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율이 현재 태평하게 본인 일을 하는 걸 보면, 한국 게이트는 당분간 안전하다는 뜻 아닐까요?”
이우그룹 부회장실. 비서의 조심스러운 추측에 부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마냥 그를 믿어선 안 돼.”
서한율은 미스터리 해커와 함께 대기업이 대규모 방공시설을 짓게 하고, 당진에 가짜 게이트와 괴물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그 위험성을 알렸다.
‘그러나 앞서 서울에 나타난 게이트 또한 그가 만든 가짜라면.’
서한율이 가진 힘은 헬기 하나를 찢을 정도의 파괴력과 생생한 환영. 그 정도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래서 부모도 일찌감치 서울과 떨어진 지역으로 보낸 거고.
“서한율이 히말라야 게이트를 주시하라고 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괴물들이 튀어나오고, 현재 4백 명에 육박하는 사상자가 생겼지.”
부회장은 미세먼지로 뒤덮인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가 우리를 통해 네팔군에 미리 주의하라고 경고했다면…. 아니, 7월 이전에 먼저 열리는 위험한 게이트가 있다는 사실만 알렸어도 지금처럼 큰 피해는 없었을 거야. 돈은 많이 들어갈지언정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대비했을 테니까.”
“그 말씀은….”
“게이트 대란이 7월에 일어난다는 사실만 알지, 그 역시 어디의 어떤 게이트가 예정보다 빨리 열린단 상세 정보를 모를 수도 있단 소리네. 그렇다면….”
쯧. 부회장은 혀를 차며 인상을 썼다.
“서울 게이트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나?”
* * *
‘천둥소리?’
퍼플아워 숙소. 어스래빗 컴백 무대를 보기 위해 OTT 플랫폼 KBC 채널을 재생하던 진은수는 헤드셋을 벗었다. 창을 가린 암막 커튼을 걷자 미세먼지로 탁한 하늘이 보였다.
‘구름은 없는 것 같은데…. 설마 또?’
서한율과 길우성, 나기혁과 호수가 있는 단톡방을 확인했다. 길우성이 바로 조금 전 톡을 올렸다.
-[방금 그 천둥소리가 났소. 써한도 함께 들었소.]
-[무섭소ㅠㅠ]
-[(이모티콘)]
나기혁의 톡.
-[미국에 있어서 그런가, 난 소리 못 들었다. 너흰 어딘데?]
길우성의 톡.
-[뮤뮤요ㅜㅜ]
-[우리 오늘 컴백했는데 참 무심하구려, 선배ㅋ]
진은수는 자신도 방금 희미하게 천둥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톡을 올렸다.
우웅. 이우그룹 도단희로부터 메시지.
-[서울에 있는 다수의 1130 증상자분들로부터 조금 전 천둥소리를 들었단 제보를 받았습니다. 최은수 님은 괜찮으십니까?]
[네, 저는 괜찮아요.]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다른 증상자들도 불쾌한 천둥소리를 들었다고 하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작년 RMMA 때처럼 숨 막히는 고통이 찾아오는 건 아닐까, 서울의 게이트가 열린다는 징조면 어떡하나.
‘7월이 오기 전에 열린 게이트가 한둘이 아니잖아. 히말라야 게이트에서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다면 굉장히 위험한 괴물들이 나왔다는 건데…. 미스터리 해커도 어제 히말라야 게이트가 열린다는 사실을 몰랐던 건 아닐까? 그럼 서울도 장담할 순….’
초조함에 방 안을 서성거리다, 얼마 전 공익 광고를 보고 만든 비상용 가방을 꺼냈다. 통장과 우비, 핸드폰 보조배터리, 손전등, 위생용품, 수건, 얇은 담요, 구급 키트, 노트북, 퍼플아워 데뷔 앨범 등이 꼭꼭 담겨 있었다.
진은수는 여기에 지갑과 여권도 넣었다. 그러다 문득 서한율이 레드 게이트 예상 지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단 사실을 떠올렸다.
‘아무 일 없겠지? 히말라야 게이트도 괴물들이 나오기 몇 시간 전부터 징후가 눈에 보였다니까…. 나타나도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거야.’
잠시 후, KBC <뮤직뮤직>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뮤직뮤직> 출연자 대기실 복도.
