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율 씨.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은수, 게이트 방어선에 가지 않도록 한마디만 해주세요.]
-[같은 각성자이자 존경하는 선배가 하는 말이면 좀 들을 것 같아서요.]
-[부탁이에요...]
이우그룹 부회장에게 진은수는 건들지 말라고 말해두었다. 그렇다면 이건 진은수 본인의 의사.
‘아니. 정말 스스로 결정한 게 맞나?’
현재 게이트 방어선에 자원하거나 자원을 고민하는 각성자 대부분에겐 이런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각성 능력이 드러났으며 둘째, 벌써 그들을 영웅시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
보통 사람이라면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이용 가치가 있을 때와 비난받을 때만 공인 취급 받는 연예인이라면 높은 도덕심을 강요받는다. 하물며 아이돌은 인기만으로 쉽게 돈을 번다는 이미지가 있어, 요구하는 기준점이 더욱 높고.
자신이 게이트 방어선에서 활약하길 바라는 수많은 목소리가 닿는 듯한 느낌, ‘게이트 방어선에 내가 있었다면 누군가는 덜 다치지 않았을까,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하는 상상이 진은수를 압박하는 건 아닐까.
‘실제론 괴물들에게도 카모플라쥬가 통하는지,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지, 강도는 어느 정도 되는지 기본 실험부터 해야 방어선 투입 여부가 결정되겠지만.’
이우그룹 부회장에게 진은수를 건들지 말라고 한 이유는 계나리가 그녀를 신경 쓰는 것 같아서였다. 카모플라쥬 능력이 아까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오빠인 계마루가 진은수의 팬이라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둘 다일 수도 있고.
[네. 따로 연락해볼게요.]
이제야 고백하는 건데
진은수는 단톡방을 물끄러미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읽었다는 표시가 떴지만, 서한율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게 조금 아쉬웠다. 그렇다고 개인 톡을 보내자니 망설여졌다.
‘저 게이트 방어선에 합류하려고 해요, 선배님. …이렇게 말해서 뭐 어쩌게.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우웅.
퍼플아워 막내 송의연의 전화.
“응, 의연아.”
송의연은 다짜고짜 용건을 꺼냈다.
-[나 이대로 사람들한테 잊히고 싶지 않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아, 언니.]
“무슨… 소리야?”
흐윽. 송의연이 울먹거렸다.
-[내 아이돌 인생,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끝내고 싶지 않다고!]
“…….”
-[언니, 언니가 미국에서 온 초청 제안 싫다고 그랬다며? 왜? 어쩌면 우리가 무대에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잖아. 우리 퍼플아워, 이런 식으로 끝낼 거야? 그러고 싶어?]
“의연아….”
진은수도 왈칵 눈물이 났다. 어릴 적부터 언니인 호수처럼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고, 그래서 언니를 따라 기획사에 들어갔다.
현재 나이 스물하나. 인생의 절반을 아이돌이 되고자 노력하고 아이돌로서 살아왔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자신의 무대를 좋아해 주는 팬들의 모습에 다시 힘을 얻고 웃었다.
그렇기에 진은수 또한 다른 아이돌이 그렇듯, 점점 나빠지는 게이트 상황을 보며 다시 무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단 불안과 허무함, 슬픔으로 떨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이 와중에 고작 아이돌 못 하는 게 대수야? 이렇게 비난받을까, 티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하지만 뭐! 사람들이 ‘너는 왜 게이트 방어선에 합류 안 하냐! 너도 특별한 힘 생겼는데 왜 가만히 있냐!’ 이렇게 지껄여서 그래? 그거 다 개소리야, 무시해! 언니가 위험한 곳에서 싸우다 죽으면 자기들이 책임진대? 자기들이 뭔데 사지로 나가라 마라 강요하는 건데! 너도 나가서 싸우자, 총 쏘는 법 가르쳐주면 도망칠 새끼들이라고, 그거!]
한참 동안 씩씩거리던 송의연이 울음을 삼켰다.
-[…흐윽, 이기적이라고 욕먹으면 어때? 진은수 너한텐 우리보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더 중요해?]
“의연아.”
진은수는 눈물을 닦고선 말했다. 게이트 방어선 합류를 고민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게이트 방어선에서 죽은 한 군인이… 우리 굿즈를 갖고 있었대.”
-[……!]
“부적처럼, 품속에.”
전화기 너머로 송의연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내일 다시 전화할게.”
계속 팀 막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자신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진은수는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훌쩍. 눈물을 억지로 삼키곤 크게 숨을 내뱉었다.
‘정신 차리자, 진은수. 정신 차려. 약해지면 안 돼.’
그러고선 너튜브 게이트 방어선 실황 영상을 클릭하려 할 때였다.
우웅.
“……?!”
송의연이 다시 전화를 걸었나 싶어 핸드폰을 본 진은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이 쿵 뛰었다.
