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도 문제없었어요.”
옥상에 괴물의 잔해가 떨어져 있던 걸 빼곤 말이다. 여름이라 금세 썩어서 벌레가 꼬일 것 같아, 깔끔하게 소각했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천만다행이다, 한율아… 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조유찬이 돌연 끝 음을 올렸다.
“잠깐 저기로 가서 형이랑 대화 좀 할까?”
이유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삐친 것 같은 얼굴.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길우성이 음률을 실은 작은 목소리로 속닥속닥, 힌트를 건넸다.
“나리 나리 계나리.”
아.
* * *
게이트 방어선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게이트가 사라졌다는 소식만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길게 느껴지는 하루의 끝.
밤이 되자 어스래빗 멤버들은 강보배와 라이언이 지내는 객실로 모였다. 단체 라이브 방송을 하기 위해.
“하루밖에 안 지나서 다들 굉장히 예민하고 불안할 텐데.”
무거운 얼굴로 느릿느릿 움직이던 차남석이 의견을 냈다.
“라방, 상황이 조금 더 나아지면 그때 하는 게 어때요? 다들 우리처럼 안전한 곳으로 수월하게 대피하진 못한 것 같아서요. 인터넷 보니까 아직 대피소에 못 들어가고 밖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적잖은 모양이던데….”
유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너무 평소처럼 밝으면, 아무리 팬이라도 마음이 조금 안 좋아질 수 있지.”
조유찬이 멤버들의 머리와 옷매무시를 가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럼 안부 인사만 짧게 하고 끝내자. 너희도 이프림 걱정되고 보고 싶다며.”
“어? 뉴스에 은수 씨 얘기. 하뉼이랑 우성 인터뷰 나올 것 같아.”
모두 동작을 멈추고 TV를 주목했다.
하단 자막.
[신비로운 초능력이 생긴 1130 증상자들]
인터넷에서 이미 화제가 된 진은수의 각성 능력 영상이 나왔다. 한 종합병원 로비. 걸음을 옮기던 진은수와 호수, 그리고 두 사람의 어머니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약 5초 후. 허공에 돌연 허우적거리는 손이 나타나더니 세 사람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봐도 봐도 신기하다…. 눈앞에서 직접 본 사람들은 정말 놀랐을 것 같아.”
“은수 씨 본인도 굉장히 놀란 것 같은데.”
“이 상황에 참 철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길우성이 유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수 씨한테 어떻게 했냐고, 노하우 좀 알려달라고 하고 싶다, 큰형.”
“응, 나도 연락 안 돼.”
“하뉼 나온다.”
앵커의 목소리.
[그러나 모든 국내 1130 증상자가 신비로운 힘을 갖게 된 건 아닙니다. 진은수 씨와 함께 연예인 대표 1130 증상자로 알려진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의 서한율 씨와 길우성 씨.]
불과 몇 시간 전 촬영한 인터뷰 영상.
기자가 질문했다.
[한율 씨도 신비로운 힘이 생겼나요?]
[저는.]
TV 속, 한율의 손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올라가는 병뚜껑.
[참 소소하죠? …그런데 부채질보다 약해서 초능력이라 하기엔 좀.]
“……?!”
박가람을 제외한 멤버들과 조유찬이 놀란 눈으로 한율을 쳐다봤다. 길우성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뻐끔거렸다. 한율은 그 강렬한 시선을 모른 척했다.
한율의 ‘초능력’을 보지 못한 채 인터뷰에 응했던 TV 속 길우성이 말한다.
[기사 보니까 초능력이 생긴 몇몇 분께서 벌써 게이트 방어선으로 달려가셨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혹시 그런 힘이 생기지 않았을까, 기대를 품고 여러 시도를 해봤는데… 안 되더라고요.]
[모든 1130 증상자에게 초능력이 생기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인터뷰 영상은 한 번에 이어서 말한 듯 요점만 적절히 편집됐다.
이건우가 핸드폰을 보곤 심각한 목소리를 냈다.
“멤버들아. 이프림, 우리 보고 싶다고 난리 났다. 빨리 라방 켜자.”
“너무 웃거나 장난치지 말고, 조금 차분하게. 알았지, 얘들아?”
그때였다.
[콰쾅!]
그들은 굉음에 놀라 다시 TV를 주목했다.
게이트 방어선으로 달려간 각성자일까. 반소매 티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여성이 손에 든 무언가를 휘두르자, 그에 맞아 비틀거리던 괴물이 산산이 폭발하는 장면이 나왔다.
강보배가 놀라 입을 벌렸다.
“미쳤다…. 영화 아니지?”
