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4화 (304/427)

* * *

거실 테이블에 인원수대로 따뜻한 차가 놓였다. 한율은 무릎에 자리 잡은 달냥과 구동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앞으로 이렇게 모이는 건 힘들 것 같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다시 모였네요.”

이해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시간이 늦었기도 하고 다들 피곤할 테니 요점만 말할게요. 전 이른 시일 안에 마요르카로 갈 계획입니다. 우리가 알던 미래와 달리 히말라야와 서울 게이트가 일찍 열린 이상, 마요르카섬 게이트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계나리와 이해원, JE, 유호와 박가람은, 마요르카섬에 열릴 게이트가 가장 위험하다는 한율의 말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런데 어떻게 가려고? 지금 한국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이 많아서 국내 모든 공항이 마비될 지경이라던데.”

“이우그룹 전용기를 이용하려고요.”

“아.”

계나리가 기밀을 빌미로 대기업 두 곳을 협박해 대규모 방공시설을 짓게 했다면, 서한율은 부회장을 직접 찾아가 협박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전용기를 이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

박가람이 턱을 만지며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서한율 너라면 날아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잠깐 생각했는데.”

“제가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

“아니, 이번 서울 게이트 결계 너 혼자 쳤잖아. 작년 12월에 우리가 고생하며 다 같이 만든 건 얼마 못 가 금까지 가서 깨졌는데….”

박가람이 TV를 힐끗했다. 게이트 현장 실시간 생중계 영상. 여전히 푸른빛을 띤 보호 결계가 게이트를 감싸고 있었다. 그 안에 갇힌 괴물들은 서로 뭉개고 뭉개져서 실패한 반죽 덩어리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보다 더 큰 게이트를 감싸고 있는데도, 몇 시간 동안 마법사 없이 버티고 있잖아.”

“저거, 곧 깨질 거예요.”

“뭐?”

한율은 관자놀이를 슬슬 어루만졌다. 지구의 마나로 만든 마력을 사용하면 늘 미미한 두통이 따라왔다. 그런데 이번 결계로 적잖은 마력을 썼더니 벌써 몇 시간 째, 신경이 거슬릴 정도로 계속 지끈거리는 중이었다.

“어쨌든 마법 학교의 존재, 마법사라는 사실은 계속 함구해줬으면 좋겠어요. 이건 여러분을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그가 알던 시간대에선 게이트 사태가 동시에 발생하며 다양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들이 나타났었다. 계나리의 시간대에서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번엔 두 곳만 먼저 터져서 그런지, 뉴스나 인터넷, 이우그룹 1130 증상자 실시간 상태 파악 보고서를 살펴봐도 각성자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각성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건….’

정말 그렇게 된다면 한율로선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괴물들이 성가시기는 하겠지만, 지구인들이 본래 세상으로 쳐들어갈 가능성 자체가 원천 차단되므로.

한율은 그런 속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여러 번 말했듯이, 괜히 힘을 드러냈다간 정작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없게 될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교장 선생님. 우린 너만큼 그렇게 강하지 않아서요.”

“하긴. 현재 여러분의 어설픈 실력보단.”

한율은 간단한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계나리와 이해원을 차례로 보곤 말을 이었다.

“몽둥이가 괴물에게 더 효과적으로 먹힐 테니.”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환기하는 데에 동참하듯, 계나리가 장난스럽게 울상을 지었다.

“흡….”

“어쨌든 다른 사람들에겐 제가 미스터리 해커 집단과 서로 아는 사이 같다란 뉘앙스만 슬쩍 흘려주세요. 여러분은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는 정도로만 하고.”

유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괜찮겠어?”

“네. 어차피 이우그룹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꼭 당부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이게 가장 중요해요.”

“뭔데?”

한율은 한 사람, 한 사람과 시선을 맞추곤 후 조용히 말했다.

“길우성, 절대로 게이트 근처로 가게 두지 마세요. 모두 죽습니다.”

