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9화 (299/427)

“그럼 이번에도….”

세 사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미 한율이 마요르카로 갈 거란 사실을 알고 있던 JE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계나리는 예상했다는 듯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일단 그곳에 가서 게이트가 열리는 걸 직접 보고 판단하려고요. 나리 씨가 겪은 미래의 나는 그곳이 아주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지켰지만, 바꿔서 생각해보면 최소 6, 7년 동안은 별일 없었단 뜻이잖아요.”

“아.”

“그래도 방심할 순 없으니, 몇 달 정돈 지켜보려고요. 그리고 갈 땐.”

한율이 머리를 쓰다듬자, 두 앞발로 망고 조각을 꼭 잡고 먹던 구동이 눈을 감았다. 끼웅.

“구동이도 데려갈 거예요.”

JE가 놀란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구동인 왜?”

“달냥이 혼자 심심할 테니까?”

“…….”

박가람이 이해원에게 속닥거렸다. 다 들렸다.

“손지은 씨는 서한율이 가는 것보다, 구동이랑 떨어지는 게 더 충격인가 봐.”

유호도 놀람 반, 걱정 반이 섞인 얼굴로 물었다.

“달냥이도 데려간다고?”

한율은 가볍게 웃었다.

“달냥이, 마법으론 여러분보다 선배예요. 마나 유동도 가람이 형보단 잘할걸요?”

“내가 고양이보다 못하다니!”

서울에서 떠나세요

JE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고양이한테도 마나 유동 가르쳤어? 어떻게? 구동이는 마물이라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한다지만, 고양이는… 고양이잖아.”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어쨌든.”

한율은 그들에게 지금까지 마련한 안전 거처와 마련한 물자를 알려주었다. 화채를 먹고 나선 함께 펜션 부지 곳곳을 살폈다.

툭툭. JE가 제 어깨를 두드렸다.

“해원이랑 나랑 창고에 있던 비상식량이랑 물자 적절히 나눠 옮기느라 고생 좀 했다.”

“수고하셨어요.”

“이불이랑 시트 전부 새것이던데. 너무 무리한 거 아냐?”

“비상시에 여러분이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과 지낼 곳이잖아요. 당연히 신경 써야죠. 이제 어느 정도 둘러봤으니, 결계 범위 알려드릴게요. 발동 방법과 주의사항도.”

한율과 유호, 박가람이 서울로 돌아온 건 저녁 무렵이었다. 원래는 더 일찍 돌아오려고 했으나, 이해원에게 마나 응용 기술을 가르쳐주느라 조금 지체되었다.

“그런데 마요르카에 생기는 게이트 말이야.”

한율 대신 운전대를 잡은 박가람이 물었다.

“그렇게 위험한 거라면 노란색이 아니라 빨간색으로 표시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리 씨 기억상 괴물이 나온 적이 없어서요. 그렇다고 회색처럼 꽉 막힌 것도 아니고.”

“서한율 네가 1회 차 때 건너간 게이트처럼, 다른 세상이랑 연결된 곳일지도 모른단 소리네?”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서 사람들에게 노란색 게이트에 관한 설명을 하지 않은 거고.”

“어떤 바보가 건너가려 할지 모르니까?”

“저처럼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단 보장도 없고, 치명적인 미지의 세균을 묻혀올 수도 있잖아요.”

유호가 사과패드에 게이트 지도를 띄웠다.

“한율이 네가 들어갔던 게이트는 어디에 생겼었어?”

“서울이요. 그런데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생겨선, 그대로 빠졌어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이 건너오지 않은 걸 보면, 생겼을 때처럼 다시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아요. 실제로 그런 식으로 나타났다 사라진 게이트들이 있었다더라고요.”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았던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좋았던 거죠. 마법을 배워서 돌아왔으니.”

“하지만…. 한율이 넌 굉장히 고생했을 거잖아. 말도 안 통하고 종족 자체도 달랐을 텐데…. 난 상상이 안 가.”

유호가 착잡한 얼굴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젠 오래돼서 거의 잊었어요.”

“존경한다, 정말로.”

“가는 길에 멤버들 먹을 간식이나 좀 살까요?”

그날 밤. 박가람이 한율의 방을 찾아왔다. 고양이 간식을 들고.

“달냥. 결투를 신청하러 왔다.”

