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시작 - 우리나라 망함?
아주 오래전 용족이 살았었다는 릴레멘시 호수.
릴레멘시는 그곳의 이름을 딴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굉장히 가파른 산 깊숙한 곳에 있어, 상인도 몇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외진 곳.
그의 집안은 오랫동안 릴레멘시에 터를 잡고 살았다. 언제부터 그곳에 정착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간혹 뛰어난 마법사의 소질을 지닌 이들이 태어나, 가문에 용족의 피가 섞인 게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추측이 돌기도 했다.
전쟁터에서 사망한 그의 아버지 역시 마법사였다. 함께 사망한 다른 지역 출신 어머니 또한. 걸음마를 떼기도 전 부모를 잃은 그는, 두 사람의 친절한 동료 덕분에 릴레멘시에 있는 조모 손에 맡겨져 자랐다.
릴레멘시는 양질의 마나가 풍족한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아버지가 그랬듯이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마나를 느끼고 다뤘다. 그리고 성인이 되자마자 마법사가 되기 위해 수도로 떠났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건 수습 딱지를 떼고 마탑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주어진 휴가 때.
도착하기 열흘 전부터 내내 걷히지 않던 먹구름, 가까워질수록 심상치 않던 마나의 흐름. 이는 릴레멘시 호수가 때때로 일으켰던 이상 현상과 비슷해,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날 밤, 기이한 옷차림을 한 길우성이 마을을 찾아오기 전까진.
뻔뻔하게 귀한 식량을 거덜 낸 길우성은 손짓과 발짓으로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소개했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왔다는 것도. 동그라미 두 개와 그 사이를 잇는 통로를 그리곤, 통로에다 물결 표시를 하며 제 가슴팍을 두드리기도 했다.
당시엔 그게 무얼 말하는 건지 몰랐으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스스로 게이트 코팅 능력자란 사실을 밝힌 것이었다.
길우성은 약 5년간 릴레멘시에 눌러살았다. 고향 사람이 보내주는 편지로 동향을 알 수 있었다.
[우성이 드디어 글을 전부 깨우쳤어. 이젠 대화도 곧잘 통해. 조금 이상하지만 멋진 춤과 노래를 가르쳐주더군.]
[우성이 지낼 작은 집을 완성했어. 어린애처럼 울더라.]
[고향이 걱정된다며 잠깐 돌아보고 오겠다는데 괜찮을까 모르겠어. 그 친구, 또 길을 잃고 헤매는 건 아닐까 몰라.]
길우성이 릴레멘시를 떠나고 수개월 후.
지구인들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본래 그의 세상과 지구를 잇는 게이트는 각성자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실오라기 걸치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길우성의 능력으로 코팅된 게이트는, 본래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지구의 온갖 물질까지 그대로 통과시켰다.
게이트와 가까운 곳에 자리한 릴레멘시 주민 대부분은 지구에서 온 병균으로 인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지구인들은 주민들의 시신을 처리하고 텅 빈 마을을 차지했다.
게이트에서 꾸역꾸역 쏟아져 나온 지구인들은 산맥 아래로 퍼지듯 내려와 영역을 확장했다. 뒤늦게 사태를 알아차리고 출병한 제국군을 무시무시한 위력의 중화기로 휩쓸고, 인근의 마을을 약탈하며.
양해를 구하거나 협상을 시도하는 행위는 일절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일까.
그의 세상을 멸망으로 이끈 재앙의 단초, 지구인들에겐 구세주나 다름없는 길우성의 행방은 묘연했다. 반드시 찾아내어 찢어 죽이려고 결심, 지구인들 틈에 섞여 길우성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지구인들은 게이트 코팅 능력자가 누군지 몰랐다.
이름은 물론이고 성별과 나이, 출신지까지도.
‘참 길었지.’
마탑에서 수련받던 중 갑자기 군 마법사로 징집돼 전쟁터로 끌려 나가 수십 년. 우여곡절 끝에 지구로 넘어와 다시 수십 년.
2021년 6월 12일, 서울 강서구 상공.
두두두. 가까운 군부대에서 띄운 헬기가 속속 도착했다. 방송국 헬기도 조심스럽게 게이트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떤 성능 좋은 카메라도 게이트 앞에 있는 그를 인식하지 못했다.