서한율의 초코톡 한 줄.
-[내일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날이 밝자 경찰은 어제 남양주에서 있었던 사건의 블랙박스 영상을 공개했다. 경찰들이 괴물들에게 공격당하는 장면은 일부 모자이크 처리해서.
게이트 방어 지휘부는 괴물들이 판 땅굴 내부, 미니 게이트가 있었던 곳을 촬영한 영상을 공개했다.
[김 기자. 땅속에 있던 괴물들을 혈혈단신으로 처리하고, 괴물들에게 잡혀갔던 경찰을 홀로 구조한 각성자가 있었다던데요.]
[네! 바로 어제 올림픽대로에서 추락하던 괴물과 충돌한 건물 파편을 모두 막아내는 영상으로 화제가 된 수수께끼의 영웅이 있었죠? ‘제임스’라고 이름이 알려진….]
이해원의 집.
뉴스를 보던 계나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법 폼이 딱 한율 오빠네요.”
JE도 동감을 표했다.
“네. 서한율 맞네요.”
쫑긋. 서한율이란 이름에 구동이 TV를 봤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JE를 돌아보았다. 서한율이 어디 있냐는 듯.
JE는 구동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서한율 이 자식. ‘로건 워커’였던 건 비밀로 하고 싶다며?’
그때 계나리의 핸드폰에서 어스래빗의 이번 신곡 후렴구가 흘러나왔다.
“넵! …네, 통화 가능합니당.”
전화를 받은 계나리가 JE를 보며 TV를 가리켰다. 서한율인 모양이었다.
“어…. 진은수 씨요? 아…. 음…. 넵, 준비할게요. 어디로 몇 시까지 가면 돼요?”
곧 계나리가 전화를 끊더니 심각한 얼굴로 JE를 돌아보았다.
“지은 씨, 저 연예인 만나요!”
“네?”
“퍼플아워 진은수 씨랑 가까이서 보게 됐다고요!”
“아, 네…. 축하드려요?”
계나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우왕좌왕 호들갑을 떨었다.
“으음, 뭐 입고 가지? 최대한 예쁘게 꾸며봤자 은수 씨 발끝에도 못 미치는 촌스러운 쌈닭 주니어 같겠지만, 아, 뭐 입지? 화장 어떻게 하지? 예쁜 옷 죄다 집에 버려두고 왔는데, 어떡하지?”
“그런데 은수 씨는 무슨 일로?”
“오빠가 직접 만나서 판단하래요. 진은수 씨가 게이트 방어선으로 가는 걸 가만히 두고 볼지, 아니면.”
게이트 방어선? JE는 놀란 얼굴 그대로 물었다.
“아니면?”
“오빠가 마요르카로 떠나고 없는 동안, 우리 전력으로 회유할지요.”
그때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며 인터폰 화면이 켜졌다.
유호나 박가람이 온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화면에는 어딘가 낯익은 한 청년이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 * *
오후. 차남석과 라이언이 격리된 종합병원.
병실을 찾은 한율은 두 사람에게 갈아입을 옷이 담긴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실검 3, 4위에 나란히 오른 거 축하드려요.”
“축하받을 일 맞아?”
그들을 취재하려는 국내외 기자들, 얼굴이라도 한번 보기 위해 몰려온 팬들 때문인지, 병원 측에선 별다른 문제가 보이지 않자 하루 만에 두 사람의 퇴원 결정을 내렸다.
앞서 게이트 방어선에서도 같은 종류 괴물에게 공격당한 군인들이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특별한 이상 증세가 없으니 괜찮을 거라며.
“나쁜 일로 오른 게 아니니까 축하받을 일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대표님 왔었는데.”
냉큼 옷을 갈아입으며 라이언이 웃었다.
“우리 이번에 실검 올랐는데 고기 안 사줘요? 물었더니 대표님 울었어. 혼나고 싶냐면서, 저거 주고 갔다?”
라이언이 가리킨 자리엔 한우 세트가 놓여있었다.
“펜션 식구들이랑 같이 나눠 먹으래.”
“나중에 영통으로 단체 감사 인사드려야겠네요.”
“그런데 서한율 너 혼자 왔어?”
“유찬이 형이랑 같이요. 오는 길에 형네 할아버지랑 마주쳐서, 함께 퇴원 절차 밟으러 갔어요. 아버진 어디 가셨어요?”
차남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아까 엄마가 와서 잠깐 얘기한다고 나갔는데 감감무소식이야. 할아버지 올 때까지 안 오면 버리고 가도 되고.”
“…….”
“뭘 그렇게 봐?”
“아뇨. 어제 일을 계속 곱씹으면서 밤새도록 또 입대 고민을 진지하게 한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덤덤해 보여서요.”
“…….”
입을 다무는 차남석 옆에서 라이언이 키득거렸다.
