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너머로… 상당히 큰 괴물의 형상이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괴물 중 가장 큰 것 같다고요.]
계나리가 말한 그놈인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워낙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게이트로 인한 스트레스 탓에 제가 요즘 정신이 없습니다. 이러다 실수로 당신의 이름을 흘리진 않을까 걱정입니다.]
“협박하시는 건가요?”
-[아직 보도되진 않았지만, 몇 시간 사이에 발생한 사망자가 3백 명을 넘어섰습니다. 당신 나이 또래 젊은 군인들이, 3백 명 넘게 죽었단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감정에 호소할 인간이 아닌데. 저주보다 무서운 무언가를 느꼈거나 더한 협박이라도 받았나?
-[물론 당신이 게이트를 막아내는 동안 살린 목숨이 수천 배 더 많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 외엔.]
뚝. 더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한율은 부회장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전화를 끊고 일어났다.
그때 박가람이 비틀비틀 화장실에서 나왔다. 조금 전에 먹은 걸 모두 게워냈는지 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왜 일어나? 펜션으로 내려가게?”
“서울 좀 다녀오려고요.”
“뭐?!”
끼웅.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구동이 어디 가냐는 듯 한율의 옷자락을 잡았다.
한율은 TV 속, 죽은 생선이 둥둥 뜬 수조를 보며 대답했다.
“간단히 실험해 볼 게 떠올라서요. 해원이 형.”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이해원이 뒤늦게 한율을 바라보았다.
“…어?”
“형도 같이 가요.”
“……!”
서울로 가기 전, 몇 가지 물건과 달냥을 챙길 겸 한율은 펜션으로 내려왔다. 그러다 손에 차 키를 쥔 채 객실에서 나오던 차남석과 마주쳤다.
“형 어디 가요?”
“할아버지 집에. 상황 더 안 좋아지기 전에 얼른 가서 찐빵이 데려오려고.”
“혼자요?”
“너까지 뭐라고 하지 마라. 안 그래도 개 때문에 손자를 위험하게 만드는 못된 노인네 만들 거냐고 노발대발하시는 할아버지, 겨우 달래드리고 나온 거니까.”
한율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차남석을 바라보았다.
“게이트 상황 직접 보고 싶어서 개 핑계 대고 나가는 건 아니고요?”
차남석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휙, 시선을 피한다.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무기력하게 평화로워지기만 바라기 싫다고 군대 간다는 사람이. 그리고 형, 평소에 거짓말 안 해서 이럴 때 되게 티 나거든요? 아무튼 저한테 들킨 이상 그대론 못 가요.”
한율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제처럼 여기는 멤버들이 안전해야, 길우성도 허튼 생각을 쉽게 하지 않을 테니.
“남석이 형이 남양주 집에 다녀온다는데, 형도 같이 가서 딴 길로 새지 않도록 감시해줄래요?”
흔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응! 알았어, 하뉼!]
희미하게 들린 목소리에 차남석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필이면 그놈한테 전화하냐.”
잠시 후. 한율은 차남석과 라이언이 남양주로 출발하고 나서야 차에 탔다. 이해원이 달냥이 든 이동 가방을 품에 안고 조수석에 올랐다.
아직도 정문 앞에는 안에 들여보내 달라며 버티는 사람들과 기자들이 있었지만, 차가 나가자마자 조유찬과 허진영이 수동으로 대문을 얼른 닫으며 불청객의 침입을 차단했다.
“기자 차가 따라오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가면서 따돌릴 기회가 많을 테니.”
이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 가방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달냥을 쓰다듬다가 묻는다.
“그나저나, 서울에서 실험해 볼 게 뭔지 물어봐도 돼?”
한율은 담담히 대답했다.
“마나 채취요.”
도우러 왔습니다
한율은 게이트 괴물과 접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본래 세상, 지구인 사이에 잠입했을 때 자료를 본 적이 있었지만, 언어 문제도 그렇고 양이 워낙 많아 영상만 잠깐 훑었다.
지구로 넘어올 땐 시간 마법을 함께 사용한 터라 괴물과 스칠 일이 없었고.
그래서 게이트를 보호 결계로 감쌌을 때 쏟아져나오던 괴물과 마주한 게 처음이었다.
게이트 자체는 지겹도록 관찰했지만 말이다.
“마나 채취? 설마… 괴물한테서도 마나를 얻을 수 있는 거야?”
“일단 그걸 알아보려고요.”
괴물의 마나를 추출해 마력으로 정제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예전부터 생각해본 일이었다. 그리고 현재 서울엔 군에게 두들겨 맞고 뻗은 놈이 한둘이 아닐 터.
‘만약 놈들에게 뽑아낼 수 있는 마나가 쓸만하다면? 인간처럼 목숨을 잃을까 조심할 필요도 없으니, 어쩌면….’