‘드디어 중요한 분기점에 이르긴 했지만…. 대체 왜 예정보다 빨리 열린 걸까.’
새하얀 빛무리 앞. 환영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한율은 게이트 너머를 노려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세상과의 경계선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게이트 특유의 불쾌한 기운만 진득할 뿐, 괴물의 낌새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경계선이 두꺼워 감지되지 않는 것일지도 몰라.’
계나리가 다른 마법 학교 학생들에게 들려준 이야기.
『가장 먼저 나온 건 굉장히 덩치가 크고 흉포한, 날아다니는 괴물이었어요. 나오자마자 아주 거슬린다는 듯 가까이에 있던 고층 빌딩을 죄다 박살 냈죠. 속수무책이었어요. 대피하지 못한 사람이 많아서 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거든요. 나중에 그 괴물을 쓰러뜨렸을 땐 이미 그 일대가 모조리 파괴된 후였죠.』
군에게 잡힐 괴물이라면 자신 역시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는, 지구인들이 그의 고향이 있는 세상으로 쳐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
‘벌써 쓸데없이 힘을 낭비할 순 없지만.’
힐끗 지상을 살폈다. 길우성에게 심은 추적마법의 기운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일단 저놈이 안전한 곳에 다다르기 전까진.’
거칠게 휘몰아치며 두 손에 응집되는 마나. 강한 마력까지 섞여 짙어진 마나는 실타래처럼 슬슬 확장되며 거대한 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푸른색으로 물든 그의 눈이 더욱 시리게 빛났다.
‘이곳을 지켜야 한다.’
쩌적. 경계선에 균열이 생기며 낯선 기운이 밀려들었다.
* * *
한 남자가 카메라를 든 채 서울 시내를 뛰어다니며 외쳤다.
“보이십니까, 여러분?! 지금 막 레드 게이트 예상 지점 상공에서 정말로! 거대한 게이트가 모습을…!”
왜에엥! 빠앙! 소방차와 경찰차 사이렌, 공포에 질린 운전자들이 누르는 자동차 경적 파도가 BJ의 외침을 삼켰다.
중심이 새하얗게 갈라진 검붉은 소용돌이의 형상. 게이트를 담은 화면에는 라이브 방송 구독자들의 채팅이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우리나라 망함?
-찐?
-대형 포털사이트 트래픽 폭주
-초코톡 마비된 거 보니 찐
-특정 통신사 간헐적 끊김 현상 발생 중
-ㅁㅊ
-서울 ㅈ됐으니 망하는 거 시간 문제
-괴물들은 안 나옴?
-뒈지기 싫으면 너도 그만 찍고 튀어 ㅂㅅ아
-더 있다간 큰일 날 듯
-재난 영화 보면 꼭 이런 데서 조회 수 욕심부리다가 카메라만 남기고 죽는 애 있던데
-히말라야도 게이트 발생하고 몇 시간 후에야 괴물 나왔다고 했으니 아직 대피할 시간 있지 않을까
서울 상황을 전달하는 이들은 BJ뿐만이 아니었다. 부랴부랴 도망치면서도 핸드폰으로 촬영하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퇴근 시간대라 도로에선 차들이 엉금엉금 기었다.
에에엥! 거리 전체에 대피 사이렌이 울렸다.
“전화가 안 돼!”
“어린이집이 전화를 안 받아…!”
“현금은 찾고 가야 하는 거 아냐?!”
“미쳤어?! 지금 게이트 찍을 때냐고!”
“왜 이렇게 안 가! 야! 빨리 차 빼!”
“선생님! 저희도 좀 태워주세요! 네?!”
“뛰어서 도망치는 게 더 빠르겠다!”
지상파 TV 채널이나 라디오에서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현장 인근 CCTV 영상과 제보 영상, 목격담을 늘어놓으며 대피를 권고했다.
[아직 강서구 상공 게이트에선 괴물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서울시민 분들은 침착하게 질서를 지키며 최대한 멀리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질서를 지키는 게 모두의 안전을 위한 길이며….]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
“저거…!”
불안한 얼굴로 게이트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외쳤다. 누군가는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렸다.
작년 12월 20일 새벽, 서울에 최초로 발생한 게이트를 막았던 반투명 구체. 그와 흡사한 푸른빛 장막이 일렁일렁 커지며 게이트를 감싸고 있었다.