“……?!”

모두의 눈이 놀라 커졌다.

한편, 길우성과 길미현이 사용하는 객실. 복층 구조로 된 객실은 위에 침실이 마련된 곳이었지만, 아래에도 싱글 침대 하나가 놓여있었다. 길우성은 위를 길미현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1층 침대에 드러누웠다. 조명을 모두 껐지만, 몇 시간 째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랑 아빠는 주무시려나.’

서로 괜찮냐고, 괜찮을 거라고 영상통화를 한 지 불과 20분. 부모님을 향한 걱정에 또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이프림 걱정에 당장 라방을 하고 싶지만, 그것도 내일 멤버들과 함께 하기로 해서 다시 꾹.

WB래빗 엔터 식구들도 무사히 서울을 빠져나왔다고 했다. 스카이러너 용맹과 하신, 그레이트7의 완언과도 통화를 하며 서로 무사하단 걸 확인했다.

초코톡 서버가 정상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1130 단톡방 멤버인 원카운트의 나기혁, 히아신스 호수와 퍼플아워 진은수도 괜찮은 것 같았다. 나기혁은 현재 미국에 있기도 하고.

‘다들 무사하단 걸 아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아직도 안 사라지는 저것 때문인가?’

소리를 아주 작게 틀어놓은 TV. 길우성은 영상에 잡히는 게이트를 노려보곤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모두가 불안한 마음에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서버에 과부하가 걸렸는지, 포털사이트 메인이 참 느리게 떴다.

실검 1위는 게이트. 그 아래 대부분은 재난 발생 시 필요한 것들이었으나, 아닌 것도 있었다.

‘유언장 작성 방법은 왜 실검에 있는 건데….’

너튜브에 들어가 보니 그곳엔 아예 영상으로 유언을 남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목만 봐도 우울해져, 길우성은 일부러 ‘어스래빗’을 검색했다. 몇 시간 전 출연했던 MBC <뮤직뮤직> 컴백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훌쩍. 길미현이 들을까, 소리를 죽이고 영상을 보는데 울음이 차올랐다.

이번 컴백 준비를 위해 고생하고 노력한 게 없어진 건 괜찮다. 그러나 앞으로 다신 무대에 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이 몰려왔다.

미래가 송두리째 사라진 것만 같은 아득한 느낌.

길우성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간절히 기도했다.

‘하느님, 부처님. 제발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을 돌려주세요.’

그런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TV에서 우울하기 그지없는 앵커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속보입니다. 게이트 괴물들을 가두고 있던 장막이… 조금 전 사라졌다는 소식입니다.]

버릴 거야?

“우성이가 게이트 근처로 가면 모두 죽는다니….”

박가람이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재앙이랑 함께 찾아오는 작은 희망이라며…!”

“맞아요, 작은 희망. 게이트 근처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으니까요.”

이게 대체 무슨 궤변이야.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모두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한율은 TV로 시선을 돌렸다.

[속보입니다.]

“결계, 깨졌네요.”

[게이트 괴물들을 가두고 있던 장막이 조금 전 사라졌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장막이 사라지며 일어난 거대한 폭발로 인해 갇혀있던 괴물들의 잔해나 사체가 지상으로 떨어졌으며, 게이트에선 또 다른 괴물들이….]

* * *

게이트 아래에 모인 군과 경찰 인력은 이곳으로 오기 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던 게이트 정보를 머릿속에 주입했다.

초반에 발생한 게이트는 괴물들이 투명한 막에 가로막힌 것처럼 밖으로 나오지 못했었다.

그러다 작년 12월, 서울 최초 발생 게이트에선 괴물들이 나오는 게 똑똑히 목격됐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지상으로 추락한 괴물 한 마리는 부서진 건물 잔해를 치워봤더니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미국 채널 아일랜드 국립공원 섬에서 발생한 게이트. 그곳에서도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몇 시간 사이 전부 사라졌다. 미국이 괴물을 생포했다는 소문이 돌았었지만 ‘그런 사실이 없다’라는 게 미국의 공식 입장.