캣닢 인형을 끌어안고 놀던 달냥이 귀를 쫑긋했다. 므앙?

“심판은 서한율 너다. 누가 마나 유동을 더 잘하는지 똑똑히 확인하라고. 어? 인간 자존심이 있지.”

“…….”

풀썩. 박가람이 달냥 옆에 방석을 두고 앉았다.

“너도 얼른 정자세로 앉아라, 달냥.”

한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달냥아.”

므앙?

“그림자.”

달냥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인형을 두고 앉았다. 사아. 달냥의 황금빛 홍채 가장자리가 은은한 푸른빛을 띠더니, 스륵. 그러잖아도 새카맸던 달냥이 그림자처럼 변했다.

“……?!”

달냥의 모습을 띤 그림자가 사뿐사뿐 책상 아래 그림자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박가람이 멍하니 입을 뻥긋거렸다.

“어…. 어…?”

“달냥이가 직접 마법을 사용하는 건 아니고, 목걸이에 새긴 그림자 마법에 스스로 마력을 집어넣고 발동시킨 거예요. 예전에 형이 결계석에다 마력을 주입했을 때처럼요.”

“아.”

“마나 유동 대결, 하실래요?”

박가람이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양이랑 비슷한 수준이면 인간이 진 거지, 뭐…. 하하하….”

“달냥.”

스륵. 달냥이 그림자 마법을 거두고 모습을 드러냈다. 므아오옹. 마력을 사용해서 피곤하다는 듯 칭얼거리며 한율의 다리에다 비비적거렸다.

박가람이 달냥을 슥슥 쓰다듬었다.

“그런데 말이야.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냐? 아무리 달냥이랑 구동이를 데려간다고 해도, 얘네만으론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형이 같이 가주려고요?”

“솔직히 처음부터 함께 들어가는 건 힘들어. 미안하지만 나도… 가족들을 챙겨야 하니까. 하지만 잠깐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들면.”

박가람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 있는 데로 갈게.”

아무리 한국 상황이 괜찮아져도 비행기는 제대로 뜨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하물며 그 먼 스페인까지는 정말 목숨을 여러 개 걸어야 할 터. 그렇기에 정말로 박가람이 그곳까지 올 수 있으리란 기대는 들지 않지만,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이면 왠지 한식이 그리울 것 같네요.”

“그래. 즉석식이라도 꼭 챙겨간다.”

다음 날인 5월 31일. 다소 놀라운 뉴스가 발표되었다.

[[속보] 제주도, 6월 7일부터 무사증 입국제도 일시 중단]

[정부가 제주특별자치도와 협의해, 국민의 안전을 위해 오는 6월 7일부터 무사증 입국제도를 일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무사증 입국제도는 30일간 사증 없이 체류가 가능한…(중략).]

-7월 게이트 대란설을 이렇게 철석같이 믿는 것 보니 진짜 한심하다.

-미쳤나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 몇 달 전부터 비행기랑 숙소 예약한 해외 관광객들 어쩌라고??

-정말 역대급 정부다. 음모론 믿고 제주도를 닫아버리네ㅋㅋㅋ 제주도 가서 바가지 쓴 기억 때문에 진짜 싫지만, 망하라고 고사 지낸 적은 없는데

-벌써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 빡쳐서 여행 취소한다고 함.

ㄴ나 제주도민. 오히려 좋아^^

-님들 지금 빨리 너튜브 ‘미스터리 해커입니다’ 영상 검색ㄱㄱ

너튜브엔 [미스터리 해커입니다.]란 영상이 올라왔다. 그러나 지금껏 미스터리 해커를 사칭하며 거짓 정보를 올린 사람이 워낙 많았던 터라, 대다수 댓글은 증거를 내놓으라는 비아냥이었다. 영상도 검은색 바탕에 자막만 흘러나오는 단순한 형태라 더더욱 믿음이 가지 않는다며.

[게이트가 열리기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시민 분들은 슬슬 다른 지역에서 지낼 곳을 알아보시고 7월이 되기 전에 서울을 비워주세요.]

[여러분이 있으면 괴물과 제대로 싸울 수 없게 되어 희생자만 더 늘어납니다.]

[여러분이 있으면 구조 인력과 물자가 불필요하게 낭비됩니다.]

3초간 새카만 바탕.

[서울에서 떠나세요.]

