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1화 (301/427)

“……?”

얼굴만 동그랗게 뚫린 토끼 탈을 잘 고정하던 한율은 고개를 돌렸다. 스태프들의 주머니와 가방에서 동시에 핸드폰이 울렸다. 삐이, 삐이. 이런 경보음도.

다른 사람들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재난 문잔가?”

“지진이라도 일어났나?”

옆에 있던 조유찬이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한율은 무거운 토끼 탈을 두 손으로 받친 채 함께 보았다.

[[안전 안내 문자][외교부] 오후 6시 40분 네팔 히말라야 게이트 발생. 네팔 항공기 일정 변경 등에 유의]

“이번엔 히말라야야?!”

“지도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거기?”

메시지를 확인한 모두가 놀란 가운데, 공연 스태프가 와서 외쳤다.

“어스래빗 이동할게요!”

어제 계나리가 말했던 게이트의 징조가 만천하에 알려진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한율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우웅, 우웅. 한율의 가방에서 또 핸드폰이 울렸다. 끊기지 않는 걸로 봐선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였다.

한율은 잠깐만 기다려달라는 뜻으로 스태프에게 손짓하곤 핸드폰을 확인했다.

“……!”

현재 어스래빗이 컴백 쇼케이스 중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계나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한율은 머리에 쓰고 있던 토끼 탈을 벗곤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오빠….]

잔뜩 당황한 계나리의 목소리.

-[히말라야 게이트가… 열렸어요….]

우웅. 이번엔 이우그룹 부회장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히말라야 게이트에서 불 뿜는 거대한 괴물 출현. 현재 네팔군과 교전 중.]

평범한 일상은 끝났다

7월에 열려야 할 게이트가 벌써?

…아니. 모든 게이트가 열렸다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리 없었다. 계나리도, 부회장도 다른 장소 언급을 하지 않는 걸로 봐선 히말라야 게이트만 열린 상황.

‘하지만 본래 시간대에서도 그곳만 먼저 열렸다는 이야긴 들은 적 없어.’

계나리도 적잖이 당황한 걸로 보아, 이는 그들이 알던 미래가 달라졌다는 뜻이었다. 히말라야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에서 일어난 이슈를 그녀가 몰랐을 리도 없고.

‘대체 왜 바뀌었지?’

스태프가 다급한 목소리로 재차 외쳤다.

“어스래빗 갈게요!”

“끝나고 연락할게. 그리고 혹시 모르니 ‘그곳’엔 가지 마.”

한율은 계나리의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무거운 토끼 탈을 다시 뒤집어쓰며 길우성을 살폈다. 다른 사람들도.

“무섭네. 다치는 사람 없으면 좋겠다….”

“히말라야에 산사태라도 일어나면 어떡해?”

“일단 무대로 가자. 더는 지체하면 안 돼.”

아직 이들은 게이트 괴물들과 네팔군이 교전 중이란 사실을 모른다. 알았다고 해도, 지리적으로 먼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잘 와닿지 않을 터.

후우. 한율은 속으로 심호흡한 뒤, 멤버들과 함께 대기실을 나섰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다른 게이트 역시 예정보다 일찍 열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

어둑한 복도와 백스테이지를 지나서 무대. 전주가 흘러나왔다. 꺄아악! 예정에 없던 무대였으나, 팬들은 박자에 맞춰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어! 스! 래! 빗! S! T! E! P!

토끼 인형 옷과 탈을 쓴 한율은 넘어지지 않도록 뒤뚱뒤뚱 안무를 추며 등장, 팬들을 향해 웃었다. 객석의 푸른색 응원봉 물결이 그의 눈 가득 비쳤다.

“Step on it.”

‘더 이른 시일 안에 마요르카로 가야겠어.’

컴백 쇼케이스는 팬서비스 시간을 더해 밤 9시가 되기 전 무사히 끝났다. 어스래빗은 쉴 틈 없이 KBC <뮤직뮤직>으로 이동했다. 멤버들은 잠깐이라도 체력을 아끼기 위해 눈을 감거나 이미 잠들었지만, 한율은 핸드폰으로 스케줄 표를 훑으며 마요르카로 가기 위한 계획을 고심했다.

어차피 한 달 안에 게이트가 모두 열려 세상은 엉망이 될 터다. 그렇다고 해도, 말 같잖은 핑계로 돌연 자리를 비우며 지금껏 이어온 일상을 지저분하게 마무리하고 싶진 않았다.

우웅. 스타믹스 JE의 톡.

-[어떻게 할 거야?]

계나리에겐 이해원과 JE에게만 괴물들과 네팔군이 교전 중이란 사실을 알리라고 했다. 박가람과 유호에겐 자신이 직접 말하겠다고.

-[이번엔 너 아니잖아.]

-[사람들은 아직 서울이나 당진, 미국과 같은 케이스로 여기고 있지만, 만약 너랑 나리 씨가 아는 미래랑 달라져서 대란이 일찍 일어나면..]

왜 히말라야 게이트만 먼저 생겨났는지,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선 직접 그곳을 살피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는 단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지구인들이 그의 세상으로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므로.

