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4화 (314/427)

아차. 뒤늦게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계나리는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한율은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런데 여긴 누구 화실이에요? 멋진 그림이 많네요.”

그 시각, 파란달 펜션 관리동 로비.

라이언과 통화를 마친 길우성이 투덜거렸다.

“써한 이 자식 그새 또 딴 길로 샜대. 어? 이것저것 말해주겠다고 한 지가 언젠데 계속, 어?”

“왜 자꾸 어, 어, 거려. 그런 건 박가람 닮는 거 아니야.”

“나 닮는 게 어때서. 싸우자는 거냐, 이건우?”

하아. 이건우가 대놓고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그래, 한번 싸워보자.”

박가람이 뒤로 펄쩍 물러났다.

“저리 꺼져!”

우웅.

“…….”

길우성은 시끄러운 두 사람을 뒤로하고 관리동을 나갔다. 몇 달 전에야 처음 알게 된 사촌 형제, 김지완의 전화였다.

“네, 형.”

차남석 꼴 나고 싶어?

“길우성!”

할 말이 있어 길우성을 찾으러 나왔던 길미현은, 관리동 앞에 나온 동생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이따가 현우…. 아, 통화 중이었어?”

길우성이 반대쪽 귀에 댔던 핸드폰을 내리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끝났어. 박현우 씨가 왜?”

“여기 잠깐 와도 되냐고 물어보더라. 친구들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다고. 현우도 WB래빗 소속이잖아.”

“널 보고 싶어서 오는 거겠죵. 으.”

“맞을래? 그런데 넌 누구랑 통화했어? 표정이 영… 수상한데.”

길우성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지완이 형.”

지완이 형? 그게 누구야?

길미현은 고개를 갸웃했다가 일순 굳었다.

“그… 큰아버지 아들?”

“응.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그러는데 당분간 내가 할머니를 모시면 안 되냐고….”

“미쳤어?!”

덥석! 길우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길미현은 그의 팔을 강하게 잡았다.

“절대 안 돼! 우리도 신세 지는 마당에 누굴 모셔! 우리 집이라도 거절할 판인데!”

“그래서 나도 그건 힘들 것 같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어?”

길미현은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자신의 동생이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모질게 내치지 못하는 무른 성정인 걸 알기에.

“그랬더니!”

“그….”

길우성이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했다.

“돈이라도 좀 보내줄 수 없겠냐고…. 물가가 갑자기 너무 오른데다가 할머니도 편찮아서 정말 힘들다고…. 앗!”

타악. 길미현은 싸늘한 얼굴로 길우성의 핸드폰을 뺏었다. 핸드폰은 그새 자동으로 잠겨있었다.

“풀어.”

“뭐 어쩌려고. 이리 줘. 돈 안 보낼게.”

“풀라고, 새끼야. 누나 손에 뒈지고 싶냐?”

“…….”

웬만하면 욕을 쓰지 않던 누나가 살벌하게 목소리까지 내리깔았다. 어릴 적 누나에게 대들었다가 크게 혼쭐났던 기억이 떠올라, 길우성은 순순히 꼬리를 내리고 핸드폰에다 엄지를 댔다.

철컥.

길미현은 곧바로 김지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길우성 누나 길미현인데요. 언제부터 알았다고 가족 행세세요. 염치가 그렇게 없어요? 양심은 지능 문제인 거 모르시나? …뭐? 무슨 년?”

“누, 누나….”

길우성은 소심하게 누나를 말려보려 했지만, 길미현은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야, 이 거지 새끼야. 누군 욕 쓸 줄 몰라서 안 쓴 건 줄 알아? 앞으로 내 동생한테 또 빌붙으려고 수작 부리면 씨발, 내가 직접 찾아가서 아가리 찢어버리고 그 잘난 피 죄다 뽑아버린다, 새끼야.”

“와….”

그때, 언제 나왔는지 이건우가 길우성 옆에 나란히 서며 감탄했다.

“꼭 우리 누나 화났을 때 보는 것 같다. 누나들은 다 저런가?”

“뭐야? 왜?”

뒤늦게 박가람이 나오며 물었다. 이건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앞으로 막내가 바보짓 하잖아? 그럼 바로 미현이한테 고자질하면 될 것 같다.”

길우성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 * *

유호의 차에 올라타며 계나리가 한숨 쉬었다.

“아쉽네요. 우리 패밀리에 예쁘고 귀여운 언니가 들어올 줄 알고 잔뜩 기대했는데.”

유호는 서한율의 차가 먼저 떠나는 걸 보며 안전띠를 맸다. 그는 생포한 괴물을 살피러 다시 별장에 간다고 했다. 그곳에 남겨둔 이해원과 달냥도 데리러 갈 겸.

“아무래도 남자들 뿐이라, 좀 불편하죠?”