[오늘 군에서 공개한 1130 증상자 김바람 씨의 영상입니다. 알루미늄배트를 든 김바람 씨는, 일정한 힘 이상으로 타격을 준 상대에게 폭발을 일으키는 초능력이 생겼다며 이처럼 게이트 방어선으로 달려왔습니다.]
“와….”
길우성도 넋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박 쩐다….”
[다른 1130 증상자 강 씨는 입으로 환한 빛을 쏘는 초능력이 생겨….]
“나도 초능력 줘….”
한율은 길우성을 힐끗하곤 무덤덤하게 시선을 옮겼다.
잠시 후. 어스래빗은 라이브 방송을 켰다. 채팅은 온통 눈물로 도배되었다.
-얘들아 무사해서 천만다행이야ㅠㅠㅠㅠㅠㅠ
-컴백 하루 만에 무슨 일이야ㅠㅠ
-나쁜 게이트ㅠㅠㅠㅠㅠ
-다들 괜찮은 거지?ㅠㅠㅠㅠㅠ
-애들 그새 핼쑥해진 거 봐ㅠㅠㅠㅠㅠㅠㅠㅠ
-우성아 초능력 안 된다고 속상해하지 마ㅠㅠㅠㅠㅠ 안전한 곳에 안전하게 있어줘ㅠㅠㅠㅠㅠㅠ
-와줘서 고마워 사랑해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멤버들은 준비했던 안부 인사, 안전을 당부하는 말을 잔잔하게 이었다. 그리고 마무리 멘트를 준비할 때였다. 한 채팅이 눈에 띄었다.
-게이트 안 사라지면 1130 증상자 강제 징집될 수 있다던데.. 아니겠지ㅠㅠ?
한편 그 시각, 미국 뉴욕의 한 호텔.
환한 아침이었지만, 아이돌그룹 원카운트 멤버들은 객실 침대나 소파에 힘없이 널브러져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리 언제 한국 갈 수 있을까?”
“지금 한국 위험하다고 항공편이 확 줄었잖아. 회사에서도 미국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고.”
스케줄을 위해 미국으로 왔다가, 한국에 게이트 사태가 벌어지며 그대로 발이 묶여 버렸다.
“그런데 밤새 한국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1130 증상자들한테 초능력 생겼다던데?”
“그 뉴스를 이제야 봤냐.”
“우리 팀 증상자는 어디 갔어?”
“본인 방에.”
“너희는 왜 이 객실로 다 모인 건데.”
“그냥?”
“기혁이도 초능력 생기는 건가?”
“게이트랑 일정 거리 안에 있어야 생기는 것 같던데? 그것도 증상자 모두한테 생기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가서 기혁이 형 보고 올게요.”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찬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아신스 호수가 DM을 보냈다. 자신에게 생긴 초능력에 상당히 놀랐는지, 진은수가 방에 처박혀 아무것도 안 먹고 두문불출해서 걱정된다는 내용이었다.
‘혹시 모르니 나기혁 상태를 살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객실을 나선 순간이었다.
멈칫.
‘뭐야, 저 사람들?’
두리번거리며 회사 스태프를 찾아봤지만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찬형은 객실로 도로 들어가 멤버들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기혁이 형 방 앞에 수상한 아저씨들이 있어요.”
“뭐?”
“수상한 아저씨들?”
“형은 일단 매니저랑 가드 형들 호출해주세요.”
“어? 어.”
“야, 같이 가. 무서운 범죄자들이면 어쩌려고 그래.”
찬형이 다시 복도로 나가자 다른 멤버들도 황급히 쫓아 나왔다. 그동안 건장한 체격의 남성들은 나기혁의 객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기혁 씨, 안에 계십니까?]
그 뒤로 이어진 말은, 잔뜩 경계하며 다가가던 원카운트 멤버들을 얼어붙게 했다.
[FBI입니다.]
그놈이 아직 안 나왔어
원카운트 멤버들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FBI에서 대체 왜?! 이 인간 무슨 사고 쳤나? 아니, 어제부터 내내 호텔에만 처박혀 있었잖아?
찬형은 용기 내어 한 걸음 나섰다. 미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서 다른 멤버들보다 영어가 유창하기도 하고, 정말로 상대가 FBI면 그리 위험하진 않을 것 같아서.
[실례합니다. 저희 일행 방엔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아.]
그들이 한꺼번에 돌아보았다. 키와 체격 모두 크고 인상도 사나워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씩 웃는 미소에서도.
[나기혁 씨와 같은 보이밴드 멤버군요.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잠깐 몇 가지 질문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이분하고 같이요.]
우락부락한 남성들 사이에 가려져 있던 여성이 쏙 나왔다.