컴백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뒤, 한율은 창 앞에 서서 레드 게이트 예상 지점 하늘을 살폈다. 대기는 미세먼지로 뒤덮여 뿌옜다. 그러나 몇 시간 전 직접 가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미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에선 게이트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에 들린 건 지난번처럼 단순한 전조였나?’
“한율아.”
유호가 음료를 들고 다가왔다.
“걱정돼서 살피는 거야?”
한율은 그가 내미는 음료를 받았다.
“네. 잘 마실게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참 아쉽다. 우리 팀, 이제야 본격적으로 날기 시작했는데.”
유호가 옆에 나란히 서며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에 우리 이번 앨범, 빌보드200 상위권에 오를 것 같단 소식을 들었거든. 그런데 기쁘기보단 착잡하더라. 팬들이 일부러 비싼, 미국 빌보드에 집계되는 앨범을 많이 사줬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유호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아니, 그 사실만 갖고 착잡했다면 좋았을 텐데. 배부른 소리라고 욕 처먹는 한이 있어도.”
“동감이에요. 만약 대란이 5년 후, 10년 후였어도 상당히 아쉬웠을 것 같지만. …형.”
“응?”
“이참에 하나 당부할 게 있는데요.”
“뭔데?”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 한율은 조용히 말했다.
“형은 이타심 혹은 이기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쉬우니까 늘 경계하세요. 본인은 아무런 행동이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감정에만 호소하는 사람도 멀리하시고요. 그래야 형도, 형의 가족도 재앙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요.”
한마디로 착한 호구처럼 굴지 말란 충고였다.
유호가 입가를 올렸다.
“명심하겠습니다, 교장 선생님.”
“이보시오, 거기 두 토끼 양반!”
길우성이 멀리서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슬슬 무대에 오를 시간이오!”
그러곤 복도 한가운데서 흐느적흐느적 이상한 춤을 춘다.
“필살! 관절 풀기!”
유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쟤 이상한 영상 찍히기 전에 빨리 가자, 한율아.”
“네.”
한율은 유호와 함께 창을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스멀스멀. 미세먼지로 탁한 하늘 속, 구름을 닮은 희미한 기류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한편, 경기도 양평에 있는 이해원의 집.
JE는 거실로 들어간 후에야 구동과 달냥이 든 이동장을 열었다.
“혼자 있으니까 생각이 많아져서 오히려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 답답하기도 하고.”
“잘 왔어요, 형. 저도 히말라야 게이트 뉴스를 보는데, 이상하게 자꾸 안 좋은 예감이 들더라고요. 지금까지 나타났던 게이트랑 달리 사상자가 너무 많이 나와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 뭐 하고 있었어? 내가 수련 방해한 건 아니지?”
“아래 별장 둘러보고 있었어요. 한율이가 운영하는 별장이라고 알려져서 그런지, 하루에도 몇 번씩 낯선 차들이 와서 밖을 둘러보고 가거나, 안으로 몰래 들어오려고 하더라고요. 방범 장치가 일제히 울리고 까마귀들이 달려들어 혼내니까 모두 도망쳤지만.”
“저런. 까마귀 괴담 만들어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끼웅. 므아앙. 이동장에서 나온 구동과 달냥이 TV 앞으로 달려가 나란히 앉았다. <뮤직뮤직>이 방송되는 TV에선 막 어스래빗 컴백 티저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JE와 이해원은 핸드폰을 꺼냈다. 찰칵, 찰칵.
“털북숭이들, 나란히 앉은 뒷모습 진짜 귀엽네.”
“전 달냥이 화장실에다 모래 좀 붓고 올게요.”
“아냐. 내가 데려왔으니까 내가 할게. 넌 애들 간식이나 챙겨줘.”
“네.”
그때였다. 어스래빗 컴백 무대가 시작되자 아예 두 발로 서서 TV를 보던 구동이 돌연 귀를 부르르 털었다. 두리번두리번. 동공이 잔뜩 커진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테라스 창으로 달려갔다.
끼웅, 끼웅.
“구동아?”
므앙? 구동의 돌발 행동에 달냥도 어리둥절한 울음소리를 냈다. 벅벅. 앞발로 창을 마구 긁어대던 구동이 이번엔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벅벅.
끼웅, 끼우웅.
“왜 그래, 구동아.”
구동이 공황에 빠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JE는 황급히 구동을 안아 쓰다듬으며 달랬다. 킁킁. 또다시 귀를 부르르 떨던 구동은 JE의 냄새를 맡더니, 그대로 그의 품에 코를 박고 눈을 감았다.
