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한율의 표정이 차분해졌다. 스륵. 스튜디오 천장 조명도 서서히 어두워졌다.
“오, 뭐야.”
“갑자기 호러 특집으로 바뀌는 거 아니지?”
“여름은 여름이구나.”
유호가 제 머리와 귀를 감싸며 책상에 이마를 댔다.
“이런 거 너무 싫어….”
잠시 후. 길우성이 삐걱삐걱 같은 쪽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교탁 앞에 섰다. 그러곤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나도 예전에 진짜 무서운 일 겪었어! 서한율네 집에서 지낼 때 겪은 일이야!”
“갑자기?”
“……?”
무서운 일? 처음 듣는 이야기에 한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유호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외쳤다.
“하지 마, 넣어둬…!”
그날 오후, 대형 포털사이트 연예 뉴스란.
[어스래빗 <스타학교> 완전체 출격! 13일 방송]
[어스래빗 라이언, 10일 MBS <괴담> 글로벌 특집 출연]
[11일 컴백 어스래빗, 신곡 M/V 티저 공개]
[오늘 4일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이 다섯 번째 EP 앨범 [Magic Bullet]의 타이틀곡 의 M/V 티저를 공개했다.
(사진=WB래빗 엔터테인먼트 제공)
어스래빗 멤버들은 마치 바다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 범고래처럼…(중략).]
-범고래는 grampus나 Killer whale 아님?
ㄴ모르겠냐
-얘네 데뷔곡이 고래가 점프하면서 배 드러내는 행위 뜻하는 ‘Breaching’이었는데ㅋ 7월 게이트 대란이 사실이면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 앨범 될 테니 마무리하는 의미로 이런 제목 붙인 건가?
ㄴ안 돼ㅠㅠ
-미쳤다ㅠㅠㅠ 너무 좋아ㅠㅠㅠㅠ
-오늘도 난 어스래빗 동양풍 콘셉트 기원을 이어나간다...
ㄴ이분 아직도 이러시네
-서한율 제발 게이트 열리기 전에 풋풋한 학원 로맨스물 하나만!!!!!!
ㄴ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요
ㄴ이분도 아직도ㅠㅠ
-새삼 드는 생각인데, 어스래빗은 탈덕하는 비율이 타돌에 비해 좀 낮은 듯
ㄴ잠깐 한눈은 팔지언정 애들이 싫어지거나 질린 적은 없어서
ㄴ4년간 활동하면서 이 정도로 병크 안 터지는 팀은 진짜 드물어서 그래영. 애들 실력도 좋고 노래도 좋고 얼굴도 맛집이고
ㄴ좀 쉴만하면 컴백하고, 좀 쉴만하면 콘텐츠 내놓고 해서 탈덕할 짬이 없어요. 그만큼 애들 바쁘게 열심히 사는 게 느껴져서 기특하기도 하고
ㄴ매일 한 명씩 돌아가면서 봐도 재밌는데 탈덕을 어떻게 하지?
-서한율 펜션 사들엿다는 게 무슨 소리임?
ㄴ????
ㄴ그게 뭔 소린데요.
ㄴ서한율 양평 팬션 인수햇는대 손님 안 받은 지 좀 됏데요. 커뮤에 올라왓슴.
ㄴ맞춤법 제발
ㄴ틀리면 외않되?
소름 돋을 것까지야
[어스래빗 서한율, 알고 보니 양평 펜션 사장님]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 경기도 양평의 펜션을 인수했다는 글이 올라와 화제다. 서한율이 인수한 양평 펜션은 야외 수영장과 12개의 객실, 인근에 계곡까지 있는 곳으로, 현재는 시설 보수를 이유로 운영이 일시 중단된 상태며…(중략).]
-돈 많으니까 바로 지낼 곳 여러 군데 마련하는 거 봐라. 진짜 부럽다.
-아이돌치곤 좀 똑똑해 보였는데 7월 게이트 음모론 철석같이 믿는 거 보니까 깬다.
ㄴ서울이랑 당진, 미국 섬 게이트에서 괴물들 나온 거 보고도 음모론이라 치부하는 네가 더 깨는데?
ㄴ넌 절대 게이트 괴물한테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살려달라고 신고하지 마라
ㄴ대비 안 하는 것도 모자라 7월 게이트 믿는 시늉만 해도 바로 잡혀가는 나라=중국, 북한, 러시아. 작성자 출신 보이죠?
ㄴ이야 빠순이들 거 한마디 했다고 몰려와서 패는 거 보소
-많은 분이 잊고 계시나 본데 서한율 1130 증상자입니다. 우리보다 게이트에 대한 두려움이 클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자기 돈으로 펜션을 인수하든 건물을 사든 그게 잘못된 일인가요? 범죄로 번 돈도 아닌데?
ㄴ아무리 생각해도 딴따라들 출연료 너무 많이 받음.
ㄴ딴따라라고 무시한다는 건 네가 더 우월한 사람이란 거죠?
