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프림한테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모습이 많은데….”
우웅. 마침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율은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서한율입니다.”
또렷한 한국어가 돌아왔다.
-[나루터엔 이목이 많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카페를 빌렸습니다. 그곳으로 와주시겠어요? 주소 보낼게요.]
“네, 그러죠.”
전화를 끊고 시동을 걸었다. 길우성이 미소를 지으며 나루터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그들이 있는 것도 모르는데 말이다.
“언제나 건강 하렴, 얘들아.”
“…….”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에서 나온 인원은 셋이었다.
작년 12월 서울 최초 게이트가 발생했을 때 한국에 들어왔다던 조쉬는, 이틀 전 생긴 게이트와의 차이점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두 분, 미국 1130 증상자 협회 뉴욕지부의 애니 크루즈와 만난 적 있죠? 현재 그 협회에서도 이번 한국 증상자들의 초능력 각성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거든요. 혹시 최근에 연락한 적 있나요?]
재미교포 김민지가 길우성에게 통역을 해주었다. 길우성이 한 박자 늦게 영어로 대답했다.
[애니와의 연락은 써한… 아니, 한율이 맡고 있어요.]
[워낙 정신이 없어서 확인을 못 했는데. 어쩌면 애니의 메일이 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정신이 없을 만하죠. 어쨌든 우리 게이트 조사위원회에서도 1130 증상자의 새로운 힘에….]
그 뒤론 충분히 예상했던 용건이 이어졌다. 미 정부에서 각성자 능력 실험연구소를 설립하자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데, 연구소가 만들어진다면 두 사람에게 협조를 부탁하고 싶다고.
[어제 두 사람의 인터뷰를 봤습니다만, 아직은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130 증상자’란 말이 처음 나왔을 때 누가 그들에게 초능력이 생기리라 상상이나 했나요? 당신들에겐 아직 미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믿고 연구해서 길을 찾도록 돕는 게, 각성자 능력 실험연구소의 역할이 될 겁니다.]
[……!]
길우성도 예상대로 눈을 빛냈다.
한율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취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게이트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이상, 조쉬 당신의 말대로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는 이상… 오히려 한국을 쉽게 떠날 수 없습니다.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할 문제 같네요.]
이는 길우성에게도 들려주는 말이었다.
한율의 말은 김민지가 통역해주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열심히 해석하던 길우성이 뒤늦게 입을 벌리며 한율을 바라보았다.
‘무턱대고 건너갔다가 정작 우리나라를 도울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대충 이런 깨달음을 얻은 얼굴이었다.
조쉬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네, 당연하죠. 천천히 생각해보고,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해주세요.]
[네. 만나서 반가웠어요.]
조쉬, 김민지와 차례로 악수한 한율은, 내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머지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게이트 조사위원회에 아는 얼굴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건만, 정말로 보게 될 줄이야.
[만나서 반가웠어요, 찰리.]
찰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악수에 응했다.
[저도요.]
* * *
펜션 관리동 로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강보배는 핸드폰을, 차남석은 삐딱하게 앉아 TV 뉴스를 보고 있었다.
원래 차남석은 오늘 할아버지와 함께 남양주에 다녀오려고 했으나, 대문 앞 불청객들 때문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차를 빼는 틈에 멋대로 들어올 수 있어서.
강보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해외 1130 증상자가 많대.”
“초능력 얻을 수 있을까 봐?”
“응. 아무래도 히말라야는 가기 힘드니까. 그리고 히말라야 쪽엔 아직 초능력이 생겼다는 사람 얘기도 없고.”
“몇천 명에 한 명꼴이니 없을 법도 하지. 어쩌면 힘이 생기기 전에 죽었을지도 모르고.”
“응…. 그런데 남석이 너 무슨 고민 있어? 아침부터 좀 심각해 보이던데.”
뉴스에선 정부 대변인이 초능력이 생긴 1130 증상자들에게 섣불리 힘을 사용하거나 시험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 한 1130 증상자가 대피소 지붕을 박살 내서 인명 피해가 발생했는데, 그것 때문인 듯했다.
차남석이 뉴스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넌 우리가 다시 무대에 오를 가능성이 몇 퍼센트라고 보냐?”
“글쎄….”
“난 최소 몇 년은 어렵다고 본다. 우리나라가 이번 위기를 잘 막아낸다 해도, 다른 나라 게이트가 몽땅 열리면 지구 전체가 위험해질 테니까.”
강보배는 차남석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속단하기엔 이르지 않을까? 강한 초능력을 지닌 사람이 한둘씩 생겨나고 있고, 무엇보다 게이트 지도가 있잖아. 우리나라처럼 갑자기 게이트가 열리는 걸 봤으니 다들 잘 대비하면….”
“나.”
차남석이 고개를 돌려 강보배를 바라보았다.
“입대 신청 고민 중이야. 이대로 무기력하게 평화로워지기만을 바라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
“……!”
툭. 놀란 강보배의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조용히 로비로 들어오던 계나리의 손에서도 과자 상자가 떨어졌다. 털썩.
‘남석 오빠가 또…?!’