끼웅….
“갑자기 왜….”
설마.
JE와 이해원의 시선이 얽혔다. 구동은 서한율이 있던 세상에서 함께 건너온 마물이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것일지도.
벌컥.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 서울 쪽 하늘을 살폈다. 거리가 먼 데다 미세먼지 수치가 높은 날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구동은 무섭다는 듯 JE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끼우웅….
“전 나리 씨한테 연락해볼게요.”
“어.”
JE는 받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서한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역시나.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TV에선 이제 막 어스래빗 컴백 무대가 끝났다. 사녹이었어도 지금쯤이면 엔딩 무대에 오르고 있을 테니 당연했다. 생방송 딜레이도 고작 5분 차이고.
‘만약 서울의 게이트가 아무런 징후 없이 열린다 해도 서한율이라면 침착하게 대응하겠지만…. 괜찮아야 할 텐데.’
* * *
[생방송 <뮤직뮤직>!]
[다음 주에 다시 만나요! 안녕!]
<뮤직뮤직> MC들의 마무리 인사. 이번 주 1위를 한 노래 전주가 흘러나왔다.
“1위 축하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컴백 축하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스래빗 멤버들은 다른 출연자들과 꾸벅꾸벅 인사하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언제 어떤 카메라에 잡힐지 모르기에, 한율은 백스테이지로 퇴장한 뒤에야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조금 전부터 게이트의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아주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기운이었으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
“수고하셨습니다아. …왜 그래, 하뉼? 어디 아파? 누가 발 밟았어?”
라이언이 한율을 보곤 걱정스럽게 물었다. 한율은 두 눈에 라이언을 담고선 입가를 올렸다.
“아니에요.”
두꺼운 방음문으로 닫혔던 백스테이지를 지나 복도. 게이트의 기운이 훅 짙어졌다.
한율은 직감했다.
지금 보내는 평범한 일상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렇게, 갑자기.’
히말라야 게이트가 열렸을 때부터, 서울의 게이트 또한 예정보다 일찍 열릴지도 모른단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는 지구로 넘어왔을 때부터 지루하게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서한율?”
한율이 걸음을 멈추자 차남석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건우와 강보배, 라이언과 길우성, 유호와 박가람도.
“왜 그래.”
일상에선 걸치기 힘든 의상에다 진한 메이크업과 장신구. 밝은 조명 아래에서 보니 참 부담스러운 모습들이었다. 자신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이 화려했고.
한율은 멤버들에게 미소 지었다.
“그냥, 여러분이랑 아이돌을 하며 지낸 시간도 나름 즐거웠단 생각이 들어서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한율아….”
“…….”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아차린 걸까. 유호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박가람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눈물로 일렁거렸다.
이건우가 당황한 얼굴로 한율과 유호, 박가람을 번갈아 보았다.
“뭐야, 갑자기. 한율이 너 무슨 일 있어? 왜 꼭 떠날 사람처럼 그런 얘길 해.”
“뭐냐, 써한? 왜 가람이 형 울리냐?”
“집에 무슨 일 있어? 안 좋은 일이야?”
한율은 씩 웃으며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 박가람과 라이언의 등을 토닥토닥 가볍게 두드렸다.
“저 어디 안 떠나요. 그러니 일단 퇴근부터 해요.”
게이트의 기운이 빠른 속도로 짙어지고 있었다. 뚜렷한 징조가 나타나 서울이 혼란스러워지기 전,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 한다. 그래서 한율은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피곤하니 빨리 가서 쉬고 싶다며 멤버들과 스태프들을 닦달했다.
“평소답지 않게 애가 왜 이렇게 보채?”
“그럼 컴백 첫날 기념 라방은?”
“숙소 가서 해요. 형들도 빨리 씻고 편히 자고 싶잖아요.”
“알았어, 알았어.”
“박가람이, 넌 아까부터 왜 그렇게 울상이야.”
“닥쳐, 이건우건우….”
“형한테 말하는 본새하고는.”
“사랑한다, 이건우건우….”
“어디 아프냐?”
잠시 후. 어스래빗 멤버들이 탄 차량은 <뮤직뮤직> 출연팀 중 가장 빨리 KBC 주차장을 벗어났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멈췄다.
“전 여기에서 내릴게요.”
매니저 허진영과 조유찬, 멤버들이 놀란 눈으로 한율을 돌아보았다.
“여기? 여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