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5화 (315/427)

떨어졌다가 차남석 꼴? 무슨 뜻이지?

한율은 의아한 눈으로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박가람이 입을 떡 벌리더니 고개를 흔들흔들, 길우성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스 불을 껐던가?!”

그러곤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하아. 차남석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저 멍청이.”

각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음 날. 이건우와 강보배, 허진영의 짐이 두 대의 차에 실렸다. 이건우와 허진영은 조유찬이 태워다 주기로 하고, 강보배와 박가람은 한율의 픽업트럭을 사용하기로 했다. 물론, 면허가 있는 박가람이 운전해서.

“뽑고 나서 딱 하루만 운전한 새 차니까, 흠집 하나당 천만 원씩 받을게요.”

“차 가격이 얼만데?”

“5천 조금?”

박가람이 한율에게 삿대질했다.

“악마다! 여기 악마가 있다!”

하아. 유호가 한숨을 푹 내쉬며 터벅터벅 걸어왔다. 이건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새삼 우리 걱정 때문은 아닐 거고.”

“엄마가 병원에 복귀하겠다고 하셔서. 지금 의사 한 명 한 명이 절실한 상황인데, 엄마만 안전한 곳에 편히 있는 게 마음에 걸리시나 봐. 아버지도 임시 사무실에 가봐야 한다시고.”

“왜 어머니는 엄마고 아빠는 아버지라 부르는 거지?”

“박가람이 넌 지금 그게 중요하냐?”

“언제 가신데요?”

유호가 재차 한숨 쉬었다.

“오늘. 게이트 방어선이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 엄마는 병원에서 지내시게 될 것 같아. 아버지는 일단 회사 임시 숙소 둘러보고 판단하시겠다는데, 거리가 있으니 아마 숙소에서 지내시겠지.”

“작은 회사면 몰라도 대기업 임원이시니, 언제까지 손에서 일을 놓으실 순 없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이건우 옆에서 박가람은 큰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었다.

“괴물들이 쳐들어와 난리가 나도, 세상은 어떻게든 돌아가는구나.”

잠시 후. 멤버들은 집으로 가는 사람들과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눴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 핸드폰이랑 보조 배터리 늘 빵빵하게 충전하는 거 잊지 말고.”

“영통 자주 하자, 보배.”

“응, 알았어.”

“형, 가족들 데리고 와. 고양이들도 잊지 말고.”

“언제 다시 활동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다들 관리 놓지 마. 특히 박가람 너. 물가 많이 올랐으니까 작작 먹어라.”

“우우, 이건우. 우우.”

“운전 조심히 해요.”

“응, 다녀올게.”

“나중에들 봐요.”

“진영이 형 꼭 돌아와야 해요. 다른 데 취직하기 없기.”

“응. 다들 몸조심해요.”

“나중에 맛있는 거 사서 놀러 갈게.”

“차남석 너 의논 없이 혼자 입대 신청하지 마. 나랑 약속했다.”

“알았어.”

“갈게요! 다들 진짜 몸조심해! 나중에 보자!”

펜션 대문이 활짝 열렸다. 밖에는 여전히 이런저런 목적을 가지고 알짱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에서 차들이 줄줄이 나오자 목을 길게 빼고 수군거렸다.

라이언과 유호가 마지막 차가 나가는 것에 맞춰 대문을 닫았다.

철컹.

길우성이 더욱 넓어진 주차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 벌써 허전하다….”

“그러게.”

남겨진 다섯 명의 어스래빗 멤버들은 관리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율아, 포털사이트 메인에 뜬 기사 봤어?”

“은수 씨 기사요?”

“응….”

오늘 아침, 대형 포털사이트 메인에 진은수 기사가 올라왔다.

[각성자 퍼플아워 진은수, 게이트 방어선 합류 결정!]

사람들 반응은 시끄러웠다.

-안 돼 은수야ㅠㅠ

-한편 아림 엔터테인먼트는, 진은수의 게이트 방어선 합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위기에 처한 국가를 돕기 위해 나서는 것일 뿐 퍼플아워를 탈퇴하는 건 결코 아니라는 공식 입장을 내놨다. <<<퍼플아워 영원하자

-공개적으로 능력만 안 밝혀졌어도 안 가는 건데

-퍼플아워가 미국 뮤직 페스티벌 초청 거절했단 소문 돌던데 이것 때문이었구나

ㄴ퍼플아워가요? 우리나라에서도 소속사 빨로 1티어 간신히 드는 팀이 무슨ㅋㅋㅋㅋㅋ

ㄴ크리스 라터쇼에서도 섭외 연락 왔었답니다.