한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도와줄 거죠, 형?”
“…응, 당연하지.”
이해원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달냥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실험에 달냥이도 필요해? 위험하지 않을까?”
므앙.
“실험 말고 훈련 겸해서 데려가는 거라 괜찮아요.”
게이트 방어선은 김포와 인천 계양구 일부, 부평구, 양천구로 확대되었다.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도 훨씬 넓어져, 반대편 차선은 뒤늦게 대피하는 차들로 빽빽했다. 반면, 한율의 차가 달리는 서울 방향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이던 이해원이 걱정을 표했다.
“영등포랑 구로도 출입 통제됐다는데. 어떻게 들어갈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다 방법이 있으니.”
한율은 이우그룹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금 전 말하는 도중 전화를 뚝 끊어서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부회장은 정중히 용건을 물었다.
-[…네, 그 정도야 쉽죠. 그럼 제 부탁은.]
“하시는 거 봐서요.”
뚝.
잠시 후, 올림픽대로에서 여의도와 영등포로 갈리는 지점 앞. 차량 통제를 위한 바리케이드와 경찰차가 도로를 막고 있었다.
무장한 경찰이 정지 신호를 보내며 다가왔다.
똑똑.
한율은 창을 내리며 인사했다.
“수고하십니다.”
한율을 보곤 순간 당황해하는 경찰. 그러나 곧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게이트가 열린 이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굉장히 고생했는지, 경찰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도 시뻘겋게 충혈되었고.
“이곳부턴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입니다. 여기선 유턴할 수 없으니, 여의도 방향으로 가신 뒤 지시에 따라 반대로 돌아나가십시오.”
“죄송하지만 제가 게이트 방어선으로 가야 해서요.”
유창한 ‘한국어’에 놀란 걸까. 경찰은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가 미간을 구겼다. 그의 눈에 짙은 경계심이 서렸다.
“출입 허가증은 있으십니까?”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 통제에 따르지 않고 민폐를 끼치며 돌아다니는 이가 많은 모양이었다. 당장 너튜브만 봐도 ‘게이트 방어선 실황’ 이란 제목으로 군 작전 지역에서 라방하는 인간들이 있기도 하고.
“그건 아직 없는데….”
두두두. 근처를 돌던 헬기의 소음이 대화를 방해했다. 한율은 직접 출입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그때였다.
삐빅. 경찰들의 무전기가 일제히 울렸다.
“……!”
무전을 듣고 놀라 똑같은 방향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한율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헬기 기관포에 격추된 괴물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크기와 각도, 날아오는 속도로 보아, 대로 옆 건물과 충돌하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누군가가 외쳤다.
“전원 머리 숙이고 엎드려! 충격에 대비해!”
옆에 있던 경찰이 한율을 잡았다.
“들어가서 숙이…!”
한율은 괜찮다는 미소를 짓곤 그의 옆을 지나쳤다.
날개 달린 뱀장어처럼 생긴 거대한 괴물이 건물과 충돌하기 직전. 한율의 가벼운 손짓에 강렬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콰앙! 괴물과 충돌한 건물과 펜스, 나무 따위가 박살 나며 온갖 파편이 날아들었다. 끼이익, 쿵! 쿠웅! 반대편 차선에서 느릿느릿 달리던 차들이 굉음에 놀라 한꺼번에 멈추거나 부딪쳤다.
그러나 피해는 그뿐.
아무런 충격이 이어지지 않았다.
“……?”
머리와 몸을 납작 숙였던 경찰들이 벙벙한 얼굴로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한율을 잡았던 경찰도 멍하니 입을 벌렸다. 가까운 하늘에 있던 헬기도, 괴물을 격추하고 뒤쫓아왔던 경전투 헬기도 놀란 듯이 그 자리에 멈췄다.
“……?!”
콰드드득. 우득.
본래라면 이곳을 덮쳤어야 할 엄청난 양의 파편이 거대한 회오리바람에 갇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한율은 그것들을 박살 난 건물 대지에다 살포시 쌓았다.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써서 천천히.
쿵, 쿠웅. 촤르륵.
경찰이 덜덜 떨면서 한율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 어떻게…….”
한율은 미소 지었다.
이런 상황에도 핸드폰부터 꺼내 촬영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현재 그는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 아닌, 로건 워커의 모습이었으므로.
“1130 각성자입니다. 게이트 방어선을 돕고 싶어서 왔어요.”
한율과 이해원은 경찰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무난하게 게이트 방어선으로 진입했다.
휘잉. 두두두. 쿠웅!
방어선 안은 전쟁터에서 들릴 법한 온갖 소리로 가득했다. 처음 지구에서 눈을 떴을 때가 생각날 정도였다.
“아. 1130 초능력자….”