“그때 그 그림자들이… 그 사람들이 온 거야…?”
누군가는 섣부른 안도감을 외쳤다. 그때처럼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던 괴물을 모조리 가둬 처치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를 담아.
“살았어…. 우린 살았어!”
군 헬기들은 푸른색 장막 안에 갇히지 않도록 피했다. 거리를 두고 게이트를 촬영하던 방송국 카메라맨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작년 12월 서울 게이트가 발생했을 때도 헬기를 타고 현장을 촬영했었다.
‘그땐 수상한 그림자들이라도 잡혔는데….’
이번엔 아무도 잡히지 않는다.
카메라는 푸른색 장막이 처음 생겨난 곳을 확대했다가, 점점 멀어지며 게이트 전체를 담고선 하얀색 빛무리 중앙에 초점을 맞췄다.
‘어쨌든, 제발 최대한 늦게 나와라…!’
한편, 이우그룹 부회장은 대통령과의 통화를 끊었다. 이곳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바로 조금 전 푸른색을 띤 장막이 게이트를 감싸고 있단 보고를 받았다. 그로써 부회장은 이번 게이트가 당진 게이트와 달리 ‘진짜’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서한율이 저곳에 있는 건가? 그 핏덩이가 지금 저 재앙을 막으려 하는 건가?’
그러나 서울 최초 게이트처럼 막을 수 있었다면, 대기업을 협박해 대한민국 정부까지 게이트 사태를 대비하도록 주도하지 않았을 터.
그는 초조한 얼굴로 저만 바라보는 주요 임원들과 두 아들을 둘러보았다.
“신속하게 중요 자료만 챙기고 직원들 대피시키게.”
강서구 일대에만 울리던 대피 사이렌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주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오늘도 평범한 일상을 보내려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닥친 재앙에 놀라 직장이나 집을 뛰쳐나왔다. 조금이라도 게이트와 멀어지기 위해.
예전에 미스터리 해커가 올린 영상의 핵심 내용도 기사로 재조명, 실검에 올랐다.
[서울시민 분들은 슬슬 다른 지역에서 지낼 곳을 알아보시고 7월이 되기 전에 서울을 비워주세요. 여러분이 있으면 괴물과 제대로 싸울 수 없게 되어 희생자만 더 늘어납니다.]
[서울에서 떠나세요.]
7월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게이트가 열리며, 미스터리 해커의 정보 또한 불확실하단 게 증명됐지만 말이다.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오는 시각, 경기도 양평.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달리던 새카만 밴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 멈췄다. 라디오와 인터넷으로 전해지는 게이트, 서울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어스래빗 멤버들은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여기가….”
분위기 있는 가로등 조명이 비추는 높이 둘린 담과 멀리 떨어진 여러 채의 건물들. 커다란 대문 옆에는 ‘파란달’이라 적힌 예쁜 간판이 걸려 있었다.
담 위의 까마귀가 울었다. 까악.
“대문, 닫혀있는데?”
“잠깐만.”
유호가 이해원에게 전화하려 할 때였다. 철컹. 커다란 대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관리실에서 보고 있었나 보다.”
대문은 차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다시 굳게 닫혔다. 철컥.
시설 보수를 위해 잠시 영업을 중단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펜션은 정상 영업을 하는 것처럼 아무 문제 없어 보였다. 널찍한 주차장엔 차 한 대만 서 있었는데, 매니저들은 물론이고 어스래빗 멤버들도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JE?”
“JE 선배님?”
세워진 차 옆에 아이돌그룹 스타믹스의 JE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까닭이었다. 새하얀 털 뭉치 비슷한 걸 품에 안고.
“다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그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왜 서한율만 게이트가 발생한 곳에 두고 와야 했는지, 서한율의 눈이 왜 파랗게 변하고, 유호와 박가람은 어떻게 오늘 같은 상황을 예전부터 확신한 것처럼 이곳 펜션으로 와야 한다고 했는지.
나중에 설명해주겠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여러 불안과 두려움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형이 왜 여기에 있어? 아니, 있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언제 온 거야? 혹시 오늘 게이트가 열리는 거 알고 온 거야?”
“아니, 몰랐어.”
JE는 이건우에게 고개를 저은 뒤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한 시간 후.
소리를 크게 틀어놓은 TV에서 뉴스 속보가 나왔다.
