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
진은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곤 게임을 종료했다.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SYSTEM][접속하지 않은 유저입니다.]
한 마디를 더하려던 사이, 진은수가 로그아웃했다.
으음. 계나리는 팔짱을 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경계심만 준 거 아닌지 몰라.’
스윽.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야. 내 방에서 뭐 하냐?”
“게임?”
“이거 미성년자는 못 하는 게임이거든?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어?”
진은수에게 보낸 귓속말을 오빠인 계마루가 읽을까, 계나리는 황급히 게임을 종료했다.
“내가 방금 무기 22강 만들었다.”
“사랑한다, 동생아. 마음껏 하렴.”
“9만 골드 썼어.”
“나가. 다신 여기 앉을 생각 꿈도 꾸지 마.”
계나리는 9만 골드를 모으려면 얼마나 고생해야 하는지 아냐며 구시렁거리는 계마루를 무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역시 율이 오빠랑 의논하는 게 나으려나.’
예전에 게이트와 각성자 정보를 정리해 서한율에게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곧장 마요르카로 향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계나리는 차후 도움 될 법한 각성자들을 자신이 주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은수도 그중 한 명.
‘진은수가 오빠를 좋아하기도 하고.’
이전 시간대에선 어스래빗 길우성이 사망하고, 어스래빗이 와해한 뒤로 연예계를 향한 관심 자체를 끊었다. 그래서 당연히 다른 아이돌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진은수에 대해서도.
하지만 ‘1130 증상자’란 말이 생긴 현재, 진은수가 그로 인해 봉변당하는 걸 보니 스멀스멀 불안해졌다.
‘가뜩이나 인간 혐오와 불신에 빠지기 쉬운 직업인데.’
사실 진은수가 그렇게 강하고 특별한 능력을 각성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전’ 진은수는 각성자면서 사람을 죽게 뒀다는 과도한 비난에 시달린 뒤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뒤늦게 죽은 사람이 그녀의 사생 스토커였단 사실이 알려졌으나, 사람들은 ‘각성자가, 그것도 공인이 사람을 돕지 않았다’라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호 오빠, 해원 씨랑 친분이 있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참 신기하네. 세 사람을 동시에 섭외한 <뮤직센터> PD한테 무슨 신기라도 있었던 건가? 두 명은 마법사고, 한 명은 각성자니.’
여기에 스타믹스 JE 또한 다른 음악방송인 <뮤직뮤직> MC 출신.
‘아니지. 호 오빠랑 해원 씨 둘 다 율이 오빠가 잠재력을 찾을 만큼 가까웠으니, 아주 우연은 아니구나.’
계나리는 서한율에게 톡을 보냈다.
[진은수 씨 멘탈 좀 보듬어주고 싶은데, 무슨 좋은 방법 없을까요?]
“……?”
그 시각. 계나리의 톡을 본 한율은 ‘은수 씨는 왜?’라고 답장을 보내려다가 멈췄다. 계나리가 괜히 진은수의 멘탈을 챙기려 할 리가 없으므로.
혹시 몰라서 예전에 계나리에게 받은 정보 파일을 훑었으나, 진은수 이름 옆엔 각성 능력 정보가 적혀있지 않았다.
‘적혀있었다면 내가 잊어버렸을 리 없지.’
[은수 씨한테 무슨 일 있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인신공격을 과하게 받는 것 같아서요. 악플도 심하고, 지저분한 루머도 너무 많고. 지금 쌓인 상처 때문에 나중에 사람들을 외면하고, 또 그로 인해 비난받으면 안타깝잖아요. 잘만 사용하면 유용한 능력인데..]
[네가 준 파일엔 무슨 능력인지 안 적혀 있었는데?]
-[헉.]
-[죄송해요ㅠㅠ]
-[나중에 생각났는데 오빠한테 전달한다는 걸 깜빡했나 봐영ㅜㅜ]
이어서 올라온 톡.
-[은수 씨 카모플라쥬 능력 각성자예요ㅠㅠ]
[카모플라쥬? 위장?]
-[저도 기록으로만 본 터라 자세히는 모르는데, 본인을 포함해서 주변을 위장하는 능력인 것 같더라고요.]
-[오빠가 사용하는 환영 마법처럼요.]