같이 가요
도로를 달리는 미 대사관 외교관 차량.
곧 만날 다른 1130 증상자 자료를 살피며 조쉬가 말했다.
“서한율이란 친구, 분위기가 참 독특하지 않았어요? 그 ‘파랑 요정’ 영상처럼.”
김민지가 동감을 표했다.
“네. 단순히 어른스럽다고 하기엔 분위기가 묘하긴 하더라고요. 보통은 길우성이나 최은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데 말이죠.”
“으음….”
최은수 이름이 나오자 조쉬는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최은수한테 꼭 협조 약속을 받고 싶은데. 힘들까요?”
“어제 보셨잖아요. 우리가 찾아가자마자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바로 와서 끼어든 사람들. 본인을 포함해 다른 사람까지 감쪽같이 감출 수 있는 능력이면… 여러 비밀스러운 일도 가능하단 거니까 한국 정부가 순순히 데려가도록 두지 않을 것 같아요.”
김민지는 작게 한숨을 쉰 뒤 덧붙였다.
“다른 나라에서도 주목하고 있고요.”
묵묵히 운전하던 찰리가 입을 열었다.
“한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각성자들을 통제하기 전, 일단 최은수를 미국으로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어떻게요?”
“인기 많은 K-POP 아이돌이니, 그 점을 잘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 * *
한율과 길우성은 밖으로 나온 김에 양평 여기저기에 있는 마트와 편의점을 돌아다녔다.
주말 동안 전국 여기저기에서 사재기 현상이 일어났으나, 군인들이 게이트 방어선을 잘 지키는 데다 평일이라 그런지 조금씩 물량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인스턴트는 진열하기 무섭게 싹 쓸어가네. 야, 써한. 수박 있다. 수박 사 갈… 히익, 가격이 왜 이래!”
그렇게 식료품과 군것질거리를 잔뜩 사서 펜션으로 귀환. 펜션 정문이 있는 골목 어귀 옆을 지나며 확인했더니, 아직도 낯선 차 여러 대가 줄줄이 세워져 있었다.
사람들 눈에 띌까, 몸을 낮췄던 길우성이 다시 쑥 올라왔다.
“영업 중단한 펜션에서 왜들 저러실까…. 응?”
길우성의 핸드폰에서 크리스탈 래빗의 발랄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냐, 곰순. 거의 다 왔다. …뭐?”
길미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남석이, 군대 가겠대에!]
“뭐라고?! 싸움도 못 하는 양반이 가긴 어딜 가!”
“…….”
한율은 저도 모르게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5년 전 WB래빗 엔터 앞 편의점에서 차남석과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을 때, 그에게 이런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났다.
게이트가 열리면, 각성이 되든 안 되든 욱해서 용감하게 싸우다 가장 먼저 죽을 것 같은 인상이라고.
‘그럼 어젯밤에 어두운 얼굴로 혼자 나와 있던 것도, 단순히 할아버지와 다퉈서가 아니라.’
길우성이 통화를 끊고선 속사포처럼 말했다.
“야, 써한. 긴급 사태다. 물건은 나중에 옮기고, 일단 남석 씨부터 잡아서 말리자. 이 인간 입대 선언했단다.”
차남석이 답답한 얼굴로 말했다.
“당장 입대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신청 고민한단 말에 다들 왜 이래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가긴 가겠다는 거잖아. 안 돼. 이 형은 허락 못 한다.”
“언젠가 가긴 가야 하는 곳이잖아요.”
박가람이 허리에 두 손을 올리며 호통쳤다.
“갈 거면 호 형부터 가고 나서! 어디 위아래도 없이 동생이 건방지게!”
“입대에 그런 순서가 어딨어요.”
“남석아.”
강보배가 크게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군대는 나중에 나랑 같이 가자. 이건 회사와도 상의해야 할 문제잖아. 상황이 나아지면 우리 앨범 활동 재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
“아니, 그러니까 지금 당장 가겠다는 게 아니라고….”
“그럼 최소한 1년…. 아니, 2년 동안은 안 가겠다고 약속해.”
“…….”
강보배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시선을 피해?!”
“형 지금 입대하면 100% 죽어요.”
관리동 로비로 들어가자마자 어떤 대화 중인지 파악되었다.
쿵. 한율은 테이블에다 수박 상자를 내려놓곤 말을 이었다.
“가긴 가더라도, 최소한 괴물을 상대하는 전투 방식과 체계가 안정적으로 잡힌 뒤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남들도 다 그렇게 미루고 피하면.”
“초능력 각성자들이 채울 거예요. 사람이 없어도 형이 그 자리에 들어갔다가 죽을 의무도 없고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생이 이렇게 말하자 조금 감정이 상했는지, 차남석이 퉁명스레 물었다.
“왜 자꾸 내가 죽을 거라 단정하는데.”
한율은 정말 몰라서 묻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형 싸움 못 하잖아요.”
“…….”
길우성이 울컥하는 차남석을 덥석 잡았다.
“어이쿠, 남석 씨. 동생한테도 지면 무슨 창피야. 얌전히 있어. 워, 워.”
