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대로 다른 지역 공항으로 이용객을 분산시키곤 있으나 그래도 역부족이라, 명품 회사 측이 그런 검토를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자국민을 위험 지역에서 탈출시키며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으니.
어쩌면 이탈리아 정부의 요청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비행기를 타시려면 그때까지 방어선이 건재해야 한다는 거,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네, 응원할게요.”
-[…….]
잠깐의 침묵에서 ‘방어선을 도와줄 생각은 없는 건가?’ 이런 불평이 들리는 듯하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네.”
-[1130 증상자들, 대체 그들의 정체가 뭡니까?]
“보이는 그대로예요. 하지만 앞으로 희망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괴물보다 더한 재앙으로 변질할 수도 있을 테니 일찌감치 시스템 안에 가두는 걸 추천하고 싶네요. 기업이 아닌 국가에서요.”
따로 흩뜨려놓는 것보단, 한곳에다 몰아넣고 관리하는 게 편할 테니.
“그리고 당연히 저처럼 보잘것없는 능력이나, 각성하지 않은 증상자들은 제외해야겠죠?”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아. 최은수도 건들지 마세요.”
-[명심하죠.]
통화를 끊고 나선 이우그룹이 입수한 해외 1130 증상자 조사 자료를 살폈다. 국가적으로 조사하지 않아 리스트 자체가 없는 지역, 정보 수집 능력이 부족해 미처 리스트를 얻지 못한 지역도 많았지만, 이것도 감지덕지했다.
‘미리 없애둬야 할 놈이… 어디 있나.’
자료를 살피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여기 있네.’
그때였다.
초코, 초코.
“……?”
이제 정상적으로 서비스되는 걸까. 초코톡 알림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초코, 초코, 초코….
서버가 마비됐을 때 제대로 전송되지 못했던 톡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몇 개는 톡 흐름의 맥락이 뚝뚝 끊긴 게 눈에 띄었다.
한율은 그것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하기엔 그리 가깝지 않은 지인들에게 안부 톡을 보냈다. 유희는 끝났으나, ‘서한율’로서 살았던 시간을 송두리째 끊어낼 필요까진 없으므로.
[괜찮아요?]
진은수에게도 톡을 보낸 뒤엔 계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으면 지금 해원이 형 집에서 잠깐 볼까?”
-[넵! 금방 갈게요!]
우웅.
“그래.”
통화를 끝내고 화면을 봤더니, 진은수로부터 답장이 왔다. 핸드폰 전원을 켰거나 PC로 초코톡에 접속한 모양.
얼굴이 보이지 않는 텍스트 분위기는 꽤 밝았다.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D]
한율은 달냥과 함께 관리동을 나와, 우선 보호 결계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슬렁슬렁 걸음을 옮길 때였다.
므앙? 달냥이 한쪽을 보며 울었다.
차남석 가족이 지내는 객실 테라스.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던 차남석도 달냥의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서한율? 안 자고 왜 나왔냐.”
“달냥이가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언덕 위 집에 다녀오려고요. 거기에 친구도 있고.”
지난번 펜션 담을 높일 때, 펜션 객실 뒤쪽에다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들었다. 잘 보이지 않게끔 식물로 교묘히 가리고, 위쪽엔 쪽문과 자물쇠도 설치했다.
“아. 그 이상한 토끼.”
JE는 펜션 객실이 아닌 이해원의 집에서 구동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형은 안 자고 여기에서 뭐 해요?”
“그냥, 잠이 안 와서.”
심드렁하게 대답한 차남석은 테이블에 놓인 컵을 들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가려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도로 멈췄다.
“그런데요, 형. 할아버지 댁에 강아지 있지 않았어요? 이름이 ‘찐빵’이었나?”
“아…. 할아버지가 친구분한테 맡기셨어.”
“왜요?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사람들 불편하게 어떻게 데려오냐. 그것도 너한테 신세 지는 마당에.”
“전 오히려 환영인데요. 진작 말할 걸 그랬네요.”
차남석은 말없이 한율을 바라보다가 들었던 컵을 도로 내려놓았다. 하아. 한숨을 쉬곤 하는 말.
“그러잖아도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가시겠단다. 상황이 엄청나게 나빠질 것 같지 않으시다면서, 집이랑 밭, 찐빵이 놈이랑 친구분도 걱정된다고.”
어째 얼굴이 조금 어둡더라니.
“혹시 할아버지랑 싸웠어요?”
“싸우긴. 위험하니까 안 된다고 말린 것뿐이야. 할아버진 그대로 고집 피우시는 상태고.”
“아버지는요?”
“그 사람이야 여기가 더 안전해 보이니까 계속 있자고 하는데, 솔직히 아버지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날이 밝아도 상황이 괜찮으면, 잠깐 할아버지 모시고 다녀오는 건 어때요? 간 김에 찐빵이도 데려오고.”
“그래도 개가 불편한 사람이 있을 텐데.”