위장 능력이라. 그런 능력이면 게이트 괴물들을 물리치거나 막을 순 없어도, 괴물을 피해 숨기엔 좋을 터다. 목적에 따라선 굉장히 유용하게 쓰이기도 하고.
‘암살할 때 딱 좋겠는데?’
물론 현재 진은수 성품상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ㅇㅇ 은수 씨한텐 내가 연락해볼게.]
-[넵!]
* * *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방송에 출연하네요, 형.”
“그러게. 매번 섭외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
5월 25일. 차남석이 SBC <너의 집> 녹화를 위해 샵으로 향했다. 이번이 네 번째 출연이었다. 한편, MBS <괴담> 세 번째 출연을 바라던 강보배는 부럽다는 얼굴로 라이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하고 와, 친구.”
“<괴담> PD님한테 네가 많이 서운해한다고 말할게.”
“글로벌 괴담 특집이잖아. 어쩔 수 없지… 만, 방송에서 무슨 썰을 풀 건지 나한테만 먼저 말해주면 안 될까?”
“응, 안 돼.”
라이언은 <괴담> 제작진 미팅을 위해 매니저 조유찬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그러나 두 사람이 탄 차가 먼저 향한 곳은 MBS가 아니었다.
“아직 시간 여유 있으니까, 편히 상담받고 나와.”
“네에.”
‘현재 정신건강의학과’. 라이언이 5년 전부터 다니던 병원으로, 오늘은 반년만의 내원이었다.
‘초반엔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왔었는데.’
라이언은 처음 이곳에 발을 디뎠을 때와 크게 변하지 않은 내부를 둘러보며 접수처로 향했다. 예약 진료가 우선인 곳이라, 로비는 직원을 제외하곤 텅 비어있었다.
“안녕하세요. 9시 30분 예약한 라이언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잠시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네.”
라이언은 소파에 앉아 얌전히 기다렸다. 그때, 로비 옆에 있던 상담실에서 한 사람이 터벅터벅 나왔다.
“응?”
“…어?”
서로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눈만 보고 누군지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마스크를 내리며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후배님. 후배님도 여기에 다녀요?”
“아뇨. 아는… 분이 여기에 다녀보라고 추천해주셔서 오늘이 처음이에요.”
라이언은 기시감을 느꼈다. 3년 전, 걸그룹 감성소녀 전 멤버이자 배우 유제희를 이곳에서 마주쳤던 일이 떠올랐다.
라이언은 그때와 비슷한 말을 했다.
“전 여기 다닌 지 5년째에요. 현 쌤 좋아요. 이야기 잘 들어주시고, 맛있는 감자떡도 주세요.”
“아….”
진은수가 살며시 웃었다.
“선배님 말씀 들으니까 믿음이 더 생기네요.”
“라이언 님, 안쪽 진료실 들어가세요.”
“네. …그럼 다음에 봐요.”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진은수는 안으로 들어가는 라이언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심호흡했다.
‘역시. 한율 선배님이 괜히 여기를 추천해주신 게 아니구나.’
바로 지난주, 서한율로부터 개인 톡이 왔다. 최근에 불쾌한 일을 겪고 있단 걸 알게 되었다며. 그러곤 조심스럽게 오지랖을 부려도 되냐고 물었다.
진은수는 미소가 번지는 입가를 마스크로 가렸다.
‘선배님한테 라이언 선배님 만났다고 톡 보내야지.’
한편, 라이언은 의사에게 선물부터 건넸다.
“두 달 전에 미국에서 샀어요.”
“선물은 괜찮대도 그러네, 라이언.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야.”
“내 자기만족이에요. 그리고 비싼 거 아니에요.”
“고맙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야.”
“네.”
의사는 지난 반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라이언은 감정이 크게 일렁거렸던 일 위주로 늘어놓았다. 의사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런 질문도 던졌다.
“요즘 게이트 이야기로 시끄러운데, 라이언은 어때? 불안하거나 겁나진 않아?”
“음….”
라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상하게, 괴물들이 마구 날뛰어도 우리 멤버들이랑 같이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우리 숙소, 굉장히 튼튼해요.”
의사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다행이구나.”