ㄴ팩트. 서한율 재산의 90%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다.
-누구랑 편히 쉬려고 펜션을 인수했을까? ♡♡♡♡♡
-그냥 막 부럽다.
-서한율 펜션 치니까 주소 다 나오던데. 나중에 게이트 열리면 나 네 팬이니까 신세 좀 지자 이러면서 저리로 다 몰려가는 거 아니냐
ㄴㅋㅋㅋ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네요
-기사엔 안 나왔는데 ‘작년 여름’에 인수한 거라고 합니다. 게이트고 뭐고 그런 징조 나타나기 전이라고 이 사람들아
ㄴ나 아는 사람이 3월인가? 여기 7월 예약하려고 했었는데 6월부터 예약 불가로 떴었다고 함.
ㄴ미스터리 해커가 7월 게이트 예고한 날짜가 1월 28일이었으니까 일부러 잠가놨을 수도 있겠네요. 7월에 정말 게이트 열리면 멤버들이나 지인들 다 저기로 피신시키려고ㅇㅇ
ㄴ그런 거면 진짜 소름인데
소름 돋을 것까지야.
<스타학교> 녹화가 끝나고 회사로 가는 길. 기사 댓글을 보던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자꾸 고개를 기울이며 쳐다보는 길우성에게 시선을 던졌다.
“왜.”
“펜션 운영하는 거 왜 말 안 했냐? 나 좀 섭섭할라 그런다?”
“새롭게 단장 마치면 여름에 멤버들이랑 회사 사람들 초대하려고 했어. 개인 사업이기도 하고.”
“오.”
“난 이제야 알려진 게 더 신기한데?”
핸드폰으로 펜션 홈피를 보던 강보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놓고 대표자 ‘서한율’이라고 적혀있잖아.”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겠지. 전 국민이 얘 이름을 아는 것도 아니고.”
차남석이 한율을 돌아보았다.
“나중에 큰일 나면, 할아버지 모시고 너희 펜션으로 피난 가도 되냐?”
“네, 언제든지요.”
“아버지는 버리는 거야, 남석아?”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뜨려도 잘 살아남을 분이라서 걱정 안 돼요.”
* * *
6월 7일. 관광업계와 여행업계의 큰 반발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무사증 입국제도가 일시 중단되었다. 여기에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출국 날짜 하루 전에 모두 사라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잡힌 사람의 말에 따르면, 7월 게이트 대란이 사실이면 제주도에 숨는 게 안전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올랐어.”
컴백 쇼케이스 연습을 위해 회사로 출근한 한율은, 로비 한쪽 테이블에서 직원들이 떠드는 푸념을 들었다.
“기름값뿐이야? 물가가 전반적으로 폭등해서 요즘엔 밖에서 뭘 사 먹기가 무섭다니까? 이러다가 나중엔 치킨도 3만 원 될 것 같아.”
“7월 게이트 대란이 거짓이면 어떻게 될까?”
“전 세계가 눈에 불을 켜고 미스터리 해커 찾아다니겠지. 예전에 어떤 사람들은 전부 우리나라 주작이라고, 게이트 소문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피해 보상을 우리나라가 해야 한다고 항의했었잖아.”
“그거, 미국 섬에 게이트 나타난 이후로 잠잠해지지 않았어? 어쨌든 전 세계의 미운털이 박히는 일이 있더라도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매달 월세 내고 학자금 갚느라 돈도 없는데, 서울 말고 어디로 도망가라고….”
인터넷에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은 정말로 이사까지 하는 가구는 드물었지만, 이대로 서울에 있자니 너무 불안하다는 사람들.
-건물주가 계약 기간 안 채우면 보증금 못 돌려주겠다는데 어떡함?
-은행 망하면 대출금 안 갚아도 되나요?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 욜로오오오
방송가는 겉으론 여전히 평화로웠다.
컴백 쇼케이스 하루 전날인 6월 10일 밤. 유호를 제외한 멤버들은 거실 TV 앞에 모여서 라이언이 출연한 MBS <괴담>을 봤다. 방송에서 라이언은 미국에서 살 때 겪었던 오싹한 실화를 짧게 풀었다.
어릴 때 공원에서 놀다가 땅에 반쯤 묻힌 장난감을 발견, 그걸 깨끗하게 씻어다가 방에 장식했는데, 그날 밤 꿈에 이상한 남자아이가 나타나 알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는 이야기였다. 너무 무서워서 다음 날 바로 있었던 자리에 되돌려놨다고.
[그 뒤론, 밖에 버려지거나 떨어진 물건엔 절대 손 안 대요.]
차남석이 라이언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런 놈이 내 양말은 그렇게 가져갔냐?”
“고의가 아니었어. 미안?”
“왜 의문형으로 사과하는 건데.”
“남석 씨 건 버려진 게 아니라서 괜찮았던 게 아닐까? 이 양말은 안전한 양말이다.”