‘당진 게이트 괴물도 서해로 날아간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길어봤자 5시간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진 괴물들.

이런 현상이 급변한 건 바로 그제, 히말라야산맥 게이트였다. 이번엔 24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게이트와 괴물들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계속해서 수를 불리며 많은 사상자를 내는 중이었다.

‘만약 게이트가 진화하는 거라면. 점점 실체화되는 힘을 갖게 되는 거라면.’

겨우 스물한 살밖에 안 된 군인은 어릴 적부터 즐겨 보았던 만화나 소설의 전형적인 전개를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저 게이트는 히말라야 게이트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게이트와 괴물들을 가두고 있던 반투명 구체가 사라졌다.

동시에 일어난 엄청난 빛과 굉음.

번쩍! 콰콰콰앙! …키에에엑!

고통스러워하는 괴물들의 단말마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쿠웅! 쿵! 사방으로 괴물들의 시체와 잔해가 떨어졌다. 탄내가 섞인 냄새는 아주 고약하고 생생했다. 무전기가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게이트에서 새로운 괴물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각자 위치 사수해! 한 마리도 이 지역 밖으로 내보내선 안 된다!]

조명탄 여러 개가 높이 떠올랐다. 얼룩덜룩한 그림자와 역광으로 물든 온갖 괴물들이 떨어지거나 사방으로 날아 흩어지는 소름 돋는 광경이 펼쳐졌다.

누군가가 악을 썼다.

“다 쏴 죽여, 씨발!”

민간인들의 대피가 모두 끝나, 괴물들을 처치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는 상부의 결정이 내려온 상황.

콰앙! 전차에서 강력한 포탄이 발사되며, 지구로 쳐들어온 게이트 괴물들과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1시. 한율은 지붕에 걸터앉아 서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전투 불빛이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쿠릉, 쿠릉. 천둥소리 비슷한 포격음도.

“게이트를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어떠셨어요? 일찍 열린 이유, 짐작 가는 거 있으셨어요?”

옆에 계나리가 나란히 앉으며 물었다.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요….”

그러나 계나리의 얼굴에선 실망하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원인을 알아봤자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체념한 듯이.

“능력이 각성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갈 거야?”

“모르겠어요. …사실 제 능력이요.”

계나리가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돌아가는 시간만큼 데미지가 와요. 5분을 돌아가면 속이 울렁거리면서 어지럽고, 한 시간 정도를 돌아가면 아예 정신을 잃어요. 돌아간 시간이 무색할 만큼. 그보다 더 긴 시간을 돌아갈수록 정확도도 떨어지고, 연속으로 자주 쓰면 몸 상태가 엉망진창이 되더라고요.”

“그럼….”

계나리는 2028년에서 2019년으로 돌아왔다. 무려 9년.

고개를 돌려 한율을 바라본 계나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마, 미래의 내 육체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 같아요. 진짜 온몸이 찢어지는 것처럼 정말 아팠다가 블랙아웃 되었거든요. 으음…. 잘은 설명하기 힘든데, 죽어서 영혼만 되돌아온 느낌?”

한율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 부작용, 나도 알고 있었어?”

“전혀요. 그때 오빠가 지금보다 무뚝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자를 아끼는 건 마찬가지였거든요. 말하면 내가 과거로 돌아오도록 두지 않을 것 같아서 비밀로 했어요.”

“그럼 죽을 수 있단 걸 알면서도 왜….”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건가?

계나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엄마랑 아빠가 돌아가셨거든요.”

“…….”

“그래도 이렇게 돌아와서 오빠를 일찍 만나 게이트 대비도 하고, 마법 학교도 세우고, 지금은 가족들이랑 안전하게 여기로 와 있잖아요.”