5월 30일. 한율이 출연한 <일일 멘토>가 방송되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독학으로 연기를 공부하던 초등학생이, 일일 멘토를 만나고 반년 만에 웹드라마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리고 그 데뷔작 촬영장을 깜짝 방문하는 멘토 한율의 모습.
-서한율 진짜 뿌듯하겠다. 보는 나도 내내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는데
-서한율 모자랑 마스크 벗고 얼굴 드러냈을 때 경원인 물론이고 드라마 스태프들이랑 배우들 전부 얼음 되는 거 보고 빵 터졌다 크으
ㄴ저예산 웹드라 대부분 신인이나 무명 배우뿐이었는데 갑자기 연기상 받았던 인기 아이돌 배우가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하죠ㅎㅎ
-이제 데뷔했으니까 형 아니고 선배님이라고 불러야지? 드르륵 탁.. 이제 데뷔했으니까 형 아니고 선배님이라고 불러야지? 드르륵 탁.. 이제 데뷔했으니까 형 아니고 선배님이라고 불러야지? 드르륵 탁..
ㄴ웃으면서 말하는데 왜 내가 다 설레냐고
ㄴ나도 선배님이라고 부르고 싶다
-예전에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도 일일 멘토 나오지 않았나요? 두 사람 후일담은 왜 안 나오지
ㄴ라이언 멘티는 열심히 공부 중이고, 길우성 멘티는 스엔 연습생으로 들어갔대요.
ㄴ오 감사감사
“…오, 감사, 감사.”
한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박가람에게 말했다.
“댓글까지 일일이 읽지 않아도 돼요, 형.”
박가람이 초등학생처럼 손을 번쩍 들었다.
“네, 교장 선생님.”
“…….”
“운전하는 사람 방해하지 말자, 가람아.”
“거의 다 왔는데?”
컴백 전 마지막 휴일. 한율과 유호, 박가람 세 사람은 경기도 양평을 찾았다. 슬슬 더워지는 계절인데다 일요일이었지만, 이해원의 집 언덕 아래 펜션 부지는 고요했다. 지난주부터 예약을 받지 않아 손님이 없는 까닭이었다. 상주하던 펜션 관리인들도 영업 중단을 핑계로 퇴직금을 두둑하게 쥐여주곤 내보냈다.
“어서들 와요.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
활짝 열린 차고에다 주차하자 이해원이 나와서 그들을 반겼다. 먼저 도착한 계나리도.
“어서 오세요.”
정원수에 앉아있던 까마귀까지 반갑게 울었다. 까악.
“다들 안녕하셨습니까. 나리 쌤도 하이.”
“오래간만이에요. JE 선배님은요?”
“안에.”
JE는 주방에서 수박화채를 만들고 있었다. 복숭아와 망고, 블루베리까지 들어가 아주 먹음직스러웠다.
“왔냐.”
JE와 동갑내기 친구인 유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왔다.”
“오오, 맛있겠다. 이 과일들 아직 비싸지 않아?”
“이따가 한 사람당 만 원씩 내.”
잠시 후. 거실 테이블에 모인 여섯 명 앞에 화채 그릇이 놓였다. 이해원은 테이블에 앉은 구동에게도 망고 조각이 담긴 작은 그릇을 내밀었다.
박가람이 새삼 신기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우리 이렇게 여섯 명 다 모인 거, 오늘이 처음 아냐?”
“응. 항상 누군가 한 명이 없었지.”
“그리고 오늘이 게이트가 열리기 전, 마법 학교 마지막 모임일 거예요.”
다섯 명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다들 알다시피 저희가 곧 컴백하거든요. 그리고 활동이 끝나는 25일, 저 이탈리아로 갑니다.”
“이탈리아엔 왜?”
“밀라노에서 열리는 패션쇼에 초대받았거든요. 그곳 일정이 끝난 뒤엔.”
한율은 이해원과 유호, 박가람을 돌아보았다.
“스페인 마요르카섬으로 갈 거예요.”
“스페인?”
“유찬이 형이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곳 아냐? 서한율 네가 추천해서?”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계나리와 JE에게 그랬듯이 그곳에 아주 위험한 게이트가 열린다고 태연히 거짓말했다. 계나리의 ‘미래’에서 자신이 그곳을 7년간 지켰단 이야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