큼지막한 자막 한 줄로 12초짜리 영상이 끝났다.

-잠깐만. 바로 5분 전에 제주도 무사증 입국제한 속보 떴잖아. 이거 혹시..?

ㄴ정 갈 곳 없으면, 관광객 없어져서 텅 빈 제주로 가란 뜻으로 정부랑 샤바샤바한 거면 ㅈㄴ 소름인데

* * *

6월 4일 금요일. 어스래빗 멤버들은 오래간만에 단체로 샵을 찾았다. 오늘 완전체로 J본부 예능 <스타학교>에 출연하는 까닭이었다.

아이돌그룹이 아이돌 전문 프로그램을 제외한 다른 예능에 완전체로 출연하는 건, 정말 인기가 많거나 기획사 힘이 세지 않은 이상 무척 힘들었다. 작년 SBC 간판 예능 <달리는 예능>에 완전체로 나간 적이 있었지만, 그것도 오프닝 때 아주 잠깐뿐이었고.

“재밌게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된다. 부담된다.”

“평소대로 해. 우리, <크리스 라터쇼>도 두 번이나 나갔고 단독 리얼리티도 찍었었잖아. 자신감을 가져.”

“<스타학교>는 일반 시청자들도 보잖아요. 아이돌 나온다고 하면 아예 거르는 사람도 많다던데.”

“여기 <스타학교>에 두 번이나 출연했던 사람 있잖아. 서한율, 팁을 내놔라.”

“편하게, 뻔뻔하게 하세요. 시청률 떨어지면 우릴 섭외한 <스타학교> 잘못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우와아. 방금 그 말, 녹화 들어가서 해도 돼?”

“네.”

“우와아.”

J본부 <스타학교> 스튜디오에 도착. 멤버들은 PD, 스태프에게 일일이 인사한 뒤 고정 출연자들을 찾아갔다. 인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러나,

“칙칙~ 하다.”

“어, 반가워. 대충 빈자리 찾아서 앉아.”

녹화에 들어가자 고정 출연자들은 남돌이 왔다며 대놓고 실망한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180도 태도가 바뀔 거란 건 충분히 예상했기에, 한율은 뻔뻔한 시범을 보였다.

“알았어.”

고정 출연자 중 리더 격인 주동수에게 씩 웃었다.

“동수 너 나와. 나 그 자리 앉을래.”

“아니, 빈자리에 앉으라니까?”

“동수가 비키면 자리 나잖아?”

“……!”

“한율이, 너희 아버지 이제 국장님 아니라고 더 막 나가는구나?”

“너 돈 많으면 다야? 어? 건물주면 다냐고!”

“잘생겼으니까 웃지 마! 잘생긴 악역 같잖아!”

슬슬 눈치를 보던 멤버들도 편히 입을 열었다.

“누구 자리가 좋을까?”

“나 앞자리에 앉고 싶은데.”

“안 비켜주면 그만이거든?”

“괜찮아. 들어서 옮기면 돼.”

“와, 쟤 팔 근육 봐.”

시끌벅적하게 인사와 자리 정하기가 끝났다. 이어서 본인이 스타라는 걸 증명하는 PR시간. 한율은 이번에도 토끼 안마봉을 어깨에 걸친 채 교탁 앞에 섰다. 그러곤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질문받습니다.”

고정 출연자가 손을 들었다.

“너 요즘도 기부 얼마 했는지 안 외우고 다니니?”

“응. 다음 질문?”

“우성이가 너한테 빌렸던 액수 얼마?”

“그 얘긴 안 돼! 엄마한테 또 혼난단 말이야…!”

“1,217,000원.”

“재산 얼마나 있어? 천억 넘는다는 얘기가 있던데?”

“몰라? 자세히 계산 안 해봤어. 다음 질문?”

“첫 키스 언제 했어?”

“한 적 없어. 다음 질문?”

“나중에 드라마 찍을 때 뽀뽀 씬 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

“하면 되지? 다음 질문?”

“살면서 제일 무서웠던 경험 들려줘.”

“어….”

휙휙 대답하던 한율이 처음으로 고개를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출연자들과 멤버들은 책상에 팔꿈치나 손을 올리며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강보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율이가 무서워하는 건 전혀 상상이 안 가는데.”

“진짜 무서운 얘긴데 괜찮아?”

“어, 괜찮아! 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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