“역시 하뉼, 차남석 잘 알아. 어젯밤에 또 그래서, 지금 입대할 거면 아예 탈퇴하라 그랬어.”
“넌 가서 면허부터 따시지?”
“뭐하러? 계속 너 운전기사로 부려 먹으면 되는데?”
“어제는 딴다며.”
“내가 언제?”
“야 이 씨.”
함께 위험한 일을 겪었으니 사이가 더 좋아질 법도 하건만. 한율은 다투는 둘을 내버려 두고, 좌 대표가 주고 갔다던 한우 세트를 살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이렇게 비싼 고기를 준비하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찐빵인 괜찮대요? 언제 데려갈 수 있대요?”
“건강엔 별 이상 없는데, 혹시 모르니 며칠 더 지켜보겠다더라. 개가 그 괴물 종류를 문 건 처음이라 사람과 달리 다른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면서. 아, 나 가다가 잠깐 들르고 싶은 곳이 있는데.”
“어디요?”
“괴물한테 끌려갔던 경찰이 입원한 병원. 중환자실에 있단 얘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아서.”
“유찬이 형 오면 그때 형한테 말해요. 전 지금 약속 있어서 가봐야 하거든요.”
“약속? 누구랑?”
한율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어떤 각성자요.”
진은수와 만나기로 한 곳은 올림픽 공원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화실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더니 건물 주차장엔 이미 유호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한율은 그 옆에 자신의 차를 세워두곤 유호의 차에 옮겨탔다. 차에는 유호 말고 계나리도 있었다.
“어서 오세요.”
“남석이랑 라이언은 잘 퇴원했어?”
“네. 은수 씨는 왔어요?”
“응, 안에서 기다리고 있대. 기자들은 잘 따돌린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말라더라.”
“네.”
그럼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들어갈까. 손잡이를 잡으려던 한율은, 평소보다 더 예쁘게 꾸민 모습으로 딱딱하게 경직된 계나리를 보곤 고개를 기울였다.
“나리 씨, 어디 불편해요?”
“이제야 고백하는 건데요.”
계나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애한테 약해요.”
“……?”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가 끄덕였다.
“네. 그럼 들어갈까요?”
“앗, 아직 마음의 준비가…!”
화실은 건물 2층에 있었다. 대충 얼굴을 가린 채 건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 톡으로 전달받은 203호 초인종을 눌렀다.
삐릭, 덜컹. 바로 문이 열렸다.
연하게 화장한 진은수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인사는 안으로 들어간 뒤 나눴다.
“오랜만이야, 은수야.”
“네. 오랜만이에요, 선배님.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나올 때 힘들지 않았어?”
“오빠가 도와줘서 괜찮았어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유호와 인사를 나눈 진은수가 이번엔 한율에게 꾸벅였다. 한율도 가볍게 화답했다.
“네. 오랜만이에요, 은수 씨.”
그리고 이어서 간단한 안부 멘트를 하려 할 때였다. 휙. 고작 0.2초나 마주쳤을까. 진은수가 고개를 돌려 피하는 바람에 살며시 입을 다물었다.
“이분이 선배님이 말씀하셨던….”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반짝거리던 계나리가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평범한 고3 수험생인 계나리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활동명은 진은수, 본명은 최은수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와, 피부랑 목소리 대박. 진짜 예뻐요, 언니. 우리 오빠가 언니 팬이라 저도 영상 자주 봤었고, 예전에 제가 <뮤직센터> 방청 간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보다 이렇게 더 가까이에서 보니! 심장에 매우 안 좋네요.”
“헤헷, 감사해요. 그런데….”
계나리의 두서없는 주접에 쑥스러워하던 진은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개나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멍멍 개 씨 아닌뎅.”
“죄송해요, 그게 아니라….”
“저랑 더순한화장품 팬사인회 했을 때 옆에서 자주 들은 이름일 거예요.”
진은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 계마루 님! 혹시 나리 씨가 마루 님 동생이에요?”
계나리를 바라보는 진은수의 눈이 빛났다. 반대로, 초롱초롱하던 계나리의 눈빛은 살짝 흐려졌다. 목소리 톤도 낮아졌다.
“그놈이 갈 때마다 뭐라고 지껄였기에 두 분 다 그 인간을 기억하시는 거죠.”
진은수가 따뜻하게 웃었다.
“데뷔 전부터 꾸준히 찾아오신 팬 분이라 더 특별히 기억에 남았나 봐요. 마루 님은 건강하세요?”
“너무 팔팔해서 걱정이에요. 하루에도 몇 번씩 ‘은수 님 절대 지켜!’ 이러고 악플러랑 싸우는걸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마 언니가 게이트 방어선으로 간다 그러면 따라서 입대까지 할 걸요? 아으, 징그러워.”
“아…. 그건 정말, 안 되는데….”
진은수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갔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두 소녀의 만남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유호의 얼굴에도 씁쓸함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