[일단 서울 게이트 예상 지점은 수많은 시선이 주시하고 있으니, 선배님은 얌전히 집에 계세요. 여차하면 바로 도망칠 수 있도록 짐이라도 싸두시고요.]

히말라야 게이트도 열리기 몇 시간 전부터 징조가 보였다. 그러니 벌써 호들갑 떨 필욘 없다.

[만약 서울 게이트가 징조 없이 열려도 제가 시간을 벌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선배님은 제가 예전에 당부한 것만 지켜주세요. :)]

JE의 답장은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잠시 후, KBC <뮤직뮤직> 어스래빗 단독 대기실. 한율은 드라이 리허설을 마친 뒤, 박가람과 유호에게 히말라야 게이트 괴물들과 네팔군이 교전 중이란 사실을 알렸다.

두 사람은 앞서 나타났던 게이트 모두 한율이 만들어낸 가짜란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심각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다른 사람에게 들릴 수 있으므로, 대화는 핸드폰으로 나눴다.

[네팔군이 괴물들을 잡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네.]

[그러고 보니 당진에 나타났던 날개 달린 괴물,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지? 그놈처럼 금방 사라지면 좋을 텐데. 언제 다시 나타날지 불안하지만 말이야.]

그 시각, 스타믹스 JE의 집.

“하….”

복잡해진 상념을 정리하고자 샤워한 JE는 머리카락의 물기도 말리지 않고 TV 앞에 섰다. 뉴스 채널에선 여전히 네팔 상황을 전하고 있었으나, 네팔군이 괴물들과 교전 중이란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분명히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하단엔 서울 게이트 예상 지점 두 곳의 실시간 영상이 작게 떠 있었다.

‘다행히 서울은 아직 잠잠하네.’

그는 소파에 풀썩 앉았다. 어제 서한율이 맡기고 간 달냥이 방석에서 일어나더니 쭈욱 기지개 켰다. 그러곤 JE의 무릎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고 누웠다.

JE는 달냥을 쓰다듬으며 조금 전 서한율이 톡으로 한 말을 떠올렸다.

『만약 서울 게이트가 징조 없이 열려도 제가 시간을 벌 테니까.』

그 말을 본 순간 가슴이 먹먹해져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진짜 게이트가 열린 이 상황에서도 본업을 놓지 않는 서한율의 태도가 의아하다. 그러나 서한율은 예전부터 평범한 일상을 하루라도 더 보내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나한텐 개죽음당하니까, 진짜 게이트 앞엔 얼씬거릴 생각 꿈에도 하지 말라고 당부해놓곤.’

그런 서한율에게 정말로 큰 위험을 떠넘기고 도망쳐도 되는 걸까. 조금이라도 그 녀석에게 도움이 될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정말 도움이 되려면 조금이라도 마력을 모아야 하는데.’

오늘은 영 집중이 안 될 것 같았다. 고민하던 JE는 결국 달냥을 아래로 내려놓곤 소파에 누웠다. 므앙. 달냥이 한마디 하더니 구동에게로 향했다.

‘미래가 달라졌다면, 히말라야 게이트와는 반대로 예정보다 더 늦게 열리는 게이트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제발 서울 게이트만은 오래오래 열리지 말아라.’

왠지 바람과는 정반대로 이뤄질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말이다.

* * *

현재까지 게이트로 인해 발생한 공식 사망자는 미국의 로버트 단 1명. 여기에 별일 없어야 한다는 낙관적인 바람과 게이트 대란이 있다고 예고된 7월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는 생각 등. 인터넷에선 이번 히말라야 게이트도 큰 피해 없이 지나갈 거라며 서로 안심시키는 분위기가 흘렀다.

6월 12일 새벽 5시. 이런 기사가 뜨기 전까진.

[[속보] 히말라야 게이트 괴물들과 교전 중인 네팔군, 현재 사상자 3백여 명 육박]

-ㅅ1ㅂ 자꾸 미쳤냐는 소리밖에 안 나온다.

-사진이랑 영상은?

-네팔 군인 3백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래도 게이트 사태가 우리나라랑 미국 전쟁 대비 준비 핑계로 만든 조작이라고 지껄여봐라, 중국 놈들아. 히말라야에다 던져버린다.

-지난번 서울 게이트 막아준 그림자들 어디 갔나요..

ㄴ당진에도 안 나타났던 걸로 봐선 이미 한국 떠나지 않았을까요

-이번엔 장난 아니네ㄷㄷ

-7월이 다가오니까 게이트도 세지는 거 아닐까?

-폭탄 잘못 떨구면 산사태 피해가 더 극심할 테니 진짜 힘들 듯..

-평범한 일상은 끝났다.

아침 11시. 컴백 무대 사녹을 마친 어스래빗 멤버들은 피곤한 몸을 차에 실었다. 틈이 날 때마다 자기는 했지만 그래도 피곤했다.

“이따가 생방 무대도 해야 하니까, 메이크업 최대한 지워지지 않게 조심해.”

“네에.”

이동 중. 한율은 살며시 창을 열어 자연의 마나를 느꼈다. 평소와 다름없이 질이 썩 좋지 않아 텁텁했다.