[서울 게이트 괴물 대거 출현… 장막에 막혀]
새하얗던 게이트 중심부는 이제 시커먼 아가리로 변해 괴물들을 꾸역꾸역 뱉는 중이었다. 그러나 괴물들은 게이트 전체를 감싼 반투명 구체에 갇혀 저들끼리 몸부림치고 있었다. 작년 12월 게이트 때와 비슷하게.
“저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작년에도 저런 보호막이 괴물들을 가두고 처치했지만, 결국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깨져서 한 마리가 떨어졌었잖아.”
소름 끼치도록 어두운 서울 도심. 지상엔 전차와 장갑차, 중무장한 군인들이 도열하고, 상공엔 헬기와 전투기가 날아다니며 괴물들의 공세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히말라야산맥 게이트 사상자 3천여 명 육박]
바로 조금 전에 뜬 뉴스. 아무리 게이트 인근 지역 사람 대부분이 대피했다곤 하지만, 히말라야와 달리 대한민국의 수도였으므로. 그리고 히말라야에 생긴 게이트보다 서울의 게이트가 세 배는 더 컸다.
길우성은 초조한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써한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48번의 연결 실패.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도 연결되지 않는다는 안내 음성이 나올까.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초록 바다와 함께 질주해….]
“……?!”
길우성은 놀란 눈으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멤버들도 희미한 노랫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통화연결음으로 설정된 다른 아이돌그룹의 노래가 이렇게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신호 간다….”
뚝. 노래가 끊겼다.
-[그만 전화하고 대문이나 열어.]
길우성은 관리실 쪽을 향해 외쳤다.
“써한 왔어요, 선배님! 문 열어주세요!”
멤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대문으로 달려 나가 서한율을 맞이했다.
다들 서울에서 대피하는 와중에 숙소에 들렀다 온 것일까. 자신의 차를 끌고 온 서한율은 피곤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몇 시간 전, 음악방송 무대를 뛰었던 화려한 아이돌의 모습 그대로.
서한율이 멤버들에게 물었다.
“메이크업 리무버 있는 사람?”
모두 죽습니다
[정부가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고심하는 가운데, 게이트 괴물들을 가둔 미스터리한 장막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었다는 보고가….]
펜션 관리동. 진한 메이크업을 지우고 말끔하게 씻은 멤버들이 하나둘 모였다. 불편했던 무대의상도 한율이 챙겨온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받은 충격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법. 다들 불안한 얼굴로 뉴스를 살피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금까지 참고 있던 의문을 먼저 입에 올린 건 차남석이었다.
“서한율 너 대체 어디에서 뭘 하다가 온 거야? 숙소에 들를 거였으면 방향이 엇비슷하니까 같이 와도 됐잖아. 그리고….”
그가 한율에 이어서 유호, 박가람을 돌아보았다. 셋은 참 공교롭게도, 혹시 이상한 종교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를 걱정하게 했던 멤버들이었다.
“세 사람, 우리한테 감추는 거 있죠?”
“없어도 분명히 있어. 써한, 너 차에서 내리기 전에 눈이 파랗게 변하는 거 내가 똑똑히 봤거든? 대체 뭐냐?”
현관을 들락거리던 매니저 조유찬도 궁금하단 얼굴로 다가왔다.
“그래, 한율아. 나는… 우리는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너 정말로 게이트 대비하려고 여기 준비한 거야? 아까 창고 가보니까 쌀이랑 생수랑… 아무튼 필요한 물품이 잔뜩 쌓여 있던데….”
한율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다들 가족이랑은 연락된 거죠?”
“어.”
“게이트가 서울에 있고, 거리상 여기가 더 가까워서 일단 본가에 계시라고 했어.”
“나도.”
현재 이곳엔 유호의 부모님과 조유찬의 아내, 그리고 차남석의 조부와 아버지가 오는 중이었다. 길우성의 누나 길미현도.
한율은 펜션 객실 배치도를 돌아보았다. 지금 있는 관리동과 12개의 객실, 주차장, 야외 풀장, 바비큐장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계곡까지 나와 있었다.
“그럼 우선 객실부터 정할게요.”
“야, 조금 전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중에 할게요. 다들 혼란스럽고 피곤하잖아요.”