“졸리면 그만 가서 자라, 우성아. 너 눈 제대로 풀렸다.”
“아니야. 라욘 형 나온 거니까 다 보고 잘 거야.”
우웅.
“……?”
핸드폰을 확인한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웬일로 계나리가 통화할 수 있냐는 톡을 보냈다.
“저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엉.”
방으로 들어가 계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큰일 났어요…!]
평소 계나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게이트가 열리는 지역의 동향을 살폈다고 했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징조가 나타나진 않을까, 사람들이 제대로 대비하는 걸까? 신경이 쓰여서.
-[네팔 히말라야 게이트 예상 지점에 구멍이 생겼어요. 사람이 가기엔 굉장히 험준한 곳이라 마침 그곳을 지나던 셰르파가 망원경으로 둘러보다가 발견해서 신고했는데, 날씨가 좋아서 헬기를 띄웠더니 오빠가 만들었던 미스터리 홀과 흡사하게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꿈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진정하고, 일단 숨 쉬어.”
-[후우…. 우리 예상보다 게이트가 더 일찍 열리는 건 아니겠죠?]
본래 세상에서 알게 된 지구의 게이트 대란 시기는 2021년 7월. 계나리가 겪은 시간에서도 똑같았다.
“작년 일본 오사카 하늘에 흐릿하게 나타난 형체처럼, 우리가 뿌린 정보로 인해 사람들 눈에 띈 징조일지도 몰라. 우리 정보가 아니었다면 셰르파가 일부러 그곳을 살피고, 또 신고가 들어왔다고 헬기까지 띄웠을까?”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제가 상황 주시하다가, 특이한 점 발견되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아니. 그곳 모니터링은 이우그룹에 맡길게. 너도 슬슬 너랑 가족들 챙기면서 체력을 비축해야지.”
-[……감동.]
잠시 조용해진 계나리는 짧은 단어 하나를 말하곤, 헤헤 웃으며 주제를 돌렸다.
-[내일 드디어 어스래빗 컴백이네요. 전 랜선으로 응원하겠습니다!]
“그래. 피곤할 테니 이만 자. 히말라야는 너무 크게 신경 쓰지 말고.”
-[넵. 오빠도 잘 자요.]
통화를 마친 한율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우그룹 부회장 자택.
흠칫. 침실에서 자고 있던 부회장은 문득 전신을 휘감는 오싹한 느낌에 놀라 눈을 떴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커튼 사이로 웬 시퍼렇고 동그란 눈알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
까마귀가 리드미컬하게 부리로 창을 두드렸다. 툭툭, 툭툭, 툭.
부회장은 심장이 덜컥거릴 정도로 놀랐으나, 가까스로 입을 꾹 다문 채 서재로 향했다.
‘이번엔 또 무슨 지시를 내리려고.’
서한율이 직접 찾아왔던 건 초반뿐, 그 뒤론 이렇게 까마귀를 보내 의사를 전달했다. 상당히 비현실적이었지만, 그래도 몇 번 겪다 보니 익숙해졌다.
부회장은 서재 창문을 활짝 열어 까마귀를 맞이했다.
“이번엔 무슨 일입니까.”
까마귀가 고개를 갸웃했다. 머릿속에서 서한율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팔 히말라야 게이트 지점에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주시하다가, 특이사항 발견되면 바로 알려주세요.]
부회장은 자신이 문을 잘 닫았는지 살폈다. 가족이나 사용인이 까마귀에게 주절거리는 지금 모습을 본다면, 바로 치매에 걸렸다고 여길 터다.
“노력해 보기야 하겠지만, 우리라고 전 세계에 눈이 깔려 있겠습니까?”
[네, 엄살 잘 들었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푸드덕.
“…….”
부회장은 입을 꾹 다문 채 속으로 노성을 질렀다.
* * *
6월 11일 금요일 오후 6시.
약 3,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에서 어스래빗 다섯 번째 EP앨범 [Magic Bullet]의 컴백 쇼케이스가 시작되었다.
이번 앨범 트랙은 총 10개. 어스래빗은 인트로와 아웃트로, inst 버전을 제외한 6곡을 선보일 예정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런데 왠지 다들 예상하고 계실 것 같지 않냐?”
컴백 쇼케이스 45분 경과. MC 김태건이 진행으로 시간을 끌고 VCR 영상이 나가는 동안, 멤버들은 황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척하면 척이지. 우리의 짱 쎈 이프림, 눈치도 빠르잖아.”
타이틀곡 의 무대를 공개하기 전, 지난 영어 앨범 타이틀곡 과 데뷔 4주년 기념 포토북 DVD를 통해 처음 공개한 팬송 <은하수> 무대까지 이어서 선보이기로 했다. 움직이기 다소 불편한 펑퍼짐한 토끼 인형 옷을 입고서.
“난 지금 에어컨의 발명에 무척 감사함을 느낀다.”
“가자, 가자.”
우웅, 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