“흐. 조금은? 그래도 괜찮아요. 펜션에 미현 언니도 있고. 그나저나 은수 언니 걱정이네요. 이미 마음을 단단히 굳혀서 설득 못 했지만….”

계나리는 진은수에게 자신도 1130 각성자라고 밝히며, 지금 게이트 방어선으로 가는 건 여러모로 체계가 잡히지 않아 굉장히 위험할 거라고 말렸다. 실험적인 전투에 많이 동원될 수 있다고.

“방어선에 들어가면 온갖 냄새부터가 평생 가는 트라우마로 박힐 텐데.”

유호는 쓴웃음을 짓다가 입가를 내렸다.

진은수와는 오랫동안 MBS <뮤직센터> MC를 함께 했다. 여러 번 특별 무대 준비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실제론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 알게 되었다.

피해가 될까 봐 자주 연락하지는 않았지만, 지켜줘야 하는 귀여운 동생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런 동생이 무시무시한 괴물이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게이트 방어선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사람들 말에 떠밀려서 가는 건 아니에요. 큰 도움은 못 되겠지만, 그래도 저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살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서… 그래서 가는 거예요. 너무 힘들면 그만두고 나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방긋 웃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제 능력이, 괴물 눈 피해서 사람 구조하는 데에 딱 맞겠더라고요.』

호수로부터 진은수를 말려달란 부탁을 받은 서한율은, 조용히 경청하다가 되레 격려했다.

『은수 씨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정한 거니 말리진 않을게요. 다만,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전 은수 씨가 자신을 우선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응원할게요.』

‘아무리 각성자라곤 해도, 순하고 눈물 많은 은수도 용감하게 게이트 방어선으로 가는데….’

계나리는 유호의 옆얼굴을 힐끗하고선 무릎에 올려놓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

“아 참.”

유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계나리에게 물었다.

“해원이한텐 연락했어요? 집에 친구 왔다고?”

“아.”

계나리는 이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오전, 이해원의 친구인 배우 고은훤이 찾아왔다. 서울에 있는 자취방이 출입 통제 구역에 포함되는 바람에 이해원에게 연락했는데, 아무리 전화해도 받질 않아서 일단 그가 알려준 주소로 찾아왔다고.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이해원이 알려준 주소에 웬 여학생과 인기 아이돌이 있는 걸 보곤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여전히 안 받네요. 설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죠? 일단 율이 오빠한테 연락을.”

계나리는 서한율에게 전화해 고은훤 이야기를 전달했다. 이해원이 너무 전화를 안 받는단 이야기도.

-[수련에 집중하느라 못 받는 걸 거야. 가서 전해줄게.]

“넵.”

별장에 도착한 한율은 괴물을 가둔 차고로 들어갔다. 괴물은 밤새도록 행해진 여러 가지 실험 탓에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상태였다. 대야에 둔 잘린 다리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몇 분 잡았어요?”

그 앞엔 이해원이 지친 얼굴로 앉아있었다.

“1분 간신히 넘겼어. 이거, 정말 어렵다.”

“1분도 정말 오래 붙잡은 거예요. 형이 만약 제가 마법을 배운 세상에 있었으면 기재 소리 들었을걸요?”

칭찬을 받아 쑥스러운지, 이해원이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설마.”

“은훤이 형이 집에 찾아왔대요.”

“정말? 그런데 왜 연락이…. 아. 무음으로 둬서 부재중 전화가 쌓이는 것도 몰랐어.”

“그럼 슬슬 정리하고 양평으로 돌아갈까요?”

“이 괴물은 어떡해?”

“죽여야죠. 어차피 이대론 살 가망도 없고, 살려둘 필요도 없으니.”

“응….”

이해원이 복잡한 얼굴로 괴물을 보았다.

사람을 해치려 한 위험한 괴물이라 이런저런 실험에 동참했지만, 막상 아무 저항도 못 하는 걸 죽이려니 껄끄럽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제가 하는 거 집중해서 잘 보세요. 이것도 마나 응용 기술 중 하나니까.”

한율은 괴물의 체내 마나를 지느러미가 있었던 자리 쪽으로 뽑아내다, 날카로운 창날 형태로 융합시켜 그대로 괴물의 몸을 꿰뚫었다.

끼르르륵…!

밖으로 길게 빼놨던 보라색 혀끝부터 꼬리까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고통스럽게 경련하던 괴물이 축 늘어졌다.

“……!”

“형태만 잡아준 마력은 회수. 상대의 마나로 상대를 죽이는 방법이에요. 대기에 떠도는 마나보단 체내 마나가 서로 끈끈하게 연결된 편이라 단단하게 뭉쳐놓기 쉽거든요. 음, 제가 설명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어쨌든 수련 계속하면, 언젠가 형도 감이 올 거예요.”

“응….”

이해원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가, 저도 모르게 드는 생각이 얼굴에 드러날까 황급히 입가를 올렸다.

“노력할게.”