“밖에 마구 풀어놓진 않을 거잖아요. 그리고 대신이라기엔 조금 그렇지만… 해원이 형, 너무 싫어하지 않았으면 해요.”
차남석이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싫어한 적 없어.”
휙. 멀뚱멀뚱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달냥이 테이블로 올라갔다. 차남석의 컵 냄새를 맡더니 그대로 고개를 집어넣는다.
“별로 마음에 안 들 뿐이…. 야.”
할짝할짝.
“이건 숙소에서도 그러더니. 너 왜 자꾸 내 물 뺏어 먹냐?”
달냥은 안 들리는 척 계속 물을 마셨다.
할짝할짝. …므아앙.
한율은 달냥을 안아 들었다.
“미안해요. 그럼 잘 자요, 형.”
“…어.”
언덕 위 집으로 올라갔을 땐 계나리와 이해원, JE가 거실에 모여있었다. 한율은 현관 앞에 마중 나온 구동까지 안아 들었다.
“게이트가 우리 예상보다 약 한 달 빠르게 열렸잖아요. 만약 한국 게이트 너머의 시간이 이쪽과 비슷하다면, 정말 큰 위험은 아직 찾아오지 않은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게이트 초창기, 가장 처음 나와서 서울을 초토화시켰던 아주 큰 괴물. 그놈이 안 나왔어요.”
“……!”
세 사람의 눈이 놀라 커졌다. 계나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빠가 만든 결계 안에 갇혔다가 처리된 거… 아니었어요?”
“서울에 갔을 때 군의 괴물 잔해 수거 기록이랑 영상 기록을 살펴봤는데, 그만한 크기를 가진 날개 달린 괴물은 없었어.”
“시간이 비슷하게 흐르고, 저쪽에서도 게이트가 예상보다 일찍 열린 거라면.”
JE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이쪽으로 오는 중일지도 모른단 소리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웅.
“잠시만요.”
이우그룹 부회장의 메시지.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에서 파견 나온 자들이 최은수 집을 찾아, 현재 미스터리 홀 특별조사위원회 인원과 대치 중입니다.]
우웅.
-[자세한 보고는 아직이지만, 미국 측에서 ‘각성자 능력 실험연구소’란 말을 꺼냈다고 합니다.]
한율은 살며시 미간을 구겼다.
‘생각보다 상당히 빨리 움직이네.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벌떡.
“저 보호 결계 해제하고 올게요.”
차남석이 또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가 무례한 방식으로 방문하다 보호 결계에 걸리기라도 하면, 괜히 골치 아파질 수 있다.
그런 걱정에 결계를 해제한 게 무색하게도, 그들은 아침이 되어서야 WB래빗을 통해 펜션에 방문해도 되겠냐고 연락했다. 한율, 길우성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각성자 능력 실험연구소. 나중엔 실험이란 단어가 부정적으로 들린다며 각성자 연구소로 명칭을 바꿨지.’
본래 각성자 연구소는 게이트가 터지고 1년 후에야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계나리와 한율의 개입, 예상보다 이르게 열린 히말라야와 한국 게이트로 인해 미국의 대처 역시 빨라진 것.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몇 시에 온대요?”
길우성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따라 끄덕.
“어려운 말은 써한이 통역해주겠지, 뭐.”
길우성은 어제부터 ‘나도 초능력 갖고 싶다’ 노래를 불러댔다. 그러니 각성 능력 연구 이야기를 듣는다면 혹할 가능성이 크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길우성의 능력은 게이트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각성하지 않을뿐더러, 한국도 각성 가능성이 있는 1130 증상자들을 방치하진 않을 테니.
‘이우그룹이 제대로 일한다면 말이지. 어쨌든, 이번 기회에 가볍게 안면을 트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그러나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 인물들이 오기로 한 시각. 문제가 발생했다.
[저희 좀 도와주면 안 될까요? 대피소도 정원 초과고, 갈 곳도 마땅치 않아서요. 정 안 되면 우리 아이 화장실만이라도 쓰게 해주세요! 부탁할게요! 네?]
[우리 가족 정말 다 한율 씨 팬이에요! 드라마도 재밌게 봤어요!]
[아줌마, 아저씨! 거짓말하지 말아요! 팬은 무슨…! 대피소가 한두 군데에요? 괜히 대피소에서 지내기 불편하니까 뻔뻔하게 빌붙으려고 온 거잖아!]
[학생들은 집 없어? 부모님이 걱정 안 해?]
[인터넷으로 보니까 부지가 넓어서 텐트 쳐도 되겠던데. 어떻게 안 될까요?]
[어스래빗 멤버들 여기에 있는 거 맞지?]
차칵차칵.
[잠깐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잠깐이면 됩니다!]
어제 뉴스를 보고 ‘돈 많은 유명 연예인이면 당연히 우릴 도와주겠지’ 이런 생각을 품고 펜션 주소를 찾아 몰려온 사람들, 극성팬들과 국내외 기자들.
워낙 많은 사람이 몰려와, 까마귀들도 오늘은 담에 나란히 앉아 주시만 하고 있었다.