계나리의 가족은 바로 이 집 2층에 짐을 풀었다. 조금 전 마법 학교 인원이 모였을 땐 그들의 대화를 들을 걸 염려해 모두 푹 재웠다.

“그러니 후회는 없어요. 아니, 정말 잘했다고 나 자신을 마구 칭찬해주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눈이 마치 자신에게도 칭찬해달라는 것처럼 보인다. 한율은 옅게 웃으며 계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헤헷.”

계나리는 바로 조금 전, 능력이 각성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겠냐는 물음에 모르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가족에게 변고가 생기면, 또 제 목숨을 날리면서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그만큼 한율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일 터.

“날이 밝으면 사람들하고 인사 나누도록 하자. 한동안은 이곳에서 함께 지낼 사이니까 서로 얼굴은 알아야지.”

“넵! 참, 오빠네 어제 MBS K <주말 아이돌> 방송 봤어요?”

“그게 정상적으로 방송됐어?”

“네. 케이블 채널이기도 하고, 게이트 터졌을 때랑 시간이 엇비슷해서 된 것 같아요. 아, 그러고 보니 <스타학교>! 어스래빗 완전체 출연인데! 오늘이 방송일인데! 아…. 망할 게이트, 조금 더 늦게 터지지….”

진심이 섞인 듯한 호들갑스러운 푸념.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한율이 잠시 어이없는 눈으로 계나리를 볼 때였다. 인위적인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더니 이해원이 지붕 위로 올라왔다.

“두 분, 이만 들어가서 쉬어야 하지 않아요?”

몇 시간 후,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새벽.

객실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서울의 게이트 상황을 보느라 밤을 새웠는지, 하나같이 피곤함과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강보배가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 길우성에게 다가갔다.

“우성아, 좀 잤어?”

“게이트 막던 그게 깨졌다는 뉴스 보고 놀라서 한숨도 못 잤어….”

강보배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각자의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국민이 받을 충격을 우려한 것인지, 게이트 현장은 더는 생중계되지 않았다. 그 대신 실시간 뉴스 채널을 보는 중이었다.

“게이트랑 멀지 않은 곳에 김포국제공항 있잖아. 거기 지금 전투기랑 헬기가 잔뜩 있대.”

“사람들 대피할 때 항공기 운항 전부 취소하고 비행기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더라. …부모님 계신 제주도로 가고 싶어?”

“응….”

길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생각해봤는데, 역시 가족이랑 함께 있어야 안심될 것 같아. 그런데 어떻게 가야 좋을지 모르겠어. 제주로 가는 항공기랑 여객선 전부 사람들로 미어터진다던데…. 그래도 일단 전라도나 경상도로 내려가서 줄 서는 게 나을까?”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섬이라 나중엔 물자 구하기가 더 힘들어질 수 있어. 대형 병원 수도 적고.”

한율이 다가가며 말하자 강보배가 웃으며 돌아봤다.

“좀 잤어?”

“네, 한 시간 정도. 형은요?”

“하하하.”

길우성이 툴툴거렸다.

“잠이 오겠냐고, 잠이. 언제 방어선이 뚫려서 여기까지 괴물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그나저나 어제는 정신없어서 못 물어봤는데.”

“또 뭐.”

“또 뭐라니. 하나라도 제대로 대답해주고 그래라? 아무튼, 너 해원 선배님이랑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냐?”

길우성은 연습생 시절부터 소문이나 뒷담에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해원은 이우그룹 회장 손녀인 이채현과 스폰 관계였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연예계를 은퇴한 인물. 같은 아이돌로서 껄끄럽게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그런 사람이 게이트를 대비해 준비한 듯한 펜션에 있으니.

누구패치의 정선지 기자가 ‘왜 서한율 정도 되는 아이돌이 스폰을 받았던 이해원과 친하게 지내지?’라고 의아해했던 것과 비슷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말은 안 하지만 강보배도 조금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백수 됐다고 하셔서 펜션 관리인으로 고용했어.”

“아니, 그러니까…. 아니, 됐다.”