ㄴ음악성은 개뿔 진은수 때문에 초청한 거지ㅋ

-이 기사를 게방부가 좋아합니다.

-이 기사를 퍼플아워 팬들이 싫어합니다.

-무사히 활약하면 진은수 세계적 탑 아이돌 될 듯

-괴물한테 딱밤 한 대만 맞아도 죽을 것 같은데 괜찮냐

-얘 몸무게 40kg 겨우 넘지 않음? 기본 군장이 20kg 훌쩍 넘는데;;;

ㄴ몸의 절반ㄷㄷㄷ

ㄴ입대하는 거 아니라고ㅠㅠ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애를 사지로 밀어 넣으니 이제 만족하냐 악플러들아? 그렇게 나라가 걱정되면 너희들이나 입대해라

-아직 게방부에서 합류 허가 안 내렸습니다.

외신들도 진은수의 게이트 방어선 합류 소식을 떠들었다.

현재 전 세계의 관심은 히말라야와 한국으로 쏠려 있었다. 특히 한국은 1130 증상자들이 미지의 초능력을 각성하고 있어,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단 생각에 더욱 집중하는 중이었다.

여기에 게이트 발생 초반, 괴물들을 몇 시간 동안 가둔 푸른색 장막. 그걸 만든 인물 혹은 인물들이 부디 자신의 나라에도 와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더해져서.

[시민들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 영웅. 그 혹은 그들은 아직 한국에 있을까요?]

라이언이 슥 끼어들었다.

“찬형이 그러는데, 아림 완전히 뒤집혔대.”

“하긴. 아림 입장에선 열심히 키운 아이돌이….”

“그게 아니라, 음…. 이 와중에도 계산기 열심히 두드린 사람들이 있나 봐.”

“…설마, 게이트 방어선에 가는 은수를 이용해 돈 벌겠다는 의견이 나온 건 아니지?”

라이언은 입가만 올린 채 눈을 끔뻑거렸다. 긍정이었다.

유호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스쳤다.

“아림 윗선에 진짜 돈에 환장한 쓰레기가 있나 보네. 호수 씨가 그 얘기 들으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 나기혁은?”

“몰라? 걔 아직 각성 안 했잖아.”

한율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 한국에 들어왔을 텐데, 나중에 연락해봐야겠네요.”

나기혁이 어떤 능력을 각성할지 아주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예전에 계나리가 준 파일에 나기혁의 이름이 있었지만, 진은수처럼 각성 능력은 기재되지 않았다. 슬쩍 물어봤더니 그녀는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다가 고개를 저었다.

『은수 씨랑은 달리 전혀 생각이 안 나요. 별 볼 일 없는 능력이었나…?』

“그런데 하뉼, 오늘도 나갈 거야?”

“네. 아무래도 제 건물들이 걱정돼서요.”

“같이 가도 돼?”

“위험해서 안 돼요. 그리고 약속도 있어서요.”

라이언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뉼은 게이트가 열려도 바쁘구나.”

“심심해서 그래, 라이언?”

“하뉼이 어릴 때 특수? 특… 공?”

“특공무술?”

“응. 그거 배웠다고 했잖아. 나도 그거 배우고 싶어. 나중에 괴물이랑 또 싸울 수 있잖아.”

앞서가던 차남석이 돌아보았다.

“네가 싸우긴 언제 싸웠냐? 그리고 속성으로 어설프게 익힌 호신술이 오히려…. …….”

말을 하던 차남석이 돌연 생각에 잠겼다.

“오히려 뭐?”

길우성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너희 셋.”

차남석이 한율과 길우성, 라이언을 차례로 보았다.

“양궁 배우지 않았냐? 아스대에서도 항상 메달권이었잖아.”

라이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오우,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우리도 쓸 수 있는 무기가 있었어!”

“장력이 약한 걸로, 그것도 가까운 과녁으로만 연습해서 당장 실전에서 쓰긴 힘들지만….”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또 연습하면 될 일이니. 오늘 나가는 김에 양궁 장비 구할 수 있는지 한번 알아볼게요.”

* * *

김해국제공항. 입국 절차를 통과한 나기혁은 모자와 마스크, 안경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별다른 초능력이 생기지 않았다던 길우성도, 돔구장에 회색 게이트가 열린 시각 다른 각성자들처럼 심한 이상 증세를 겪었다고 했다.