CCTV 모니터가 놓인 관리실. 쉴 새 없이 초인종을 누르는 이 사람들을 어떡해야 하나, 난감해하는 매니저 허진영 옆에서 조유찬이 한숨을 쉬었다.
“문 살짝만 열어도 난리 나겠는데.”
“한율이랑 애들 이미지 생각하면, 계속 이대로 무시하는 건 안 좋을 것 같은데. 어떡하죠?”
“제가 말할게요.”
“한율아.”
스피커에서 나오는 바깥 소란과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한율은 대문 초인종과 연결된 수화기를 들었다.
달칵. 응답하는 신호가 들리자 모니터 속 사람들이 일제히 그쪽을 쳐다본다.
“여기까지 찾아오신 분들께 죄송합니다만, 따로 도움 드리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양평에도 아직 정원이 남은 국가 지정 시설이 여럿 있으니 그쪽으로 가서 도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달칵. 일방적 의사전달 후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멍하니 있던 불청객 몇 명이 다시 초인종을 마구 눌렀다.
[우리 아이 화장실만이라도 쓰게 해주면 안 될까요? 급해서 그래요!]
[한율 씨 맞죠? 한율 씨, 잠깐 얘기 좀…!]
“이젠 응답하지 말고 무시하세요.”
조유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겠어? 도와달라고 찾아온 사람들 쫓아냈다고, 인터넷에다 과장 섞어 욕해댈 인상들인데.”
“게이트 방어선이 초반보다 뒤로 물러나긴 했죠. 날아다니는 괴물, 방어선을 뚫고 도망치는 괴물 수도 늘어나고 있고. 하지만 피해 범위를 아무리 넓게 봐도 아직 강서구 주변이잖아요. 서울에도 안전한 곳이 있는데 양평 구석까지 와선.”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드는지, 불청객들의 얼굴이 점점 짜증이나 화로 붉어진다. 우는 아이들을 CCTV 앞에 내미는 부모도 있었다. …극성팬으로 보이는 몇몇 여자애들은 좋아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고.
“바로 앞에서 괴물에게 쫓기거나 정말로 힘든 상황이면 모를까. 타인의 호의부터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 도와주고 싶지 않네요.”
조유찬은 잠시 놀란 눈으로 한율을 바라봤다가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 선이 분명한 애였지.’
“하지만 조금 곤란하네요. 이대로 계속 안 비켜주면 손님들이 들어오지 못하는데.”
“손님들 들어오는 틈에 같이 들어오려는 사람도 있겠지. 경찰… 부를까?”
“아니요. 경찰도 굉장히 바쁠 텐데 이 구석진 곳까지 부르는 건 미안하잖아요. 시골이라 인력도 적을 테고.”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데서 만나기로 하고, 뒷문 통해서 조용히 나갈게요.”
잠시 후. 한율은 길우성과 함께 언덕 계단을 올랐다.
철컹. 자물쇠를 잠그자, 길우성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와, 문 감쪽같이도 숨겨놨네. 그런데 이렇게 잠가버리면 펜션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나오라고.”
“해원이 형이랑 호 형한테 여분 열쇠 있어.”
문은 철창 간격이 넓어, 안쪽에서도 자물쇠를 잡아서 열 수 있었다.
“그렇구먼. 약속 장소까진 어떻게 갈 거야? 지은 씨나 해원 선배님 차 빌려서?”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 사람들과는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나루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따라와.”
한율은 이해원의 거처로 걸음을 옮겨, 잠긴 차고 문을 열쇠로 열었다. 차고엔 이해원과 JE의 차, 그리고 여분으로 구매해 둔 픽업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길우성이 황당한 소리를 냈다.
“여기 해원 선배님 집 아니었어?”
“소유주가 나야.”
삑.
“타.”
“이 트럭도 네 거냐?”
“어.”
“오우….”
강이 흐르는 나루터.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나루터 정자 근처엔 어린애들이 놀고 있었다. 까르륵거리는 천진한 웃음소리엔 게이트와 괴물들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길우성이 중얼거렸다.
“뉴스랑 달리 평화롭네.”
밤새 게이트 방어선에선 수십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중경상자는 천 단위를 넘었으며, 경제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다.
한율은 주위를 살폈다. CCTV로 확인한 게이트 조사위원회 차량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상 그들이 더 일찍 도착했어야 할 텐데.
“야, 써한.”
“왜.”
“우리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보며 길우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우울해지는 표정과 목소리.
“원래라면 우리 오늘, 보이는 라디오에 나가서 홍보하고, 이프림이랑 팬미팅 하고, 밤이 되면 남석 씨가 나간 <너의 집> 본방 사수하다가 졸면서 <락뮤닷>에 출근하고 그랬을 텐데….”
“…….”
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길우성만이 아니라 다른 멤버 모두 ‘이번’엔 평범한 일상으로 쉽게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단 짙은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될 걸 알기에, 할 말이 없었다.
길우성의 불안에 공감하는 척 입에 발린 소리도 하기 싫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