한국인의 입버릇인 ‘아니’를 두 번이나 말하며 길우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48시간 가까이 깨어있는 상태라 여전히 정신이 없는 모양.

객실에서 나오던 유호의 어머니가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일찍 일어났네요?”

길우성과 강보배가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그녀를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침 식사를 준비할까 하는데…. 마땅한 식자재가 있을까요? 어젠 정신이 없어서 미처 챙기지 못했거든요. 없으면 나가서 사 오고.”

펜션이라 기본적인 취사도구와 조미료는 갖춰져 있다. 냉동고에는 고기와 생선, 창고에도 쌀이나 즉석식품이 쌓여 있고.

한율은 그렇게 설명하곤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필요한 게 있을 테니, 호 형 일어나면 형이랑 저랑 셋이서 마트에 가봐요.”

사람들 분위기도 살필 겸.

‘이번엔 게이트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벌써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길우성이 번쩍 손을 들었다.

“나도! 짐꾼!”

“이놈은 분명 쓸데없는 거 살 테니 버리고 갈게요.”

“이놈이?!”

아침 7시. 유호와 유호의 어머니, 서한율과 이건우가 차 두 대를 끌고 펜션을 나섰다. 그러나 한 시간 후 돌아온 차는 한 대뿐이었다.

주차장으로 나온 멤버들은 장 본 물건이 담긴 상자와 장바구니, 봉투를 챙겨 관리동으로 옮겼다.

라이언이 두리번거렸다.

“하뉼은?”

“부모님 댁으로 곧장 갔어. 늦어도 저녁 전엔 돌아온다더라.”

“아.”

“읍내라고 해야 하나? 거기 분위기는 어땠어? 뉴스에선 하룻밤 새에 사재기 현상이 심각해져서, 어떤 마트에선 손님들 간에 싸움까지 벌어졌다던데.”

박가람의 물음에 이건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장 보고 온 거 봐. 우리, 마트 오픈 전부터 줄 서서 들어갔거든? 그런데 밤새 엄청나게 팔렸는지 물건도 별로 없고, 그나마 있는 것도 사람들이 정신없이 카트에다 쓸어 담아서… 이것도 겨우 건진 거야.”

“양파를 두 보따리나 산 것도 그런 이유야?”

“무거워서 그런지 잘 안 집어가더라고.”

차남석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이 주변에 밭이 많아서 그럴 거예요. 여차하면 남의 밭에서 훔치면 된다고 생각해서.”

“설마.”

“작년에 우리 할아버지 밭도 밤사이에 도둑이 작물을 털어갔거든요? 평소에도 그런데,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 어떻겠어요. 서울 게이트로 경제가 하루아침에 마비된 이상, 물가가 오르는 건 기정사실인데.”

“게이트, 대체 언제 사라질까? 지금까지 나타난 게이트 모두 길어봤자 며칠 안에 사라졌었잖아.”

[밤새 이어진 괴물들의 공세에, 군은 방어선이 뚫리지 않도록 신속히 인원과 장비를 교체하며….]

관리동 로비에 걸린 TV에선 여전히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공중파 정규 방송은 모두 중단된 상태.

[그리고 저희 KBC 또한 국민을 대신해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작년 12월과 어제 발생한 게이트를 미스터리한 장막으로 감싸 지킨 인물 혹은 단체 관계자가 이 뉴스를 보고 있다면 부디 이번에도 도와주시길, 연락이라도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유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야? 연락을 기다린다니?”

“조금 전에 대통령이 직접 브리핑하면서 말했어. 게이트 사태를 예견한 미스터리 해커, 그리고 게이트 괴물들을 가두면서 시간을 벌어준 영웅들을 찾는다고.”

한편, 정부와 국민이 간절히 찾는 영웅은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전용기를 쓸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전화 상대방인 이우그룹 부회장이 침울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나라, 버리고 떠날 겁니까?]

한율은 실소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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