옆에서 눈을 감은 이건우가 말했다.

“매연 들어온다, 한율아.”

“네.”

한율은 창을 닫았다.

숙소에 도착한 뒤 멤버들은 서로 나중에 보자는 말만 하고선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침대에 편히 누워 잘 수 있는 시간이 3시간밖에 안 되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한율은 옷을 갈아입고선 차 키를 챙겼다.

조금 전 바람에 실린 마나에선 게이트 특유의 불쾌한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 직접 가서 확인해야 안심될 것 같았다.

“어? 한율아, 어디 가!”

“혼자 어디 가, 한율아!”

“야, 안 피곤하냐?!”

“너 여자 만나러 가는 거 아니지?!”

차고에서 한율의 차가 나오자, 숙소 앞에 모인 사생들이 큰 소리로 물었다. 한율은 익숙하게 그들을 무시, 강서구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날 오후, KBC <뮤직뮤직> 어스래빗 대기실.

풀썩. 대기실로 들어오자마자 한율이 소파에 쓰러지듯 앉자, 조유찬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숙소에서 잠 제대로 못 잤어?”

“네, 조금.”

안쓰러운 얼굴로 한율을 바라보던 유호가 짝짝 손뼉을 쳤다.

“우리 다들 체력을 위해 떠들지 말고 조용히 최대한 휴식을 취하다가 무대에 올라갑시다. 컴백 하루 만에 피곤한 모습으로 비실거릴 순 없잖아.”

“네에.”

다행히 오늘 출연팀 중 어스래빗보다 선배인 팀과는 사녹 직후 인사를 나눴기에, 따로 움직일 일이 없었다. 툭. 매니저 허진영이 눈치껏 대기실 조명을 껐다.

“다들 편히 쉬어요. 시간 되면 깨….”

똑똑.

“…….”

말이 끝나기도 전 들리는 노크 소리. 누군가의 핸드폰 불빛에 비친 유호의 얼굴에서 내적 갈등이 보였다. 찾아온 건 분명히 후배 아이돌 팀일 터. 한 팀과 인사를 나누다 보면 또 다른 후배들이 몰려와… 결국 제대로 쉬지 못할 게 뻔하다.

한율은 부스스 일어났다.

“컴백 첫날인데, 인사는 제대로 해야 서로 마음 편하겠죠?”

이미 반쯤 눈이 감겨있던 길우성도 일어났다.

“엉…. 그렇지.”

“아이고, 나이가 드니까 조금만 잠을 설쳐도 정신을 못 차리겠네.”

“진영 형님, 조명 켜주세용.”

달칵. 대기실 조명을 환하게 켠 허진영이 문을 열고 상대를 확인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멤버들이 지금 손님 맞을 준비가 안 돼서요.”

잠은 70여 명에 달하는 후배 아이돌과 웃으며 인사와 앨범을 나누는 동안 완전히 달아났다. 한율은 아예 계속 깨어있는 게 더 낫겠다 싶어 핸드폰을 꺼냈다.

[히말라야 게이트 영상.]

마침 이우그룹 부회장이 영상을 보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각도로 핸드폰을 들어 영상을 재생했다.

네팔군이 촬영한 영상이었다. 알 수 없는 다급한 언어와 비명. 총성과 폭탄 터지는 소리가 먼저 귀를 괴롭혔다. 이윽고 카메라에 괴물들의 모습이 잡혔다.

‘왜 몇 시간 사이에 3백 명 넘는 사상자가 나왔는지 알겠네.’

애초에 전문 산악인이나 셰르파도 접근하기 힘든 험준한 지형이었다. 폭탄을 잘못 사용했다간 산사태가 일어날 가능성도 크고.

그런데 대장 격으로 보이는 괴물은 웬만한 화약으론 도저히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표피도 단단했다. 여러 개의 다리는 채찍처럼 쭉 늘어나 유려하게 움직이며 헬기를 바닥으로 내리쳤다. 콰앙! 진흙처럼 흐물흐물 쩌억 벌어지는 입에선 시퍼런 불이 뿜어져 나왔다.

한율은 거대한 괴물의 공격 형태나 파괴력, 방어력 등을 가늠하며 생각했다.

‘엄청나게 못생겼네.’

“뭘 그렇게 집중해서 봐?”

길우성이 다가와 물었다. 한율은 가볍게 전원 버튼을 눌렀다. 영상엔 괴물만이 아니라, 사람의 사지가 종잇장처럼 찢겨나가 죽는 모습, 불이 붙어 몸부림치다 죽는 모습, 피와 내장이 사방으로 튀는 모습도 함께 찍혔기에.

“아무것도 아니야.”

“그랭.”

길우성이 한율 옆에 붙어서 앉았다. 참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워, 한율은 슥 반대쪽으로 거리를 벌렸다.

“뭔데.”

“방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과장된 표정으로 길우성이 물었다.

“이상한 소리 못 들었냐?”

한율은 끼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무슨 소….”

하늘이 비명을 지르며 게이트의 전조를 알렸다.

그긍… 드드득….

1부 마지막 -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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