TV 속, 아직 결계가 깨지지 않은 게이트를 힐끗하곤 말을 이었다.
“다들 컴백 쇼케이스 끝내고 잠도 제대로 못 잔 채 내내 깨어있었잖아요. 일단 쉬면서 체력 보충해요. 최소한 오늘 밤은 안전할 테니, 나중을 위해 억지로라도.”
“써한, 너 같으면 오늘 같은 날에 잠이 잘 오겠냐?”
“이성적인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는 상태가 되면 그때 말하겠다고.”
“난 지금 충분히 이성적이거든?”
한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너 말고 나.”
평소보다 서늘한 눈빛과 알 수 없는 위압감. 길우성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알았다고….”
박가람이 길우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위로했다.
“친구한테 쫄았구나, 막내야.”
“이보쇼.”
“저기, 그런데….”
꾸욱. 강보배가 핸드폰을 세게 움켜쥐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프림은… 괜찮을까? 특히 생방송 방청하러 왔던 이프림은 우리보다 좀 더 늦게 나왔을 텐데, 그 난리에 버스랑 전철이 제대로 다녔는지도 모르겠고….”
그러잖아도 어두웠던 모두의 얼굴이 근심으로 더욱 얼룩졌다. 하아. 이건우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다들 괜찮은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반대로 우리가 무사한지 걱정하는 이프림도 있을 텐데…. 이 와중에 라방을 할 수도 없고….”
“안 될 게 뭐 있어요?”
“응?”
한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그래도 지금은 아까 말했듯이 아직 혼란스럽고 불안하니까, 내일 해요. 단체 라이브 방송.”
그래도 괜찮을까? 멤버들의 시선이 그들의 보호자 격인 매니저 조유찬을 향했다. 조유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엉뚱한 사람들이 꼬일 수 있으니까, 한율이 펜션에 와 있단 사실만 노출되지 않도록 신경 쓰면 괜찮을 것 같아.”
“그럼 SNS는요?”
군이 게이트 주변에 진을 치고 있지만, 장막이 깨지고 괴물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며 말 그대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반대로 12월 게이트처럼 큰 위기 없이 지나갈 수도 있으나, 지구 곳곳에 게이트가 열리면 연예계 산업 전반이 마비될 터다.
그래도 희망적인 미래를 버리고 싶지 않단 마음, 그러길 바라는 마음은 짧은 글 한 줄 작성에도 그들을 고심하게 했다.
잠시 후, 어스래빗 공식 SNS 계정.
멤버들은 팀 반지를 모아둔 사진을 올렸다.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올 때까지 부디 다들 무사하길 바랍니다.]
그때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고, 관리실에 있던 이해원이 나왔다.
“호 형 부모님 도착하셨어요.”
이윽고 차남석의 조부와 아버지, 조유찬의 아내와 길우성의 누나 길미현까지 차례로 도착했다.
면허를 따고 처음 장거리, 밤 운전을 했다는 길미현은 길우성을 보자마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오는 동안 연신 눈물을 닦아내며 비볐는지, 그녀의 눈가는 발갛게 부어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운전했는지 생각이 잘 안 나. 너무 무서웠어….”
길우성은 그런 누나를 안아 토닥거렸다.
“그래도 차가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몰라, 이 멍청아….”
“멍청이라니! 차를 사준 은인에게 그 무슨!”
차남석이 짧게 혀를 찼다.
“넌 이 와중에 그런 생색을 내고 싶냐.”
가족 간의 재회와 인사가 오간 뒤, 그들은 각자 정한 객실로 가서 쉬기로 했다. 그러나 얼마 전 한율의 펜션 기사가 뜨고 주소가 노출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관리실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으나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방범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아무도 못 들어오니, 안심하고 푹 쉬세요.”
한율은 사람들이 객실로 들어가는 걸 모두 확인한 뒤, 펜션 부지에 친 결계를 발동시켰다. 그리고 자정이 지날 무렵, 박가람과 유호를 데리고 언덕 위 집으로 향했다.
“나리 씨?!”
그곳엔 마법 학교 선생이자 미스터리 해커인 계나리가 와 있었다.
반가워하는 유호와 박가람을 향해 계나리가 피곤한 얼굴로 웃으며 손을 들었다.
“초코톡 서버 불안정으로 톡이 제대로 안 갔나 보네요.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