라이언은 그러거나 말거나 수박을 품에 안았다.
“이거 내가 잘라도 돼?”
매니저 조유찬은 테라스에서 오 팀장과 통화하고 있었다.
펜션에 찾아와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이 인터넷에다 악의적인 과장을 섞어 떠든다는 소식, 원래 어제 진행되었어야 할 서울 팬미팅과 16일 부산 팬미팅 취소 환불 건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나라 상황이 어떤지 알면서요?”
-[네.]
한율을 패션쇼에 초대한 이탈리아 명품 회사에서 예정대로 전세기를 보내기로 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국내 체류 중인 이탈리아인들도 함께 탈 예정이라, 그 부분은 양해를 구하고 싶다네요.]
“그 말씀은.”
-[동행 가능 인원 딱 한 명. 경호원은 그쪽에 도착하는 즉시 붙여주고.]
조유찬은 머뭇거렸다.
어쩌면 이번 패션쇼가 한율과 함께 하는 마지막 스케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설명하기 힘든 아쉬움과 슬픔이 밀려왔다.
다른 항공권을 구하는 건 어려울 테니.
“팀장님이… 가실 거죠?”
-[무슨 소립니까. 당연히 유찬 씨가 가야죠.]
“네? 하지만 전 세계 셀럽이 모이는 명품 패션쇼잖아요. 중요한 스케줄이니 팀장님이 가셔야죠. 영어도 저보다 잘하시고, 기대도 많이 하셨잖아요.”
-[영어는 한율이가 더 유창하죠. 유찬 씨도 기본 이상은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중요한 스케줄이니, 한율이한테 익숙한 사람이 함께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오 팀장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실렸다.
-[유찬 씨도 아쉬움 남기고 싶지 않잖아요.]
조유찬은 입을 꾹 일자로 다물었다. 울컥 올라오는 복받친 감정을 겨우 삼킨 뒤에야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나 감동의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사이좋게 수박을 먹을 때였다.
[속보입니다. 게이트 방어선이 무너졌습니다.]
* * *
게이트 방어선이 무너졌다.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극심한 불안에 휩싸였으나, 일각에선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게이트가 열린 곳은 탁 트인 평지가 아닌 도심 한복판 상공이었다. 아무리 최신 무기를 동원하고 병력을 곳곳에 배치해도 지형적 불리함은 어쩔 수 없었다.
괴물들도 이를 본능적으로 알았는지, 복잡한 건물 사이로 빠져나가거나 빈집, 하수구 등에 숨어있다가 밤이 되자 수명산을 넘어, 부천시와 양천구 쪽으로 흩어졌다.
“한두 마리야 실수로 놓친 거라 넘길 수 있지만, 이제 백 단위가 넘어가니. 여기에….”
이해원의 거처. 계나리가 노트북과 TV를 연결해 영상을 재생했다.
‘저건.’
한율은 미간을 구겼다.
이우그룹 부회장이 보내주었던 히말라야산맥 게이트 영상. 거기에 나온 놈과 똑같이 못생긴 괴물이 장갑차를 뭉개며 시퍼런 불을 뿜어대고 있었다. 채찍처럼 쭉 늘어나는 여러 다리로 다른 전차나 드론을 후려치고, 건물을 무너뜨려 그 아래에 있던 군인들을 매몰시킨다.
[쿠웅!]
축적된 충격과 괴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도로가 무너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걸 집어삼킨 거대한 싱크홀의 발생. 그러나 괴물이 아랑곳하지 않고 파괴 행위를 계속했다.
“가죽이 굉장히 단단해서 웬만한 화기는 먹히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결국 군이 주변 병력을 물리고 아주 강한 미사일까지 썼는데….”
계나리가 고개를 저으며 다른 영상을 재생했다.
“하필 그사이에 게이트에서 똑같은 놈이 셋이나 더 떨어지고, 그것들을 상대하는 사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다른 괴물들에 속수무책. 방어선이 완전히 뚫려버린 거죠.”
“나 잠깐….”
박가람이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유호와 JE도 두 손으로 얼굴을 덮거나 고개를 돌렸다.
“…….”
“하…….”
영상엔 사람이 죽는 모습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처절한 비명도.
아무리 마법을 배우고 있어도 지금껏 평범하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아온 아이들이었다. 충격을 받는 건 당연한 일.
“…….”
그러나 한 사람만은 영상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율은 심각한 얼굴로 영상 속 괴물을 노려보는 이해원을 힐끗하곤 핸드폰을 꺼냈다.
우웅, 우웅.
이우그룹 부회장의 전화.
그는 한율이 전화를 받자마자 용건부터 꺼냈다.
-[한 번 더 도와줄 순 없습니까? 정부와 국회 모두 아주 난리입니다.]
“미안하지만 내 힘은 무한이 아니라서요.”
계나리가 영상을 끄고 뉴스를 조용히 틀었다. 괴물들의 습격으로 초토화된 수산물 도매시장 내부가 보였다. 뜯어 먹히다 만 채 죽은 해산물이 여기저기 널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