무전으로 연락받았는지,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세워놓고 지키던 군경은 한율과 이해원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개중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도.
그러나 그들에게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 게이트 악몽이 얼른 끝났으면 하는 바람.
“이곳이 현재 게이트 방어 지휘부입니다.”
앞장선 경찰차를 따라 도착한 곳은 구청이었다.
한율과 이해원이 차에서 채 내리기도 전, 앞에서 기다리던 군인이 절제된 동작으로 다가와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위 정상욱이라고 합니다.”
“제임스입니다. 이쪽은 제 친구 이해원. 잘생겼죠?”
“안녕하십니까.”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오시….”
건물 안으로 안내하려던 정상욱이 무언가를 발견하곤 멈췄다.
“그 가방 안에 있는 건 혹시….”
이해원이 품에 안고 있는 가방. 공기가 통하도록 촘촘한 그물 형태로 된 작은 창 너머. 달냥이 울었다.
므앙.
“고양입니다.”
“아, 고양이….”
“네, 고양입니다.”
고양이를 이 위험한 곳에 데려와? 정상욱의 눈에 순간 이런 분노가 돈 것 같았으나, 한율은 모른 척 경찰들에게 인사했다.
“여기까지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경찰들도 가방에 든 게 고양이란 걸 알고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으나, 힐끗힐끗 보다가 몸을 돌렸다.
커흠. 정상욱이 헛기침했다.
“어쨌든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십시오. 가는 동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우그룹 부회장더러 ‘미스터리 해커 집단 일원인 제임스’의 신원을 알아서 꾸며놓으라고 했다. 방어선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잘 처리하란 말도. 그래서인지 정상욱은 한율이나 이해원에게 신분 증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도 제임스를 미스터리 해커 집단의 일원이라 알고 있을 테니, 당연한가.’
정부 측에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나중에 부회장에게 직접 듣기로 하고, 한율은 정상욱에게 방어선 상황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그리고 게이트 방어 지휘부 책임자인 소장 김관식과 만나 악수했다.
‘아무리 강한 각성자라 하더라도 오자마자 책임자와 대면이라.’
김관식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이었으나, 한율을 바라보는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위’에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답은 한율보다 달냥이 빨랐다.
므앙.
잠시 후. ‘제임스’와 이해원은 게이트 방어선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 * *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없어졌다뇨?”
남양주. 본가가 있는 마을을 찾은 차남석은 당황했다.
강아지 ‘찐빵’을 맡아주었던 이웃집 할머니가 면목 없는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미안하구나, 남석아….”
그녀의 아들인 중년 남성이 변명했다.
“그게…. 주인이 안 보여서 그런지 굉장히 낑낑거리더라고. 그래서 너희 할아버지 댁으로 산책을 시켰는데 아, 이놈이 갑자기 파다닥 달려가더니 그대로….”
“정말 미안하다, 남석아. 잘 돌봐주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해놓고선 잃어버리기나 하고….”
어릴 적부터 워낙 잘해주신 분이라, 차남석은 차마 그녀 앞에서 한숨을 쉬지 못했다.
“어쩔 수… 없죠.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 우리 집 쪽에서 잃어버렸다고 하셨죠?”
할머니의 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횡설수설했다.
“어. 정말 미안하다. 우리도 워낙 게이트네 뭐네 그것 때문에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밥 구멍… 아니, 목구멍에 밥도 제대로 안 들어가다 보니 미처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했어.”
“아니요, 괜찮아요. 이런 불안한 시국에 남의 집 개를 돌봐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정말 미안하다, 남석아….”
“괜찮다니까요.”
차남석은 연신 사과하는 이웃집 할머니를 가볍게 안아드리곤 고개를 숙였다.
“그럼 몸조심하세요.”
“그래. 너도 꼭 몸조심해야 한다. 학생도요.”
멀뚱멀뚱 서 있던 라이언이 웃으며 꾸벅였다.
“넵! 할머니도 건강하세요!”
두 사람은 도로 차에 탔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라이언의 얼굴이 도로 뚱해졌다.
“저 아저씨 수상해. 할머니한테선 진심 느껴졌는데, 아저씨는.”
“알아. 나도 느꼈어.”
찐빵은 유기견 보호소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걸 할아버지가 데려와 치료해주며 키워서 그런지, 완전히 할아버지 껌딱지였다. 어디를 가든 늘 쫓아다녔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가 자신을 남에게 맡기고 사라지자 큰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할아버지를 찾아 나선 걸지도.
‘집에서 할아버지 냄새가 나는 물건, 그리고 그놈이 좋아하는 간식을 챙겨서 찾아보는 수밖에.’
실은 여유가 생기면 라이언을 설득해 서울 쪽을 둘러보고 가려 했건만.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차를 집 쪽으로 몰 때였다. 어? 창밖을 보던 라이언이 차남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야.”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