 가 하루 만에 격리가 해제,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른 문제가 터졌다.
퍼플아워가 일본에서도 워낙 인기가 많은 터라 방송에도 출연했는데, 진행자들이 진은수가 1130 증상자란 이유를 갖다 붙이며 말도 안 되는 성희롱성 발언을 일삼았다.
[듣기론 1130 증상자 중 일부는 그날 이후 성욕이….]
어쩌고저쩌고.
하필 또 생방송이었던 터라 진은수가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은 그대로 전파를 탔다. 그걸 본 한국 팬들의 분노가 폭발, 한일 양국 네티즌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1130 증상자 루머를 무기 삼아 진은수를 공격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한국 1130 증상자들은 즉시 한국으로 꺼져라! 진은수 OUT!]
[1130 증상자들은 잠재된 테러리스트다! 진은수 꺼져!]
[퍼플아워 진은수는 예비 살인자다! 꺼져!]
진은수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공식 스케줄이나 연습 시간 외엔 숙소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전보다 더 심하게.
직원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담당 아이돌을 제대로 케어하지 못한다며 혼날까 봐.
“그게…. 얼마 전에 즐겨하는 온라인 MMORPG에서 만렙을 달성했대요. 로스트 아… 뭐라는 판타지 게임이었는데.”
“판타지 게임.”
다행히 실장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에 했던 살벌한 총싸움보단 낫네요.”
“네. 하하….”
퍼플아워 숙소.
진은수는 푹신한 의자에 편히 앉은 채 게임에 접속했다. 만렙도 달성하고 내실도 다 채워서 이젠 딱히 할 게 없었지만, 그래도 찾다 보면 또 할 일이 있는 게 MMORPG였다.
[학원팟. 공략 영상 보신 분, 시간 많고 끈기 있는 분 환영^^]
레이드 학원 파티를 만들자 곧바로 신청자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아무나 받을 수는 없는 노릇. 진은수는 최소 필요한 매너 스펙을 갖춘 사람들만 골라서 받았다.
[다들 공략 영상은 보셨죠? 출발합니다!]
-[네!]
-[넵!]
병아리 같은 초행 유저들을 데리고 공략이 복잡하고 어려운 레이드를 가면, 어떤 점이 문제인지 살피고 가르쳐주느라 정말 몇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다른 잡생각이 안 들 정도로.
[다들 7시간 동안 트라이하느라 수고하셨어요!]
-[공대장님 잘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복 받으세영ㅎㅎ]
그렇게 오늘은 약 7시간 동안 퍼플아워 진은수가 아닌, 게임 속 레이드 선생 유저로 지냈다.
‘이제 운동하고, 씻고 자야겠다.’
진은수는 쭈욱 기지개를 켰다.
그때였다.
[귓속말][안녕하세요, 런스루 님.]
모르는 유저가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만약 게임처럼 특별한 힘, 강한 힘을 갖게 된다면 런스루 님은 뭘 하고 싶으세요?]
예전에 운영했던 레이드 학원 파티 유전가?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이 보낸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고 싶진 않았다. 사생이나 안티, 혹은 회사 직원의 장난일지도 모르므로.
[글쎄요ㅎㅎ 이만 게임을 꺼야 해서 가볼게요.]
귓속말이 연달아 빠르게 왔다.
[귓속말][사람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귓속말][부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