하지만 천둥소리는커녕 이명도 들리지 않았다.

‘게이트 근처로 가야 하나?’

현재 돔구장이 있는 구로는 출입 통제 상태. 그래도 최대한 가까이 간다면 무언가 변화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길우성처럼 각성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호의 섞인 관심을 받는 게 좋다. 무대에서 듣는 환호성이 주는 짜릿한 전율은 중독성이 심해, 여자의 연락을 실수로 못 받은 척 무시한 적은 있어도 연습을 미룬 적은 없었다.

하지만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은수도 게이트 방어선으로 가는 마당에, 같은 소속사 선배인 내가 그럴싸한 능력을 각성해놓고도 빼면 순식간에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겠지.’

그러니 아무 능력도 각성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최소한, 서한율처럼 별 쓸모없는 능력이거나.

“기혁아.”

함께 입국한 매니저가 조용히 말했다.

“한국에 있는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 사람한테서 연락 왔어. 지금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대.”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는 1130 증상자가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이 아닌, 열리고 시간이 지난 후 그 지역에 들어가게 되어도 능력을 각성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타국의 기관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건 위험하겠다 싶어서 각성자 능력 실험연구소 협조 제안은 단박에 거절했지만, 위의 의문은 나기혁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와서 결과를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참 성미도 급하네요. 내가 어디 도망이라도 갈 줄 아나. 예정대로 서울에서 만나겠다고 전해주세요.”

“가면서 너랑 친한 각성자들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게 많대.”

“형도 따로 가실래요? 저 아예 기차 타고 혼자 갈게요.”

“아니야.”

매니저는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나기혁은 캐리어 손잡이를 툭툭 두드리면서 공항 내부를 둘러보다, 뉴스가 나오는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속보입니다. 게이트 너머에서 지금까지 나온 괴물들보다 몸집이 상당히 큰 개체가 발견되어 방어선 전체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군은….]

‘괜히 지금 갔다가 저 괴물이랑 마주쳐서 죽는 거 아니야?’

“가자, 기혁아.”

“어? 네….”

아림 엔터에서 미리 보내준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일단 구로로 가요. 출입 통제선 직전까지.”

“회사에 안 들르고 바로?”

“네.”

나기혁은 언제 이상 증세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감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나기혁을 태운 차가 대로변에 멈췄다.

‘잘 자네.’

힐끗. 매니저는 출입 통제 바리케이드와 나기혁을 번갈아 보았다. 곤히 잠든 그를 깨워야 하나 고민할 때.

“……허억!”

나기혁이 갑자기 숨을 크게 뱉어내며 벌떡 일어났다. 불과 몇 초 전까지 평온했던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왜 그래, 기혁아! 악몽이라도 꾼 거야?”

“허억, 허억….”

나기혁은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 얼굴과 몸을 더듬고, 창에 달라붙어 바깥도 살폈다.

“여기 어디예요?”

“구로 들어가는 길목. 통제선 바로 앞이야.”

그제야 나기혁은 안도하며 시트에 몸을 묻었다.

“하…….”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그래?”

“아뇨, 그게, 제가 게이트에서….”

무심코 털어놓으려던 나기혁은 멈칫했다.

“기혁아?”

“…아니에요. 그냥 악몽이에요. 악몽.”

그래, 악몽이어야만 한다.

나기혁은 옆좌석에 둔 생수를 집어 마셨다.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살피며 그새 이마에 맺힌 식은땀도 닦았다.

‘각성자가 될지도 모르는 내가 꿈에서 게이트 괴물이 되었다는 걸 어떻게 말하냐고. 무슨 오해를 사라고.’

그 시각.

한율은 트럭에 잔뜩 실린 양궁 장비를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우그룹 부회장이 몇 시간 만에 준비한 물건들로, 전부 상태가 괜찮았다.

우웅.

‘제임스’가 사용하는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은 게이트 방어 지휘부 책임자인 김관식 소장.

“네.”

-[그 ‘큰놈’, 이르면 한 시간 안에 도달할 것 같습니다.]

“금방 갈게요.”

전화를 끊은 한율은 함께 온 이해원을 돌아보았다.

“형은 이 차 끌고 펜션으로 돌아가세요. 전 잠깐 방어선에 다녀올게요.”

마치 동네 산책을 다녀오겠다는 듯 덤덤한 말투. 그러나 한율이기에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이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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