[안녕하세요.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에서 나온 이사벨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영상으로 봤을 때보다 다들 멋있으시네요.]
[무슨 일입니까?!]
경호원들과 함께 실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실장은 남성들을 보곤 흠칫 놀랐다가 멤버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FBI랑 게이트 조사위원회에서 나왔대요.”
“뭐?! FB…. 기혁이 이 자식 무슨 사고 친 거야?”
똑똑. 그사이 다른 FBI 요원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 계십니까.]
처음 대답했던 다른 요원이 신분증을 꺼내서 보여주었고, 찬형은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귀마개 낀 채 깊게 잠든 상태일지도 모르니까, 제가 먼저 들어가 볼게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찬형은 실장에게 나기혁의 객실 키를 받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나기혁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자는 중이었다. 테이블에는 새벽에 마신 걸로 보이는 위스키가 놓여있었다.
휙. 이불을 걷고선 나기혁의 귀에 꽂힌 귀마개를 뺐다.
“일어나요, 형. 미국 정부에서 사람이 왔어요.”
나기혁이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웅얼거렸다.
“……으음?”
“…….”
“…….”
도로 잠드는 나기혁.
찬형은 귓가에 대고 또박또박 거짓말했다.
“루아한테서 전화 왔어요. 루아가 형 보고 싶대요.”
번쩍. 나기혁의 눈이 떠졌다.
“……뭐?”
“미국 FBI가 찾아왔다고요. 게이트 조사위원회 사람도 함께.”
멍하니 찬형을 보던 나기혁이 왈칵 인상을 구겼다.
“너 이 씨. 거짓말이었냐?”
“후자는 거짓말 아니고 진짠데요. 빨리 일어나서 옷이나 입어요.”
* * *
“이리 와 봐유, 서한율 씨.”
라방을 끝내고 강보배와 라이언의 객실을 나갈 때였다. 길우성이 한율 앞을 막아섰다.
“나랑 얘기 좀 해유.”
“피곤한데.”
“너 어제 뭐 하고 돌아다녔는지, 파랗게 변한 눈 기타 등등 오늘 다 설명해준다고 해놓고, 어? 밖에서 한참 싸돌아다니다가 와 놓고선, 어?!”
“부모님 댁에 다녀온 게 싸돌아다닌 거냐?”
“서울도 다녀왔잖아.”
“그래서 피곤하니까 다음에.”
덥석. 길우성이 지나가려는 한율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럼 초능력 어떻게 쓰는지만!”
한율은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기울였다. 오히려 이런 질문을 하는 길우성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그냥, 되던데?”
길우성이 활짝 웃었다.
“멱살 좀 잡아봐도 되니, 친구야?”
“뉴스에 나온 사람들처럼 멋진 힘 생기면 뭐, 어떻게 하려고.”
“만에 하나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 괴물들하고 맞설 힘 있으면 좋잖아. 아니면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초능력이라도. 지금 우리한테 총이 있냐 뭐가 있냐?”
옆에서 대화를 듣던 유호가 길우성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괜찮아, 우성아. 초능력이 생기지 않아도, 넌 우리한테 없어선 안 될 소중한 멤버이자 동생이야. 힘든 일이 생기면 다 같이 힘을 합쳐서 극복하면 돼.”
“큰형….”
길우성이 유호에게 감동하는 동안, 한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걸음을 옮겼다.
“전 먼저 가서 잘게요.”
“그래. 잘 자, 한율아.”
“오늘은 봐줄 테니 내일 제대로 설명해라, 써한! …야, 듣고 있냐?”
한율이 지내는 곳은 관리동 2층이었다. 본래 관리인 숙소로 사용되던 곳이라, 통로엔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도록 중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는 잠그지 않고 활짝 열어놓았다.
중문을 지나 잠긴 현관문을 열자 나오는 가정집. 거실 캣타워에 있던 달냥이 달려왔다. 므아앙. 조금 전까지 가지고 놀았는지, 바닥엔 한율이 숙소에서 가져다준 인형이 나뒹굴고 있었다. 어디서든 적응을 잘해서 참 다행이었다.
“밥은 먹었어?”
므앙.
한율은 한참 동안 달냥을 쓰다듬어준 뒤 소파에 편히 앉았다. 그리고 이우그룹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25일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 정상 운항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국내 체류 중인 이탈리아인들의 탑승도 검토 중이랍니다. 이건 전세기를 계약한 클라이언트 측 의견이라, 이쪽에선 터치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게이트 가까이에 있던 김포국제공항은 현재 운영 중단. 인천 국제 공항도 안전을 위해 운항 스케줄을 대폭 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