“사체는 태울 거니까, 여기저기 튄 피 지울 준비만 해요.”

“다용도실에 있는 세제로 될까?”

“아마 되지 않을까요? 얼룩 좀 남아도 별 상관없으니.”

“응, 가져올게.”

이해원은 차고를 나갔다. 몇 시간 동안 피를 흘리는 괴물과 함께 있었던 탓인지, 새삼 바깥 공기가 굉장히 상쾌하게 느껴졌다.

‘전부터 느꼈지만, 한율이….’

이해원은 차고 문을 활짝 열어놓는 한율을 힐끗하곤 고개를 돌렸다. 거실 통창 앞을 서성거리던 달냥이, 이해원을 보더니 빨리 오라는 듯 두 발로 서서 창을 긁는다.

‘조금, 무서운 것 같아.’

대체 수십 년 동안 어떤 시간을 보낸 걸까.

궁금하지만 막상 한율을 보면 묻기가 힘들었다. 물어도 구체적인 이야기는 피할 것 같은, 그런 ‘선’이 있어서.

‘언젠가… 천천히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아니, 꼭 이야기를 듣지 않더라도.’

서한율에게 큰 은혜를 입은 만큼 보답하고 싶다.

이해원은 살며시 주먹에 힘을 주며 걷는 속도를 높였다. 손목에 찬 염주 팔찌가 은은한 푸른빛을 냈다.

‘빨리 강해지자. 조금이라도 한율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한율이 양평 펜션에 도착한 건 밤이었다.

이미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관리동 식당엔 한율 몫의 한우가 남아 있었다.

“달냥아아, 어디 갔다 왔어어….”

이동장에서 달냥을 꺼내자, 길우성이 기다렸다는 듯 달냥을 와락 안아 뺨을 비비적거렸다. 달냥은 귀찮다는 듯 길우성의 얼굴을 앞발로 꾹꾹 밀어냈다. 므아앙.

차남석이 물었다.

“언덕 위 집에 은훤이 형 온 거 알아?”

“네. 이따가 잠깐 가보려고요.”

“하뉼, 고기 구워줄까?”

“일단 씻고 올게요.”

“응.”

한율은 길우성의 품에서 달냥을 쑥 빼낸 뒤 2층으로 올라갔다. 길우성이 손을 뻗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안 돼, 내 고양이 충전…!”

잠시 후. 목욕을 마친 한율이 다시 식당으로 내려왔을 땐 여전히 어스래빗 멤버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매니저 조유찬과 허진영도.

“다 함께 의논할 거라도 있어요?”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박가람이 팔꿈치를 세우고 귀여운 척했다.

“네 한우 뺏어 먹으려고 버티고 있는 건뎅.”

“네, 제가 다 먹기엔 양이 좀 많네요.”

“내가 구울게, 하뉼!”

“어허! 라이언, 너 아까 보배 거 많이 뺏어 먹지 않았니? 이번엔 형한테 양보하렴.”

한율은 스스로 고기를 구웠다. 모두 모인 이유는 곧 이건우에게 들을 수 있었다.

“나랑 보배, 그리고 진영이 형. 각자 집으로 가려고 해. 부모님은 서울이랑 머니까 괜찮다고 하시지만, 내가 걱정돼서 안 되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동생도 아직 어리고.”

“저도 부모님이 걱정돼서요. 미안해요, 다들. 명색이 매니전데… 여러분 케어를 끝까지 못 해서.”

“무슨 소리예요, 진영이 형. 스케줄도 다 취소된 마당에, 며칠 동안 우리 돌봐준 것도 업무 외 노동이었는데요. 혹시 벌써 사표 낸 건 아니죠?”

조유찬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 사표는 내가 찢어버렸어. 상황 나아지면 업무 복귀해야지.”

“악덕 선배다.”

“너희들, 믿을 만한 아이돌 매니저 구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지 알아?”

어쩐지, 도착했을 때부터 은근히 밝은 분위기를 만들더라니.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만약 상황이 안 좋아지면 언제든 여기로 돌아와요. 아니면 집에 갔다가 가족 전부 데리고 와도 괜찮고. 아직 남은 객실 많아요.”

강보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괜찮겠어? 우리 집 고양이 일곱 마린데?”

길우성이 반색했다.

“그새 한 마리가 더 늘었어? 데려와! 대환영!”

한율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 마리라도 괜찮아요.”

고양이라면 스무 마리든 서른 마리든 달냥을 통해 통제가 가능할 테니.

먹기 좋게 익어가는 고기를 노려보던 박가람이 젓가락을 쥔 채 손을 들었다.

“나는 보배 가는 길에 잠깐 묻어갔다가 부모님만 슥 살피고 다시 돌아오겠노라.”

“형님.”

길우성이 박가람을 향해 엄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써한이랑 떨어졌다가 남석 씨 꼴 나고 싶소? 얌전히 계쇼. 그 젓가락은 나 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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